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1화 〉탐식마(貪食魔)
캉! 캉! 푸스스- 흙바닥을 구르던 데스나이트의 머리통이 검은 연기로 화해 흩어졌다. 몸에서 다섯 번을 더 뜯겨나가길 반복한 끝에, 놈은 더 이상 소생하지 못하게 되었다.
여섯 번의 ‘죽음’ 동안 놈의 몸뚱이에 담겨있던 사기와 끈적끈적한 마력은 온데간데 없어진 상태였다.
“후우우...”
하늘을 향해서 검은 연기를 후욱 뿜어내는 류 현만이 있을 뿐.
‘으음...아무리 그래도 네임드 몹을 통째로 삼키는 건 빡세네.’
류 현은 목을 이리저리 뒤틀며 몸을 풀었지만, 몸살이 날 것 같은 느낌은 가시질 않았다. 부상이 아니라 마력을 과도하게 흡수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니 당연했지만.
‘이래서 매번 기절했던 건가. 평소처럼 삼키고 기절하는 쪽이 더 편한 거였네.’
그랬다간 난리가 났을 테니 그럴 기미가 보였다면 자해해서라도 정신을 붙들었을 테지만 말이다.
“예상대로...놈을 따라서 소멸해주진 않는군.”
자신이 있는 곳으로 날아들던 밴시가 화련의 현철대침에 맞고 소멸하는 것을 보고 류 현이 중얼거렸다.
‘장악력이 높아서 따라서 소멸하지 않을까 싶었는데...이런 것만 전생이랑 똑같네. 리치가 일으킨 언데드들은 리치가 소멸하면 같이 소멸하던데 대체 뭔 차이야?’
데스나이트 무리를 언데드 군단과 고립시키기 위해서 무너뜨려둔 바위들이 밀리고, 깨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아마 주인인 데스나이트가 죽자 마지막 명령의 타겟인 자신을 죽이기 위해서 눈이 뒤집혔을 것이다. 폐도 다 삭아버렸을 놈들이 내지르는 괴성이 협곡에 쩌렁쩌렁 울렸다.
‘어지간하면 좀 개체 수라도 줄여주려고 했는데...이 상태로는 어림도 없군.’
당장이라도 집어삼킨 마력들이 피부를 뚫고 뛰쳐나올 것만 같았다. 2/3정도를 삼켰을 때만 해도 별 이상이 없었는데, 놈을 전부 삼키고 나자 갑자기 놈의 마력이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기 시작한 것.
반항이라고 하기에는 소극적이고, 그냥 용량이 커서 느끼는 부담이라기에는 흐름이 조금 극적이었다. 자신의 의지를 따르지 않고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도 그렇고.
‘강림’ 때문에 이런 식의 고통이나 압박에는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았다.
‘숙소에 가자마자 또 기절할 지도 모르겠군.’
화련이 들으면 입에서 불을 뿜을만한 생각을 품은 채 류 현은 슬쩍 손을 들어올려 그녀들을 불렀다.
***
“죄송하지만 제가 전할 수 있는 말은 모두 전한 것 같네요.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사정상 배웅을 못하는 걸 양해해 주시길.”
노골적인 축객령에 멀끔한 정장차림의 남자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살짝 떨리고 있는 남자의 손이 그가 느끼고 있는 모멸감을 대변했으나, 방을 떠나는 두 여자의 관심 밖이었다.
방을 나오고 문이 닫히자마자 키가 작은 여자가 큰 여자에게 붙으며 말했다.
“죄송해요, 언니. 괜히 저 때문에...”
“아냐, 내가 끼워달라고 고집부린 건데. 그 땐 화가 나서 앞뒤 안 가리고 고집부리긴 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니까. 방해가 안 돼서 다행이다 싶네. 나야말로 고집 부려서 미안해, 련아.”
“아, 아니에요. 방해는커녕 큰 도움이 됐는걸요.”
화련은 고개를 붕붕 내저으며 격렬하게 부정했다. 꽤 도움이 된 게 사실이었으니까.
접선을 시도해오는 이들을 상대하는 걸 거의 혼자 도맡아하면서 그녀는 꽤 지친 상태였다. 서로 대충 정보를 공유하거나 빼돌려서 어떤 상황인지 뻔히 알 텐데도 꾸역꾸역 찾아와서 사람을 귀찮게 만들었다.
지난 한 달 동안.
‘슬슬 그 변명을 우려먹는 것도 한계였지.’
거기에 네임드 몹을 잡을 때 입은 내상을 다스린다 라는 변명도 오래 우려먹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류 현이 한 시간 반 만에 언데드 군단을 뚫고 들어가서 데스나이트 체페슈의 머리통을 뜯어냈으니까.
그 뒤에 숙소로 돌아오는 와중 기절해버려서 변명거리가 아주 없진 않았지만, 슬슬 의구심을 가질만한 시간이 지난 건 분명했다. 류 현이 내내 병실에 박혀있기만 한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사실 평소의 화련이라면 그냥 대충 무시하고 그 변명을 밀어붙였겠지만,
‘그런 걸 들었는데 뻔히 욕먹을 만한 상황을 어떻게 그냥 둬?’
류 현에게서 그런 이야기를 듣고 나선 그럴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해봐야 별 의미 없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전처럼 행동할 수가 없는 것이다.
화련은 피로감을 감수하고 정신적인 안도감을 얻는 걸 택했다. 그것이 자기기만에 가까운 것일지라도.
점점 지쳐가고, 우려먹던 변명이 한계를 보여서 어쩔까 고민하고 있는 걸 세아에게 딱 포착당하고, 그녀의 페이스에 말려서 대강의 사정을 털어놓고 보니 이렇게 된 것이다.
저 중국 외교부의 유망주는 대사관으로 돌아가서 정말 대차게 까일 것이다. 교섭 대상의 가족에게 좋지 못한 인상을 심어줬다는 걸 자기 입으로 말하게 될 테니.
‘그보단 대화 내용 자체로 엄청 까이겠지만.’
동생이 없는 자리에서는 끊는 게 칼 같은 세아는 중국 외교부에서 왔다던 젊은 유망주를 시종일관 몰아붙였다.
이쪽에 명분도 있고, 힘도 있으니 상대가 쓸 수 있는 논리가 지극히 한정되는 건 당연했다. 거기에 가족이라는 보정까지 붙으니, 이름도 제대로 각인시키지 못한 상대는 아무런 소득도 없이 체면만 깎아먹고 축객령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정말로 중국 쪽에서 보내는 사람들이 엄청 피곤하게 굴었거든요. 부서가 달라서 이미 찾아온 줄 몰랐다. 우리랑 그쪽 부서랑은 방침이 다르고, 그래서 제시할 수 있는 것도 다르니 따로 협상을 해야 하지 않겠냐. 어휴...”
화련은 진저리를 쳤다. ‘대소환’ 이후로 인류 간에 쓰는 언어가 달라서 말이 안 통하는 경우는 사라졌는데도, 이 인간들과는 도통 말이 통하질 않았다.
뭐라고 어르고 압박하든 간에 일관되게 보여주는 태도가 ‘너 말고 니네 대장 직접 나오라고 해라’ 였다. 화련은 왜 주변 국가들이 중국에 그렇게 학을 떼는 지 세 번의 만남 만에 알게 되었다. 이 치들은 저들이 원하는 대로 되는 게 아주 당연하다는 생각을 패시브로 탑재한 인간들이었다.
그냥 류 현이 한 번 나와서 전권을 위임했다고 한 마디 해버리면 해결될 일이지만, 화련은 그럴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이 짜증나는 인간들의 의도대로 해주고 싶지 않다는 이유도 있지만,
‘한 번 얼굴을 내밀면 지금 같은 상태를 더는 유지할 수 없게 돼. 마스터 본인이야 괜찮다고 하겠지만...유럽 쪽은...’
류 현이 현장 복귀까진 아니어도, 업무를 볼 수 있을 정도 회복되었다는 소식이 돌면 지금 유럽의 들끓는 여론이 그에게 쏟아질 가능성이 높았다.
그녀가 보기에는 그럴 확률이 9할이 넘었다. 나머지 1할은 전부 미쳐서 플레이어들을 마구잡이로 공격할 확률.
어떻게 봐도 좋게 돌아갈 여지는 보이지 않았다. 류 현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더라도 그 확률을 조정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유럽의 여론은 흉흉했다.
사람들은 유럽 전역에 할로윈을 선포할 기세 던 데스나이트 체페슈를 거꾸러뜨린 것 보다, 놈을 소멸시키고 뒤처리를 하지 않고 돌아갔다는 사실에 더 주목했다.
아니, 후자에 대해서만 떠들어 댔다.
언데드 군단의 발호가 마치 그들의 탓 인양, 뒷수습을 하지 않고 내뺐다고 분노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해봐야...아무 소용없겠지. 정부에서 여론 선동을 안 하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된 걸 보면...’
유럽 각국 정부에서는 여론을 어떻게든 다른 방향으로 몰아가려고 애쓰는 듯 했지만, 오히려 반발만 사는 중이었다.
각국 대사들은 그 실책을 만회하려는 것인지,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제 나라가 어떻게 여론 선동을 시도하는 중인지 보고서까지 올리는 중이었다.
속이 뻔히 보였다. 이렇게 열심히 수습하려고 애쓰고 있으니, 잘 봐달라는 의미일 터.
‘그럼 뭐해. 아무런 효과도 없는데. 대놓고 감싸고돌면 지지율 떨어지니 언론사 찔러서 호위보도나 내게 만드는 게 다면서.’
열심히 하면 뭐 하는가 아무런 효과가 없는 것을. 속내가 너무 뻔해서 약 올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아무것도 주는 것도 없으면서 들볶아대는 중국보단 낫지.’
그 중국의 외교관을 세아가 쫓아준 것이다. 한 번도 나선 적이 없는 그녀가 나섰으니 아마 또 비상체제에 돌입했을 것이다. 어떻게든 그녀에게 비벼서 류 현을 움직이려고 들겠지만...
‘택도 없지. 세아 언니는 지금도 엄청 참고 있는 걸 텐데.’
세아는 여전히 류 현이 괴수와 싸우는 걸 반대했다. 이젠 대놓고 안 하면 안 될까? 하고 반대하진 않았지만, 은연중에 그런 기색이 드러나곤 했다.
그마저도 류 현 앞에서는 거의 내비치지 않았다. 얘기를 나누다가 풀어졌을 때나 어쩌다 확인하게 될 뿐.
“언니 덕분에 당분간은 한 숨 돌리겠어요. 소문 퍼지면 그래도 다른 곳은 몸 좀 사리겠죠.”
“그렇다면 다행이긴 한데...정말 그럴까?”
화련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류 현이라는 괴물을 어떻게든 달래거나 꼬시려는 놈들이다. 긴가민가해 하던 놈들도 류 현이 단독으로 데스나이트 체페슈를 소멸시키는 것을 보고 확신이 섰을 터.
그가 하나 뿐인 혈육을 끔찍하게 아낀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으니, 한 동안은 류세아 대응법을 짜내느라 바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질척거리긴 하겠지만, 그 정도야 지금까지 엉겨붙던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 기사도 그렇고...유럽에서는 현이한테...”
화련은 세아가 태블릿에 띄운 기사를 확인할 것도 없이 그것이 무슨 기사인지 알 수 있었다. 아마 류 현을 성토하는 일반인들의 여론을 게재했거나, 그 인간들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기사일 것이다.
화를 참는 기색이 역력한 떨리는 목소리와 감정의 요동에 맞춰서 꿈틀거리는 마력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화련은 세아에게 바싹 붙어서 남은 손을 꼭 잡고 그녀를 달랬다. 그러면서 세아의 손에서 태블릿을 슬쩍 빼내었다.
“아까 선물 목록 보셨죠? 그게 전부 유럽에서 보낸 것들이에요. 상황상 일반인들에게는 풀지 못하는 정보들이 있어서 그래요. 다들 아직 사정을 몰라서 저러는 거고, 조금 있다가 정보가 풀리면 이런 소리도 쏙 들어갈 거에요.”
거짓말이었다. 류 현을 성토하고 있는 작자들이 펼치고 있는 논리는 정보 부재와는 별 상관이 없었다. 그냥 저가 입은 상처가 아프니 니가 알아서 하라고 꽥꽥 소리를 지르고 있는 거였으니까.
화련은 이번 사건으로 플레이어와 일반인들 간의 간극이 메워지기에는 너무 벌어져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소환’이 진행될수록 그것이 더 심화되리라는 것 또한.
류 현이 아무리 강해졌어도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네임드 몹을 피해 없이 해치우는 건 불가능했으니까.
‘언니가 이런 사정까진 모르니 다행이지.’
정말 다행인걸까? 그가 유일하게 기댈만한 사람마저 사정을 모르는 게 정말 맞는 일일까?
화련은 속에서 치미는 의구심을 꾹 눌러놓았다. 표정으로 그것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애쓰며 그녀는 짐짓 밝은 어조로 말했다.
“어서 가요. 마스터 더 기다리게 하면 언니가 안 보는 곳에서 저 엄청 쪼일 거에요. 아직 아픈 사람 데려다가 대체 뭘 그리 오래했냐면서. 아, 아까 입맞춰둔 대로 말씀해주시는 거 잊으시면 안 돼요?”
“알았어, 알았어. 그런데 오늘 희란이가 통 보이질 않네. 어디 갔는지 아니? 평소 대로면 산책할 시간인데 안 보이네.”
“아...아마 승하 언니랑 같이 있을 거에요. 어제 부탁할게 있다고 승하 언니가 희란이를 찾던데.”
대답하는 화련의 표정이 떨떠름하게 변하자 세아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굳이 캐묻진 않았다. 그저 팀원들끼리의 일인가 보다 하고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