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93화 〉탐식마(貪食魔) (293/429)



〈 293화 〉탐식마(貪食魔)

“하아...”


류 현은  숨과 함께 손으로 눈가를 덮었다. 한 숨을 내쉬지 않으려고 했는데 계속해서 한 숨이 새어나왔다. 손가락 틈으로 힐끗 보자 빤히 시선을 보내고 있는 화련이 보였다.

“아니 대체 왜...”
“말씀 드린 대론데요.”
“......”
“근신이든 뭐든 말씀하신대로 하겠어요.”


그런  없습니다. 류 현은  말이 곧바로 입 밖으로 튀어나갈 것 같았다.
용잡이 팀에는 팀원을 벌주는 규칙 같은 건 없었다. 있는 건 분배에 대한 계약뿐인데, 초기에 작성한 것을 두어 번 고쳤을 뿐이고 이제와선 거의 의미도 없는 수준.
구성원의 지분 구조도 정립 안 된 팀인데, 징계에 관한 규정을 만들었을 리가 만무.


‘솔직히 그 땐 이 팀이 계속 갈 수 있을 지도 긴가민가했었으니까.’

회귀라는 비밀을 혼자만 품고 있었을 당시에는 팀에 대한 확신 같은 건 있지도 않았다. 어지간하면 그녀들을 안고 계속 가겠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여의치 않다면 결별한 뒤로도 전생 같이 험한 일을 안 당하도록 몰래몰래 케어 해줄 생각이었다.
회귀라는 비밀을 공유하고, 여기까지 온 것 자체가 상정 해두지 않은 기적 같은 상황.


류 현은 그 기적을 만드는 데 크게 일조한 여자를 내려다 보며 다시금 한 숨을 푹 내쉬었다.

“제가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거 알고 저지르신 거 아닙니까.”
“그건 아니에요. 우리 팀에 징계 규정이 없긴 해도, 마스터가 말하는 대로 근신이든 뭐든 할 생각으로 지른 거랍니다.”

사고를 친 이가 죄를 청하는  치고는 뻔뻔해 보이는 태도였지만 그걸 책잡기도 뭣했다. 화련은 정말로 징계를 받아들일 생각으로 보였으니까.


“미리...말씀이라도 해주셨으면 대충 입이라도 맞췄을  아닙니까.”
“그럼 또 마스터는 조금만 곤란한 일이 터져도 연락을 받고 뛰쳐나가셨겠죠.”
“...설마 연락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까?”
“네.”

미소 지으며  부러지게 대꾸하는데 거기다 대고 뭐라  말이 떠오르질 않았다.


‘왜 그랬는지 묻는 게 우선이겠지만...이렇게 까지 해놓고  할 것 같진 않네.’

화련도 이 일에 대해서 이것저것  말이 많을  분명한데도 가타부타 별 말이 없는 걸로 봐선 단단히 마음먹고 지른 게 분명했다. 그녀의 성격을 감안해보면 말을 안 하고 일을 친 것 자체가 이유를 말 안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거나 다름없었다.
결국  현은 그녀가 원했을 말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근신...하라고는 까지는 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일주일 간 용잡이 팀으로서 이름을 행사하는 걸 금지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병원 출입 금지라고는 안 하시네요.”


별로 주눅 든 것 같지도 않은 화련의 모습에 류 현은 이게 맞나 싶은 의구심을 억누르며 대꾸했다.


“말 상대가 사라지면 누나가 남아도는 기력으로 절 쪼아댈 거 아닙니까.”

 그래도 요즘 침대 밑을 확인해대서 피곤해 죽겠는데. 류 현이 투덜거렸다. 화련이 그런 그를 보고 킥킥 웃었다.

***

“어, 음. 좀 짜증  거라는  아는데, 다시 한 번  확인하지. 진짜 이거 풀어?”
-그렇게 의심가고 쫄리면 왜 푸는 지 이유도 물어보지 그래요?

말로는 물어보라고 하지만 수화기 너머의 여자의 목소리는 냉랭했다. 정말로 물어보면 짜증을 부릴 거라는 티를 팍팍 냈다.
하지만 그 정도로 물러선다면 지벡 건터가 아니었다. 지벡은 기꺼이 머리를 디밀기로 했다.

“오, 그래도 되나. 그럼 좀 듣고 싶은데. 대강 짐작은 가지만, 그래도 확실히 알아야 나도  퍼뜨리지 않겠어?”


마지막에는 상대가 거부할 수 없도록 살살 꼬드기는 말도 잊지 않았다.
‘보아하니 팀 이름을 쓸 수 없는 상황인가 본데...아무것도 모르고 끌려 다니다가 꼬리 자르기 당하는 건 사양이라고.’
통화 상대인 화련 단독으로도 어지간한 대형 클랜 하나는 갈아 마시고 남을 괴물이지만, 아무래도 개인으로 나서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당장이야 데스나이트 후속 조치반 대장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지만, 임시니 시간이 지나면 반납해야할 테고 그 뒤에는 스폰서들의 보복을 걱정해야할 처지니까. 원한을 사거나, 문제가 생길 거리는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쯧...
“뭐, 사실 그냥 유튜브에 올리기만 해도 엄청 잘 퍼지겠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방향성이라는 게 있지 않겠어? 약간의 편집만 가해도 이미지가 확 달라지니까.”
‘그래도 괴물이라는 이미지는 못 벗겠지만.’

지벡은 노트북을 툭툭 두드리며 생각했다. 이 안에 있는 영상은 어떤 조작을 가해도 찍힌 인간이 괴물이라는 이미지 외에는 긍정적인 이미지를 주는  불가능한 물건이었다.

-공포.
“응?”
-공포를 원한다고요.
“어...내가 잘  들은 건지 좀 확인해 줄래? 공포 라고 들은 것 같은데?”
-제대로 들은 거 맞는데요.
“허...”

닳고 닳은 그조차  빠지는 소리를 낼 수밖에 없는 예상외의 말이었다.
‘여론이 이렇게 개판인데 거기다가 대고 공포 이미지를 들이붓겠다고?’
‘얘 그 때 일로  맛간 거 아냐?’


류 현의 연락처 번호가 절로 떠오를 정도였다. 당장 그에게 전화를 걸어 팀원 중 쥐톨만한 여자가 정신적으로 심하게 맛이 갔다는 걸 알려야   같았다.

-전에 그쪽이 말했었잖아요? 일반 사람들이 우리를 사냥개로 안다고. 그래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거라고.
“어, 그렇게 말하긴 했었는데...”


그게 지금 들끓는 여론에 이런 영상을 푸는 것과 무슨 관계인 건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지벡은 자신이 뭔가 잘 못 본게 있나 싶어 동영상을 재생시켰다.
도입부는 듣는 것만으로도 시체 썩는 내가 나는 것 같은 언데드 특유의, 폐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였다.


얼마가지 않아 화면이 휙휙 돌아가더니 시커먼 덩어리들을 비추었다. 하나는 회색빛으로 불타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여러 개가 검붉은 불꽃에 휩싸여 있었다.
류 현과 데스나이트 무리가 부딪히기 시작하자 전체적으로 고요하던 영상이 소란스러워졌다. 그것을 들었는지 화련이 맞춰서 말을 시작했다.


-그럼 최소한 그 사냥개가 그냥 만만한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려줘야 말이라도 섞어볼 생각이 들지 않겠어요?
“아니...말이야 쉽지...”

대중의 공포를 조절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금 유럽 여론이 들끓는 것도, 데스나이트가 입힌 피해에 공포가 더해져서 정신적인 도피처를 찾다가 엄한 플레이어들을 화풀이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니까.
조절할 수 있다면 애초에 지금 같은 상황이 벌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유럽의 힘있는 국가들 중에서 지금 이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서 여론 조작을 시도 안 하는 곳이 없을 정도니까.
그럼에도 여론은 계속 악화일로를 걷는 중이다. 진지하게 군을 움직이는  고려하는 곳도 나올 정도로 말이다.


-조절 같은 건 필요 없어요. 애초에 기대도  했고, 할 수도 없을 테니까.
“...방금 그 말 때문에 신뢰도 팍 깎인  알지? 방금 그 발언으로 손 떼고 싶어졌는데.”
-거절해도 상관은 없어요. 영상은 이미 받았으니까.


‘염병,  못 걸렸나.’


뜬금없이 전화를 걸어서 데스나이트와의 전투 장면을 찍은 영상을 요구할 때부터 느낌이 좋지 않았다.
유격대 대원 중에서 허가도 없이 전투 장면을 몰래 촬영한 놈이 있을 거라는  유격대를 한 번만 둘러봐도 알만한 일이긴 했지만, 이 타이밍에 그걸 압수하고 통제하라는 것도 아니고 영상만 요구한 것 자체가 좀 이상했다.


‘그 일로 문제가 좀 생길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이렇게 눈깔이 돌아갔을 줄은...’


지벡의 망상회로가 맹렬하게 돌아가려는 때였다.


-무슨 생각하고 있을지 대충 감은 오는데, 솔직히 그쪽이랑 입씨름 할 기운도 없고. 딱 본론만 말하죠. 이번  도와주면 그 쪽이 한국으로 넘어올 때 최대한 힘 써줄게요.
“그 대신 책임은 내가 떠맡고?”
-내가 그쪽 뭘 믿고요? 책임을 떠맡을 생각도 없으면서. 그냥 잘 퍼뜨리기만 해요. 책임도, 마스터한테  쪽에 대한 설득을 하는 것도 내가 다 질 테니까.
“내가 그 말 그대로 돌려주고 싶은데.  그   믿고 진행해?”
-이미 녹음하고 있을 거 뻔히 보이는데 무슨.

지벡은 찔끔했다. 그녀의 말대로 전화를 받았을 때부터 녹음 기능을 켜둔 상태였다. 스폰서들을 배신할 생각을 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는 초긴장 상태였고, 너무 오래 지속된 긴장은 편집증 증세로 나타났다.
자신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거나 하는 인간들과의 대화는 전부 녹음하는 식으로 말이다.

-믿기 싫으면 말아요. 내가 그냥 영상만 풀어도 그쪽 딸려 나올 수 있을 것 같아서 기껏 생각해서 한 말인데 의심은.
“아, 아니, 누가  한데? 하지. 해. 한다고. 그런데 말이야...”
-또 무슨 트집을 잡으려고...질질 끌지 말고 그냥 말해요.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이대로 그냥 둬도 알아서 당국에서 가라앉힐 일이라고. 아닐지도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 가라앉긴  거야. 그 반면에 그쪽은 이번일로 백프로 된통 깨질 거고.”
-기분 더러워서요.
“뭐?”
-평생 반격 한  못해보고 맞기만  사람이  맞기만 해야 한다니까 기분 더러워서요.
“아니 그건 또 무슨 뜬금없는...”
-그쪽이 알 필요는 없어요. 그냥 영상이나 잘 퍼뜨려줘요. 나도 마스터한테 그쪽 어떻게 포장할지 열심히 생각할 테니까.

통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지벡은 어느 새  현이 데스나이트 체페슈의 머리통을 여섯 번째로 잡아 뜯는 장면에 도달한 영상을 한 번 슥 보고는 한 숨을 푸욱 내쉬었다.
어쩌다가 이런 괴물들과 연관된 것인지, 어쩌다 이런 괴물들한테 의탁해야하는 처지가 된 것인지 한숨만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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