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6화 〉탐식마(貪食魔)
“그쪽 입장에서는 이해 못할 것도 아니지요.”
류 현이 이해한다는 듯한 투로 말하자 화련의 눈초리가 샐쭉해졌다. 대놓고 뭐라고 하진 못했지만, 불만스러움을 감추지도 않았다.
뭐하러 그런 약쟁이 대장이 징징거리는 걸 신경써준단 말인가?
“아마 폭탄을 안고 자는 느낌이겠지요. 당장 자기 목을 놈이 따러오지 않는다고 해도 그 디에고라는 사람 입장에서는 실시간으로 자기가 딛고 있는 땅이 줄어드는 기분일 겁니다.”
뚱한 화련 대신 승하가 대신 질문을 던졌다.
“너 남미 터지고 나서 가봤다고 하지 않았어? 뭔가 잘 아는 투다?”
“그 시절 지배자라고 지칭되는 이들은 다 비슷했으니까요.”
류 현이 보기에 남미의 대부라 불리는 디에고 리베라 브렌트는 운이 좋은 불한당이었다. 다른 곳보다 더 빠르게 플레이어의 무력이 된 곳에서, 빠르게 치고 나갈 수 있는 기회를 얻은 자.
그에 대한 정보 대부분이 지벡 건터가 제공한 주관이 뒤섞인 것들이니 걸러 생각하긴 해야겠지만, 굳이 거기에 힘쓸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승하에게 말한 것처럼 그놈이 그놈이었으니까.
‘모든 걸 자기 힘으로 이뤘다고 생각하는 머저리들.’
여기서 부정적인 뭔가를 더할 수는 있을지언정, 빼줄 일은 없었다. 그놈들이 전생에서 부르짖던 패권이나, 종교적 신념, 인류를 이끌어갈 방향성은 모두 저를 치장하기 위한 장신구였다. 장신구이면서 동시에 창이자, 방패였다.
놈들은 대의라는 이름의 방패 뒤에 몸을 보호하고, 대의라는 이름의 창으로 제 적들을 찔렀다.
끔찍한 시절이었다.
그리고 그 끔찍한 시절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류 현은 그들에게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다.
누구든 그 자리에 앉아있으면 제 것을 지키겠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뛸 테니, 관심을 둘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거대 군벌이 되거나, 미쳐서 제 근거지에 불을 지르고 저만 살자고 도망가지 않는 이상에야 신경쓰지 않는 것이 지금까지의 스탠스였다.
그래서 웨인이 올리는 보고마다 징징거리는 멘트를 끼워 넣는 디에고에게 별 다른 불쾌감을 느끼지 않는 것이었다.
류 현의 기준에서는 디에고는 그래도 제 자리는 지키겠다고 열심히 뛰는 성실한 쓰레기였으니까.
“제 기준에서는 이 정도면 꽤 훌륭한 편이라서요. 현장에서 상대하고 있는 웨인 씨는 좀 괴롭겠지만, 어쩌겠습니까. 상황이 이런 것을요. 화련 씨 말씀처럼 아마존을 뒤져야 하는데 우리 같은 소규모 팀이 낀다고 엄청난 진전이 있을 것 같지도 않고요.”
화련의 탐색 능력을 생각하면 도움이 안 될 리는 없지만, 우선순위에 밀려도 한참 밀렸다.
안 그래도 엉망진창이었는데 ‘대소환’ 이후 더 엉망이 되는 와중에, 디에고 리베라 브렌트라는 새파란 애송이를 대부로 부를 정도로 이래저래 꼬여버린 남미와 아군임을 스스로 증명해 온 미국.
굳이 대볼 필요도 없었다.
“무엇보다 지금 출국하겠다고 하면 미 정부에서 공항에 불을 지를지도 모르는 상황이니까요.”
승하가 낄낄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맞아. 걔네 우리가 브라질 갔다 오겠다고 하면 진짜로 그럴지도 몰라. 우린 공격 못할 테니, 공항을 부숴버릴지도.”
떠나려고 든다면 회색 오러 버프를 받은 화련이 브라질까지 문제없이 일행을 옮길 수 있겠지만, 당장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뭐, 호지슨 버넷 씨가 있으니 그럴 일은 없겠지만요. 그 때야 아프리카에 소식이 안 닿으니 모르셨겠지만, 귀국하고 나서 어렴풋이 눈치 채셨을 겁니다.”
아마 아프리카 원정대에 속했던 이들 대부분이 어림짐작으로나마 용잡이 팀이 특별한 이동 수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들과 헤어지고 나서 거의 바로 우크라이나에 있던 유격대 본대와 합류했다는 것을 귀와 눈을 닫고 사는 게 아니면 모를 수가 없으니까.
용잡이 팀과 꽤 많은 전투를 같이 수행한 호지슨 버넷은 그보다 한 발 더 나갔을 것이다.
“모르면 그게 바보죠. 제가 텔레포트 쓰는 거 한 두 번 본 것도 아니고. 우크라이나에서도 한두 번 쓴 게 아니니까. 누가 소문냈어도 냈겠죠. 대가에 대해서 이상한 소문이 났을지는 몰라도.”
“용케 감시 안 붙이고 있다니까. 다른 곳이었으면 도망갈까봐 카메라 심어놓고, 도청하고, 수발 들어준다는 핑계대고 감시역 붙이고 난리였을 텐데.”
승하의 말대로 미정부는 용잡이 팀이 요청한 편의 외에는 제 재량으로 뭔가를 밀어 넣지 않고 관망하는 상태였다.
대충 대충 대접한다는 느낌이 아니라, 수험을 코앞에 둔 수험생을 대하는 것처럼 거슬릴만한 여지를 만들고 싶지 않아서 사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요청한 것들은 아무리 뜬금없는 것이라도 3시간 내로 처리 해주는 것만 봐도 그랬다.
그리고 그런 미정부의 전략 아닌 전략은 꽤 좋게 작용하는 중이었다. 주로 승하와 화련의 기분에.
“뭐 덕분에 쉴 때는 마음 놓고 쉴 수 있으니 좋지 않습니까.”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었다.
천공성이 ‘구멍’을 뚫고, 그 안에서 용종 괴수가 쏟아지기 전에는 이래저래 찾아와서 찝쩍거리려고 접촉 시도하는 이들이 한 둘씩 있었다.
대부분은 호지슨 버넷의 부대원들의 선에서 커트되었고, 드물게 그 차단선을 넘은 이들도 승하가 슥 쳐다보면 갑자기 급한 일을 떠올리곤 물러갔다.
대화 비슷한 걸 나눈 몇 안 되는 이 중 던전부 장관이라는 자는, 대화를 나누다 말고 전화를 받더니 급한 일이 생겼다며, 다시 보자며 떠나갔다. 그 후로는 만나지 못했다.
그 뒤에 ‘구멍’이 열리고 불규칙적으로 쏟아져 나오는 용종 괴수를 때려잡고 나니, 주변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위험한 줄도 모르고 꾸역꾸역 밀려들던 기자나 기업가들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고, 일처리를 위해 어쩌다 보이는 관료들은 제 그림자를 볼까 두려워하는 것처럼 팀원들이 시야에 들어오면 줄행랑을 놓았다.
유일한 예외인 대통령은 이쪽이 부담돼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대책캠프를 차리도록 설득했고 말이다.
“이런 환경에서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건 마스터뿐이죠. 수습반이나 그 군인 아저씨 부하들 만날 때마다 어우...”
그 와중에 가장 자주 보는 괴수 사체 수습반과 호지슨 버넷의 휘하 부대원들은 용잡이 팀에게 전쟁 영웅을 보는 것 같은 눈빛을 보내곤 했는데,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 강도가 짙어지는 중이었다.
그들이 놓친 용들을 보스턴에서 수습하기 위해서 최상위 팀 열 팀이 투입되고도, 고층 빌딩 서른 채가 찌그러진 파이꼴이 되는 걸 막지 못했다는 사실을 듣고 나서는 더욱 가속화 되었다.
화련은 그들이 부담스러워서 사냥이 끝나고 나면 도망치듯이 숙소로 먼저 텔레포트 해서 최대한 접촉을 피하는 중이었다.
“뭐 어때. 왜 다 못 막았냐고 돌 집어던지는 인간들 보다는 낫지.”
“그걸 말이라고 해요? 당연히 비교도 안 되죠.”
“그렇다고 바짓가랑이 물고 늘어지면서 사정사정 하는 건 좀 그렇잖아?”
“그것도...인정. 맞아요. 그러면 진짜 다른 의미로 정 떨어질 것 같아. 지금도 막 부담스러워서 수습반 사람들 눈 마주치고 나면 밥 안 넘어가는데 으으...그러고 보니까 신기하네요. 우리가 뭘 어느 정도로 잘 막고 있는지 모르는 것 같진 않은데 이상하게 조용하네?”
“위쪽에서 잘 막고 있는 거겠지. 기자나 어디 사장이나 회장이라고 찾아오는 인간들 발길 끊긴거 보면. 어제 온 그...어디 소속이라더라? 나사?”
“NSA겠죠.”
“아, 그래 거기. 거기서 왔다던 아저씨 눈 보니까 막 말 걸어주세요! 말 걸어주시면 할 말 많아요! 막 이렇게 말하는 거 같더라. 다른 공무원들도 우리 보면 도망가면서 겁먹고 도망가는 분위기는 아니었고. 입 다물라고 명령이라도 내렸나 보지. 귀찮게 하지 말라고.”
“그렇긴 했죠. 미국에서 우리 뒷조사라도 한 건가? 어떻게 이렇게 딱 맞추지?”
“좋은 게 좋은 거지 뭐. 지들이 잡은 용들 머리통이랑 심장도 달라니까 준다는 데, 뒷조사 좀 했어도 그냥 넘어가자고.”
“그거야 우리가 해주고 있는 거 생각하면 수고비도 안 되죠.”
“걔들 입장에서는 그래도 속 많이 쓰릴 걸? 신종도 많고, 류 현이 저거 다 먹어서 힘 기른다는 것도 모르니 네가 텔레포트로 어딘가 짱 박아놨다가 사태 정리되면 다 싸가지고 갈 줄 알 테니까.”
“속이 쓰리거나 말거나. 우리 앞에서 티만 안 내면 상관없어요. 그나저나, 마스터.”
“예?”
두 여자가 주거니 받거니 하는 동안, ‘가방’에서 용고기 육포를 꺼내 씹고 있던 류 현은 화련의 부름에 입에 든 육포를 어찌해야 하나 갈등하는 표정이 되었다.
화련은 손을 살랑살랑 흔들어 먼저 삼키라고 권했다. 류 현이 육포를 다 넘기고 나자 화련이 용건을 꺼내들었다.
“브라질에서 올라오는 보고 제가 대신 받을 수 없을까요? 보고를 받을 때 동석해 계시고, 표면적으론 제가 받는 걸로요.”
“안 될 건 없습니다만...왜 그러시는 지 이유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평소 화련의 태도를 생각하면 이상하게 여길만한 요청이었다.
최근에 지벡 건터를 통해서 사고를 치긴 했지만, 일이 터지기 전에 먼저 자수하고 징계를 요청한 화련이었다.
류 현 본인이 월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도 얼마나 월권 범위를 넓게 잡았는지, 일단 물어보고 보는 그녀였는데 이 요청은 상당히 뜬금없을뿐더러 그녀의 평소 행동과 대치되었다.
“아무래도 마스터 직통으로 보고를 올리니까 그쪽에서 보고 라인을 무슨 휴대폰 메신저로 생각하는 것 같아서요. 보고서에 변하는 거라곤 피해 지역 수치뿐인데, 자꾸 같은 내용으로 징징거리는데...”
“어...음...”
류 현의 생각에 그녀는, 주제도 모르고 징징거리는 놈 꼴을 더 봐주기 싫어서 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 듯 했다.
‘전에는 이런 걸 월권이라고 생각해서 시도도 잘 안 했던 거 같은데. 우크라이나 테러 이후 때부터 인가? 태도가 확 변했어.’
테러 트라우마 때문에 히스테리를 부린다거나 그런 건 아닌 거 같았지만, 변화가 급격해서 상당히 당혹스러웠다. 이렇게 갑자기 치고 들어올 때는.
“뭐, 괜찮지 않아? 진짜 급한 일 터지면 웨인이 알릴 테고. 디에고 징징거리는 거 내용물은 진짜 아무것도 없던데. 갈구기 전문가가 나서서 갈구면 현지에서도 좀 조용해지겠지. 늦든 빠르든 어쨌든 그리로 가게 될 텐데 그런 놈들은 기 좀 죽여 놔야 편해.”
“누, 누가 갈구기 전문가에요!”
“지벡이 류 현보다 널 더 무서워하던 거 같던데. 저번에 통화하는 거 들어보니까.”
사실무근은 아닌지 어버버 거리던 화련은 갑자기 뭔가 떠올랐다는 듯 소리쳤다.
“아니, 남이 통화하는 걸 왜 엿들어요!”
“아니 뭐 나도 엿들으려고 작정하고 들은 건 아니거든? 니가 워낙 심각하게 목소리 깔고 뭐라고 하고 있길래. 무슨 일 있나 싶어서 걱정하는 마음에 살짝.”
“살짝은 무슨!”
투닥거리는 두 여자를 보고 픽 웃음 짓던 류 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락의 말을 내뱉었다.
“예, 원하시는 대로 하셔도 됩니다.”
“...허락해주셔서 감사해요.”
하지만 화련이 보고를 받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잔뜩 벼른 그녀가 보고를 받을 차례에 날아든 보고는, 브라질 내륙의 작은 마을 하나가 통째로 홀로 빙하기에 접어들었다는 소식을 담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