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0화 〉탐식마(貪食魔)
타타타타! 승하는 헬기 문을 열어젖히고 몸을 반쯤 밖으로 기울인 채 주변을 살피는 중이었다.
까딱 잘못하면 천 미터도 넘는 까마득한 상공 아래로 추락할 수도 있지만 제지하는 이는 없었다. 그녀가 검성이라는 게 첫 번째 이유고, 그 검성이 날카롭게 벼린 칼 같은 기세를 유지한 채 아래를 살피도 있다는 게 두 번째 이유였다.
눈을 번뜩이며 허공을 이리저리 살피던 승하의 고개가 딱 멈추더니, 살벌한 미소가 걸렸다.
“찾았다.”
뭘 찾았냐고 묻기도 전에 승하는 헬기를 박차고 뛰쳐나갔다. 그녀의 행동에 모두가 벙쪄 있는 동안, 그녀의 옆에 딱 붙어있던 백혜라도 밖으로 몸을 던졌다.
다른 이들이 그녀들을 쫓아 헬기 문에 매달렸을 때는, 이미 두 사람은 점으로 변한 뒤였다. 회색빛 불꽃에 휩싸인 까만 점 두 개.
질끈 동여매어 놓았는데도 머리칼이 미친 듯이 고글을 때렸다. 승하는 대충 쓸어 올린 뒤에 자신이 보았던 것을 찾기 시작했다.
[오오옹!] 놈은 생각보다 빠르게 승하의 존재를 눈치 채었다. 하얀 비늘로 뒤덮인 새하얀 동체, 인간이 만들어낸 어떤 비행체도 흉내 내지 못할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날고 있는 존재는 샌 드래곤이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놈의 머리통이 두 개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놈은 그 점을 장점으로 잘 승화시킨 상태였다. 놈은 두 배는 넓은 시야로 승하 하나만 쫓지 않고, 바로 뒤에 바짝 따라붙은 백혜라의 존재까지 잡아내었다. 두 쌍의 눈에 광기와 살의로 번들거렸다.
후와아악! 놈은 주저하지 않고 자신의 최대 무기 중 하나를 꺼내들었다. 브레스!
피어와 함께 용종괴수를 용종답게 만들어주는 마력의 파도가 그녀들을 덮쳐갔다. 머리통 마다 품고 있는 성질이 다른지, 내뿜어낸 브레스의 색이 한쪽이 하얗다면, 한쪽은 회색빛이었다.
승하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지만.
끼이이이- 키아아앙! [캬아아악!][끄르륵...]
그녀가 검끝으로 그려낸 검은 선은 브레스고 뭐고 상관 않겠다는 듯이 앞에 있는 것을 뚫고 지나갔다. 용의 아가리가 내쏘아낸 마력의 창은 아무런 방해가 되지 못했다.
오른쪽 머리통의 미간을 뚫고 나온 검은 검기는, 휙 한 번 휘돌아 왼쪽 머리통의 후두부를 터뜨려버렸다. 그러고도 숨이 끊어지지 않자, 두 목줄기까지 끊어버렸다.
기관총 세례와 미사일 공격에도 당당하던 용의 몸뚱이가 순식간에 커다란 고깃덩어리로 전락하며, 추락을 시작했다.
뒤늦게 그녀들을 덮쳐든 브레스세례는,
촤아악! 쩌저적! 백혜라가 손을 휘둘러 내세운 얼음방패를 뚫지 못했다. 임무를 다한 두 여자는 중력의 손아귀를 피하지 않고, 시체가 된 샌 드래곤을 방패삼아 같이 추락해갔다.
추락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콰아앙! 폭탄이 터진 것 같은 소리와 함께 먼지 구름이 자욱하게 일었다. 주변에 서있던 차들이 한 번 들썩하더니 경보기가 미친 듯이 울었다.
“끄으읏...이걸로 오늘 일은 끝이지?”
“더 있어도 말하는 게 양심 없는 거죠. 거의 무료 봉사나 다름없는데.”
“에이, 무료 봉사까진 아니지. 저걸 받을 거고, 토벌 수고비는 나중에 알아서 챙겨줄 걸? 대통령이 그렇게 살랑거리는데 떼먹겠어?”
“이런 거 잡는 게 우리 일은 아니잖아요. 더 큰 걸 상대하러 온 거지.”
“뭐 어때, 그냥 시간 죽이고 있기도 그랬는데 운동 삼아서 잠깐 도와주는 것 정도야. 잡아줬는데도 어디처럼 돌이 날아오는 것도 아니고.”
“그건 그렇긴 하지만...”
“아- 배고프다. 빨리 가서 일단 밥부터 먹자. 갈구는 건 련이한테 시키면 되잖아?”
“언니 정말...”
천 미터도 넘는 높이에서 자유 낙하한 것치고는 지나치게 멀쩡하게 걸어 나가는 두 여자를 빤히 지켜보는 이들이 있었다.
이곳 필라델피아에 떠서 여객기 운항을 올 스톱시킨 샌 드래곤을 잡기 위해서 같이 달려온 협회팀이었다.
정확히는 웨인이 용잡이 팀을 도우라고(수발들라고) 보낸 이들이었다.
개 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남자가 툭 내뱉었다.
“왜 대놓고 수발들라고 했는지 이젠 좀 알 거 같다. 전력이 아닌 게 눈에 보일 정도인데 수준이 다르네 달라.”
“그러게, 처음에는 좀 화났었는데 화낼 깜냥도 안 되는 거였어.”
“아니 저게 말이 돼? 저거 못해도 2톤은 나가보이는데?”
“파리에 뜬 지룡이라는 것보다 커 보이는데. 애초에 머리 두 개 달린 용종 괴수가 발견된 적이 있긴 한가?”
“없지. 없어. 머리 두 개 달린 놈들은 종류에 상관없이 보통 것들 보다 두 세배는 강한데 용종 괴수가 그러면 전멸이지.”
“그 영상 보고 짐작은 했지만...저렇게 대충대충 하는데도 이 정도라니...”
“그래서 웨인이 우리를 이리로 보낸 걸지도 모르지.”
“뭔소리야?”
“네임드 몹을 상대하고 나서 기량이 확 늘었잖아. 단순히 생사를 넘나드는 싸움으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기에는 너무 급격하게. 웨인 본인도 반쯤 인정했으니 말 다한 셈이지.”
“그리고 거너 건터.”
“맞아. 그놈이 아티펙트 룸 요전에 빌렸었는데, 내부 영상보니까 그놈도 수준이 달라졌더라고.”
“옆에서 경험치 얻어먹으라고 이리로 보냈다고?”
“그게 전부는 아니겠지만, 그것도 이유의 한 부분이 되지 않을까 싶은 거지. 솔직히 방금 전 검성이 한 것만 봐도 우리가 뭘 끼어들 여지가 있겠어? 저런 괴물들도 생사를 넘나들어야 하는 상대인데. 처음부터 수발이라고 한 것 자체가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둔 거겠지. 웨인 걔 성격을 우리가 몰라?”
“그건 그렇긴 한데...”
다들 수긍은 하지만 떨떠름해 하는 눈치였다. 가장 나이 많은 사내가 이들의 등의 두들기며 재촉했다.
“자자, 저기 수습팀 오네. 방해하지 말고 돌아가서 얘기마저 나누자고.”
남자가 가리킨 방향에는 군복과 하얀 방균복 같아 보이는 차림을 한 이들 한 무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오늘만 해도 세 번이나 출동한, 미국이 붙여준 수습팀이었다.
“하...부럽다. 저거 하나면 차가 아니라 빌딩이 바뀔 텐데.”
“헛소리 하지 말고 움직여 임마. 우리가 잡았으면 저렇게 깔끔하게 못 잡았다.”
“그러니까 하는 소리지. 머리통이랑 목만 딱 죽게 부숴놨으니 가죽만 해도 부르는 게 값일 텐데. 심장이나 코어 힘줄 생각하면...이렇게 벌고도 놀 생각은커녕 죽을 지도 모르는 자리만 찾아다니는 거 보면 좀 무섭기도 해.”
“벌기는 무슨, 이 팀에서 사냥한 괴수들 10프로도 시장에 안 나왔다. 10프로가 뭐야, 5프로도 많이 쳐준 거지.”
“엥? 그럼 대체 그 많은 시체가 다 어디 갔데요? 가공해서 장비 만드는 것도 한계가 있는데.”
“낸들 아냐. 먹기라도 하나 보지.”
“에이, 무슨 그런 끔찍한 농담을 해요? 용종이면 또 몰라 누가 굳이 독 있을지도 모르는 괴수를 처먹는다고.”
“대장이라는 친구가 용혈 해독 레시피 특허권자인거 몰랐어? 모르긴 몰라도 상당양은 진짜 먹거나 실험에 썼을 걸?”
“허, 생긴 건 무난함 그 자체던데 좀 의외네.”
“생긴 것만 따지면 검성이 제일 의외지. 누가 저 얼굴에 괴수를 산 채로 포 뜬다고 믿겠어?”
“이놈들이? 딴소리 그만하고 움직여!”
“예, 예에.”
***
태양이 내리쬐는 한낮이었다. 습도가 높아 조금 불쾌지수가 높긴 했지만, 활동하는 데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마을은 생기라곤 없이 조용했다.
마을 안에 감도는 침묵은 한밤중의 고요함 보다는 무덤가의 것처럼 섬뜩한 구석이 있었고, 마을 안을 돌다 나온 바람에는 어찌할 길이 없는 죽음의 냄새가 감돌았다.
마을 입구에 발을 디딘 두 남자는 바람이 실어온 특유의 냄새를 맡고 바로 확신했다. 이곳이다.
“찾긴 제대로 찾았네. 씨발.”
목적을 달성했음에도 지벡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그는 침을 한 번 탁 뱉고는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 주변을 돌아보던 웨인도 군말없이 뒤를 따랐다.
두 남자가 멈춰선 것은 원래는 마을의 광장쯤으로 사용되었을 중심부 공터였다.
공터 중앙에 뭔가를 발견한 지벡이 그 앞에서 멈춰서더니 갑자기 욕지기를 내뱉었다. 뒤따라온 웨인은 욕지기를 하진 않았지만 인상을 확 찌푸렸다.
“이런 씨발. 별 좃같은 걸 다 보네. 씨발! 좃같네!”
지벡이 욕지기를 내뱉게 만든 것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어 있는 가죽더미였다.
가공을 거친 동물의 가죽이 아니라, 내용물이 쭉 빠져나가서 거죽만 남은 인간의 시체.
지벡이 욕지거리를 하는 동안 웨인은 조심스럽게 가죽만 남은 시체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도 불편한 심기를 숨기진 못했지만, 욕만 하고 있어선 이 같은 피해가 더 나는 걸 방관하는 꼴이라는 생각이 그를 이끌었다.
웨인은 곧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가죽을 벗긴 게 아니야. 안에 있던 것들이 빠져나간...뭐야, 내장을 긁어내간 게 아니었어?’
“야, 너 뭐하...와 시발 뭐야 이거? 안에 그대로 있는데 이렇게 된 거라고?”
지벡이 웨인이 외치고 싶은 말을 대신 해주었다. 그가 지벡에게 검사를 요청하려고 시체를 넘기려는 순간, 그와 지벡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처참한 상태였던 가죽이 무게를 못 견디고 부스러졌다. 안에 남아있던 내장으로 추정되는 찌꺼기 같은 것들을 쏟아내면서.
가죽 안에 들어있던 것도 가죽과 마찬가지로 핏기라곤 없는 상태였다.
“와 씹...내가 별 좃같은 걸 다 봤지만 이런 건 진짜 처음 본다. 무슨 흡혈귀한테 당한 것도 아니...”
“흡혈귀?”
불평을 늘어놓으려던 지벡과 웨인이 서로 짜 맞춘 것처럼 눈을 맞췄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 둘은 서로 의사를 교환할 수 있었다.
‘그거다!’
뭔가를 알아낸 것 같다는 생각에 의욕이 고취된 두 남자는 마을을 샅샅이 뒤져, 중앙 공터의 소년과 같은 꼴을 당한 마을 사람 백여 명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거 진짜 그 놈 짓일까? 언데드라면 리치나 데스나이트가 있긴 했지만...완전히 다른 유형이잖아.”
“그런 놈들이 있으니 흡혈귀의 특성을 가진 괴수가 나타나지 말라는 법도 없지요. 따지고 보면 데스나이트 체페슈가 가진 데스오러도 그런 쪽 아닙니까. 천천히 생기를 빨아내는.”
“그렇긴 한데...씨발, 왜 자꾸 이런 좃같은 쪽으로 빌드업을 하고 지랄이야. 이새끼들은.”
정말 뜬금없이 떠오른 생각을 기반으로 한 가설이었지만, 두 남자는 그 가설을 의심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일주일 동안 아무런 소득도 없이, 놈이 초토화시켜놓고 간 뒷자리만 뒤적거리다가 겨우 붙잡은 단서였다.
거기다가 첫 인명 피해가 이런 식이었으니, 아니라는 증거가 나오기 전까지는 이 가설을 버릴 이유가 없었다.
“야, 그런데 이놈 강도 잘만 얼렸잖아.”
“그거야 이야기 속 약점이니 이쪽에 기대하는 게 더 웃긴 일이죠. 다른 언데드들이 십자가에 약하지 않다고 화를 내실 겁니까?”
“그런 건 아니지만...끙...”
“당장은 이 가설을 보고서에 포함시킬 생각은 없습니다. 좀 더 면밀히 검토를 거친 후에, 보고서를 올려야겠지요. 당장 추적하는데도 이 가설을 적용시켜서는 안 될 일이고요.”
“그건 나도 알아. 나도 어림짐작 때문에 뒈지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걱정 붙들어 매.”
그로부터 일주일 후, 두 남자는 네임드 몹 흡혈귀설을 확신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