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9화 〉탐식마(貪食魔)
방안의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뭘 모르는 이가 들었다면 물증은 없고 감을 기반으로 한 추측뿐인데 뭘 그리 심각해 하냐고 하겠지만, 정말 뭘 모르니 할 수 있는 소리였다.
류 현이 회귀라는 비밀을 공유하기 시작한 이후로, 용잡이 팀은 마탑과 물밑 교류를 시작했다. 정확히는 화련이 류 현의 재가를 받고 강찬을 통해서 마탑과의 교류를 시작했었다.
화련이 마탑에 요구한 것은 아직도 가끔씩 나오는 던전 내의 유적에 대한 자료.
해독 가능한 룬어나, 아직 해독이 안 된 변형 룬어로 쓰인 석판의 이미지까지, 그녀는 닥치는 대로 끌어 모았다. 그 대가로 자신의 공간 마법과 청뢰에 대한 자료를 제공했다.
무슨 원리인지는 몰라도 경지가 오를수록 해독할 수 있는 변형 룬어의 가짓수가 많아진 화련은, 그 이전부터 감각만으로 던전에서 발굴된 잠금장치들을 풀어내던 강찬과 합작해서 해독 불가 판정이나 폐기처분을 받은 석판과 잠긴 큐브들을 풀어내었다.
그녀 스스로는 성과에 만족하진 못했지만, 상당한 진전이 있었다.
류 현이 세기말에나 봤었던 던전 관련 이론들을 입증해내거나, 그보다 한 발 더 나아가는데 성공한 것이다.
대표적인 예시로 그녀는 라가 주술사가 쓰는 저주를 비롯한 마법 같아 보이는 행사들이, 사실은 마법이 아니라 구엘 뒤 굴락이 휘둘렀던 붉은 오러와 같은 방식으로 작용하는 것을 밝혀내었다. 실제로 자신이 회색 오러를 받은 상태에서 저주를 시연 해보이기까지 했다.
그녀가 건 저주는 그녀가 연결을 끊어도 계속해서 존재했다. 라가 주술사가 걸었을 때와 똑같이.
그녀 본인도 정확하게 그것이 어디에서 빌려온 힘인지 알진 못했지만, 전생에는 저주가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작용하는 것인지 밝혀낸 이가 없었을 정도였으니 전생의 연구자들을 혼자서 추월했다고 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그런 그녀가 대 네임드 몹 경험까지 쌓았는데, 그렇게 벼린 감을 바탕으로 내놓은 추측은 단순히 추측이라고 넘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어, 그럼 뉴욕 시가 아니라, 뉴욕 주 전체에 대피령을 내려야 하는 거 아니야?”
“아프리카에 일어난 일이 터지면 주가 아니라, 동부 전역에 대피령을 내려야겠죠. 그렇게 하더라도 별 소용없겠지만요.”
화련의 말 대로였다.
아프리카는 아프리카 원정대가 인간 노예 구출을 마무리하고, 거의 해산하자마자 늘어난 면적만큼 몸살을 앓는 중이었다.
이번 일로 솟아난 땅에서 갑자기 화산이 폭발하고, 일그러진 지형 때문에 홍해는 끓는 주전자 같이 해류가 미쳐 날뛰었다. 인도양도 그 뒤를 따를 것처럼 해류가 심상찮았다.
덤으로 이집트였던 땅에 몰려들었던 괴수들이 피난길이라도 오르는 것처럼 아라비아 반도로 몰려드는 중이었다. 물경 8천에 이르는 대 무리였다.
이번 사태의 피해가 아프리카에 국한되지 않을 것이라는 건 이미 기정사실이었고, 아프리카 대륙 내의 것을 제외한 피해액 카운트가 끝을 모르고 오르는 중이었다.
칼리프 클랜이 여태 아무런 잡음을 내지 않고 얌전히 있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당장 옆동네에서 화산재가 날아오고, 옆동네 일의 여파로 해일과 괴수의 파도가 본진에 덮쳐드는 판국에 뭘 하겠는가?
뉴욕에 이 반이라도 실현되었다간 미국은 주 하나를 버리는 게 아니라, 동부 전체를 희생해야 할지도 몰랐다.
“...이래서 그 할아버지 앞에서는 말 못했어요. 당장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게 대비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니까요. 어마어마하게 큰 게 넘어오는 건 알겠는데, 그게 땅인지 괴수인지 알 수가 없으니...”
말을 하면서도 께름칙했는지, 화련이 어깨를 부르르 떨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프리카 때는 정말 소리소문 없이 시작되었으니 이번에도 선례를 따르길 바라는 수밖에요. 저 요란한 변화가 땅이 아니라, 괴수가 넘어오는 과정이길 바라야겠죠.”
“어, 그건 그거대로 곤란한 거 아냐? 안 그래도 구엘 뒤 굴락보다 강한 놈이 나올 거라면서. 저 정도 규모면...으으, 생각하기도 싫다.”
승하가 몸서리를 치는 것을 보고 류 현은 픽 웃었다.
“이제야 3차 ‘대소환’에 시동이 걸렸는데 미국이 괴멸하는 것보다야 이쪽이 낫죠. 어차피 잡아야 할 놈이고요.”
“이번엔 파리 개선문이 박살났다고 했었지?”
“예, 지룡 상대로는 그 정도면 엄청 잘 막은 거지만요.”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기 직전, 파리에 등장한 지룡이 개선문을 박살내는 장면이 전 세계 뉴스 채널에 속보로 퍼져 나갔다.
등장과 동시에 개선문을 박살낸 지룡은 주택가를 헤집다가, 대통령 궁으로 질주하던 도중 주살 당했다고 했다.
협회가 슬쩍 찔러준 정보에 의하면 사건이 발생하기 직전, 파리 어디에서도 던전 포화의 기미는 없었다고 했다.
“잘 막긴. 사이즈가 아프리카에서 잡은 거 반도 안 되겠던데. 그거 새끼 맞지?”
“그건 직접 살피지 않으면 알 수가 없는 거라 서요. 같은 종이라도 덩치 차이가 존재하지 않습니까. 용종은 좀 심한 편이니 그냥 다 큰 게 저거일 수도 있죠.”
“어쨌거나 저게 프랑스의 최정예면 우리가 봤던 급이 나타나면 파리는 그 날로 끝일 걸.”
“별 수 없는 일이죠. 그 정도 급이 나타나면 도시가 파괴되는 건 확정이고, 인명 피해에 신경을 써야할 테니까요.”
가급적 생산 시설은 덜 파괴되길 비는 수밖에 없었다.
“흐응...그러고보니 웨인 녀석은? 원래 오늘 합류하기로 한 거 아니었어?”
“아, 웨인 씨는...”
그 때, 류 현의 휴대폰이 울었다. 1분도 안 되는 시간동안, 연달아 두 번. 첫번째는 메세지였고, 두번째는 전화였다. 짧은 시간동안 메세지를 확인한 류 현은 꽤나 풀어진 얼굴로 경쾌하게 전화를 받았다.
“류 현입니다. 예, 주소는 찍어드린 대롭니다. 예, 고생하셨습니다. 예, 휴식 후에 뵙지요.”
“누구야?”
전화를 끊자마자 승하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류 현은 바짝 들이민 그녀의 이마를 슥 밀어내며 대꾸했다.
“협회의 정예팀입니다. 웨인 씨가 이리로 못 오는 대신 보내주셨죠.”
“엥? 걔 못 와?”
“남미에서 할 일이 있으셔서 저들을 대신 보내신 겁니다. 하도 연락이 없어서 다 같이 오실 줄 알았는데, 방금 막 메세지를 보내주셨네요. 브라질에 도착했다고.”
“남미? 브라질? 설마 아마존 그거?”
“예, 당장 추적할 방법이 없다곤 해도 그냥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쪽도 당장 뭘 해결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요. 추적조를 자청하시더군요.”
“걔 혼자서? 괜히 기운만 뺄 텐데. 걔 남미 가본 적은 있데?”
“아뇨, 현지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을 한 명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 사람 때문에 여태 확정이 안 됐던거고요.”
‘정확히는 끌고 간 거지만.’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화련의 한쪽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그녀는 감 잡았다는 얼굴로 확인을 위한 질문을 던졌다.
“그 인간을 조수로 끌고 갔다고요? 가서 사고나 안 치면 다행일 텐데.”
“사고 쳐봤자죠. 웨인 씨랑 상성도 최악이라 자다가 기습해도 웨인 씨가 이길 텐데요.”
“하기야...마법사로는 실력이 나쁘진 않으니 괜찮은 선택이네요. 협회에는 그만한 마법사도 없을 거고.”
“예, 그렇죠.”
“뭔데? 왜 나만 몰라?”
약간 심통난 얼굴로 물어오는 승하에게 류 현은 픽 웃으며 해답을 내놓았다.
“지벡 건터 씨가 동행입니다. 그곳 주인이나 다름 없는 디에고 리베라 브렌트와 안면이 있고, 몇 년 전만 해도 일 년에 두 번은 들렸다고 하고, 게다가 본인이 실력이 괜찮은 마법사이니 그만한 적임자도 없죠.”
대답을 들었지만 이전보다 더 의문이 깊어진 승하가 새된 소리를 냈다.
“엥?”
***
지벡 건터는 CIA의 마수에서 벗어난 뒤로 생긴 기벽이 하나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뇌를 한 번 거치고 내뱉을 말을 그냥 내뱉는 버릇이 그것이었다.
CIA에 붙들려 있던 시절, 관자놀이에 권총을 들이댄 채로 인터뷰 대본을 외웠던 과거 탓인지, 아니면 지벡 건터 라는 남자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던 똘끼가 발산할 수 있는 환경을 맞이해 미쳐 날뛰는 것인지는 아무도 몰랐지만, 지벡 건터는 남녀노소, 빈부, 계급의 구분 없이 말을 막하는 망나니로 유명했다.
망명을 도와준 제 스폰서 앞에서도 그 기벽을 억누르지 못했으니 말다한 셈이었다.
그들을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꺼리고, 두려워했기에 지벡은 그들 앞에서도 잘만 돌아가는 주둥이에 걸린 것이 치료 불가능한 불치병이라 여기고 고삐 풀린 제 주둥이를 방치했다.
류 현이라는 괴물을 만나기 전만 해도 그랬었다.
정확히는 류 현이라는 괴물의 진면목을 목도하고, 그의 앞에서 예의 따윈 씹어 먹은 줄 알았던 제 주둥이가 예의를 차리기 전까지는.
‘씨발.’
그리고 시간이 흘러, 지벡 건터는 고삐 풀린 제 주둥이가 알아서 스스로를 단속하게 만드는 인간을 다섯은 꼽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기분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얼굴을 맞대는 것만으로도, 적의도 살의도 내보이지 않고 그냥 있는 것만으로도 목숨의 위협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괴물이 다섯이나 된다는 소리였으니까.
심지어 그 괴물들은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으니까.
눈앞의 남자, 웨인 크로이츠가 그러한 좋은 예였다. 원래는 지벡 건터의 고삐 풀린 주둥이의 피해자였다가, 요 1년 사이에 급격히 강해져서 그의 주둥이에 예절을 주입시켜준 자였다.
웨인 크로이츠 본인은 아무런 위해도 가하지 않았지만, 그래서 더 짜증났다.
지벡은 말을 열심히 골랐다. 마음 같아선 욕을 한 바가지 퍼부어주고 싶었지만, 잃어버린 예의를 되찾은 그의 주둥이가 그 말들을 내뱉는 걸 거부해서였다.
“제정신이야? 이 넓은 남미를, 그것도 딸랑 둘이서, 네임드 몹으로 추정되는 놈을 추적하자고?”
두 남자가 위치한 곳은 브라질의 마나우스의 한 폐건물이었다. 그러니 지벡이 내뱉은 말은 돌아가자는 의미보다는, 지원이 필요하다는 징징거림에 가까웠다.
임무 자체를 거부할 거였으면 그 전에 깽판을 쳤을 것이다. 아무리 늦어도 비행기가 뜨기 전에 비행기에 불이라도 질렀겠지.
‘염병, 내가 대체 왜...’
사실 거부하고 싶은 마음은 가득했지만, 이 임무 뒤에 있을 남자를 생각하니 그럴 수가 없었다.
‘씨발...왜 날 못 잡아먹어서 안 달이야? 해달라는 대로 다 했잖아.’
류 현이 시키는 대로 그 끔찍한 데스나이트를 물고 늘어졌었다. 그것도 통합도 안 되는 급조팀을 이끌고!
그 뒤에는 그 본인이 아니라 데리고 있는 팀원 여자의 말도 꼬박꼬박 들었다. 중간에 수고비를 좀 챙기긴 했지만, 문제될 정도는 아니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소재 파악도 안 된 네임드 몹(추정) 추적이라니.
직접 가라고 지시만 안했지, 웨인의 태도를 보면 놈이 지시한 게 분명했다. 아니, 그렇지 않더라도 웨인이 전화 한 통화만 하면 그렇게 될 터였다.
‘같이 온 게 이놈만 아니었어도 연락 끊긴 척 하고 짱 박혀볼만한데...’
상대가 웨인 크로이츠라서 엄두조차 낼 수가 없었다.
용잡이 팀을 따라다니면서 자청해서 개고생 하던 호구남은 다시 만났을 때 버그라도 쓴 것 마냥 급격하게 강해진 상태였다. 동급 취급을 받았던 과거가 생각도 안 날정도로 격차가 벌어진 것이다.
‘아무래도 그 네임드 몹을 잡을 때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도 경지가 팍 뛰는 것 같은데. 씨발, 저 미친놈 아니고 누가 그런 위험을 감수해?’
그리고 지금 그 호구남은 자신의 감시자였다. 전후사정이 어떻게 돌아가서 이렇게 되었든 간에 지벡이 느끼기에는 그랬다.
“둘이라서 움직일 수 있는 거지요. 디에고 리베라의 감시망에 걸리지 않고, 만족할 만한 기동성과 조사능력을 유지하려면 이 정도가 적당합니다. 라인 몇 개는 활용할 수 있겠지만, 너무 자주 사용하면 그쪽으로도 역추적 당할 거고요.”
“염병, 말은 쉽지...네임드 몹이라고 했잖아! 그쪽에서 그렇게 잠정 결론 내렸다면서! 그런데 달랑 둘이라니 이게 말이야 똥이야?”
지벡이 열이 올랐든 말든 웨인은 여전히 차분한 어조로 응했다.
“우리가 해야 할 건 추적뿐입니다. 심지어 딱 붙어서 실시간 보고를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네임드 몹이 정말 맞는지와 이동 경로 정도만 알아내면 족합니다. 우려하시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교전이 일어나면 임무 실패니까요.”
“말은...쉽지!”
데스나이트 건으로 지벡 건터는 여실히 깨달았다. 저것들은, 네임드 몹은 괴수라는 상식 밖의 존재의 틀 안에도 넣을 수 없는 끔찍한 무언가라는 것을.
놈들을 상대하면서 ‘이 거리면 안전하겠지.’, ‘이만큼 준비했으면 한 번은 몸을 빼낼 수 있겠지.’ 같은 견적은 아무짝에 쓸모없다는 것을!
전 같았으면 스폰서의 위협이고 나발이고 그냥 냅다 튀었을 것이다. 네임드 몹에게 찢겨 죽나, 스폰서들에게 암살당하나 결국 죽음이 결론이라면 적어도 좀 덜 구르는 쪽을 택하고 싶었을 테니까.
류 현이 데스나이트의 모가지를 뽑아내는 걸 보기 전의 그였다면 말이다.
그러니까, 그 광경을 본 지금의 지벡은 도망가는 걸 선택할 수 없다는 얘기였다.
도망이나 배신을 떠올릴 때마다 무어라 설명하기 힘든 압박감이 그를 짓눌렀다.
위험 요소에는 귀신같이 반응해서 몇 번이고 목숨을 건지게 해준 그의 감도 고장 난 것처럼 도망이라는 선택지를 거부했다.
그래선 안 된다고, 후회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씨발...내가 어쩌다가 이런 새끼들한테 코 꿰여서...”
결국 위험하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따를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