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4화 〉탐식마(貪食魔)
“이상입니다.”
호지슨 버넷은 들고 있던 서류 뭉치와 태블릿 PC를 수습하고 슬쩍 물러섰다. 홀로그램 출력기가 꺼지자, 그의 앞에 앉아있던 제럴드 던컨이 턱을 괴고 책상을 톡톡 두드리기 시작했다.
“제프, 아무리 봐도 그 때 매달려 봤어야 했던 거 같아.”
“...각하, 그 얘기 끝난 거 아니었습니까?”
“아니, 이걸 보게 이걸! 뒤에 0만 일곱 개가 넘게 붙어. 이걸 결제하고 나면 던전부 장관이 또 와서 징징거릴게 뻔해.”
총 액수가 아니라 마리당 가격이 최소 일곱 개가 붙는다는 소리였다. 제프 리어던은 동요를 감추기 위해 얼굴에 힘을 주었다.
부통령 자리에 있으면서 천만 달러 단위가 우습게 보이는 서류에 결제를 할 일이 많았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 있는 단위도 아니었다.
한 마리도 아니고 스무 마리가 넘었으니까. 그 말인 즉, 일개 팀 하나가 한 번 사냥으로 억 단위를 벌어들였다는 소리였다. 어쩌면 0하나가 더 붙을 지도 몰랐다.
가장 놀라운 것은 열 명도 채 되질 않는 팀이 단독으로 이 많은 숫자를 하루 만에 다 때려잡았다는 것이지만.
‘드래곤의 사체가 비싸다곤 들었지만...이건 정말 차원이 다른 수준이군. 시장에 풀린 적 없는 신종의 사체라 거품이 붙은 것도 있겠지만.’
그의 상사 때문에 플레이어에 대한 공부를 이래저래 많이 한 제프였지만, 현물 시세까지 꿰고 있진 못했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렇다고 뺏거나 강매를 시도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어차피 그 정도 성과가 아니면 그 친구는 각하를 괴롭힐 겁니다.”
“당연하지! 말이 되는 소리를 하게. 자네 같으면 목숨 걸고 취한 사냥감을 내달라고 하면 좋다고 받아들이겠나? 그것도 와달라고 애걸복걸한 상대가 갑자기 안면을 싹 바꾸고 그러는데?”
“절대 아니죠. 집주인이 일이 끝나고 자신들을 팽하지 않을까 의심을 하면 하지.”
“바로 그걸세. 젠장, 그 때 귀화시켰다면 이런 고민이 아니라 킴을 어떻게 놀려줄지 고민하고 있었겠지.”
던전부 장관인 대니얼 킴이 평소에 그를 얼마나 괴롭히는지 모르지 않는 제프는 이미 지나간 일로 징징거린다고 던컨을 타박하진 않았다.
제프가 보기에 그는 시간을 되돌려서 그들을 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게 아니라, 후회를 정리하는 데 조금 애를 먹고 있는 것뿐이었다.
그 자신도 혼자서 이 일을 생각할 때면 그런 생각이 들곤 하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각하.”
“알고 있어. 알고 있네. 젠장, 내가 별 소리를 다하는군. 드래곤들을 저렇게 장난하는 것처럼 잡아 죽이는 걸 보니 나도 모르게 긴장을 놓아버린 모양이야. 미안하네.”
“미안해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 서류를 저에게 떠맡기지 않으신 다면요.”
“끙...알았네. 알았어. 어떻게 된 게 대통령의 짐을 덜어주려는 인간이 하나도 없어. 하나도.”
“어차피 저희끼리 처리해도 각하께서 몰래 검토해보실 것 아닙니까.”
전적이 있는 던컨은 묵비권으로 대응했다.
“엄청나긴 하군요. 드래곤의 사체가 비싸다곤 듣긴 했습니다만...이거 그 친구들이 팔아주겠다고 해도 덥썩 물 수가 없는 규모군요. 안 그래도 뉴욕 시 때문에 긴급편성을 해야 할 지경인데...이 정도면 국회에서 구매가 아니라 다른 쪽으로 알아보라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뉴욕 시는 주 예산으로 어떻게 하는 게 불가능 할 정도로 험악한 꼴로 변해가는 중이었다. 지금 상황보다 호전될 가능성은 제로였다.
피난길에 오른 이들이 입은 피해는 계산에 넣지도 못했으니, 단순히 무너진 건물들을 복구하는 것뿐만 아니라 피난으로 인한 여파수습에 들어갈 돈이 어느 정도일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절대 안 될 일이지. 계속 그러긴 어렵겠지만 그 친구들이 이곳에 있는 동안은 국회에 이 소식이 흘러들어가선 안 되네. 공화당이 뭐라고 할지 너무 뻔해.”
“소식이 빠른 친구들은 벌써 알았을 겁니다. 던전 안에서 은밀하게 끝난 사냥도 아니고, 그 난리를 쳤는데 모르면 그거대로 문제겠죠. 틀어막는 것보다는 적당히 협상을 유도하는 게 나을 겁니다. 이 일은 제가 맡도록 하지요. 맥그리지 그 친구가 올린 법안이 통과되도록 힘써주겠다고 하면 알아서 입단속을 할 겁니다.”
“좋아, 그 일은 자네가 맡게. 음...버넷 중령?”
제프와 던컨이 나누는 대화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서있던 버넷이 다시 앞으로 나섰다.
“예, 각하.”
“부대원들 상태는 어떤가? 이런 바이탈 사인들 말고, 그들이 느낌말일세.”
“처음에는 활동 자체를 힘들어 했습니다만, 지금은 과반수가 적응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지구력이 많이 떨어지긴 했지만 점차 회복하는 추세입니다.”
“나머지 반가량은 적응을 못했다는 소리군.”
호지슨 버넷은 송구하다는 듯 말 대신 허리를 숙였다. 던컨은 손을 내저어 그를 다시 일으켰다.
“자네를 추궁하려고 물은 게 아닐세. 추궁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도 아니지 않은가. 용잡이 팀의 친구 하나도 힘들어 한다고 들었네. 그 정도 되는 이도 아직 고생 중인데, 자네들을 타박할 이유가 없지. 인원 교대가 필요할까 싶어서 물어본 걸세.”
“아직 힘들어 하는 인원들도 분명 있습니다만, 모두 임무 수행에 대한 의지가 강합니다. 각하. 그들이 발목 잡을 일은 없을 겁니다.”
던컨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기야 전투에 참가한 적은 없으니...그런데 용잡이 팀에서 힘들어 한다던 그...희...”
“오희란을 말씀하시는군요.”
“그래, 맞네. 그 친구 상태는 좀 어때 보이던가? 전에 보고 받은 바로는 능력이 굉장히 특이하던데, 활동이 가능해 보이던가?”
가뜩이나 인원수가 적은 용잡이 팀이었다.
외부에서 보기엔 소수 정예 정도가 아니라, 팀원 하나에 문제가 생기면 제대로 돌아갈 수나 있을까 싶은 정도였다.
단 한 명이지만 이탈하게 될 시, 하늘에 구멍이 뚫린 이 이상현상에 대응력이 떨어질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었다.
“평소에는 꽤 힘들어하는 게 눈에 뜨입니다만, 집중 상태에 들어가면 평소와 다를 게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지구력이 좀 떨어지긴 했지만, 그녀의 포지션을 고려하면 큰 문제는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용잡이 팀 내부에서도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눈치는 아니었고요.”
“그거 참 다행스러운 일이군. 그럼 그 친구들이 지금 상황에 대해선 어떻게 받아들이는 것 같던가? 대기 시간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주변이 조용한 것도 아니니 꽤 곤란할 것 같은데 , 주둔지를 조금 뒤로 빼면 그들이 받아들이겠는가?”
호지슨 버넷은 잠깐 말을 골랐다.
검성은 용을 상대로 마음껏 검술을 시험해볼 수 있어서 입이 귀에 걸렸고, 각하께서 상태를 물어보신 여자는 상태가 안 좋은데도 아주 의욕적으로 백혜라를 대동하고 ‘구멍’을 관찰하곤 합니다.
대장인 류 현은 백화련이라는 여자에게 어제부터 교관 앞의 신병처럼 시달리고 있습니다. 지치기는커녕, 기운이 남아도는 것 같으니 주둔지를 물리기보다는, 그곳에 머물게 하면서 ‘구멍’에서 쏟아져 나오는 드래곤들을 대처하게 만드는 것이 최선으로 사료됩니다.
라고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허위 보고를 할 생각은 아니었다. 꼭 필요한 부분은 보고서에 기입하였고, 검성이나, 화련과 류 현 부분은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뻔했으니까. 왜 저러는 지 이유라도 파악한 뒤에 보고에 포함시키는 것이 맞았다.
그래서 호지슨 버넷은 최대한 무난한 말을 입에 담았다.
“현 시점에서는 주둔지를 옮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구멍’에서 흘러나오는 드래곤들을 상대하는 것에 큰 불만도 없어 보였으니, 당분간 사태를 관망하면서 그들의 요청이 있기 전까지는 처리를 맡기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됩니다.”
너무 급하지도 않게, 적당한 속도로 말을 모두 내뱉은 호지슨은 조금 헐떡이며 군 최고 통수권자의 살폈다.
다행스럽게도 제럴드 던컨은 꽤 만족한 얼굴이었다. 호지슨은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었다.
죄를 지은 것도, 던컨이 용잡이 팀에 해코지를 할 것도 아닌데도 이 자리에 올 때마다 수명이 깎여나가는 느낌이었다.
‘오늘은 돌아가서 한 잔하고 잠부터 자야겠군.’
이런 식으로라도 긴장을 풀어주지 않으면 정말 수명이 깎일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
“결국 네 번의 웨이브 동안 용종 말고는 다른 괴수는 나온 적이 없네요.”
“난 그놈 나오는 거 보고 드디어 다른 종류도 나오는 구나! 싶었는데. 그 괴상하게 생긴 게 용종이라니, 류 현 니가 말한 게 아니었으면 못 믿었을 거야.”
“피어라도 있으면 모르겠는데 놈은 그것도 없으니까요.”
“괴수 분류법에 대한 연구는 나중에 하죠. 나중에. 일단, 네 번의 웨이브 동안 튀어나온 놈들은 128마리에요. 그 중 우리가 잡은 게 117마리고요.”
“와, 이렇게 들으니까 많다 많아. 류 현 너 용고기는 이번에 원 없이 먹겠다.”
좋아서 그걸 먹는 게 아닌 류 현은 쓴웃음을 머금을 뿐이었다. 낄낄거리던 승하마저 화련이 눈을 흘기자 입을 다물었다.
“후, 다시 돌아와서. ‘구멍’에서 4번의 괴수 웨이브가 내려왔지만 용종 외에는 다른 괴수는 코빼기도 안 보였죠. 이쯤 되면 대충 감이 잡히죠. 저기 뚫린 ‘구멍’이 이 다양한 놈들이 전부 어울려 살 수 있을 정도로 풍요로운 서식지거나,”
“아니면 구엘 뒤 굴락 같은 카리스마적 존재가 있다는 의미겠지요.”
“그것도 아니면 그냥 단순하게 그런 성질을 가진 던전일 수도 있지. X던전처럼. 애초에 저건 X던전이랑 관련된 무언가잖아?”
“그건 그렇죠. 그런데 아무래도...”
화련의 시선이 조용히 머그컵을 만지작거리던 희란과 류 현에게 한 번씩 머물렀다.
“마스터랑 희란이가 저 근처에 가서 느끼는 것들이 좀 걸려요. 통상 던전은 이 두 사람이 매번 갈 때마다 그런 반응을 보일 정도로 꾸준히, 장시간 마력을 내뿜어내진 못하잖아요. 정확히는 한 번 열릴 때 괴수랑 같이 안쪽에 있던 마력이 쏟아져 나오고 나면 그 주변이 게이트 내의 마력 환경이랑 동화 되버리는 거지만..”
“하긴 벌써 네 번째인데 근처에 가면 기분 나쁜 건 똑같더라. 그리고?”
“뭐라고 설명은 못하겠는데 저 ‘구멍’ 넓어질 준비를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요.”
“넓어질 준비?”
“뭔지는 모르겠지만 준비하는 그런 느낌? 주변 마력흐름은 엉망진창인데, 공간자체는 꽤 고요한 상태에요. 그게...”
“폭풍전야 같다?”
“네, 이건 진짜 감인데...‘구멍’ 주변의 공간이 안정된 게 단순히 준비하는 게 아니라 주변이 짓눌릴 정도로 커다란 뭔가가 저 너머에서 도사리는 그런 느낌이에요.”
“네 촉이 맞다면 네임드 몹이겠네. 아니, 네 촉이 틀렸어도 언젠가 놈이 저 ‘구멍’이든, 저 성에서든 튀어나오긴 하겠지.”
그들은 네임드 몹의 존재를 확신하는 정도가 아니라, 바라고 있었다.
아프리카 때처럼, 목을 쳐서 사태를 진정시킬만한 목표가 없으면 어찌해야 할지 감이 안 오는 상황이었으니까.
목을 날리고 나면 ‘구멍’이 닫히게 만들, 뉴욕 상공에 떡하니 떠있는 주제에 물리력이 먹히질 않는 저 성을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리든, 부술 수 있는 상태로 만들 수 있게 하든 간에 처리하고 나면 상황을 어떻게든 진전시켜줄 만능 버튼 같은 목표가, 그 역할에 걸 맞는 네임드 몹이 필요했다.
여태까지는 던전에서 그런 것처럼, 보스를 잡으면 상황이 해결되는 법칙이 잘 들어 맞아왔으니까.
그리고 이 자리는 아직 확정되지도 않은 네임드 몹의 정체를 추론하기 위해 모인 자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