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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2화 〉탐식마(貪食魔) (292/429)



〈 292화 〉탐식마(貪食魔)

“흐흥흥-”

안개 때문에 팔이 닿는 거리조차 보이지 않는 상태였지만 승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그냥 안개도 아니고, 피부에 들러붙어 천천히 체력을 갉아먹는 것임에도 그녀는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제 몸을 감싸고 있는 회색빛 오러를 믿었기 때문에 보일 수 있는 여유였다. 실제로 안개는 승하의 몸에 닿지도 못하고 회색빛 오러에 닿자마자 증발했다.


승하는 칼에 들러붙은 살점들을 툭툭 털어내며 말했다.


“역시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이만한  없다니까. 보급이고 페이스 분배고 신경 안 써도 된다니 진짜 스트레스 해소로는 딱이야.”

현존하는 던전 중 가장 높은 등급인 화이트에서 지껄일 말은 아니었지만 아무도 승하의 말에 반발하지 못했다.

평소에는 검에 살점 같은  들러붙을 새도 없을 정도로 살벌한 마력검 컨트롤을 하는 그녀였는데, 지금은 대충대충 휘둘러서 살점을 덕지덕지 달고 다닐 정도인데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시야를 가리면서 동시에 체력을 깎아먹는 안개도, 세심한 마력 컨트롤로  딛는 곳에 발판을 만들어야 하는 특수 늪필드도 그녀에겐 아무런 방해가 되지 못했다.

단칼! 이 던전 내에서 그녀의 행보는 그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있었다.
어떤 놈도 그녀의  검을 버티지 못했다. 단숨에 숨이 끊기느냐,  꿈틀거리다가 죽느냐 차이만 있을 뿐이었다.


[크우우우!]

늪지대 전체가 들고 일어나는 것 같은 진동과 함께 지룡이 늪을 뚫고 모습을 드러내었다. 화살표 두 개를 접붙여 놓은 것 같은 대가리가 놈의 연륜과 강대함을 여실히 보여줬지만 승하는 여전히 싱글벙글 이었다.

“와, 크네.  정도면 아프리카에서 잡은 것보다 무게가 거의 두 배는 더 나가겠는데?”


[캬아아아!] 전생에서는 도시 살해자라는 별칭마저 붙은 놈을 눈앞에 둔 것치고는 지나치게 여유로운 태도였지만 다른 두 명의 인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검무를 추는 것처럼 천천히 검을 끌어당겼다가 앞으로 내리긋는 승하의 모습을 유심히 관찰할 뿐. 그녀들이 기대한 마력적인 작용은 거의 눈에 보이지도 않았지만.

스읏- [크우...끄르륵-] 푸홧! 쩌억! 꾸웅!

단칼!
보스몹 버프를 받은 지룡도 예외가 되진 못했다. 승하가 검을 갈무리 했을 때, 지룡은 머리부터 가슴께까지 반으로 절단된 몸뚱이를 가누지 못하고 대지에 몸을 눕혔다.
놈의 강인한 생명령이 이 지경이 되고도 아직 죽음 앞에서 버티곤 있었지만, 머지않은 미래의 일이  게 분명해 보였다. 앞발이 잘려도 이틀이면 다시 돋아나는 재생력이 전혀 듣지 않고 있었으니까.


“수, 수고하셨어요. 언니.”
“아냐, 아냐. 그 소린 내가 해야지. 갑자기 부탁한 건데 들어줘서 고마워, 희란아.”
“...차라리 그냥 이 버프 받고 퍼플 솔플이라도  걸 그랬나. 괜히 고집 부린 꼴이네.”

안개 너머에서 시야 안으로 걸어 들어온 두 여자를 향해 승하가 손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둘로 쪼개진 지룡의 대가리 절단면을 살피는 백혜라의 목소리에는 허망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승하는 혜라에게 어깨동무를 건채로 실실 웃었다.

“에이, 무슨 말을 그렇게 해. 그리고 거기 들어가 봐야 경험치 먹어봐야 얼마나 먹는다고. 퍼플  번 돌아도 이번에 아프리카에서 먹은 거 반도 못 채우잖아?”
“그거야 내가 한 것도 없고...”
“에헤이, 그런 소리 말고. 어때? 괜찮은 것 같아?”


혜라는 눈을 돌려 승하와 마찬가지로 제  위로 타오르고 있는 회색빛 오러를 봤다. 그녀는 이번이 첫 경험이었다.

아프리카에서는 웨인 크로이츠와 퇴로를 잡으려고 뒤로 빠져있었고, 우크라이나에서는 세 여자가 언데드 군단을 농락하는 동안 류 현의 경호를 서느라 버프를 받을 일이 없었다.
사실 우크라이나에서는 받으려면 받을 수 있었지만, 회색빛 오러 버프를 받고  이후 세 여자가 보인 태도 변화가 눈에 밟혀서 피해왔었다.

뭐라 말하기 힘든 미묘한 변화였지만 셋 다 류 현을 더 신경 쓰게 된 듯 했다. 이전이라고 신경  쓰는 건 아니었지만, 적극성 부분이 조금이나마 더 커진 것처럼 보였다. 이전보다  기대는 느낌도 받았고 말이다.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느낌뿐이었지만, 어쨌든 그녀가 느끼기에는 그랬다.

결국 고민 끝에, 이미 이 팀에서 발을   없고 전력 강화를 꾀할  있는 버프를 느낌만으로 거부할 수는 없어 오늘 첫 체험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제 느낌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런  받고 태도 변화가 없는  더 이상하지.’


던전 안에서 숨만 쉬고 있는데도 생기가 채워지는 것 같았다.
거기에 뭐라 말로 설명하기 힘든 거대한 존재가 자신을 포용하고, 보듬어 주는 것 같은 가슴이 뿌듯해지는 포근함.


절대 무너지지 않는 성벽의 비호 아래 있으면 이러할까? 종교인들이 오매불망 그리워하는 초월자의 품 안이 이러할까?
배움이 짧아 형언할 수는 없지만, 이것이 해롭지 않다는 것만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평생 이 상태로 있고 싶은 기분이었다. 백혜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구 끄덕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
“이게 대체 뭐에요?”
“보시는 대로 레시피죠.”
“...지금 제가 글자를 못 읽어서 여쭤본  인  같아요?”
“흠흠...”

류 현은 헛기침을 하며 화련의 시선을 피했지만, 그곳에는 못 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세아가 있었다. 류 현은 진퇴양난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는  덜 부담스러운 화련에게로 시선을 되돌렸다.
 여자의 시선을 견디다 못한  현은 더듬더듬 변명을 늘어놓았다.


“누워만 있자니 무료하기도 하고, 한 동안 시간이 없어서 이런 걸 정리할 시간이 없었잖습니까. 그래서 시간 난 김에...”
“아니 무슨 시간 난 김에 에요. 하, 진짜...”


나는 그 시간동안 편히 쉬게 해주려고  고생을 하는데. 화련은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걸 눌러 담았다.
뭐라고 쏘아 붙이고 싶은데 그것 때문에 말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현아.”

화련에게는 다행스럽게도, 그녀에겐 한 마디 만으로 류 현을 얼어붙게 만드는 아주 강력한 아군이 있었다. 대 류 현전 결전 병기라고 해도 될 정도의.


류 현의 눈이 데룩데룩 소리가 날 것 같이 뻣뻣하게 움직였다.


“어, 음...누나. 그러니까 이게...”
“병원비가 부담스러우면, 누나 이제 퇴원해도 돼. 일상 생활하는 데는 아무런 지장 없어. 오히려 전보다 더 잘 보여. 방식이 조금 달라지긴 했어도, 아예 시력을 잃은 것도 아니니까.”

세아도 모르진 않았다. 동생이 쌓아놓은 돈이  병원을 사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이 앓았던 병을 연구하기 위한 학교를 세워도 될 수준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현 또한 세아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이런 식으로 공격 당하니 말문이 막히는 건 별 수가 없었다.


“아, 아냐. 그런 게 아니고...”
“그럼 당장 매달려야 할 정도로 급한  아닌 거 맞니?”
“어? 어...구, 굳이 따지자면 해두면 좋은 일인데...이럴 때 해두면 신경  쓰고 있는 동안에도 꾸준히 쌓이니까...”

사실 수익성 측면에서는 이번에 구원 받은 우크라이나 정부나, 시치미 뚝 떼고 있는 일본 정부를 상대로 뜯어내는 것이 훨씬 나았다. 두 쪽  동맹국이나 주변국들 눈치가 보여서라도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

따지고 보면 레시피를 공급해서 가장 득보는 건 그것을 제공받을 서해란이나 협회였다.
류 현에게 돌아오는 돈도 무시할 수준은 아니었지만, 돈만으로 이렇게 매달릴 정도는 아니었다. 곧 돈의 가치가 수직 하락할 예정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가 원하는 것은 레시피의 보급으로 인한 플레이어들의 생존율 증대와 강화였다.
공짜로 뿌리는 방법도 있지만,  번 실험해본 결과 효과가 그리 좋지 못했었다. 공짜로 푸니 효과가 입증되고 그것이 풀려나가기까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풀리기 까지 신경 쓰기에는 류 현이 너무 바빴다. 신경을 안 쓰자니 중간에 가로채서 특허 신청을 하는 황당한 경우도 있었다.
차라리 태양그룹과 협회에 레시피를 제공하고 상품을 팔다가 레시피를 슬쩍 푸는 쪽이 훨씬 효과가 좋았다. 엉뚱한 놈들이 특허를 채가서 폭리를 취하는 것도 막을 수 있고 말이다.


그 덕에 요즘 가장 노난 건 서해란과 태양그룹이었다. 공식적으로는 병상에 누운  현이 할 일이 없어, 틈틈이 레시피를 작성해 보내주니  중 반만 풀어도 주가가 천장을 뚫는 중이었다.
그것도 이젠 끝이겠지만.


“마스터, 전 이걸 쓰는 거 자체가 나쁘다는 게 아니에요. 쉬엄쉬엄 소일거리 삼아 하시는 건 말릴 생각은 없어요. 그런데...”


텅! 화련은 류 현이 침대 아래 숨겨놓았던 종이 뭉텅이를 침대 빈 공간 위에 올려놓았다. 언뜻 봐도 쉬엄쉬엄 썼을 분량은 아니었다.

‘진짜 눈을 못 떼겠다니까.’

나흘 전만 해도 이런 걸 보지 못했으니 나흘 사이에 이걸  썼다는 의미였다. 전생의 경험 때문인지, 레시피를 굳이 종이에 적는 류 현의 이상한 버릇이 아니었다면  정도인지 눈치 채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대체 언니 눈을 어떻게 피한 거지?’
이쯤 되니 황당하다 못해 신기하기 까지 했다. 멀쩡한 상태도 아니면서 감지계열인 게 분명한 세아의 눈은 어찌 피한 것인지.

“이런 건 좀 아니죠.”
“어, 음 그게...전부 이번에 쓴 것들은 아니고 저번에 쓴 것들을 검토할 겸해서...”
“현아?”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임에도  현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거 같이 보면서 천천히 따져볼까? 얼마나 급한 일이었는지?”

빙긋 미소 지으면서 눈은 전혀 웃지 않는 세아를 보며 류 현은 후회했다.   세 시간동안.


***

“예? 화, 화련 님.  말씀이 대체 무슨 의미인지 저는 도무지...”
“말씀 드린 대로.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시면 되요. 정말 죄송하고, 제가 이럴 자격이 없다는 건 알지만. 제가 저지른  값은 추후에 제대로 치를 생각이에요. 아니,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마스터에게 사실대로 고해바칠 생각...”


웨인은 실례라는  알면서도 손을 내저으며 그녀의 말을 끊고 들어갔다. 하얗게 질린 얼굴과 평소답지 않은 태도가 그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잘 보여주었다.

“화, 화련 님. 왜 화나셨는지는 알겠습니다. 충분히 이해...아니, 제가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겠지요. 제가 당한 일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이렇게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건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괜찮아요. 해결을 보려고 이러는  아니니까요.  잠깐 동안 어떻게 그러겠어요? 우리가 신도 아니고.”

화련은 상쾌하게 미소 지었다. 보는 이의 가슴이 뚫리는 것 같은 상쾌한 미소 다음에 온 말은 웨인에겐 전혀 상쾌하지 않았지만.

“해결할 생각도 없고,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도 하지 않아요. 저도, 마스터도. 그냥 시간이 필요해서요. 아무도 잡음 넣지 않고 그냥 조용히 있을 시간이요.”


화련은 거기에 쐐기를 한 번 더 박아 넣었다.


“해주실 수 있죠? 지금 네임드 몹이 뜬 비상사태도 아니고, 그냥 저 꼴 보기 싫은 인간들 막아만 달라는 건데.”


웨인은 말문이 막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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