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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8화 〉탐식마(貪食魔) (298/429)



〈 298화 〉탐식마(貪食魔)
제럴드 던컨은 자신을 향해서 다가오고 있는 동양인 청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에 확  정도로 잘 생기거나, 외모적인 특징이 보이진 않았지만 무덤덤해 보이는 표정이 꽤 인상적이었다.
자신의 측근도 아니고, 오늘 처음 대면하는 이가 저렇게 무심한 반응을 보이는  대통령 취임식 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것도 닳고 닳은 정치인이나 기업가가 아니라 새파랗게 젊은이가 말이다.


‘동양인이 원래 젊어 보인다지만...상상했던 것 보다 훨씬 젊군.’


실제 나이도 젊긴 했었다. 아직 이십대 중반에도 도달하지 않은 나이. 남자는 서른은 되어야 제 구실을 한다는 던컨의 신념상 젊다 못해 어린 나이였다.


‘그렇지만 세계 최강팀의 확고부동한 리더다.’


던컨의 기준에선 팀 전체가 젊다 못해 어렸지만, 그런  아무래도 좋을 정도로 능력이 압도적이었다.  능력을 증명할 실적마저도 비교 대상이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그들 외에는 누구도 네임드 몹을 거꾸러뜨리지 못했으니까.
가장 근접한 실적을 낸 지벡 건터마저도 데스나이트의 진격을 지체시킨 것이 전부였다. 깎아내려질만한 실적은 아니었지만, 그들과 비교하면 아무래도 빛이 바래보일 수밖에 없었다.

국내 사정이 이래저래 꼬이지 않았다면 진작 만나서 귀화 러브콜을 퍼부었을 것이다.

‘이젠 그러기도 힘들지. 그들이 있는 곳이 가장 괴수 억제력이 높은 곳이 되니.’

제프가 말려도 그냥 강행했어야 했나. 던컨은 그런 생각을 품었다.

“음? 무슨 일인가?”
“검성이 차고 온 검 때문에 그러는 것 같습니다. 각하.”


류 현이 다가오다 말고 멈춰서더니 뒤돌아서 뭐라고 하는  하자 던컨은 고개를 갸웃했다. 비서가 귀엣말로 사정을 설명해줬지만, 눈살만 더 찌푸리게 되었다.


“그냥 들이라고 하게. 검성 정도면 검을 차고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 아닌가. 죽이려고 마음먹으면 이 자리에 있는 전원을 맨손으로 다 죽이고도 남지. 연구팀 말로는 소대화기 정도로는 상처도 안 날거라던데.”


던컨의 말은 사실이었지만, 비서는 쩔쩔 매면서도 속 시원히 그러겠노라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비서된 자로서의 입장이라는 게 있었으니까.

“각하, 아무리 그래도 절차라는 게...”
“어허, 두 번 말하게 할 생각인가? 아쉬운 건 우리일세. 이런 사소한 걸로 마음이라도 상하면...”


굳이 검성이 아니어도  무장을 강제로 빼앗기는 상황에 반발할 플레이어들은 널리고 널렸다. 엄밀히 따지면 반발하지 않는 쪽이 소수일 것이다. 경험이 깊을수록 그럴 터였다.
살아 움직이는 PTSD 종합 견본이라고 할 만한 플레이어가 그런 반응을 보이는 건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전대 정권 덕에 플레이어들에 대해선 논문을 내도 될 정도로 깊게 공부한 던컨은, 이처럼 이성적으로 호소해서 안 될 일을 굳이 관철시킬 생각이 없었다.
자신이 말한 대로 그들에게 살의가 있다면 칼이 있든 없든  자리에 있는 이들 전부가 다 죽을테니까.


비서를 닦달하면서 류 현을 다시 살피려던 던컨은 멈칫했다. 류 현에게 제 ‘가방’에 들어있던 검까지 전부 내밀고 있는 검성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투덜거리고 있긴 했지만 크게 기분 상한 표정은 아니었다. 뒤따라서 아티펙트를 내밀고 있는 세 여자는 이게 당연하다는 분위기였다.

‘단순히 무력의 우위가 아니라 정말로 팀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군.’

어찌 보면 사소한 일.
하지만 검성의 진상 에피소드 대부분을 알고 있는 던컨에게는 달리 다가올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그는 cia와 nsa가 올린 보고서에서 검성 부문을 대폭 수정했다. [무력에 억눌린 것이 아니라 초창기 ‘예거즈’ 수뇌부를 따르는  같은 행동을 보임.]으로.

 현이 경호진에게 무장을 건네고 다시 걸어 들어오자 던컨은 목을 가다듬었다.


“X던전 사태 때 은혜를 입었음에도 제대로 감사조차 표하지 못했었지. 상황이 이렇지만, 뒤늦게나마 만나서 감사를 표할 기회가 오게 되어서 개인적으로 기쁘오. 제럴드 던컨이오. 제럴드라고 불러주면 기쁠 거요.”
“류 현입니다.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


“되게 의욕적인 할아버지였죠. 그런 자리에 있으면서 그러기가 쉽지가 않을 텐데.”
“하하하...”


할아버지라니. 류 현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승하랑 붙어 다니더니 진짜 물들었네.’


이전에는 팀원들끼리 있어도 외부 사람을 언급할 때는 그래도 억지로라도 격식을 차리려는 느낌이었는데, 이젠 그런 건 신경 쓰지 않기로 한 모양이었다.
우크라이나 테러 사건 이후 더욱 노골적으로 변했다. 그녀는 더 이상 팀원 외의 인간을 언급할  높임말 같은 걸 입에 담지 않았다.


‘정 떨어져버린 건가.’

그럴 만도 했지만, 그냥 넘기기에는 조금 켕겼다. 현생의 그녀는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고 하는 과정 없이 그런 악의에 노출된 것이니까.
그냥 단순히 일반인에 대해서 좋지 못한 인상을 품게 된 것이 아닐 가능성이 컸다.
딱히 PTSD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지만, 이 방면에 해박한 것도 아니니 단정할 순 없었다.


“응? 왜 그래요? 제 얼굴에  묻었어요?”
“아뇨, 아닙니다. 잠깐 생각 좀 하느라.”
‘당분간은 조용히 지켜보자. 하필 이런 때에 네임드 몹이나 천공성이나 들썩거려선...’


이틀 전만 해도 느긋하게 정비에 힘쓰면서 화련과 희란의 상태에 신경 쓰는  전부였는데, 갑자기 일거리가 확 몰려드니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었다.


‘다음부턴 웨인 씨 전화는 대신 받게 할까.’


그런 시답잖은, 장난 같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자신에게 일거리를 안겨준 남자도 지금쯤 협회 본부에서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을 거라는  유일한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그래도 대통령이 저리 적극적이니  숨 돌릴  있는 거죠. 고마운 일입니다. 아니었으면 뉴욕에서 시민들 대피시켜야 한다고 의회에서 연설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했을 테니까요.”


용잡이 팀과 뉴욕 현장에 시찰을 나선 제럴드 던컨은 화련의 확언이 떨어지자마자 대피령을 내렸다.
주 정부에서 이렇게 갑작스럽게는 곤란하다는 태도를 보이자 계엄령이라도 불사할 것 같이 굴던 모습은 용잡이 팀에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야 그렇긴 한데요. 저 많은 사람들을 어디로 보내려는 건지...당장 터진다는 보장도 없는데 말이에요.”
“그래도 괜히 여기 있다가 죽는 것보다는 낫겠죠.”


천연덕스럽게 대꾸하면서도 류 현은 슬쩍 화련의 눈치를 살폈다. 피난민들의 고충을 걱정하는 것보다는, 사태가 장기화 되었을 때 그들이 우크라이나의 테러범들처럼  것을 걱정하는 것 같아서.

하지만 표정만으로는 아무것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별 수 없지. 군에 군중들이랑 최대한 떨어뜨려 달라고 요청하는 수밖에.’
류 현이 버넷 호지슨의 연락처를 저장한 휴대폰을 떠올리고 있자 승하가 대화에 끼어들어왔다.


“그런데 저 성은 진짜로 존재 하는 거야?”
“존재는 해요. 그러니까 일반인들 눈에도 보이는 거고. 하지만 우리 쪽에서 저쪽에 어떤 행사도 할  없는 그런 상태죠.”
“‘페릭스’때처럼?”
“좀 다른데...음...걔는 위상차원에 떠 있다가 필요할 때만 이리로 왔다 갔다 했다면, 저 성은 아예 두 곳에 걸친 채로 실체화  거라 서요.”

설명을 들은 승하의 표정이 떫어졌다. 화련은 저도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저도 저런 건 처음 봐서 딱 부러지게 이거다 하기가 힘들어요. 지금도 어떻게 두 차원에 양다리 걸친 채로 있는지도 모르겠고.”
“음, 그러니까 지금은 무슨 짓을 해도 저 성을  친다는 거지?”
“이 세상에  정도는 걸쳐져 있으니까 안  건 없는데...솔직히 저거 건드려서 뭘 어떻게 될지 알아요. 거기다가 건드리는 데만 해도 소모가 엄청날 걸요. 언니의 그 까만  공격이랑 마스터가 오러 버프 켜고 검은 안개 써야 뭘 어떻게 해볼  있을 것 같은데.”
“못 건드린다는 뜻이네.”


화련은 얕게 고개를 끄덕이곤 말을 이었다.

“건드릴  있어도 지금 저 상태에서는 건드리는 건 추천하고 싶진 않네요. 뭐인지는 몰라도 저 성 위로 흐름이 심상치 않으니까.”
“아, 그래. 성 근처로 가니까 기분 확 나빠졌었지. 뭐라고 해야 하지...그 주변 공기만 이상하게 엄청 무거웠다고 해야 하나? 아, 희란이 넌 아까 토했잖아. 속은 좀 괜찮아?”
“아...네, 네. 괜찮아요. 아깐 갑자기 떨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좀 밑도 끝도 없는 말이었지만, 희란에게 캐묻는 인원은 없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모두가 이상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천공성(穿孔城)은 일반인들에게도 보일 정도로 강해진 존재감만큼이나 주변에도 기이한 방식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시찰 도중에 희란이 구토와 어지러움을 호소할 정도로. 백혜라도 비슷한 증세를 호소해, 방에서 쉬고 있는 김에 조용히 따로 모인 것이다.
승하는 제 잘못도 아닌데, 토한 일로 의기소침해 하는 희란의 어깨를 살살 쓰다듬으며 화련에게 물었다.

“그래서, 뭐하고 있는 거 같아? 뭔가 하기는 엄청난 일을 하고 있는  같긴 한데.”
“좀 자존심 상하긴 하지만 공간 마법인거 외에는 알아볼  있는 게 거의 없어요. 워낙 주변이 엉망진창이라. 솔직히 아까 접근하는 것도 거부하려다가 참은 거에요.”
“그럼 또 무기한 대기인 건가. 흠...류 현, 이번에도 저번처럼 두 곳 동시에 진행하는 게 낫지 않을까? 두 쪽다 때려잡을 괴수는 아직 보이지도 않으니, 브라질 쪽에 조사단이라도 보내는 게 낫지 않아?”
“글쎄요. 그게 남미쪽 상황이 워낙 특수해서...네임드 몹이라는 확증이 나오기 전에는 웬만한 능력자들로는 거기서 활동하기도 힘들겁니다. 수행해야하는 일의 특수성을 생각하면 난이도가 너무 뛰어서...일단 생각해둔 인선이 있긴한데 아직 연락이 없네요.”
“뭘 어떻게 쓸 만 한 놈이 없냐. 우린 당분간 꼼짝없이 여기 묶여야 하는데.”
“저기, 제 말 아직 다  끝났거든요?”
“응?”

세 쌍의 시선이 동시에 화련에게로 몰렸다. 화련은 어깨를 으쓱해보이곤 말했다.

“추측거리가 아예 없진 않잖아요? 카이로랑 똑같이 X던전 클리어 이후에 저 성이 나타났고,  다 이름이 붙어 있잖아요. 카이로는 왕의 영지. 여기 뉴욕은...”
“천공성(穿孔城).”
“맞아요. 그냥 떠있는 성이 아니라는  알려주려고 친절하게 속  표시까지  놓은 덕분에 끼워 맞출 여지가 생겼죠. 저건 지금 구멍을 뚫고 있는 걸 거에요.”
“구멍? 무슨 구멍?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
“왜 뚫을 곳이 없어요? 언니가 며칠 전만 해도 신나게 드나들던 던전 게이트도 결국 ‘구멍’인데.”

화련은 좌중을 한  돌아보고는 선언하는 것처럼 무겁게 말했다.


“저 천공성은 구멍을 뚫고 있는 거에요. 게이트 너머의 공간이 원래 붙어있던 세계든, 제 3의 세계든 이계와 이곳을 연결하는 구멍을.”


그녀는 이런 말을 하는  자체가 부담스러운 듯, 상의의 가슴께를 몇 번 당기더니 크게 심호흡을  번하고 나서야 말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천공성 주변에서 보이는 변화의 조짐으로 보건데, 그 구멍으로 넘어올 것들은  해도 아프리카에서 있었던 변화에 준하는 정도일 거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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