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96화 〉탐식마(貪食魔) (296/429)



〈 296화 〉탐식마(貪食魔)

아마존 강의 하류. 강을 둘러싼 아마존의 정글은 평소와는 달리 조용했다.
‘대소환’으로 인한 괴수의 등장으로 아마존에 서식하는 수많은 동물들이 멸종 위기에 몰리거나 소리 소문 없이 멸종해버렸지만, 아직 남은 것들을 생각하면 이리 조용한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거기에 ‘대소환’ 이후  많은 인간들이 모종의 이유로 도망쳐 들어와 지은 건물들도 일제히 빛을 잃은 상태였다. 말소리는 물론, 인간들이 들여온 기계들도 일제히 멈춰서 침묵에 동참한 모습.
숲 전체가 숨을 죽인  같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숨죽이고 있는 숲의 일부를 영원한 침묵에 빠뜨리며 걸어 나왔다.

스스스- 스쳐지나가는 바람도 견디지 못하고 한 줌의 습기를 제물로 몸을 빼내야 했고, 디딘 땅은 허옇게 얼어붙은 외투를 입어야만 했다.
나무들은 얼어붙다 못해 견디지 못하고 터져나갔으며, 운 나쁘게 냉기의 영역을 빠져나가지 못한 동물들 또한 비슷한 신세였다.


걷는 것만으로도 참혹한 광경을 만들어내는 그 성질과는 반대로, ‘그것’은 외양만큼은 아름다웠다. 지나가던 이들을 붙들고 물어본 다면 백이면 백, 하는 말은 조금씩 다를 지라도 아름답다 라는 결론에는 동의할 정도로.
정글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드레스 차림의 ‘그것’은 아직 얼지 않은 강물 위로 발을 뻗었다.


쩌적! 찌직! 하이힐 굽이 닿기도 전에 강물 얼어붙어 발판이 되었다. 급조되어 거친 빙판 위를 ‘그것’은 미끄러지듯이 걸어 나갔다.
강이 끝나고 대서양에 닿을 때까지.

***


“흠...좃  거 같은데.”

일간지 1면을 장식한 기사를 이리저리 뜯어보던 지벡 건터는 조그맣게 자신의 감상을 내놓았다. 그로선 드문 일이었지만, 상황과 장소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 중심가의 한 건물 지하 사무실에 초대된 상태였다.
 사무실이 브라질뿐만 아니라 남미 대륙 전체를 아우르는 대부(代父)라 불리는 디에고 리베라 브렌트의 개인적인 공간이었으니, 분란의 여지가 있을만한 발언을 조심하게 되는 것도 당연했다.
그 이유가 두려움 때문에 입을 다물 대다수의 사람들과는 정반대였지만.

‘괜히 나불거리다가 귀찮은 일에 휘말리는 건 사양이야. 메신저 역할만 해도 귀찮아 돌아가시겠구만.’


팔자에도 없는 전령 노릇하게 된 것만으로도 짜증나는데, 정보를 캐내러  곳에서 정보를 뱉어내는 귀찮음까지 감수할 생각은 없었다.
귀찮음은 둘째 치더라도, 그랬다간 자신을 이곳으로 보내는  적극적으로 나선 화련에게 크게 밉보일 것이다.


그리고 그건 화련과 류 현의 눈치를 보느라 군말 없이 이곳까지 날아온 지벡에게는 좋지 못한 소식임이 분명했다.

‘어쩌다가  신세가...씨발.’

휴대폰을 조작해서 시간을 확인하던 지벡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이새끼 또 지랄이네. 이제 지가 회계장부도  안 보는 새끼가 무슨 시간 약속을 밥 먹듯이 어겨?’

이미 약속 시간에서 30분이 지났다. 개인적인 볼 일이었다면 이미 이 건물로 대낮에 캠프파이어를 벌였을 것이다. 이젠 디에고가 가진 압도적인 수적 우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까.
 뒤에 한국으로 돌아갔을 때 받을 추궁 때문에 극한의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극한의 인내심마저 바닥을 보이려는 때 방문이 열리며  명의 남자가 들어섰다.
 남자는 신장 차이가 여실했다.  쪽은 위로 쭉 뻗었을 뿐만 아니라, 풋볼의 라인맨처럼 덩치가 상당했다. 작은 쪽은 큰 쪽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작았는데 어깨가 좁은 편이라 상대적으로 더 작아보였다.


미간에서 턱까지 가로지르는, 얼굴 형태를 일그러뜨릴 수 있는  흉터가 아니었다면, 유순하게 생긴 사무직으로 여겼을 것이다. 흉터가 있는 지금도 모르는 이들은 그가 남미대륙의 대부로 불리는 디에고 리베라 브렌트 라고는 상상도 못하겠지만.
디에고가 지벡의 맞은편에 앉고, 덩치 큰 남자는 그의 뒤에 섰다.


“늦어서 미안.  아래로 아주 죽겠다고 난리를 쳐 대서 그거 좀 다독이느라고 늦었어.”
“네 야만적인 기 싸움 방식은 소문 다 났으니까 그런 식으로 변명할 필요 없어. 뭐라고 하든 간에 내 30분만큼 대가를 받아갈 거니까.”
“지금 브라질이 어떤 꼴인지 알면 그런 소리 못할 걸.”
“여기 새끼들이 어떤 상태든 내 알 바야? 그리고 도시로 들어오는 내내 그런 기미라곤 코빼기도 안 보였다. 이런 기사를 빼면.”

지벡은 오는 길에 구입한 일간지를 탁자 위로 툭 던졌다. 자세히 들여다 볼 것도 없이 1면에는 대문짝만한 사진이 박혀 있었다. 아마존이 아주 일부 구간이지만 꽝꽝 얼어붙은 사진이.


“그거야 여긴 내가  심혈을 기울인 도시니까 그런 거고. 서재 주변이 시끄러워서야 쓰겠어?”


빙긋 미소 짓는 디에고였지만, 지벡은 코웃음만 쳤다. 디에고가 이곳 리우데자네이루에 어떤 식으로 심혈을 기울였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파산과 ‘대소환’이라는 악재가 겹친 탓에 이 도시는 남미대륙 어느 곳보다 빠르게 타락했었다. 지금 유럽에서 자행되고 있는, 던전과 연관된 불법행위들이 우습게 보일 정도로.
때문에 디에고 리베라 브렌트가 브라질을 접수할  그 어느 곳보다 잔혹하게 숙청을 가했다.

그 여파가 지금까지 남아서 디에고가 운영하는 ‘본사’ 직원과 속사정을 모르는 관광객 외에는 머무는 이가 없는 유령도시화 한 상태였다.

“개소린 그만하고. 이거, 근처에 cctv 찍힌  하나도 없어?”


지벡은 신문의 사진을 짚으며 추궁했다. 이렇게 광범위 하게 얼어붙었으니, 이런 짓을 한 것의 모습이 분명 찍혔을 것이다.
‘대소환’ 이후 아마존은 괴수 천국이 되었지만, 그 안에 상주하는 인구도 역사상 최대치를 찍고 있었으니까.

“있으면 우리가 이렇게 대면하는 때가 미뤄졌겠지. 한 일주일 쯤.”
“...디에고. 한 때 같이 놀았던 정으로 충고하는 건데 이건 네가 감당할만한 일이 아니야. 감춰두고 니네들끼리 해결하려고 들다간 위신이 문제가 아니라 목이 다 날아갈 거다.”

남미 대륙의 대부에게 할 말이 아니라고 판단한 덩치가 곧바로 으르렁거렸다. 지벡은 본 척도 하지 않고 디에고만을 빤히 바라봤다.


“언제부터 그리 친절해졌는지 모르겠군. 유감스럽게도 아니야. 아까도 말했지만, 정확한 원인을 알게 됐다면 우리의 만남이 뒤로 미뤄졌을 거다.”
“야, 너희가 감당할 깜냥이...”
“우리랑 싸우고 싶어 하는 게 아니라면 오지랖은 그쯤 해둬. 자, 여기. 말로만으로는 네가 안 믿을 것 같아서 증거도 받아왔다.”

디에고는 태블릿pc를 탁자 위에 놓고 동영상 시켰다. 지벡은 미심쩍은 시선을 한  던졌다가 태블릿pc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동영상은 전형적인 cctv영상이었다. 힘차게 바다로 물을 흘러 보내고 있는 강의 모습이 계속 흘러나왔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뚝 하고 화면이 암흑으로 물들더니, 지직거리는 노이즈가 계속 되었다.


“이게 뭔데?”
“네가  그 기사에 실린 사진들의 현장에 있는 건물들에 달린 cctv화면. 근처에 있던 cctv가 300대가 넘는데 다  모양  꼴이야. 시간차가  있긴 하지만 단서가 될 만한 차이점은 없어. 다른 전자기기들도  먹통이 되어버렸고. 젠장할, 하이에나 새끼들이 이런 식으로 치고 들어올 줄은.”

투덜거리는 디에고와 달리 지벡은 표정관리에 온 힘을 다했다. 그는 이와 비슷한 현상을 이미 본 적이 있었다.


‘아프리카!’ 동시에 그의 머릿속에 불이 튀었다. 새빨간 적색 경고등이 요란하게 울었다.

‘염병, 네임드 몹이다.’ 네임드 몹까지는 염두에 두었다. 사건 발생 지역에서 거리도 제법 있고, 데스나이트 같은 케이스라면 최악의 경우에도 몸을 빼내서 미국이나 캐나다로 도망치는  가능했기에 별 불평 없이 브라질로 왔다.

그러나 그 계산 안에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전자기기를 망가뜨리는 능력까지 탑재한 놈은 없었다.


“일단 내가 너를 먼저 불러서 보여준 거다. 말 안 해도 알겠지만, 이 이야기가 새어나가면 우리 관계는 좀 많이 재미없어질 거야.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몰라도 이젠 이 일에서 관심 꺼.”


디에고는 아직 그 현상이 뭘 의미하는 지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전자기기를 망가뜨린 놈과 아마존 강에 때 아닌 화이트 크리스마스로 만든 놈이 별개라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전자는 이미 인간 짓으로 확정지은 듯 했다.
거기에 전자의 존재 때문에 후자도 플레이어 짓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고개를 드는 모양이었다.


이상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논리적인 추론이라 할만 했다.
흐르는 물을, 그것도 실개천도 아니고 아마존 강을 얼려버릴 수 있는 괴수가, 그것도 광범위하게 전자기기를 손상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녀석이, 주변에 떡하니 존재하는 인가들을 cctv만 부수고 지나쳤다는 추측은 추측이 아니라 망상이니까.
차라리 디에고의 사업을 노리는 놈들의 수작질과 우연들이 겹쳤다는 게 더 합리적이었다.
디에고가 속한 상식의 세계에서는 분명히 그의 추측이 옳았다.


하지만 데스나이트의 데스오러와 놈이 얼마나 인간 같이 행동하는  경험한 바 있는 지벡은  수 있었다. 이건 네임드 몹 짓이라고!


‘이놈도 데스오러 같은 걸 가지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이렇게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cctv가 외부손상 없이 깔끔하게 맛갔지. 씨발, 놈의 오러가 전자기기만 망가뜨리는 게 다 일리가 없는데...’

데스나이트가 휘두르던 데스오러를 다시 떠올리니 등허리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일단 이 최대한 빨리 이 나라를 뜨는 게 우선이다.’

아직도 데스나이트가 나오는 악몽을 꾸곤 했다. 브라질에  놈이 얼마나 강한지는 모르나, 그런 끔찍한 기억을 추가할 가능성조차 용납하고 싶지 않았다.


“출장비랑 내 시간 30분 값을 잘만 쳐준다면야.”
“그거야 어렵지 않지. 야디, 가져와.”


덩치 큰 사내가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문을 열고 나가 얼마가지 않아 다시 돌아왔다. 돌아온 사내의 양 손에는 007가방 두 개가 들려있었다. 사내가 탁자 위에 가방을 내려놓자, 디에고가 말했다.


“오른쪽은 무기명 채권. 미국이랑 일본 거 적당히 섞어서 100만 달러. 왼쪽은 네가 전에 피던 거 최신 버전. 전이랑 똑같이 피지?”
“어어.”
“그럼 한 세 달은 갈 거다. 이건 떨어지면 연락해. 앞으로  년은 무상으로 대줄테니까. 30분 기다리게 한 대신이야.”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지벡은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디에고가 당장이라도 떠날 것 같은 모습에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붙잡았다.

“뭐가 그리 급해? 내가 직접 봐줄 수는 없어도 접대할 준비는 끝내놨어.”
“바빠서.”
“바쁘긴 무슨. 데스나이트 대책반 뭐시기도 이제 해체돼서 한 동안은 아무도 너 안 건들 거 아냐. 온 김에 놀다가. 이대로 가면 내가 좀 미안하지. 조직 일 때문에 내가 좀 까칠하게 굴었다고 화났냐?”

디에고는 나름 호의를 보이는 것이었지만, 지벡 입장에서는 짜증날 뿐이었다. 당장이라도 이 나라를 뜨고 싶은데, 놀다가라니.
지금 상황이 어떤지 몰라서 하는 소리겠지만, 욕이라도 퍼부어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이 촌구석 먹었다고 귀도 닫고 사냐? 그 대책반 중간에 개판 나서 지금도 뒷수습 중이다.”
“그러길래 왜 안 어울리는 짓을 해서 사서 고생이냐?”

지벡은 대답대신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보였다. 디에고는 픽 웃더니 문을 열고나가는 지벡에게 손을 살래살래 흔들었다.

“이번 일 끝나면 내가 연락하지. 간만에 거하게 놀아보자고.”


지벡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은 이미 최대한 빠르게 이 나라를 뜨는 것으로 가득한데다가, 떠오른 말이 도무지 내뱉을 수 없는 성격의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네가 이번 일 끝날 때까지 살아있을 수 있으면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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