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5화 〉탐식마(貪食魔)
“핵심은 용종 괴수만 꾸역꾸역 나오고 있다는 거죠. 날개나 다리가 여러 달린 놈, 날개가 없는 대신 덩치만 무식하게 큰 놈, 용이 맞는 지나 의심되게 생긴 놈. 마지막은 마스터가 보장하셨으니 그렇다고 넘기고, 그놈을 제하더라도 용이라는 것만 빼면 공통점이라고는 요만큼도 없는 놈들이 마구 쏟아져 나오고 있죠.”
류 현은 고개를 까딱여 화련에게 긍정을 표했다.
용종(龍種)이라는 카테고리가 존재하긴 했지만, 엄밀히 따지면 기존의 생물 분류체계와는 다르게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하는 경향이 있는 게 괴수 분류였다.
골격 구조는커녕, 장기 개수마저 다른 놈들이 몇 가지 공통점만으로 용종에 같이 묶이기도 했다.
이를 테면, 피어의 유무, 브레스를 뿜을 수 있는가, 마나 하트라고 불리는 두 번째 심장이 존재하는가.
심한 경우에는 해부 표본을 구하기도 전에 스트라이커들이 느낀 내구도 같은 걸로 분류를 하기도 했다.
정확하게 따지자면 종이라는 명명 자체가 틀려먹은 것이었지만.
전생을 기억하는 류 현이야 그보단 체계적인 분류를 기억하고 있지만, 전문가 입장에서는 엉망진창이긴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 엉망진창인 분류에 속한 놈들이 뉴욕 시 상공에 뚫린 ‘구멍’을 통해서 쏟아지고 있는 게 현 상황이었다.
던전 내부의 생태가 엉망진창인 건 관심이 조금이라도 있는 이들은 모두가 아는 바이지만, 그 이상으로 심각했다. 최상위 포식자로 군림할 놈들만 백 마리 넘게 쏟아져 나왔으니까.
“심지어 얘들은 우리를 봐도 좀 흥분하긴 했어도 아예 판단력을 놓진 않았어요. 공격을 당하면 서로 감싸는 것 같은 포지션을 잡을 정도죠.”
이번에는 승하가 격하게 공감을 표했다. 낮에 있었던 토벌에서 그녀가 직접 겪은 일이었으니 당연했다.
회색빛 오러와 구엘 뒤 굴락 전 이후 얻은 진전 덕에 갖추게 된 압도적인 공격력으로 전부 찍어 눌렀지만, 신경 쓰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 호흡만 실수 했어도 꽤 큰 부상을 입었을 테니까.
“우리를 무시하고 도망갈 정도로 지능이 돌아온 것 같진 않지만, 그냥 넘길 수도 없는 문제죠. 이 비슷한 걸 이미 본 적 있으니까요.”
“아프리카 요새에서 본 리치들.”
“맞아요. 구엘 뒤 굴락이 죽으니 본성을 되찾긴 했지만, 그전까지는 굉장히 절제된 움직임을 보여줬었죠. 라가들은 아예 죽으라면 죽고, 도망가라면 죽어가면서도 도망가는 모습까지 보였었죠. 이놈들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언제까지 안 그럴 거라는 보장도 없지. 아프리카에서도 처음에 본 놈들은 무장이랑 오와 열은 맞췄지만 인간을 보면 눈깔 돌아가는 건 똑같았으니까. 당시에 구엘 뒤 굴락이 어떤 상태였는지 알 수가 없으니 아무것도 확신은 못하겠지만.”
“바로 그 부분이 문제죠. ‘구멍’은 이미 뚫렸는데 천공성은 여전히 같은 작업을 반복하고 있죠. 선례가 하나뿐이긴 하지만, 용들의 움직임을 볼 때 ‘구멍’ 너머에는 놈들의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하는 놈이 있는 게 분명해요.”
화련의 목소리는 꽤 확신에 차 있었다. 공백 부분을 채우기 위한 비약이 없진 않았지만, 제 생각과 대체로 비슷했기에 류 현도 부정하지 않고 말을 보태었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아무리 용종이라도 밖으로 나오자마자 그런 연계는 다른 요인 없이는 말이 안 되지요. 라가로드 같은 선례가 없으면 모를까, 이미 엘더 리치나 라가로드라는 선례가 있으니 이쪽이 더 가능성이 높을 겁니다.”
‘그러고 보니 데스나이트와 라가로드를 빼면 두 번씩이나 종속 관계에 있는 네임드 몹 그룹이 나타났었군.’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캐볼 최소한의 재료도 없고, 정비할 시간도 모자랄 정도로 상황이 바쁘게 돌아간 터라 넘기곤 있었지만, 엄청난 변화였다.
네임드 몹이 한 번에 두 마리 튀어나오는 것도 골치 아픈 일인데, 그 중 하나는 원래 지능이 거의 다 돌아와서 지휘까지 한다니.
상황이 이렇지만 않았다면 유적이 발견되었다는 던전을 이 잡듯이 뒤지고 다녔을 것이다.
‘지금까지 움직임을 보면...브라질에 뜬 놈이랑 이쪽 놈이랑은 그런 관계가 아닌 것 같긴 한데...’
아직 ‘구멍’에서 나오지 못한 놈 입장에서는 바로 아래에서 제 부하들을 잡아 죽이고 있는 용잡이 팀이 보통 거슬리지 않을 텐데, 브라질에서 분탕질 치고 있는 놈은 여전히 아마존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어보였다.
‘일단은 여기 집중하자. 막말로 남미 전체가 날아가도 미국이 멀쩡하게 이번 사태를 넘기면 남는 장사다.’
세상 사람들이 들었다면 모두가 손가락질을 했을 생각이었지만, 류 현은 그런 도의적인 문제는 아무래도 좋았다.
“‘페릭스’ 때를 생각하면 확신은 금물이지만, 엘더 리치와 라가 로드 때를 생각하면 ‘구멍’ 너머에 도사리고 있는 놈도 아마 용종 네임드 몹일 가능성이 높겠지요.”
“전에 비슷한 경우는 보신 적 없나요?”
“없습니다. 네임드 몹의 카리스마에 눌린 괴수들이 이리저리 몰려다니면서 분탕질 친 적은 있어도...이런 식으로 세세하게 컨트롤 할 정도로 지능이 돌아온 놈은 손에 꼽을 만 했고, 대부분 활동기간이 길어서 천천히 지능이 돌아온 케이스였죠.”
전생의 아지다하카나 ‘마녀’가 그러한 대표 케이스였다. 단순히 류 현을 몰아넣는 정도가 아니라, 주변 국가들을 철저하게 파괴시킨 놈들.
“용종은요?”
“딱 둘 있었습니다. 화룡과 아지다하카.”
본 드래곤도 있긴 했지만 언데드라는 느낌이 더 강하여 넣지 않았다. 이미 잡은 놈이기도 해서 굳이 언급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대답하는 류 현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딱 둘 뿐이었던 용종 네임드 몹은 둘 다 류 현에게 끔찍한 기억을 남겼으니까.
용종에 대한 트라우마가 아닌 강렬한 적개심만 남은 게 이상할 정도로.
“아지다하카가 괴수 군단을 이끌긴 했지만, 그건 지금 상황과 비교하면 이끈 다기보다도 몬다고 하는 게 맞을 겁니다. 그 때야 그 비슷한 짓을 하는 놈이 거의 없다시피 했었으니 더 끔찍하게 느껴졌지만요.”
“그 화룡이라는 놈은요?”
류 현은 고개를 내저었다.
“놈 주변에 붙어 다니던 용종 괴수가 몇 있긴 했습니다만, 놈이 끌어들였다는 느낌보다는 그놈들이 이끌려서 따라다닌다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실제로 놈은 따라다니는 놈들을 활용하지 않고 저와 정면 대결을 고집했었죠.”
‘그리고 처참하게 발렸지. 내가.’
놈에게 정말 죽기 직전까지 몰린 것만 다섯 번이 넘었었다. 그 중 세 번은 정말 운이 좋아서 살았고, 두 번은 과감한 판단 덕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몸을 절반 가까이를 잃고 도망간 것은 카운트 할 수도 없었다. 한 두 번이 아닌데 그 때마다 뇌손상이 심각해서 필름이 끊겨서, 아직도 그 때의 기억은 혼란했다.
‘마녀’처럼 상성이 극도로 불리해서 몰린 것도 아니고, 순수 힘으로, 일대일로 붙었는데 그렇게 밀린 건 처음이었다.
네임드 몹은 스펙만 놓고 보면 언제나 류 현보다 강했지만, 상성은 대부분 그가 우위였었다. 데스나이트 킹 헬라처럼 존재가 생명체에 대한 상성상 우위 가지는 놈마저, 상성의 핵심인 데스오러에 적응한 류 현과의 첫 일기토에서 소멸을 면치 못했다.
아무리 강력한 힘을 품고 있어도 그 기반이 마력인 이상, 일 대 일 상황만 마련되면 류 현이 가진 상성상 우위를 극복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그가 아지다하카까지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고.
하지만 화룡은 달랐다.
놈은 류 현이 가진 상성상 우위를 그냥 힘으로 눌러버렸었다. 일대일 상황에서 몇 번이나.
놈은 상성마저 씹어먹는 그 강대한 몸뚱이로 핵까지 버텨내고, 다섯 나라를 완전히 끝장내놓았다.
놈을 공격할 때 쓴 방사능 낙진으로 죽거나 이탈한 인원은 헤아릴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결국 사냥하는데 성공하긴 했지만, 놈의 강력함은 아지다하카와는 다른 의미로 류 현의 뇌리에 강렬하게 자리 잡은 상태였다.
“만약 ‘구멍’ 너머에 있는 게 놈이라면 사태가 상상이상으로 끔찍해질 겁니다. 동부만으로는 안 끝날지도 모르죠.”
놈의 힘이 전생과 동일하다면 문제없겠지만, 가장 약체였던 본 드래곤마저 그렇게 업그레이드가 돼서 나타나는데 화룡이 그대로 나타나진 않을 것 같았다. 타 네임드 몹에 대한 장악력을 가졌다고 약해져서 나타난 놈도 아직 없었고.
“그 정도야?”
“그 땐 제가 혼자였고, 그 때와 다르게 제 전력도 상승하긴 했습니다만...놈이 현생에 나타난 네임드 몹들만큼 힘이 상승했다면 장기전을 각오해야할 겁니다.”
시작하기도 전에 기를 죽이는 취미는 없었지만, 화룡의 강력함을 아는 류 현은 경고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젠 그들이 같이 끝까지 살아남기를 바랐으니까.
‘만약 정말 놈이라면 나만 붙어서 시간을 끌어야겠지.’
다행스럽게도 회색 오러를 손에 넣은 덕에 그 때처럼, 놈의 눈을 피해 벌벌 떨면서, 놈이 대륙 하나를 엉망으로 만드는 걸 지켜보면서 힘을 키우지 않아도 되었다.
시간만 끌면 준 네임드 급도 잡아 족칠 실력을 갖춘 팀원들이 괴수 사체를 수급해 줄 수 있을 테니까.
어지간하면 그냥 몸을 빼고 흩어져서 괴수 사체를 수급해보겠지만, 하필 미국이라는 게 문제였다.
이번 생에서 자신을 외면했으면 모르되, 벌써 몇 차례 도움의 손길을 건넨 명백한 아군이 괴멸하는 걸 그냥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저 너머에 있는 게 놈이 아니길 바라는 수밖에 없죠. 놈이 나온다면...미국에 큰 출혈을 각오하게 해야겠죠.”
‘나도 같이 피 흘리게 되겠지만.’
류 현은 속으로 각오를 마쳤다. 지금도 꿈으로 보게 되면 벌떡 일어나게 만드는 끔찍한 기억을 선사한 상대를 혼자서 상대하는 걸 자청하는 것이었지만, 망설임은 없었다.
“네가 그렇게 까지 말하니 나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래도 우리가 기도한다고 ‘구멍’너머에 있는 놈이 바뀌는 것도 아니니까 일단 어떤 놈이었는지나 알아두자고.”
“그거야 당연히 말씀드릴 생각이었습니다. 여기, 이 노트에 대략적인 부분은 다 적어뒀습니다.”
회귀 이후 틈틈이 정리해둔 전생의 공략 일지였다. 전생과 달리 네임드 몹들이 강해져서 나타나고, 순서를 무시하고 나타나거나, 아예 못 보았던 놈이 나타나고, 두 마리가 동시에 출현하는 등 다른 점이 너무도 많아 몇 번 써먹지 못했지만 없는 것보단 나을 터였다.
‘페릭스’ 때처럼 이산가족 꼴이 나지 않는다면 자신이 옆에 붙어서 첨언하면 활용처가 아주 없진 않을 터.
“아, 화련 씨. 오늘 출동 직전에 웨인 씨한테서 연락이 왔다고 들었는데, 무슨 일이 있다고 합니까?”
머리를 맞대고 노트를 이리저리 뜯어보는 세 여자를 바라보던 류 현이 불현 듯 떠오른 의문을 내뱉었다.
“아뇨. 진짜 별 거 없었어요. 사진은 그 때 이후로 한 장도 안 나오고, 디에고인가 디오인가 하는 약쟁이 징징거리는 소리만 잔뜩...그 인간 진짜 약을 너무 빨아서 뇌에 구멍 난 거 아니래요? 어떻게 여기 상황이랑 거기를 비교할 수가 있지?”
브라질에서 꾸준히 인명 피해가 나고 있다곤 하나, 그 규모가 뉴욕에 댈 바는 아니었다.
뉴욕은 아직 인명 피해가 거의 없는 것일 뿐이었으니까.
공식적으로는 작전 대기 상태인 용잡이 팀이 ‘구멍’에서 쏟아져 나오는 용종괴수들을 대부분 때려잡지 않았다면 뉴욕 시 정도가 아니라 인접 주들이 쑥대밭이 되었을 것이다.
엊그제 용잡이 팀이 놓친 샌 드래곤과 쐐기룡 여섯 마리가 보스턴의 빌딩 30여 채를 찌그러진 파이꼴로 만드는데 1시간도 걸리지 않았다는 건 이미 비밀도 아니었다.
그에 비해 이상한 짓을 하곤 있지만, 브라질의 네임드 몹(추정)은 얌전하다고 해도 될 정도였다.
“사실 소재만 파악되면 그 쪽을 먼저 처리할 생각도 없진 않았습니다만...이런 상황에서는 별 수가 없네요.”
놈의 소재가 단순히 파악이 안 된 정도가 아니라, 수색조차 곤란하게 만드는 특성을 가졌다는 게 문제였다.
광범위한 수색망을 펼쳐놓고 천천히 조여들어 가려면 전자기기의 도움이 필수인데, 놈이 근처에 있으면 아예 그 그물망에 구멍이 나버리니까.
놈이 유인이 가능한 수준의 괴수도 아니니, 아마존에서 활동을 계속하는 한 놈이 쓸고 지나간 흔적 더듬기만 반복될 것 같았다.
보고받은 바로는 지난 3주간 실제로 그 짓을 반복이기도 했고 말이다.
“아마존이 무슨 동네 갈대숲도 아니고, 여기서 한창 용 때려잡는 팀보고 찾지도 못한 놈 잡아달라고 와달라니. 진짜 뇌에 구멍이 난 게 분명해요. 우리가 무슨 지들 부하인 줄 아나?”
급격하게 열이 오르는 지 과격한 발언을 하는 화련을 보며 류 현은 쓴웃음을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