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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0화 〉탐식마(貪食魔) (310/429)



〈 310화 〉탐식마(貪食魔)

‘그것’에게는 원래 이름이 없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자신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머리 위에 떠오른 이름. 해왕(海王) 비아트릭스.
스스로도 몰랐던 이름이었다. 어딘지도 모를, 이름조차 없는 세계에서 평생 모를 것 같았던 이름을 찾게 될 줄이야.
황당했다. 일평생 느껴온 것들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당혹스러움이 그녀를 뒤흔들었다.


비아트릭스는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 속에서 제 아비를 떠올렸다.

비아트릭스의 아비는 그녀와 같은 용이었다. 대해의 지배자라고 불리던 그녀의 아비는 만 년이 넘는 너무 기나긴 삶에 돌아버린 것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미쳐있었던 것인지 비아트릭스의 어머니인 인간 여자를 사랑했다.


거기까지였다면 영웅 서사시의 도입부로 써먹히고 말 닳고 닳은 이야기로 끝났을 것이다. 용의 피를 받은 혼혈이  혈통의 강력함으로 인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십번도 더 있었던 이야기였으니까.
그러나 불행히도 그렇지 못했다.


비아트릭스의 어미가 되는 이름도 모르는 인간 여자는 수태 능력만큼은 아주 특별한 인간이었다. 거기서부터 이야기가 꼬이기 시작했다.

적당히 인간 수준에 맞춰서 그녀를 임신시켰을, 아비의 정(精)이 어미의 특별한 수태능력을 만나서 용의 정(精)으로서 정상 기능을 해버렸던 것. 모체에 맞춰 조금 뛰어난 인간을 잉태시켰어야 할 정(精)이, 상대를 용으로 착각해버린 것이다.
비아트릭스의 어미는 뱃속에 제 목숨을 갉아먹는 것을 품게 되었다. 사태를 파악한 아비가 수정된 비아트릭스를 도려내고자 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의식조차 없었던 단계의 비아트릭스는 생존 본능만큼은 무시무시했었다. 비아트릭스를 도려내면 모체가 먼저 죽을 판이었다.

비아트릭스는 천천히 모체의 목숨을 갉아먹으면서 성장했다. 마침내 그녀가 세상 밖으로 나왔을 때, 어미는 의술의 신이와도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죽음에 가까워진 상태였다.
분노에 미쳐 그녀를 죽이려는 아비를 어미의 유언이 막았다. 아이를 해하지 말라는, 죽어가는 이의 애걸에 아비는 비아트릭스를 외면하는 것으로 들어주었다.
대신 아주 작은 복수를 행했다. 딸에게 저주와 같은 말을 남겼다.


너는 용이 되지 못할 것이다. 네 이름이 영원히 진창에 뒹굴 것인저. 너는 세상 어디에서도 동족을 찾지 못할 것이다. 영원히 떠돌며 네 죄를. 어미를 죽여가며 태어난 패륜을 영원히 반성하게  것이다.


아비의 말대로 용으로서 가져야할 이름을 갖지 못한 비아트릭스는 용이 되지 못했다. 용이 가져야할 능력을 모두 갖추었지만, 용의 몸으로 돌아가는 것은 제한되었다.


그렇지만 아비의 저주대로 비통에 찬 삶을 살지도 않았다.
비아트릭스는 온전한 용이 되진 못했지만, 강력함으로 따지자면 용중의 용이라고 할만 했다. 강력한 용이었던 아비의 혈통 덕일까?
그녀는 반쪽짜리도 못되는 자신을 핍박하러온 동족들을 모두 굴복시켰다. 하나의 예외가 있긴 하였지만, 그조차 그녀를 굴복시키진 못했다.
도전해 오는 동족들을 굴복시키다보니, 어느새 그녀는 바다의 주인이 되어 있었다.

당연하게도 이런 비아트릭스가 제 이름을 갈구할 일 따윈 없었다. 있다면 아주 가끔씩 무료할 때나 의식 위로 떠오르는 호기심이 있을 따름이었다.


갑자기 이상한 곳으로 끌려와서, 이름을 되찾게 된 그녀의  떨떠름한 반응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머리 위에 떠오른 것은 거짓 이름도 아니었다. 저 이름을 접하고 난 뒤로 한 꺼풀 벗어던진 느낌이었으니까.
그렇기에 더욱더 그녀는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름을 받아들이면 한 꺼풀 정도가 아니라, 원래 가졌어야  힘을 모두 가질 수 있지만 선뜻 그러질 못했다.

비아트릭스는 몇 번이고 한 일이었지만, 제 머리 위에 떠오른 이름을 멍하니 바라봤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지향해야할 일이었지만, 그녀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한참을 머리 위를 응시하던 비아트릭스가 고개를 훽 돌린 것은 아무런 전조도 없이 이루어졌다. 시선이 향한 방향 끝에는 그녀가 통째로 얼려버린 마을이 있었다.

[......]

그녀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 방향을 응시했다. 색이 흐릿한 동공이 열리며 푸른 물빛이 어렸다.
그녀의 고개가 옆으로 살짝 기울어졌다.


[어째서?]

근처에 인간이 있었다면 옥쟁반에 구슬 굴러가는 소리 같은 말을 나불거렸을 목소리였다. 그녀는 대답이 돌아올리 없는 허공을 향해서 물었다.


[어떻게?]

그녀가 느끼기에 이 이상한 세계는 모든 것이 약했다. 신경 써서 조절하지 않으면 디딘 대지마저 부스러질 정도로, 연약하기 그지없었다.
그녀가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죽어나자빠지는 인간들은 자신이 알 던 그 인간들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마법의 발달도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마법뿐만 아니라, 신께 청을 올리는 방법도 모르는 것 같았다.
비아트릭스는  세계의 수준을 대강 가늠하고  뒤에는 제 능력이 제대로 작용하는지 이것저것 시험해 보았다.
이틀 전에 통째로 얼려버린 마을에 대고 이런 저런 능력을 쏟아본 건 그런 의미에서 한 행동이었다.
아무런 경계도, 뒤처리도 하지 않고 떠난 것은 다른 의미가 있어서 한 행동은 아니었다. 그렇게 해도 아무 일이 없을 것 같아서 그랬다.


이틀 전의 그녀에게는 그게 당연한 일이었다. 원래의 세계에서도 그녀의 목숨을 위협할 수 있는 존재는 단 셋뿐이었지만, 이곳은 더했다.
무슨 짓을 해도 자신을 추적하지 못할  같았으니까.

그러니 그녀가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라는 건 당연했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인간일 확률이 높은 미지의 존재가 저가 남긴 흔적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포착해냈다. 그냥 존재를 확인한 정도가 아니라, 이쪽의 위치를 읽어냈다.

일방적으로 이쪽을 들여다 볼 정도로 수준이 높진 않았지만, 그래도 놀랄만한 일임은 분명했다.
그리고 미련 따위 없다는 것처럼 연결을 끊어버리니, 비아트릭스의 의구심이 솟구칠 수밖에 없었다.


[가볼까?]

그녀는 말을 내뱉었다가 곧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자신을 추적했을 인간 마법사에 대해 떠올리니 머릿속이 엉망진창으로 뒤엉켰기 때문이었다.

인간에 대한 살의.
그것이 만년 가까이 살아온 그녀의 대해 같은 이성을 뒤흔들었다. 명백하게 이상한 일이었다. 그녀는 인간을 좋아하지도 않았지만, 보는 족족 잡아 죽이는 쪽도 아니었다.
어느 쪽이냐면 무관심한 쪽에 가까웠다.


그런데 지금은 인간에 대해서 떠올리는 것은 물론, 인간 냄새만 맡아도 눈이 돌아갔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살의가 솟구쳤다.
인간 냄새를 맡고 정신을 차려보면, 인간들의 시체가 주변에 그득했다. 피를 포함한 수분 대부분을 뽑아낸 인간의 시체가.

다행스럽게도 아직 인간을 뜯어먹는 기분 나쁜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기분 나쁜 게 어디 가진 않았다. 알 수 없는 존재에게 조종당하는 기분이었다.

 충동을 적절하게 해소하면서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에겐 조용히 생각할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먼 바다로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지금 아마존 하구라고 불리는 곳을 눈앞에 둔 상태였다.

그런 와중에 갑자기 탐지를 당해서 괜히 인간에 대해서 떠올리게 되었다. 그녀는 뇌를 갉아먹는 것 같은 충동을 애써 억누르며 내륙으로 발길을 돌렸다.
바다로 나아가기 전에 마을 하나를 더 없애야 할 것 같았다.


***

비아트릭스는 밤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하나 뿐인 달. 낯선 별 자리.

그녀가 아는 것은 밤하늘에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 이상한 곳에 떨어지고 몇 번이고 확인한 사실이었다.

결국 마법사는 오지 않았다. 그녀가 마을 하나를 없애고, 옛 기억들을 곱씹으며 해가 넘어가고 밤이 깊기를 기다렸음에도, 다시 연결되는 일조차 없었다.
더 이상 지체해봐야 충동만 다시 들 것 같았다.

비아트릭스는 수면 위로 발을 내딛었다. 강과 바다가 만나는 지점이라 움직임이  격함에도, 그녀의 발이 닿은 곳은 거짓말처럼 흐름이 잦아들면서 얼어붙었다.


이럴 필요 없이 그냥 바다에 몸을 던져도 되었지만, 비아트릭스는 이런 비효율적인 방법을 굳이 사용하기로 했다. 이 세상의 바다가 너무 메말라 몸을 담고 싶지 않다는 것도  이유이긴 했다.
그녀는 산책하는 것처럼 천천히 바다 위로 펼쳐진 얼음 카펫을 밟아나갔다.
실제로 그런 의도가 거의 오할  되었다.  뜬금없고 기분 나쁜 충동 때문에, 인간이 사는  근처에서는 무슨 생각을 차분히 하거나,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쉬기도 힘들었다.


비아트릭스는  순간을 만끽하기로 했다.


그때였다.

슈슉!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머리 위쪽 공간이 열리는 것이 느껴졌다.
비아트릭스의 입이 반쯤 벌어졌다. 그녀의 상식 내에서는 이런 약해 빠진 세계에 있어서는 안 되는 기술이었다.
심지어 시전자는 인간 마법사였다.

하지만 그 사실에 온전히  놀라기도 전에 그녀의 머릿속은 하나의 격렬한 감정으로 가득하게 되었다.
인간의 존재를 확인하자마자 억눌러 두었던 인간에 대한 살의가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비아트릭스는 자신이 의식하기도 전에 손을 휘둘렀다. 그녀의 의지에 따라 마력이 인간들 주변 공간을 통째로 얼려버렸다.

“꺄악!”
“언니!”
“화련 씨!”
“뭐야 저거 어떻게 다 넘어오기도 전이 이런 식으로...”


하지만 튀어나온 건 인간 마법사의 비명뿐이었다. 비아트릭스는 정도 이상으로 끓어오르는 분노에 이끌려 다시 손을 내휘둘렀다.
이번에는 확실히 흔적도 없이 저 인간들을 분쇄하고도 남을 힘을 실어서.

후왁! 후르르!


그러나 비아트릭스가 휘두른 공격은 전혀 예상외의 방식으로 막히게 되었다.
갑자기 훅 하고 타오르기 시작한 회색 오러와 검은 안개가 그녀가 내쏜 마력을 통째로 집어삼켜 버렸다.
인간에 대한 분노와 살의로 제 기능을 못하는 머리로도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더군다나 그녀는 저것과 비슷한 것을 본 적이 있었기에 더했다.


[마신의 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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