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7화 〉탐식마(貪食魔)
슈슉! 바람 빠지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빛이 닥쳐 들었다. 류 현은 당황하지 않고 눈꺼풀을 뚫고, 눈을 찌르는 빛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영원할 것 같던 빛은 금방 사그라졌고, 류 현은 방치된 것 같은 헬기 착륙장을 한 번 휘돌아봤다. 주변이 이미 어둑어둑 했지만 그건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빌딩 옥상에서 둘러본 도시는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불이 들어와 있는 건물이 대부분이었지만, 이 숨길 길 없는 냉막한 정적을 몰아내진 못했다.
도시는 애써 지금의 상황을 무시하는 것처럼 침묵을 지키는 것 같았다. 과한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류 현이 느끼기에는 그랬다.
“분위기 끝내주네요. 무슨 도시 전체가 초상집 같네.”
화련 또한 같은 것을 느꼈는지, 한 번 휘돌아보고는 투덜거렸다. 텔레포트의 여파 인지 그녀의 안색은 살짝 혈색이 빠져 질린 상태였다. 그녀의 몸 주변으로 타오르고 있는 회색빛 오러 때문에 더 질려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런 일이 터졌으니까요. 이동, 고생하셨습니다. 혹시 무리하신 건 아니죠?”
이집트에서 우크라이나까지 연속 텔레포트로 이동한 전적이 있긴 했지만, 화련과 희란 말고는 전문가라고 할 만한 이도 없고, 워낙 복잡하고 소모가 심한 마법이다 보니 장거리 이동이 있을 때마다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괜찮아요. 뉴욕 주변에 마력 흐름이 엉망이라서 예상보다 마력이 좀 더 빠져서 그래요. 조금만 쉬면 다 회복될 거에요.”
“그럼 빨리 얘기를 끝내고 쉬도록 하죠.”
그러긴 쉽지 않을 거라는 걸 류 현이 가장 잘 알았지만, 그는 그러리라고 마음먹었다.
류 현이 건물 안으로 들어갈 문을 찾는데, 때 마침 그 문이 열리며 웨인과 지벡이 옥상으로 들어섰다.
일행을 발견하자마자 떨떠름한 얼굴이 돼서 그 자리에 멈춰 섰지만, 웨인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류 현의 앞에 멈춰서더니 허리를 조금 숙이며 손을 슥 내밀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생은 화련 씨가 다 하시고 저흰 멀쩡합니다. 일단 상황부터 듣고 싶은데...”
“예, 자리를 준비해뒀습니다. 가시죠.”
선도하는 웨인의 눈가에는 가려지지 않은 검은 그림자가 가득했다.
‘하기야 아마존에서 인간형 괴수를 찾으라는 건 사막에서 바늘 찾기나 다름없으니까.’
그걸로도 모자라, 일정 범위 안의 전자기기를 다 망가뜨리기까지 하니 그 고생이 말로 다 못하는 수준일 것이다.
협조자라고 하는 이도 고분고분한 인간은 아니었으니까. 고분고분하지 않은 것을 넘어, 국경너머에 있는 류 현에게, 그를 통해서 원거리로 징징거린 인간 아닌가. 옆에 붙어서 현장을 뛰었을 테니 그냥 고생이라는 말로 퉁치는 건 심한 일 일지도 몰랐다.
‘음...이번일 끝나면 좀 챙겨주긴 해야겠다.’
류 현이 그런 결심을 하는 동안, 일행은 웨인이 준비한 회의실에 도착했다. 회의실 치고는 좀 좁고, 개인방 같은 분위기였지만 지친 화련은 침대 겸용의 소파의 존재에 감사하며 그 위로 늘어졌다.
류 현은 자리에 앉자마자 본론으로 들어갔다.
“피해 마을은 어떻답니까? 생존자나 목격자는요?”
“마을 전체가 얼음덩어리에 먹혀서 확인된 건 외곽에 있는 시신들뿐입니다.”
웨인은 대꾸하며 책상에 세팅해 놓은 홀로그램 영사기를 켰다. 웅웅거리는 소리가 좀 나더니, 허공으로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이미지가 불쑥 솟아났다.
아마존 정글을 바로 옆에 둔 마을이 커다란 얼음 덩어리에 먹힌 모습에 그보다 더 적절한 표현은 없으리라.
“허...이거 대체 부피가 얼마야? 높이는 어느 정도래요?”
축 쳐져서 그대로 잠이라도 잘 것 같던 화련마저 이리 물어올 정도였다. 대부분의 수치를 머릿속에 다 넣어두었던 웨인은 지체 없이 대답했다.
“가장 높은 곳이 92미터고, 대체로 80미터 선에 머물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허...”
화련은 그것으로 궁금한 것이 모두 사라졌는지 다시 소파 위로 늘어졌다. 웨인은 떠오른 이미지를 가리키며 설명을 계속했다.
“보시다시피 마을 안에 있는 이들이 살아있을 가능성이 없어 보입니다. 운 좋게 그 때 마을을 나가있었던 이들도 찾긴 했습니다만, 그다지 의미 있는 정보는 없더군요. 대신 이 커다란 얼음덩어리에서 한 가지 사실은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류 현의 한쪽 눈썹이 쓱 올라갔다. 웨인은 뜸들이지 않았다.
“이 얼음덩어리 주변에는 전자기기의 작동을 저해하는 마력이 흐르고 있더군요. 가까이 갈수록 그 정도가 심해져서, 촬영하는데도 특수 장비가 필요했었습니다. 전에 아프리카에서 본 그 물건 말입니다. 일반 전자식 카메라는 영향력이 줄어드는 거리까지 멀어져도 이상하게 노이즈가 꼈고요.”
“드디어 아마존 강을 얼린 놈이랑 마을을 습격하던 녀석이 같다는 물증이 생겼군요.”
“예, 그렇지요.”
그리 좋은 소식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나쁜 소식도 아니었다. 아마존 강을 얼린 놈과 마을을 습격하는 것이 같은 네임드 몹의 짓이라고 류 현은 거의 확신하고 있었지만, 물증이라고 할 만한 게 없는 상황이었다.
유일한 물증인, 구식 폴라로이드 카메라에 찍힌 사진은 상황 판단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괴상한 능력을 지닌 괴수를 둘을 동시에 상대할 일은 없겠군.’
그전에 발견된 얼음 덩어리들에서는 이런 특이점이 발견되지 않은 게 켕기긴 했지만, 정황상 확신을 가져도 될 듯했다.
아무리 지능을 되찾은 네임드 몹이라도, 제 능력 때문이라도 전자기기의 존재도 파악하지 못했을 텐데 굳이 얼음덩어리로 봉한 마을에 그런 처리까지 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아마 두 가지 능력을 가진 놈이 이번에는 어쩌다 그 능력을 썼다고 보는 게 옳았다.
생각을 대충 정리한 류 현은 웨인을 돌아보다가 그의 얼굴에서 어떤 기색을 읽어낼 수 있었다.
“뭐가 더 있습니까?”
“예, 목격자가 있었습니다.”
“예? 하지만 사건 당시에 마을에 있었던 이들은 전부...”
“마을 사람이 아니고 우연히 그 근처를 지나가던 이가 있었습니다. 아주 멀리 떨어져서 얼음덩어리가 갑자기 솟구치는 걸 봤다고 하더군요. 수준이 그리 높진 않았지만, 그래도 플레이어라서 겨우 시야가 닿았던 것 같았습니다. 지니고 있던 전자 기기가 다 망가진 것도 확인 해두었습니다.”
“뭐라던가요? 이름은? 확인 했다고 합니까?”
“너무 멀어서 그것의 머리 위에 이름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다고 증언했습니다. 사실 지금 좀 정신이 온전치 못해서 일관되게 증언한 것들만 추리는 작업을 하는 중입니다.”
류 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목격자가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니.
하지만 충분히 있을 법한 이야기였다. 전생에서도 네임드 몹이 이동 루트에 있었던 노약자들이 심장마비로 즉사하거나,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 꼴을 본 게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수준이 높지 않은 플레이어라면 근처에 있었던 것만으로도 큰 충격을 받는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곤란하군요. 그렇지 않아도 추적이 힘든 놈인데.”
“그래도 몇 가지 사실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 일관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놈의 차림새와 놈의 주변을 지키고 선 붉은 병사들에 대한 것들은 자세하면 자세해졌지, 이전 발언을 부정하는 일 없이 새로운 사실을 떠올려내고 있는 상태고요.”
“차림새? 인간 수준의 소형일 거라고 생각하긴 했는데...차림새 소리가 나올 줄은 몰랐네요.”
“들어보면 더 놀라실 겁니다. 증언에 따르면 놈은 여성체에, 하얀 드레스 차림이라고 합니다.”
류 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머리통 위에 떠있을 이름을 못 본 놈이 그런 건 잘도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웨인이 그런 그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가려운 부분을 긁어주었다.
“가장 황당한 건 이 부분인데...머리 위에 떠오른 이름의 존재는 멀어서 확인 못했다는 사람이, 놈의 외모가 아주 아름다웠다고 증언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네?”
“처음에는 착란 증세나 수작질을 부리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점점 얼굴 묘사가 세세해지더니, 지금은 인물화까지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게 그 스케치입니다. 웨인이 내민 종이에는 연필로 막 그려낸 것 같은 여자의 초상이 있었다.
외모에 대한 호불호가 애매한 류 현조차 미형이라는 사실에 동의할 수밖에 없는 그림이었다.
‘아니 다른 건 멀어서 못 보거나, 기억이 애매한 인간이 이런 건 왜 이렇게 쓸데없이 잘 그린거야?’
“허, 그 인간 진짜 약하고 헛걸 본 거 아냐?”
“약한 인간이 이런 걸 어떻게 그려요. 진짜 모델이 없으면 못 그릴 수준인데요. 여기 이거 봐요.”
“확실히 어이없을 정도로 예쁘긴 하네.”
류 현의 어깨 위로 슬쩍 고개를 디민 두 여자가 이런저런 평을 늘어놓았다.
‘진짜 그 목격자라는 인간 대체 뭐지?’
목격자라고 하는 인간과 직접 대면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웨인의 말을 들어보면 직접 심문해봐야 별 소용이 없겠지만, 이런 황당한 걸 붙들고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초상화를 받아든 류 현이 표정이 점점 썩어 들어가자, 웨인은 슬쩍 그것을 회수하고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놈 주변에 있던 병사들에 대해선 꽤 세세한 증언을 해주었습니다. 자신이 대면해 본 최고 등급 괴수가 샌 드래곤이었는데, 놈들에 비하면 샌 드래곤이 장난감처럼 느껴졌다더군요.”
“최소 퍼플이상 보스급이라는 소리군요.”
“예, 상태가 저 지경이니 신뢰성이 좀 떨어지긴 합니다만, 여기에 대해선 배치나 숫자도 기억할 정도니 조금 더 파봐야 할 것 같습니다.”
“몇 마리라고 하던가요?”
“이백은 되어 보인다고 했었습니다. 아무리 많아도 사백은 안 될 거라고 하더군요.”
“이백이라...”
‘너무 적은데?’
놈의 짓이 확실한 수법으로 죽어나간 이들만 2만에 달했다. 최대 수치인 사백을 기준으로 잡아도 너무 적었다.
‘사람 몸뚱이에서 피를 뽑아서 병사로 만드는 놈이 여태 이백만 만들었을 리가 없는데.’
본진이라도 차린 것일까? 아니면 어떤 목적이 있어서 분산 대기 중?
류 현의 머릿속에 온갖 가정들이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병사들이 한 순간에 놈의 손아귀로 사라지는 걸 봤다고도 했습니다.”
“사라졌다고요?”
“정확히는 몸뚱이가 녹아내려서 놈의 손안에 커다란 수정 구슬 형태로 모였다고 하더군요. 부피가 너무 극적으로 줄어서 몇 번이고 다시 물어서 확인했습니다만, 같은 대답만 얻었습니다.”
“사람의 피를 병사로 부리는 놈이니, 그걸로 다른 마법을 부릴 수 있다고 해도 이상하진 않겠죠. 무슨 이유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하는 지는 알 수 없지만요. 그런데...이래선 놈이 이끄는 무리의 덩치가 불어나서 꼬리를 잡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접어야겠군요.”
“예, 아마 그래야할 것 같습니다.”
‘안 좋아. 여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던 놈인데 제 무리까지 그렇게 가볍게 움직일 수 있다는 건...놈을 한 번에 못 잡을 경우에 리스크가 너무 커진다.’
지금도 놈은 지나가는 시간 속에 제 지능을 되찾고 있을 것이다.
지금이야 가진 힘에 비하여 얌전하게 행동 중이지만, 용잡이 팀이라는 위협에 한 번 노출되고 나면 태도를 달리하게 될 것이다. 그 싸움에서 치명적인 손상을 입지 않고, 도망친다면 제 무리의 기동성이라는 무기를 쥐고 발광할 터. 그것에 대응하기가 극히 어려울 것이라는 것 정도는 충분히 짐작 가능했다.
‘하필 뉴욕이 그 상태인데 기동성이 좋은 놈이 여기에...’
이곳의 책임자인 디에고 리베라 브렌트를 아직 만나지도 않았는데도, 벌써 골치가 지끈지끈 아파오는 것 같았다.
다른 팀원들도 비슷한 생각에 도달했는지, 방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갑자기 방안에서 붕뜬 존재가 된 웨인이 눈치를 살피다가 홀로그램 영사기에 손을 뻗었을 때였다.
“저어...”
“네?”
희란보다 의견 개진하는 일이 적은 백혜라가 입을 열자 시선이 확 쏠렸다. 저마다 고심을 시작한 용잡이 팀원들 모두가 그녀를 돌아봤다.
갑작스러운 시선 집중에 흠칫한 혜라는 한 사람 한 사람 눈치를 보고 나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어, 저 현장에 가볼 수 없을까요?”
“응? 왜 그래? 뭔가 다른 게 보여?”
“보이는 건 아닌데...뭔가 저기 접촉해보면...아니, 꼭 접촉해봐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자신이 생각도 뜬금없는 소리였지만, 백혜라는 흉중에 들어앉은 말을 전부 털어놓았다. 허상일 뿐인데도, 저 얼음덩어리를 보고 있자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특수 제작한 대 던전용 카메라로 촬영한 것이라더니 그래서일까?
설명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명확한 뭔가가 느껴지진 않았다. 뭔가 직접 만지고 싶은 간질간질한 기분이 드는데, 그 원인을 알 수가 없었다.
충동도 너무 미약해서 설명을 하기도 힘들었고.
‘조금만 더 생각하고, 말을 골라서 내뱉을 걸.’
후회가 되었다.
“좋습니다.”
“네?”
“가보죠. 오늘은 늦었으니 이만 자기로 하고, 웨인 씨. 그곳까지 갈 헬기를 좀 수배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그래야지요.”
“어...저기, 거기 갔는데 제가 아무것도 못 느끼면요?”
“그렇다면 다시 단서를 찾아봐야겠지요. 어차피 한 번쯤은 가보게 됐을 겁니다. 조금 일정이 앞당겨졌다고 생각하면 되겠지요.”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는 류 현의 모습에 백혜라는 할 말을 잃었다. 승하가 어깨를 툭툭 건드려서 돌아보니 그녀가 히히 웃으며 말했다.
“너도 이 팀의 팀원인데 뭘 그렇게 어려워 해? 어차피 가야하는 곳인데 뭐.”
“그건 그런데...”
뭐라고 할 말을 찾던 혜라는 자신이 바보같아져서 어깨를 늘어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