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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2화 〉탐식마(貪食魔) (312/429)



〈 312화 〉탐식마(貪食魔)

“예, 확인 끝났습니다. 오늘도 고생하셨습니다.”
“아니요, 현장에서 목숨 걸고 뛰시는 분들에게 비할 바는 아닙니다. 저희야 말로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하지요. 다만 상황이 이렇다보니...사태가 수습되고 나면 시간을 내주셨으면 합니다. 그래 주실 수 있으신지요?”
“기쁜 마음으로 응할 수 있게 되면 좋겠군요.”

의례적인 덕담을  마디  나눈 뒤에 웨인은 중년 남자를 떠나보낼  있었다.
국방부의 높으신 분치고는 지나치게 저자세였지만, 웨인은 중년 남자를 이해했다. 아마 그는 없는 자존심이라도 만들어서 팔아버리고 싶은 기분일 것이다. 그것이 비싸다면.

‘복구하는 것보다  밀어버리고 다시 짓는 게 더 싸게 칠거라니.’


웨인은 강화 유리로만 이루어진 외벽 쪽으로 걸어가며 생각했다. 그의 시선 아래로는 벌레가 파먹다가 남긴 것 같은 꼴의 빌딩들이 줄지어 서있었다.
몇몇은 아직 무너지지 않은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고, 몇몇은 붕괴 위험 때문에 지금 철거를 하는 중이었다. 웨인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건물 붕괴에 피해를 입을만한 일반 시민들은 모두 대피한지 오래였지만, 싸움터는 지형지물을 이용할 계획이 있는 게 아니면 저런 것들은 치워놓는 게 옳았다. 재무부에선 오늘 철거된 빌딩들의 몸값을 헤아리며 머리를 쥐어뜯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웨인이 신경 쓸 바는 아니었다.


그의 경지를 생각하면 저 건물들이 싸우는 도중 무너져도  문제는 생기진 않겠지만, 잠깐 멈칫하는 순간 수많은 목숨이 날아갈 수 있는 실수가 터질 수도 있는 법 아닌가.
철거 요청은 궁극적으로 이 나라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모두가 있을 때는 그럴 필요도 없었겠지만.’

웨인은 고소를 머금었다.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사고방식이 이로울 것 없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지친 상태에서는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을 억누르기도 힘들었다.


그는 새어나오려는 한 숨을 삼키며 방을 가로질렀다. 냉장고에서 얼음  덩이를 꺼내 컵에 집어넣고는 위스키를 가득 부었다. 그대로 컵을 들고 침대에 털썩 앉은 그는 멍하니 바깥을 바라보며 잔을 기울였다.

뉴욕은 ‘잠이 들지 않는 도시’라는 별명이 무색하게 잠에 빠지려는 모습이었다.
해가 벌써 지평선 너머로 쓰러지고 있는데 불이 들어온 건물은 거의 없었다. 몇 시간만 더 지나면  도시가 깊은 잠에 빠지리라는 것을 알만한 모습이었다.

‘결국, 그들을 누구도 대체  수 없다는 사실만 확인하게  셈이지.’

웨인은 반도 마시지 않은 위스키 잔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어차피 취하려고 마시기 시작한 것도 아니었다.
되레 입맛이 더 쓰게  줄은 생각지 못했지만.

‘세 번. 세 번 만에 이렇게 되어버렸군.’


웨인이 뉴욕으로 오게  지 한 달.

‘구멍’에서 용종 괴수를 쏟아내는 간격은 굉장히 길어진 상태였다. 초기에는 사흘을 못 넘기고 다음 웨이브를 토해내었는데, 이제는 그 주기가 일주일이 넘었으니 상당한 변화였다.

그러나 남겨진 이들에게는 그마저도 가혹한 난이도였다.
최상위급 플레이어로 이루어진  하나가 달라붙어도 별 피해 없이 사냥하는 게 가능할지 의문인 상위용들이었다.
그런 놈들이 차례차례 하나씩 나오는 것도 아니고, 웨이브 한 번에 열 댓 마리씩 쏟아져 나는 판국에 아직 별다른 인명피해가 없는 것이 기적이었다.


이 끔찍한 웨이브를 막아낼 수 있는 팀의 절반이 이상이 이곳을 떠났고, 남은 인원도  상태가 좋지 못했으니 당연했다.


‘아직도 정신을  차리고 있는 걸 보면 아마...’


웨인은 고개를 내저어  생각을 쫓아내려고 했지만 쉽사리 떨쳐내진 못했다.

웨인 크로이츠가 뉴욕으로 온 지 한 달.
그리고 용잡이 팀의 백화련이 네임드 몹의 공격으로 초주검이 돼서 한국으로 돌아간 지도 한 달하고도 2일이 넘게 지났다.

그 날 화련의 처참한 몰골을 생각하면 웨인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웨인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겉으로만 봐도 양팔을 어깻죽지부분에서 절단할 정도였고, 내부적으로도 마력이 계속 흩어지기만 할 정도로 안쪽이 박살난 상태였다.
이게 숨만 붙어있는 것과 뭐가 다른 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그런 부상을 당한 이가 한 달 넘게 정신을 못 차리고 사경을 헤매고 있다니 회복보다는 다른 쪽으로 생각이 기우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숨을 붙여놨다는 것도 신기할 지경이었으니.


‘정말 그녀에게  문제가 생겼다면...당장 뉴욕은 문제가 아닐지도 모를 일이지. 아니, 문제라고 느껴지지도 않게 될 테지.’


천공성은 여전히 반 걸친 상태로 ‘구멍’ 아래에 떠있었고, ‘구멍’은 당장이라도 뭔가 큰 걸 토해낼 것 같던 기세가 무색하게 안정세로 돌아서긴 했지만 여전히 용종 괴수 웨이브를 토해내는 중이다.
소위 던전 전문가들이라고 거들먹거리던 책상물림들의 입을 음식 투입구로 전락시킨, 이 이상현상마저 별 것 아니게 될  있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자 웨인은 저도 모르게 마시다 내려둔 위스키 잔을 찾았다.


화련이 이대로 일어나지 못하고 죽는다면.
웨인은 그 명제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지만, 건드리지 않을 수도 없었다. 너무 오래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으니까.
몇 번이고 같이 싸워본 이에게 가혹한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그는 그녀가 죽고 나서의 일을 생각해야만 했다.

더 정확하게는 다 죽어가는 그녀를 데리고 한국으로 귀국한 이후에는 대외적인 활동이 일절 않고 있는 남자가 어떻게 반응할 지에 대해서.


‘전투 도중에 위기는 몇 번이고 있었지만, 그는 아직 실패한 적이 없다.’

웨인이 가장 걱정하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었다. 류 현이라는 남자는 아직 되돌릴 수 없는 치명적인 실패를 경험한 적이 없다는 것.

싸움에서 항상 압도적으로 이기기만  것은 아니었다. 몇 번 패퇴하거나, 적을 놓치거나  적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 최후의 승자는 그였다.  과정에서 그는 치명적인 피해를 당한 적도 없었다.
그 자신이 위험한 고비를 몇 번 넘기긴 했지만, 웨인이 봤을 때 그는 그런 것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멀쩡한 척이 아니라, 그것을 피해 범주에 넣고 있지도 않은 듯했다.
오히려 주변에서  기겁을 했다.

‘아예 무감각한 거면 그냥 넘어갈 수 있겠지만, 그건 절대 아니니.’


류 현이 자신에 대한 기준처럼 타인에게도 그리 대했다면 이런 고민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화련이 초주검 상태로 귀국한  날, 웨인은 미쳐 날뛰려는 걸 겨우겨우 억누르고 있는  현을 보았다.
당시 같이 있었던 디에고가 정보를 캐기 위해서 따라붙었던, 그 약삭빠른 인간이 류 현이 억누른 기세만 보고 꽁무니를 뺀 것이 전혀 우습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그 때의  현은 감정적으로 동요한 상태였다.


‘실패 따윈 모르고 승승장구한 남자의 첫 실패가 생사를 같이한 동료의 죽음이라면...’

후우. 웨인은 더는 한 숨을 억누르지 못했다.
그걸로 모자라 침대 위로 드러누웠다.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야 하는데...그렇게 되면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다니...이것 참...”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오면...검성도 아마 이탈할 테지.’

세 번의 웨이브 동안 버틸 수 있었던 건, 검성 나승하가 있어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도 자청해서 남은 게 아니고, 모두를 따라 귀국했다가 류 현이 보내서 온 것이었다. 전화를 해서 그녀를 부탁하기까지 했다. ‘다독여 달라는 부탁은 드리지 않겠습니다. 대외적인 업무만 대신 부탁드립니다.’
웨인은 한 달이 지난 지금도 그녀가 뉴욕으로 돌아온 날 보여준 험악한 기세를 또렷이 기억했다.

 뒤로도 그녀는 얼굴 한  펴는 일 없이 저기압 상태였다. 용종 괴수가 튀어나오지 않으면 방에 쳐 박혀서 코빼기도 보이질 않았다.
어떻게 봐도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지만, 웨인은 내심 그녀가 방에 쳐 박혀만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그녀가 처한 상황을 고려해서 심리 상태를 유추해보면, 그녀가 밖으로 나돌아 다니면 필연적으로 사고가 터졌을 테니까.
원래 뉴욕의 인구수의 백 분의 일도 못 되는 군인들과 플레이어, 그리고 관료들을 찾아가서 사고치기도 쉽진 않겠지만 웨인은 확신했다.

‘사실 그렇게 되면 당장 그녀가 이탈하는  문제가 아니라...용잡이  전체가 침체될 수도 있다. 정말 최악의 경우에는 팀의 존립자체가 흔들릴 수도.’

이익에 따라서 숱하게 해체되고, 그냥 해체되는 걸 넘어서 구성원들이 서로 원수가 되기도 하는 게 클랜과 팀이지만, 반대로 이익에 따라서 구성된 팀이나 클랜이 어지간한 가족보다 끈끈해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목숨을 걸고 같이 싸운다는 것은 그런 의미였다.


웨인이 보기에 용잡이 팀은 재고의 여지없이 후자였다.
그리고 그런 끈끈한 팀들은 그 끈끈함 때문에 와해되는 경우가 굉장히 많았다.
가족 같은 팀원이 싸우다 죽은 경우에 싸움 자체에 회의감을 느끼거나, 그 장면이 트라우마가 되는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용잡이 팀도 그리 되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아니, 사심을 빼고 냉정하게 따지자면 어느 팀보다 그럴 확률이 높았다.


‘이리 고민해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는데...그렇다고 고민하는 것 외에는 내가 할  있는 것도 없군.’


가장 끔찍한 건, 외부자인 그로서는 할  있는 게 없다는 점이었다.
류 현이 평소에 자신의 말을 들어주는 편이라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들은 척도 안 해주는 게 최대한의 양보일 것이다. 화내기가 싫어서 그러는 것일 테니까.

‘그녀가 회복하길 기도하면서 기다리는 것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군.’


웨인은 그대로 눈을 감았다. 잠이 오지 않을 게 뻔했지만, 억지로라도 잠을 청해야 했다. ‘구멍’은 던전과 다르게 친절하게 언제 괴수 웨이브를 토해낼 거라고 예고해주지 않으니까.


잠이 올 때까지 화련을 위해서 기도라도 드릴 생각이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부터 종교를 버린 자신이 다른 목숨을 위해 기도를 올린다는  우스웠지만,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무사히...눈을 떠주길.’


웨인을 비롯한 팀원들의 기도가 닿은 것일까?
웨인은 그로부터 닷새 후, 화련이 의식을 찾았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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