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3화 〉탐식마(貪食魔)
[캬아아아!] [오오오옹!] 투타타타! 푸확! 카앙! 퍼엉!
전장에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지만, 화려하다 라는 표현이 걸 맞는 광경이었다.
중력을 포함한 물리법칙을 희롱하는 것처럼 하늘을 유영하는 용들. 그 용들이 뿜어내는 마력의 파도는 그 안에 내제된 파괴력은 차치하고, 몽환적인 색체가 허공을 물들였다.
가지각색의 브레스가 수를 놓는 것처럼 허공을 가로질렀다.
쉬익! 퍼어엉! 인간 측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무인기가지지 않겠다는 듯 어지러운 비행을 반복하며, 가진 불꽃을 모두 쏟아내었다.
하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말 그대로 용들의 눈을 잠깐 동안만 현혹하는데 그쳤다.
그녀들에게는 그 정도도 충분한 여유였다.
쿠르르르- 콰릉! 짜자작! 무분별하게 흩뿌려진 브레스 때문에 과포화 된 마력으로 들끓던 하늘을 푸른 벽력이 가로질렀다. 적대적인 마력이 가득하다는 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오오오옹!][캬르르륵!][크아아아!] 마치 한계가 없는 것처럼 소유자의 성장에 맞춰 최대출력을 달리하는 청뢰는, 괴수 중에서도 항마력이 수위권을 다투는 용들을 여지없이 꿰뚫었다.
즉사는 이끌어내지 못했지만, 놈들의 머릿속을 번쩍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꾸웅! 그 뒤를 개미지옥의 인력(引力)이 따랐다. 한순간이지만 의식을 잃었던 용들에게는 치명적인 방식의 공격이었다.
대부분의 용들이 나는 법을 잊은 듯, 지면을 향해 추락해갔다.
네 마리의 특출나게 강대한 용들만이 제 몸을 추스르는데 성공했다. 놈들은 바로 고도를 회복하지 않고, 서로를 감싸는 것처럼 정지비행을 감행했다.
그 상태로 충격을 받은 몸을 추스르고자 했다.
승하에겐 그 마저도 비집고 들어가기 충분한 틈으로 보였지만.
시작은 아주 조용하고 조심스러웠다. 류 현이 본 샌 드래곤 최대 전장을 1.5배 이상 넘어서는 놈의 머리통에 사뿐히 내려선 그녀는 샌 드래곤이 반응하기도 전에,
쉬링! 푸확! 놈의 수급을 거두고 시체가 된 놈이 떨어지기 전에 놈을 발판 삼아,
끼이이이- 키아악! 전후좌우로 검은 검기를 내뿜어내었다.
[끄르르륵!][캬아아아!][크아아!] 과연 용종괴수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한 번에 절명한 놈은 한 놈뿐이었다.
류 현이 쐐기룡이라고 이름 붙인 개중에서 가장 작은 놈과 마찬가지로 그가 이름 붙인 쌍교룡(雙翹龍), 미국에서 스파이더 드래곤이라고 부르지만, 류 현은 팔각룡(八脚龍)이라고 부르는 놈은 날개 죽지나, 피막에 손상을 입었을 뿐.
치명상을 입은 놈은 없었다.
단숨에 숨통을 끊어놓지 못한 탓에 약이 잔뜩 오른 놈들이 승하를 압박해 들어갔다.
팔각룡의 여덟 개에 이르는 발들이, 쌍교룡의 명검 이상 가는 강도와 날카로움을 가진 한 쌍의 꼬리가 그녀를 덮쳐 들어왔다.
그 뒤에서 몸을 잔뜩 움츠린 채 도사리고 있는 쐐기룡의 살벌한 눈동자는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이 자리에 있는 것이 그녀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승하는 웃었다. 너무나도 선명하게 보이는 검의 길이 그녀를 웃게 만들었다. 마치 이리로 따라오라는 것처럼 휘두를 궤적이 선명하게 보였다.
이것을 무엇이라 이해해야할까.
찰나 간의 고민 끝에 그녀는 이해하길 포기했다. 그저 그 길을 따랐다. 검이 춤을 추었다.
처음은 팔각룡의 두 다리였다.
마법사들을 귀신같이 골라 낚아채 날아오른 뒤, 골통을 부숴먹는 데 주로 쓰이던 두 다리는 뼈가 갈리는 소리도 없이 몸통에서 분리되었다.
그러고도 예기를 다 막지 못해, 사람으로 치면 가슴께에 해당하는 부분이 반쯤 열리며 피가 울컥 치솟았다.
[캬아아아!] 놈이 고통을 감당하지 못하고 잠깐 억지로 멈췄던 추락을 재개했다.
그 다음은 쌍교룡의 꼬리였다. 슬쩍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건물을 썩썩 썰어내던 놈의 두 줄기 꼬리는, 그 예리한 만큼 깔끔하게 잘려나갔다. 그녀가 슬쩍 궤도 안으로 밀어 넣은 검기를 이기지 못하고 제 풀에 잘려나갔다.
승하는 놈이 당황하는 동안 꼬리가 갈라지는 부분을 딛고 놈의 머리통을 날려버렸다.
쒸익! 동족의 죽음을 목도한 쐐기룡이 잔뜩 움츠렸던 제 몸뚱이를 해방시켰다.
구조상 있을 수 없는 정도까지 압축되었던 몸뚱이는 폭발하는 것처럼, 혈류를 온몸으로 쫙 내쏜 심장박동과 함께 내쏘아졌다.
그 순간, 승하는 놈의 움직임을 놓쳤다. 보고 반응하고 말고 할 수준이 아니었다.
놈의 몸뚱이가 음속의 벽을 아득하게 넘어섰다.
류 현만이 기억하는 전생에서, 인간이 띄운 비행체에는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던 쐐기룡의 찌르기는 그런 것이었다.
검의 길을 똑바로 쫓지 않았다면, 그녀도 큰 부상을 피할 수 없었을 만큼 위력적이었다.
달리 말하면, 휘두를 궤적을 그림으로 그려낼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하게 ‘길’을 보고 있는 승하에겐 큰 문제가 되지 못했다.
퍼엉! 놈의 움직임을 미처 쫓지 못한 소리가 뒤늦게 따라붙었다.
하지만 이미 결판은 난 이후였다. 예측이라도 한 것처럼 승하가 슥 밀어 넣은 칼날 앞으로 제 몸을 던진 쐐기룡은 더 이상 살아있다고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그냥 대가리가 반쪽 난 것도 아니고, 회색 오러 버프를 받은 승하가 힘껏 끌어올린 마력검에 당했으니, 혹여 라도 재생할 여지는 없었다.
대가리부터 허리께까지 두 쪽이 난 쐐기룡은 꿈틀거려보지도 못하고 추락했다. 그 뒤를 딛고 뛸 곳이 사라진 승하가 따라붙었다.
그녀는 벌써 가슴께에 벌어졌던 상처가 아물고 있는 팔각용을 노리고 있었다. 놈은 추락을 멈추지 않고 달아나는 중이었다.
끼이이이- 키아아악! 그녀의 검 끝이 다시금 검은 선을 그려내었다. 이번에 그려낼 것은 상처 입고 도망가는 용의 죽음!
이전의 경험으로 이 공격을 위협으로 느낀 팔각용이 남은 여섯 개의 다리로 머리통을 보호하려고 들었지만,
퍼억!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시체가 된 팔각용의 몸뚱이의 추락에 가속이 붙었다.
추락하는 것치곤 느긋하게 다가오는 지면을 바라보던 그녀의 몸을,
텅! 화련의 마력이 감싸 안으며 추락을 멈추었다. 승하를 향해서 손을 내뻗은 그녀의 표정은 어딘가 못마땅하다는 얼굴이었다.
“땡큐.”
“진짜 이상하다니까. 그냥 보조 받으면 더 편하게 잡을 거 뭐하러 그냥 맨몸으로 나서요? 마냥 만만한 놈들도 아닌데.”
“이런 저런 상황을 대비할 겸 미리 경험해 보는 거지. 매번 네가 이렇게 해줄 수는 없는 거잖아?”
“말이나 못 하면.”
“그런데, 안 내려가 봐도 돼?”
“저길요? 괜히 갔다가 거치적거리지나 않으면 다행이죠.”
승하는 보이지 않는 손에 허리만 들린 것처럼 둥둥 뜬 채로 아래를 슬쩍 내려다보았다.
이 높이에서도 유혈이 낭자하고 있는 것이 보일 정도로 험악한 전투가 거듭되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청뢰와 개미지옥의 연계로 떨어뜨린 용종 괴수들은 승하에게 명이 끊어진 놈들보다 더 끔찍한 모습으로 죽음을 맞고 있었다.
“음...류 현 쟤 스트레스 많이 쌓였었나 보다.”
“뭐에요. 왜 그런 눈으로 날 봐요?”
“아니 뭐...그 원인 제공자로서 어떤 기분인가 싶어서.”
“...확 떨어뜨릴까보다.”
여기서 떨어져봐야 승하의 내구성이면 약간 접질린 것 같은 감각이 전부겠지만, 화련은 제 말을 실행으로 옮기진 않았다.
류 현이 마지막 괴수의 머리통을 터뜨리는 것에 맞춰,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선 두 여자는 피 칠갑을 한 류 현의 모습을 보고 조금 질렸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류 현의 실력을 생각하면 굳이 이런 꼴이 되지 않아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이었기 때문이었다.
류 현이 그녀들의 표정을 보고 머쓱해 하며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두 여자는 참지 않고 한 소리씩 했다.
“어우, 너 안 그러다가 왜 그래? 갑자기 질풍노도의 시기라도 온 거야?”
“오늘 욕실에서 못 나오시겠네요.”
“처음에는 이럴 생각은 없었는데 말입니다...”
류 현은 시선을 위쪽을 향했다. 그의 머리 위에는 천공성이 있었다.
그의 시선은 그보다 좀 더 위의, 천공성이 뚫은 시커먼 구멍에 닿았다. 화련의 추측이 정확하게 들어맞았다는, 별로 달갑지 않은 증거.
“저것 때문인지 자꾸 안쪽에서 뭔가가 꿈틀거리는 느낌이라...”
류 현의 말에 두 여자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이틀 전, 땅이 아니라 공간이 통째로 흔들리는 것 같은 충격과 함께 뚫린 저 구멍은, 불규칙하게 용종 괴수를 토해내는 것 외에도 주변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수준이 조금 떨어지는, 도시 내로 피난을 마무리하기 위해서 남아있던 플레이어들이 갑자기 기절하거나 구토, 오한, 간질 발작 같은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다 저 구멍이 꾸역꾸역 토해내고 있는 이질적인 마나 때문이었다.
그들과 수준이 다른 희란마저 이 근처로 오면 여지없이 토하고, ‘연결’의 상태가 불안정해질 정도이니 말 다한 셈.
그래서 백혜라를 옆에 붙이고 둘을 숙소에 두고 왔는데, 류 현마저 영향을 받고 있다니?
이건 그냥 대충 넘길 문제가 아니었다. 이전에도 방법이 없어서 피해가는 방법을 택했을 뿐이지 대충 넘긴 건 아니었지만, 뉴욕에서 잠깐 멀어질 것을 고려해볼 정도로 심각한 문제였다.
화련이 바짝 붙으며 물었다. 외견상으로 변화가 없다는 건 그녀 스스로도 알았지만, 그녀는 어떤 변화라도 찾아내기 위해서 얼굴을 들이밀고 그의 몸 이곳 저곳을 살폈다.
“어떤데요? 막 울렁거리고 그래요? 짓눌리는 느낌이고? 아니면 떨어질 거 같은 느낌?”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만...”
류 현은 슬쩍 두 여자의 눈치를 살폈다. 그 모습을 본 화련과 승하는 정말 무슨 일이 있나 싶어, 몸으로 그를 포위하듯이 둘러쌌다.
“숨기지 말고, 이거저거 빼지 말고 딱 있는 그대로 말해. 너 갑자기 난리치면 우리 둘로는 감당 못해.”
승하의 으름장에도 류 현은 좀처럼 입을 열지 못하고 망설였다. 두 여자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마스터. 우리 전에 약속했잖아요?”
“아니, 숨기려는 게 아니고 이걸 뭐라고 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혀서...”
정확히는 어떻게 말을 잘 해야 그녀들이 기겁하지 않을 것인지 감이 안 잡히는 것이었지만.
두 여자의 눈총에 류 현은 결국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달콤한 냄새가 납니다.”
“응?...달콤한 냄새?”
“예. 청뢰를 얻었을 때처럼, 그런 냄사가 납니다. 정확하게는 냄새라기보다도 식욕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 같은데...아무튼 그래서 그랬습니다.”
“어...그러니까. 싸우는 도중에 도무지 못 참을 것 같은 냄새가 나서 그러셨다고요?”
두 여자가 아연한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피가 뿌려지지 않은 곳이 없어서 그냥 맨 아스팔트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머리통과 복부가 다 터져서 죽은 놈은 어찌나 많은지, 수습하는데 한 세월은 걸릴 듯 싶었다.
둘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다시 류 현을 바라봤다. 그는 시선을 감당할 수 없어 고개를 떨구었다. 고해성사라도 하는 것처럼 잔뜩 주눅 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죄송합니다.”
그 말에 놀라서 풀어졌던 두 여자의 눈초리가 다시 사나워졌다.
“난 또 무슨 큰일있는 줄 알았더니 뭘 그런 걸로 심각한 분위기 잡고, 혼자서 죄송하다고 하고 그래? 왜, 우리가 막 혐오스럽게 보면서 도망이라도 칠까봐?”
“안 들어봐도 뻔하죠. 마스터 은근히 혼자서 땅 파는 거 잘하니까.”
“진짜 못 살아. 우리가 쟤한테 그렇게 눈치 줬었나?”
“눈치 볼까봐 괴수 고기 먹을 때는 쳐다도 안 보기로 한 건 완전 헛짓이었다는 거죠.”
“쟤 눈치 보여서 놀란 표정도 이젠 못 짓겠다.”
두 여자가 주거니 받거니 하다 고개를 내젓는 것을 보고 류 현이 조심스럽게 끼었다.
“놀라신 거...아니었습니까?”
“놀라기야 했죠. 식욕 느껴져서 이렇게 해놨다는 데 누가 안 놀라요? 마스터 능력을 모르면 또 모를까. 뻔히 아는데 왜 중간에 뜯어먹는 게 아니라, 이래놨나 싶었죠. 희란이는 근처만 와도 토하는데 저기서 새어나온 마력에 식욕 느낀다는 게 좀 황당하기도 하고. 그런데 왜 먹는 게 아니라 이래 놓은 거에요? 정말로 우리가 뭐 혐오감 느끼고 도망이라도 갈까봐?”
“에이, 그 정도까진 아니겠지. 우리가 쟤 괴수 뜯어먹는 거 한 두 번 본 것도 아닌데. 설마.”
“설마가 사람 잡죠.”
그 설마가 맞았다. 류 현은 등허리를 타고 내려가는 식은땀을 화련이 눈치 챌까 바싹 긴장했다.
다행스럽게도 뒤늦게 달려온 있는 협회팀이 그를 구해주었다. 그들 앞에서 능력에 관계된 이야기를 나눌 수 없으니, 그녀들도 입을 다물었다.
협회팀은 류 현이 펼쳐놓은 참상에 한 번, 그 참상의 재료가 된 괴수들의 목록을 확인하고 또 한 번 놀라하더니 수습반에 연락을 했다.
그리고 자신들이 이곳에 올 때만 해도 하지 않으리라고, 실력을 증명해서 벗어나겠다고 결심했던, 뒷수습을 시작했다.
미 정부에서 붙여준 수습반이 곧 오겠지만, 이거라도 하지 않으면 눈치가 보여서 견딜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