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7화 〉탐식마(貪食魔)
“결국, 정확한 위치는 알 수가 없다는 거네요.”
“별 수 없지요. 그나마 티가 이렇게 티가 나는 특성을 가지고 있어서 이놈이 세상에 나왔다는 사실을 빨리 안 게 다행이라고 여길 수밖에요.”
“근처에 있는 전자기기가 닥치는 대로 맛이 가서 놈이 지나갔다는 건 알 수가 있는데, 그것 때문에 정확한 위치는 파악할 수가 없다니 이게 무슨...”
화련은 앞머리를 쓸어 올리면서도 태블릿pc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브라질 현지 보도 자료와 지벡 건터의 사견이 한껏 들어간 보고서는 그만한 파괴력이 있었다.
“이 비슷한 특성 가진 놈이 있었나요?”
전생에서. 화련이 굳이 내뱉지 않은 말을 류 현은 듣지 않고도 알아들었다.
“없었습니다. 화룡이나 아지다하카가 뜨면 주변에 마력적인 태풍이 일어서 사람이고 기계고 닥치는 대로 망가진 건 본 적이 있습니다만...이렇게 얌전하게 회로만 망가진 건 처음 보는 군요.”
“이거 데스나이트 오러 같은 거겠죠?”
“예, 아마도 있는 줄도 모르는데 놈이 지나가다보니 작용 범위 안에 들어가서 다 망가진 것 같습니다. 그게 아니면 아무리 네임드 몹이라도 이 많은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뒀을 리가 없죠. 본 드래곤 때처럼 지휘개체가 있지 않은 이상은요.”
류 현은 전자기기 피해를 입은 범위 안에 사는 사람들의 인원 부분을 톡톡 두드렸다. 최소로 잡아도 5천명. 네임드 몹으로 추정되는 놈이 이 정도의 무리를 감지 못했다고 단정하기도 조금 이상하지만, 직접 전자기기들을 망가뜨릴 수 있는 거리까지 가서 그것들만 망가뜨리고 나왔다는 게 더 이상한 수치였다.
구엘 뒤 굴락 때처럼 용도가 있어서 납치를 한 것도 아니니 말이다.
“그렇다고 지휘개체의 존재를 가정하자니, 너무 쓸데없이 요란하죠. 그냥 조용히 이동할 수도 있을 텐데 요란한 흔적은 남겼으면서 인명을 살상한 것도 아니고, ‘업화의 아이들’때처럼 주요 시설을 공격한 것도 아니니.”
“이동루트도 좀 이상해요. 이렇게 띄엄띄엄...이거 텔레포트 쓸 수 있는 개체인가? 아니라면 굳이 주변 안 얼리고, 전자기기 부숴서 흔적 안 남길 수 있는데 일부러 이러는 거라는 소리인데...”
“정말 나온 지 얼마 안 된 놈이라 적응이 덜 끝난 걸 수도 있죠. ‘페릭스’만 해도 시간이 지나니까 행동패턴이 확 달라졌으니까요.”
“끙...”
화련이 머리가 터지겠다고 투덜거리는 모습에 류 현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괴수 행동 패턴 분석한다고 골머리 썩을 줄이야.’
이런 고생을 하게 만든 건 아지다하카 정도였다. 그런 놈마저 도시 몇 개가 날아가고 나니 행동 패턴이 읽혔는데, 현생의 놈들은 간을 보질 않나, 유전 같은 생산시설들을 공격하질 않나 괴수를 상대하고 있다는 생각이 안 들 정도였다.
이번에 브라질에 등장한 것으로 추측되는 네임드 몹은 더 했다. 여태껏 밝혀진 인명피해는 전무한데, 이슈화는 본 드래곤 때보다 더 빠르게 이루어졌다.
아마존 강이 짧은 구간이나마 얼어붙은 모습을 한 두 곳도 아니고, 일곱 군데가 넘게 노출되었으니까.
근처의 전자기기들이 일제히 먹통이 된 것은 그리 주목받지 못하는 듯 했지만.
지벡의 보고서는 현지에선 전자기기 먹통 현상 때문에 괴수가 아니라 인간, 플레이어 짓 쪽으로 기울고 있다고 언급했다.
‘이상할 건 없지만, 좀 곤란한데.’
괴수 짓이라고 입증되기 전까지는 움직이는데 제한이 생길 테니까. 군대를 이끌고 공항을 틀어막아도 뚫으려면 뚫을 수는 있겠지만, 굳이 마찰을 일으키고 싶진 않았다.
데스나이트 토벌 이후 그렇지 않아도 여러모로 뒤숭숭한데, 한껏 주목 받고 있는 플레이어 팀이 분란을 일으키면 그 여파가 말도 못할 것이다.
“지금 가장 큰 문제는 확실한 게 없어서 협회든, 유엔이든 움직일 수가 없는 거죠.”
“하기야 세계 카르텔 본진인데 확정난 것도 없이 문을 열어줄 리가 없긴 하겠네요. 여긴 가보신 적 있으세요?”
“아뇨, 전생에선 제가 가보기도 전에 완전 박살이 났었거든요. 화룡이 거기서 본격적으로 난리를 쳐서 그 뒤로는 아예 갈일이 없었습니다. 인프라가 박살난 건 둘째 치고, 아마존이 전소되고 나서 일반인들이 아예 못 살 지경이었거든요. 놈이 남미 대륙을 거의 다 태우고 나서 멕시코에서 잠깐 붙은 적은 있습니다만, 일주일도 못 갔죠.”
“아마존이...전소요? 대체 그 화룡이라는 게 어느 정도 였길래...”
“음...공략 기간만 따지면 아지다하카의 두 배정도 걸렸습니다. 거의 죽을 지경이 돼서 도망친 것도 스무 번이 넘고 나서는 안 세어봤으니 정확한 횟수 모르지만, 패퇴횟수도 아마 최다 일겁니다. 뭐, 아지다하카 때는 아예 살 생각을 버렸으니 횟수 같은 걸로 비교할 건 못 되지만요.”
류 현은 아무렇지도 않게 어깨를 으쓱해보이며 말을 마쳤지만, 듣는 이들은 마냥 그렇게 넘길 수가 없었다.
회의에는 별 관심 없다는 듯이 소파에서 뒹굴 거리던 승하마저 입을 쩍 벌리고 멍하니 시선을 보낼 정도로 류 현의 말한 내용은 꽤 충격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의 대장은 도저히 질 것 같지 않은 괴물 중의 괴물이었으니까.
‘페릭스’에게 일방적으로 몰렸다는 건 얘기만 들었을 뿐 보지 못했고, 다른 네임드 몹들도 상대할 때마다 크게 몰린 적은 있었지만 결국, 제대로 붙고 나면 살아남는 건 그였다.
그런 그가 스무 번 넘게 도망을 택한 적이라니. 거기에 아마존을 전소시켰다는 말이 더 해지자 딴 세상 얘기처럼 들렸다.
딴 세상 이야기가 맞긴했지만.
“아니...미친, 너 대체 전생에 뭘 하고 다닌 거야?”
“뭘 하고 다녔냐고 하셔도...말씀드린 대롭니다만.”
“무슨 저 혼자 어벤져스 찍고 다닌 걸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네.”
“됐어요. 그쯤 해요. 마스터 반응이 바뀌려면 하루 이틀로는 택도 없어요. 한 십 년쯤 붙어서 해야 할 걸요.”
그 농담같은 말이 영 틀린 말 같지가 않아서 승하는 떨떠름한 얼굴이 되었다. 그녀는 빠르게 표정을 수습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그래서, 어쩔 거야? 꼴을 보니까 네임드 몹 이 떡하니 카메라에 찍히지 않는 이상은 그 약쟁이들이 그냥 문 열어줄 것 같진 않은데?”
“글쎄요. 시기가 너무 공교로워서 강경책을 쓰자니...”
화련이 지벡 건터에게 사주해서 푼 영상의 여파는 아직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은 상태. 이 상황에서 다른 충격을 가했다간 아직 표출되지 않고 반응을 보류 중인 이들에게 좋지 못한 영향을 줄게 뻔했다.
물론 움직여야 할 순간이 오면 망설일 생각은 없었다.
문제는,
‘어쩌다보니 클랜들이 군벌로 변하는 건 막은 게 됐지만, 그 때문에 플레이어와 일반인의 대립구도가 만들어졌다. 는 거지.’
전생에서는 이런 대립구도는 없었다. 은연중에 사회가 플레이어에게 가하던 차별을, 일반인들이 입으로 통해 구체화시키기도 전에 양측의 입장이 뒤바뀌었으니까.
제 3차 ‘대소환’에 맞춘 것처럼 군벌화를 시도한 클랜들을 국가는 억누르지 못했고, 내분과 제 3차 ‘대소환’이라는 외환을 동시에 맞게 된 국가는 버티지 못했었다.
국가라는 방패막이가 사라지자 일반인들은 입을 다물고 군벌화한 플레이어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살아남기 위해서 사냥개의 밑을 기는 개가 되어야만 했다.
그 시절이라고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무력과 주도권을 플레이어들이 다 쥐었는데 대립구도가 성립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나 그것들 모두가 이제는 없는 일이 되었다.
혼란을 틈타 등장한 제 2의, 제 3의 ‘위스프’도 없고, 군벌로 넘어가기 전 일반인 플레이어 간의 짧은 갈등을 드러낸 총파업 사태도 없다.
그럼에도 마음 편히 활동하는 건 머나먼 일처럼 느껴졌다.
분명 상황이 전생보다 호전되었는데도, 이런 고민을 해야 하는 처지에 대한 고민은 덤이고.
‘전력 보존 면에서는 비교할 것도 없지만...이걸 정말로 잘 된 거라고 생각해야하는 건지.’
막 나가려고 들면 못할 건 없지만, 지금 상황에선 좀 꺼려졌다. 당장 브라질 어딘가를 거닐고 있을 네임드 몹을 추적할 방도가 떠오르질 않았으니까.
‘당장 그것들이 네임드 몹 짓이라는 걸 증명할 방도가 없으니...몰래 입국하는 건 일도 아니지만, 그 뒤가 문제지. 재수가 좋아서 바로 발견하면 또 몰라도.’
아마 네임드 몹을 추적하는 것보다 남미 대륙을 수중에 넣다시피 한 카르텔을 더 신경 써야 할 터.
“이런 말은 별로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만...당분간은 지켜보는 것 외에는 별 다른 방법이 없을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드러난 사실만 보면, 놈이 일주일 넘게 아마존을 돌아다니면서 오러 범위 밖의 cctv에 찍히지 않을 정도로 소형이며, 아직 희생자를 내지 않았거나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적은 희생자만 냈다는 건데...어느 쪽이든 괴수의 본능을 꽤 잘 억누르는 놈이니 다른 케이스처럼 추적하는 것도 어려워 보이네요.”
“거기에 약쟁이놈들도 지랄할 테고.”
“예, 지금 이렇다 할 증거도 없는데 밀고 들어가면 추적에 시간이 걸리는 만큼 마찰도 심해질 겁니다.”
“마음 같아선 싹 쓸어버리고 싶은데 그래서야 도로 아미타불이지. 남미 대륙 플레이어치고 그 카르텔에 연관 안 된 놈이 더 드무니까. 아니면 그놈들한테 약 받아먹는 충성 고객이거나.”
“그 부분이 가장 큰 문제죠.”
그들을 적으로 돌리는 것 자체는 두렵지 않지만, 그렇다고 곤란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적이 되더라도 살아있는 한 반 강제로 괴수와 싸우게 될 테지만, 그래도 정도가 있지 않은가?
가뜩이나 네임드 몹들이 경험과는 다르게 행동하고, 다른 힘을 가지고 나타나서 피곤한데 괜히 신경 쓸 거리를 늘리고 싶진 않았다.
“음...그럼 당분간은 그쪽에 무슨 일 안 터지나 신경 쓰면서 대기라는 거죠? 뾰족한 방법이 없다는 건 아는데 좀 그렇네요.”
“일단 유엔이나 협회를 통해서 슬쩍 협력 의사를 내비치긴 해보겠지만 아마 안 받아들일 겁니다.”
“영역의식은 확실한 놈들이니까. 전력으로 따지면 칼리프 클랜 선에서 정리될 놈들이 무슨 겉멋만 들어선.”
승하는 더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 모습에 쓴웃음을 짓던 류 현은 휴대폰이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류 현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자, 두 여자가 서로 귀를 붙인 채로 머리를 디밀어왔다.
그리곤 둘이서 멋대로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이런 타이밍에 이 양반이 전화 올 때면 다 안 좋은 소식 아니었어요?”
“얘가 류 현한테 전화 걸었을 때 좋은 소식 물어다준 적이 있긴 해? 난 기억 없는데.”
“어...저도 기억 없네요.”
류 현은 휴대폰 화면에 떠오른 발신인을 사정없이 씹고 있는 두 여자의 수다를 막기 위해 헛기침을 했다. “일단 받겠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자신도 그녀들과 같은 생각을 했다. ‘또 무슨 일이지.’
“예, 웨인 씨. 류 현입니다.”
-류 현님, 천공성이 떴습니다!
“예?”
거의 반사적으로 내뱉은 되물음에 웨인은 턱까지 밀려올라온 숨과 함께 말을 내뱉었다.
-뉴욕, 뉴욕에 떠 있던 그 환영성 말입니다. 그게 지금 관측이...아니, 제가 지금 그리로 가는 중입니다. 팀원들을 모아주셨으면 합니다.
웨인의 다급한 부탁에 류 현은 승하를 빤히 쳐다봤다. 말로 내뱉을 것도 없이 승하는 바로 백혜라를 찾으러 방을 박차고 나갔다.
“마침 모여 있었던 참입니다. 예, 조금 있다가 뵙지요. 조심히 살펴 오시길.”
전화를 끊은 류 현은 소리 없이 한 숨을 내뱉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화련이 툭 내뱉었다. 그녀의 얼굴에도 류 현과 마찬가지로 지울 수 없는 떨떠름함에 존재했다.
“이것 봐, 또 한 건 물고 왔네.”
이번만큼은 류 현도 그녀의 뒷담을 막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