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4화 〉탐식마(貪食魔)
웨인 크로이츠는 퀭한 눈을 한 채 머그컵을 기울였다. 단맛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씁쓰레한 커피향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너무 남용한 탓인지 몽롱한 정신이 돌아오는 효과는 미미했다. 웨인은 미간을 주무르며 의자에 푹 기대었다.
‘전사나 암살이 아니라 쇠약사를 걱정하게 될 줄은...’
그것도 현장이 아니라 책상 앞에서 그런 위기감을 느끼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원래 격무에 시달리는 편이긴 했지만, 그들이 등장한 이후로는 격무의 차원마저 달라졌으니 말이다.
그리고 지금 그의 골치를 썩히고 있는 것도 그들에 대한 문제였다.
-대체 헌팅 레벨이 몇이야? 200? 300?
⤷저 유격대에 속한 파비오 룸펜 헌팅 레벨이 250이 넘는가 그런데 데스나이트 근처도 못 갔다던데.
⤷그럼 400쯤 잡아야 하나?
⤷멍청이들아 딱 보면 모르겠냐. 이건 헌팅 레벨을 운운할 수준의 괴물이 아니라고.
-저런 괴물이 있는데 왜 그렇게 오래 쩔쩔 멘 거야?
⤷부상 때문이라던데. 아프리카 원정대에 갔다가 바로 우크라이나로 직행한 거래.
⤷누가 그러는데?
⤷가디언 지에서.
⤷그 새끼들 완전 플레이어 후빨러들이잖아. ‘위스프’도 두둔하던 쓰레기새끼들. 그걸 믿고 싶냐?
⤷그럼 넌 어디 보는데?
⤷당연히 타임즈지!
⤷오, 신이시여. 저 멍청이에게 작은 지혜를 내려주소서.
-하나는 확실해졌군. 발정난 개(파비오)나 촉새(지벡)는 좃도 아니라는 거.
⤷그 둘이 좃밥인 게 아니라 영상의 동양인이 좀 심하게 괴물인 거 같은데. 저 데스나이트는 폭격 다섯 번 맞고도 안 뒈진 괴물이라고.
⤷그냥 상성이 나빠서 못 잡은 거 아냐? 동영상 상에서는 그냥 가지고 노는데?
⤷진심으로 하는 소리냐? 누가 이새끼한테 bbc 다큐멘터리 링크 좀 쏴줘. 영상 이름이 잘 기억이 안 난다. 대체 인터넷으로 뭘 하길래 올해 초등학교 들어가는 내 조카도 아는 걸 모르냐. 폭격 맞고도 안 죽을 정도로 단단한 놈이면 스트라이커들은 더 죽어난다고 멍청아.
⤷검성이랑 같은 나라 출신이라고 그랬나? 그 좃만한 나라에 괴물이 몇 이나 되는 거야?
⤷근데 둘 다 자기네 나라 존나 싫어하는 거 같던데.
⤷뭔 소리야?
⤷둘 다 확고한 소속이 없잖아. 검성은 ‘예거즈’ 나온 뒤로 아예 대놓고 협회랑만 놀고. 자기네 나라 일은 받지도 않는 것 같던데.
⤷그게 뭔 상관이라고. 플레이어 놈들이 뭐 그런 거 신경은 쓰는 줄 아냐? 돈만 밟히는 괴물새끼들이지. 그 병신들이 꾸물거려서 우리 농장 땅 다 뒤집혔어. 다 죽었으면 좋겠다.
⤷네 다음 순혈주의자.
-헌팅 레벨 152 현역 플레이어다. 질문 받는다.
⤷야 저게 가능한 거냐? 합성 아님?
⤷너네 클랜 마스터랑 비교하면 어때?
⤷데스나이트 헌팅 레벨 매기면 얼마나 뜰 거 같냐?
⤷우리 클랜 마스터도 저 유격대 헌팅 레벨 커트라인에 짤려. 미친놈들아.
⤷헌팅 레벨? 오, 제발 인터넷으로 이러고 놀지 말고 뉴스 좀 찾아봐라. 대가리 위에 이름 박힌 놈들은 측정 불가라고! 잡은 새끼들이 영상에 나온 괴물이랑 그 괴물이 데리고 다니는 팀원들뿐인데 무슨 헌팅 레벨이야. 우크라이나 애들은 운 좋은 줄 알아야해. 같은 네임드 몹 뜬 아프리카에서 탈출한 애들은 자기 고향으로 반품 안 되려고 발악 중이라고. 다 뒈질 수도 있었는데 살려놨더니 그 지랄이라니, 오 신이시여 그 좃같은 땅에 이름 박힌 괴수 한 마리 더 떨궈주소서.
⤷이새끼 가디언 앞잡이 아냐? 아프리카 소식은 ‘위스프’ 새끼들이 저지른 테러 때문에 끊긴 거라고. 내 친구가 타임즈 기자라서 잘 알아.
⤷그리고 네 머리통에 들어차 있는 건 뇌가 아니고 마요네즈고 말이야.
영상이었다.
류 현이 데스나이트 체페슈를 일 대 일로 찢어 죽이는 영상.
문제는 그 영상이 유튜브에 떡하니 유포되고 있고, 댓글도 아주 활발하게 달리고 있다는 것.
원래라면 당장에 정보 통제령을 내리고, 바쁘게 이 나라 저 나라에 전화를 걸고, 구글에 압박을 넣어서 영상을 내렸을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그렇게 했어야 했다.
‘결국 영상에 대한 조치를 취하라는 말은 없었다. 아마...그쪽 중 누군가가 시작한 일이라는 뜻이겠지.’
오늘 통화한 류 현이 그에 대한 언급을 피하며 통화를 끝마치지 않았다면 그랬을 것이다.
‘뜬금없이 연락 금지 통보를 받을 때만 해도 뭔가 했었는데...혹시 팀 내분이라도 난 건가?’
화련이 개인적으로 불러내서 연락 금지 통보를 때린 것이 얼마 지나지 않은 일이다. 아프리카의 일을 해결하자마자 쉴 틈도 없이 한국으로 날아온 웨인에겐 꽤 가혹한 처사였다.
무슨 문제가 있는게 아닌가 하고 차마 직접 들여다볼 생각은 못하고 외곽에서 빙빙 돌면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는데, 이 영상이 터진 것이다.
바로 어젯밤에.
웨인이 영상을 확인했을 때는 이미 조회수가 백만 단위를 찍었을 때였다. 어떻게든 수습을 해보려고 협회 위원회 영상회의를 걸고, 여기저기 연락을 찔러보는 중에 류 현에게 연락이 왔었다. 그게 오늘 이른 아침 일이었다.
그런데 류 현은 웨인이 기다리던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영상에 대한 언급은커녕, 화련이 무례하게 군것에 대해서 사과를 해왔다. 그러면서도 당분간은 외부 활동은 힘들 것 같다며 통보 아닌 통보도 같이.
‘이게 터질 줄 알고 있었거나, 아니면 터뜨린 사람에게 언질을 받은 거겠지.’
류 현이 터뜨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그렇게 진행할 이유가 없다는 제 논리에 막히고 말았다.
‘뭘 추구해서 푼 것이든 간에 영상만 보면 협회와 대치되는 목적은 없어 보여. 그렇다면 그 남자 성격에 이용할 수 있는 라인을 내버려 둘 리가 없다.’
그렇다면 그 본인이 벌이거나 지시한 일이 아니라는 뜻이 된다.
그럼에도 류 현은 영상을 수습해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댓글창 반응만 봐도 긍정적인 반응은 없다시피 한데도 방치를 택했다.
몰라서 내버려 둔다기에 는 영상의 노출도가 너무 높았다. 원본 영상 벌써 조회수 천만단위 진입에, 다른 플랫폼에는 아예 메인에 떡하니 걸려있는 상황. 그 중 어디에도 긍정적인 반응이 주인 곳은 없었다.
‘우크라이나에서 있었던 일 때문인가? 아니야, 그런 걸로 자포자기 할 남자는 아니다.’
트라우마에 대해서 사람의 정신력 운운하는 것만큼 우스운 건 없겠지만, 웨인은 확신했다.
‘묵인한 이유를 알고 싶긴 한데...추론거리가 너무 적군.’
그는 책상을 톡톡 두드리면서 떠올릴 수 있는 추측 재료들을 전부 펼쳐보았지만 연관점은 딱히 보이지 않았다.
‘일단은...부정적인 이미지가 더 확대되는 것부터 막아야겠군.’
생각만 해도 한 숨이 나오는 미션이었지만 손 놓고 있을 수도 없었다.
“조금만이라도 속내를 드러내주면 좋을 텐데 말이지.”
이루어질리 없는 속내를 내뱉어 보지만, 돌아오는 것은 허망함뿐이었다.
웨인은 고개를 내젓고 휴대폰을 쥐었다. 그리고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예, 윈스턴 경. 웨인입니다. 도움이 필요합니다.”
***
승하는 뚫어져라 들여다보던 태블릿을 놓으며 참았던 숨을 훅 토해내었다.
“허어...”
“무슨 허어...에요. 그런 눈으로 사람 보지 말아줄래요?”
화련이 샐쭉 눈을 흘겼지만 승하는 어이없다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녀가 놓은 태블릿 pc에서는 영상이 마저 재생되는 중이었다. 류 현이 데스나이트의 머리통을 뽑아내고 있는 장면이.
“전부터 생각했던 거지만 너 진짜 은근히 막 나가는구나?”
“언니한테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은데요.”
“야, 그래도 난 내가 커버할 수 있는 규모로만 사고 치거든?”
“자기도 사고 친다는 인식이 있는 상태에서 쳤다는 거네요. 와...”
“야, 왜 갑자기 이야기가 그리로 새? 그리고, 너도 이번에는 똑같잖아. 아니, 이건 커버도 안 되니까 나보다 더 심하지!”
“필요해서 한 일이에요.”
단언하는 화련의 얼굴에는 망설임이라곤 없었다. 그 곧은 눈을 보고 있자니 경도되는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승하는 드물게 슬쩍 눈을 피하며 말했다.
“류 현은. 별 말 없어?”
“부르시더니 한 숨만 5분 넘게 쉬다가 몇 마디하고 끝났죠.”
“뭐래?”
“언니 닮지 말고 제발 사고 칠거면 신호라도 보내 달라던데요.”
승하의 표정이 확 일그러지자 화련이 기다렸다는 듯이 히죽 웃었다.
“아니, 걔는 왜 나만 가지고 그런데? 사고 친 규모를 보면 네가 훨씬 더 크잖아!”
“억울하면 평소에 잘 하든가요. 그치, 희란아?”
희란은 대답하지 않고 어색하게 웃어 넘겼다. 퉁퉁 부은 얼굴이 된 승하가 투덜거렸다.
“그래서, 왜 그랬던 건데? 너 지벡 엄청 싫어하지 않았어?”
지벡이 언급되자 그에게 꽤 시달린 경험이 있는 희란이 움찔했다. 화련이 그런 그녀의 어깨를 살살 쓰다듬었다.
“끔찍하죠. 그래도 이용가치가 없는 건 아니잖아요? 그런 인간쓰레기라서 써먹을 곳도 있는 법 아니겠어요?”
“와, 말하는 거 봐. 류 현이 이걸 들었어야 했는데.”
“일러바쳐도 별 상관없어요. 마스터 반응 보면 아주 생각 안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고.”
“누가 이른데? 좀 많이 바뀌었구나 싶어서 해 본 소리지. 근데 류 현이 진짜 그놈도 안고 가겠데?”
“안고 가기는 무슨. 그냥 근처에 있는 거 안 쳐내고 써먹을 때 써먹으면 그만이죠. 뭐하러 그런 인간을 신경 써줘요?”
승하는 조금 질린 표정이 되었다.
‘얘는 생긴 거랑 행동하는 게 점점 반대가 되네. 기준 밖에 있는 인간들은 칼 같이 자르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류 현이 하듯이 대하네. 이거 그냥 냅둬도 되나?’
“표정이 왜 그래요? 무슨 귀신 본 거 같은 얼굴인데.”
“귀신은 무슨, 귀신보다 더 끔찍한 놈들 잡는 게 우린데. 그냥 좀 놀라서. 네가 그런 말하게 될 줄은 몰랐거든. 전 같으면 다른 길을 찾았으면 찾았을 텐데.”
“그냥...이거 저거 가리고 있을 처지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거죠.”
어색하게 쓴웃음을 지으며 말하는 화련을 빤히 바라보던 승하는 턱을 한 손에 괸 채로 물었다.
“앞으로 어쩔 거야? 설마 이걸로 끝?”
“왜요. 말하면 같이 사고치고, 같이 마스터한테 깨져 주게요?”
“어. 그래야 할 것 같아서.”
“...지금 당장은 뭘 더 할 필요는 없죠. 뭘 더 끼얹으면 이상한 시너지만 더 날 것 같고요.”
“하기야...이 반응만 봐도 여기에 뭘 더 집어넣든 의도한 반응은 안 나오겠네. 완전히 맛탱이가 갔어. 근데 이거 진짜 괜찮을까? 류 현을 버튼도 없고, 지 맘대로 걸어 다니는 전략핵 취급하는 분위기인데. 원래도 이미지가 막 영웅 취급은 아니었다지만...”
“반항할 줄 모르는 사냥개 취급보다는 이쪽이 낫죠. 적어도 이렇게...”
화련은 제 휴대폰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휴대폰 화면에는 쓰레기(지벡 건터)라는 이름이 떠올라 있었다. 스피커폰 모드로 전환시킨 후 화련은 전화를 받았다.
이쪽 상황을 알 리 없는 지벡은 연결되자마자 본론부터 꺼내들었다.
-그쪽이 맞았어.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그쪽 네 대장한테 뭘 쥐어 줘야 대화를 시작할 수 있냐고 내 계좌에 소개비 쏴주더라. 말이 대화지 거의 호랑이 조련사한테 호랑이 소개해 달라는 분위기야. 우크라이나 내부 분위기도 장난 아니고. 우리 공격한 놈들 공개 처형하자는 얘기까지 나오는 중. 어떻게 알았는지, 우크라이나 정부가 사례도 안 했다는 소식까지 퍼져서 난리도 아니야. 당장 보복이 들어올 거라는 둥. 아, 반응들 보면 호랑이가 아니라 살아있는 핵폭탄 취급이네.
“잡설은 됐고, 얼마 받았는데요?”
-무기명 채권 5천만 달러 어치. 전화 연결 성공하면 이만큼 더 준다는데.
“두 배는 더 달라고 해요. 아니, 최소 두 배는 뜯어내요. 더 뜯을 수 있으면 더 좋고. 마스터랑 연결시켜 줄 테니까.”
-어, 그래도 되나? 이번 일로 그쪽네 대장이 뭐라고 안 해? 난리 났을 거 같은데.
“그건 내가 해결할 문제고, 그쪽은 그쪽 일에나 신경 써요. 하는 시늉만 해도 그쪽한테는 나쁠 거 없잖아요? 마스터랑 연결 시도 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이미지만 박혀도 그쪽 죽이려는 스폰서들이 한 번은 더 생각해볼 텐데.”
-흠흠. 그야 그렇긴 한데, 중간에서 힘쓰는 나한테 뭐 없나? 뭐 큰 걸 바라는 건 아니고...
“소개비 5천만 달러 그냥 그쪽이 먹고 안 받은 척 해요. 마스터도 거기까진 안 캐물을 테니까.”
지벡이 영혼을 다해 성사시키겠다는 둥 헛소리를 해대자 화련은 통화를 종료했다.
“이렇게 아주 입 싹 닦거나, 이쪽에 돌 던진 인간들이 무죄방면 되는 꼴 같은 걸 더 안 봐도 되니까요.”
작은 어깨를 들먹거리며 말하는 화련을 향해 승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그래. 확실히 이쪽이 낫긴 한 거 같다. 류 현 전생 얘기 들을 때마다 속 터졌는데, 이번 건 마음에 드네. 그래서 걸어 다니는 핵폭탄 다음은 뭐야?”
“당장은 여기서 뭘 더 추가할 생각은 없어요. 이것만으로도 충분해 보이기도 하고.”
“당장은 말이지.”
“네, 뭐 그렇죠. 당장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