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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3화 〉탐식마(貪食魔) (313/429)



〈 313화 〉탐식마(貪食魔)

화련은 새하얀 벌판을 걷고 있었다. 누구도 발을 디딘 적이 없는 새하얀 설원을.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았다. 눈을 뜨니 이곳이었고, 이곳이 어떤 곳인지 생각해보기도 전에 걷고 있었다.
멈춰 서서 차분하게 생각해볼 겨를 따위는 없었다. 잠깐 멈춰서 본 결과 화련은 끔찍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기억이라는 대가를.

어느 부분이 결락되었는지는 알  없었다. 정말 말도  되는 일이지만, 어느 부분에 결락이 발생되었는지는 몰라도 기억이 사라졌다는 사실만은 또렷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차라리 팔이나 다리가 도려 졌다면 고통에 몸부림이라도 쳤을 것이다.
사라진 기억은  텅 빈 부분을 제대로 들여다볼 수도 없으면서도, 그 허무감은 그녀의 정신을 갉아대었다.


잠깐 멈춰선 것에 대한, 딱 한 번 넘어진 것에 대한 대가치고는 너무나 가혹했다.


화련은 겁에 질린 채 계속 걸어야만 했다. 방향도, 날의 변화도  수 없는 새하얀 벌판을 하염없이 걷기만 했다.
그녀를 이끄는 것은 두려움이었고, 멈춰서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는 것도 두려움이었다.


화련은 이 끝없는 레이스의 끝이 해피엔딩일 것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열심히 걷고 있는 두 발과  위의 다리의 감각은 사라진지 오래였고,  팔의 감각 또한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동상으로 인한 무감각함이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흐르고 보니 그것이 아니라는   수 있었다.

목 위로는 사정이 그나마 나은 편이긴 했지만, 눈을 시야가 뚫려있어 봐야 이런 곳을 걷는 이상 감은 것과 별 다를 게 없었고, 코나 귀도 냄새 맡거나 소리를 들을 것이 없는 이상 감각이 남아있는 게 오히려 방해였다.
원래의 기능도 못하면서 칼바람의 매서움은 전부 그대로 느꼈으니까.


화련은 몇 번이고 코나 귀를 도려내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었다. 도구도 없고, 멈춰서면 또 다시 기억을 빼앗길  같아 그러지 못한 것 뿐.
그 충동을 느꼈을 때 화련은 저가 가졌던 능력이 묶여버렸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다. 그 때, 그녀는 이 상황에 저항할 의지를 잃었다.


그저 더 기억을 잃는 것이 두려워, 걷고 있을 뿐이었다. 더 기억을 잃으면 자신의 존재가 사라질  같아 두려워, 조금 유예된 파멸을 향해서 걸어갈 뿐이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점점  외에는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언제까지고 계속 될 것만 같은, 무의미한 행위가 그녀를 마모시켰다.


이대로 계속 걷기만 하다  이상 버티지 못할 지경까지 가면 쓰러져서 그대로 일어나지 못하게 될 테지.
화련은 예정된 파멸을 생각하면서도 그것을 피할 행동을 취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

그런 그녀가 검은 빛을 발견했을 때 느낀 것은 의아함이었다. 시커먼 빛이라는  자체가 이상하긴 했지만, 광원도 없는데 엄청나게 밟은 이 새하얀 벌판에서는 그리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화련이 의아함을 느낀 것은 다른 부분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시커먼 빛에 익숙한 느낌을 받는다는 것에 의아했다.
이 하얗기 만한 공간을 블랙홀처럼 일그러뜨리고 있는, 구멍이 뚫린 것 같은 시커먼 빛에 익숙한 느낌을 받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세상에 시커먼 빛을 뿜는 전구 같은 게 발명됐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으니까.
일단 피하고 봐야할 기현상인 것이다. 평소라면.


쓰러지지 못해서 걷고 있는 화련은 그런 것을 고려할 여유가 전혀 없었다. 그녀는 곧바로 방향을 틀었다.
함정일까 하는 의심 따윈 없었다. 화련은 이 공간을 모두 빨아들일 것처럼 흉흉한 기운을 내뿜고 있는 검은빛을 향해 걸어갔다.

‘따뜻하다...’


광원에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얼어붙은 감각이 되돌아왔다. 그와 함께 끔찍한 통증도 같이 밀어닥쳤지만, 화련은 손과 발끝이 타들어가는 것 같은 통증 속에서도 웃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전에 비하면 이런 통증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한계라고 부르짖는 팔다리를 닦달했다.
화련은 자기도 모르는 새에 뛰고 있었다. 시커먼 빛을 향해서. 겉보기에는 불길하기 그지없지만, 친숙하고 따스한 그 빛을 향해서.

***


“...어?”

잠에서 깨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 끔찍한 설원을 걷고 있던 것이 꿈이었다는 사실을 화련은 바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방금 전만해도 쫓았던 시커먼 빛 대신, 정상적인 빛을 내뿜고 있는 전등과 주변의 소란스러움이 그녀를 강제로 현실로 끌어당겼다.

“언니! 언니!”
“화련 씨, 제 말 들리십니까? 들리시면 눈을 두 번...”
“언니...? 왜 그래요? 어디 이상해요? 언니!”
“혜라 씨, 화련 씨가 왜 이러는 겁니까?”
“저, 저도 모르겠어요. 분명히 냉기는 전부 제거했는데...갑자기 내상의 통증이 느껴져서 이러시는  아닐까요?”
“그럴 분이 절대 아닌데...화련 씨?”


그들의 애타는 부름에 응하는 대신 화련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우는 것이었다.
아마 목 상태가 멀쩡했다면 같은 층 내의 사람들이 다 들었을 정도로 목 놓아 울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  넘게 의식을 잃고 있었던 환자의 목 상태가 좋을 리가 없었고, 화련은 눈물만 쏟아내며 소리 없이 통곡했다.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


“죄송하지만 그건 어렵겠습니다.”
“아, 아니 이보게 류 현군. 어찌 그리 안 된다고만 말하나? 이게 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저희 팀원  하나가 거의 빈사에 몰릴 정도로 큰 부상을 입었습니다. 그 사람이 회복될 때까지는 어떤 외부활동도 시작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래도 남은 이들은 멀쩡하지 않나. 응? 자네들이 조금만 수고로움을 감수해주면 이 나라도 그렇고 자네들 일신에도...”
“지금 뉴욕에 검성이 있습니다. 총리님도 아실 텐데요. 그녀는 이리로 오고 싶어서 하루에도 네다섯 번씩 연락을 해옵니다. 그녀를 거기에 두고 있는 걸로 할 바를 다 했다고 생각합니다만.”
“이,  사람아 아무리 그래도 어찌 한 사람이 가있는 것과 나머지가 다 가있는 게 같을 수가 있는가?”
“...이 건에 대해선 더 말할 거리가 없는 것 같군요.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아니, 이보게! 이보게!”


류 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응접실을 나섰다. 문을 닫고 나오자 깊숙이 허리를 숙인 문민호가 보였다. 그 모습을 보자 안쓰러움 보다는 짜증이 밀려들었다.

‘그렇게 죄송스러우면 이런 일이 없게 하던가.’


 밖으로 내지 않은 게  현으로서는 최선이었다. 그는 조금 신경질적인 어조로 말했다.

“다음에는 이런 사과를 받아드리지 않을 겁니다. 지금도  사과를 받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심히 고민되거든요.”
“죄송합니다.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허리를 숙인 채로 사과의 말을 내뱉는 문민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류 현은 그도 그리 편한 심정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스카웃을 하려던 플레이어가 이젠 자신의 상전이  상황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냥 있어도 여기저기서 들어오는 압력이 상당할 테니까.


‘그래, 너도 죽을 맛이겠지. 힘없는 게 죄는 아니니...’


 현은 콧김을 한  훅 뿜고는 문민호의 어깨를 잡아 일으켜 세워주었다. 문민호의 어깨를 툭툭 털어준 후 그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반쯤 숙인 자세를 고수하는 문민호가 종종 걸음으로 따라붙었다.

“문민호 씨의 곤란함을 다 알진 못해도 대강 짐작합니다. 이번 일은 그것 때문에 그냥 넘어가는 겁니다.”
“죄송합니다.”
“저는 이 나라에 바라는  없습니다. 그냥 가만히, 훼방만 놓지만 않으면 됩니다. 그렇게 있기만 해도  때문에 떨어지는 콩고물이  되지 않습니까?”


문민호는 무겁게 끄덕였다. 그러면서 눈치를 슬쩍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류 현이 별로 불쾌해 하는 기색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그는 입을 열었다.


“이번 사태 때문에 미국에서 로비가 꽤 들어왔습니다. 들으면 아실 법한 유명 회사부터, 페이퍼 컴퍼니 같은 곳까지 가지각색인데 하나 같이 들고 온 가방은 묵직하다고 들었습니다.”
“들었습니다? 문민호 씨한테 온 게 아니라요?”
“제가 어찌 그런  받겠습니까.”


말은 그렇게 하지만 사양한  아니라, 받지 못한 것일 거다. 류 현이 아는 문민호라는 남자는 눈앞의 푼돈 때문에  것을 놓칠 멍청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청렴결백하지도 않았다.
그런 이였다면 전생에서 정부산하 조직인 ‘터주’를 군벌로 독립시키지도 않았을 것이다.

‘견제가 들어오고 있는 건가. 전생에서는 군벌까지 꾸린 남자가 이러는  보면...견제 세력이 한 둘이 아닌 모양인데.’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터주’를 군벌로 만들어서 대한민국 정부를 붕괴하게 만든 1등공신이었던 남자가 군벌을 꾸리려는 것도 아니고, 자신과의 연결라인이라는 점 하나만으로 돈가방 하나 못 챙길 정도로 견제를 받고 있다니.

‘마음에 드는 인간은 아니지만...일단 이쪽 대변인 비슷한 일을 해주곤 있으니 그냥 두긴 좀 그렇지. 이번 일도 그렇고.’

총리와의 이번 만남은 문민호가 견제에 시달리다 못해, 통제력을 잃어버려서 일어난 일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엘더 리치 때, 바로 옆나라 일본에서 로비스트들을 여객기로 실어 보낼 때도 이런 일은 없었으니까. 미국과 일본이 가지는 위상차이도 있지만, 먹인 돈은 아마 일본 쪽이 더 클 터였다.
미 정부는 용잡이 팀의 성향을 아주  파악하고 있는  해보였으니, 움직이는 건 피해를 입은 동부 도시에 적을 둔 기업들일 터. 지금 동부 사정을 생각하면 로비에 쏟아 부을 돈을 짜내는 것도 힘들 것이다.

결국 문민호가 이전과 다르게 영향력이 많이 줄어들었고,  본인도 그 때문에 의욕이 많이 깎여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결론이 나온다.
제 영향력이 깎여나갔는데, 문민호 입장에서는 목을 걸고 막아줄 이유가 없으니까.


‘이 인간을 밀어주게 될 줄은 몰랐는데...’

‘터주’와 부딪힐 때 문민호는 이미 고인이었으니 별다른 사감은 없지만, 전생에서 군벌의 수장이었던 자를 밀어주자니 떨떠름한 기분이 들었다.

‘밀어줄만한 다른 인간이 있는 것도 아니고...그냥 말 몇 마디 해주는 거니까.’
“청와대 핫라인 압니까?”
“예, 여기 있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내밀어오는 것만 봐도 그랬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나오니 화 보단 헛웃음이 나왔다.


“문민호 씨.”
“예, 말씀하십시오.”
“중간에 돈을 받아먹든, 호가호위하든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애초에 그런 걸 근절할 생각이었다면 내가 전부 직접 처리했어야 하니까요. 다만.”
“......”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우리 관계는 좀 많이 재미없어 질 겁니다. 제 이름 아래에 이거저거 누리셨으면 일은 제대로 처리해주셔야지요.  그렇습니까?”
“예, 예에...”

살의를 내비치지도 않았다. 아주 조금, 지금 느끼고 있는 짜증을 마력을 내보내는 것으로 표현했을 뿐이었다. 문민호의 이마가 식은 땀으로 젖어 들어갔다.


“이번 일은 제가 그동안 너무 방치해서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고 계산에 넣진 않겠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가 발생하면 생각을 달리 할지도 모릅니다.”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현은 허리 건강이 걱정될 정도로 거칠게 허리를 숙여대는 문민호를 뒤로 하고 병원으로 향했다.
화련이 너무 과하다고 짜증을 부릴 테지만, 오늘 검사 일정이 아직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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