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0화 〉탐식마(貪食魔)
죽음이 범람했다.
[꺄아아아악!][끄르락!][푸히이이잉!]
죽지 못한 것, 죽음에서 돌아온 것들이 내지르는 비명과 귀곡성이 서로 뒤엉켜 협곡 안을 울렸다.
그러나 협곡 안에서 가장 끔찍한 건 이 지옥의 속삭임 같은 괴성들이 아니었다.
뻐억! 푸스스- 파악! 후두둑! [끼아아아악!] 후욱!
죽지 못한 놈들을, 죽음에서 돌아온 것들을 대지라는 관 위로 거꾸러뜨리고 있는 남자 류 현은 어떤 감흥도 느껴지지 않는 얼굴로 세 번째 데스나이트의 머리통을 투구 채로 잡아 뜯었다.
키이이- 깡! 마력이 빨려나가고, 죽은 몸뚱이를 움직이던 핵이 파괴되어 천천히 붕괴 중이던 데스나이트는 저항하지 못했다.
잡아 뜯은 머리통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았다.
카앙! 캉! 던져진 머리통은 그것과 똑같은 머리를 달고 있는 데스나이트 무리 앞에 떨어졌다. 데스나이트 체페슈와 놈을 호위하고 있는 데스나이트 근위대 앞에.
푸스스- 몇 번 구른 후 머리통은 검은 연기가 되어 흩어졌다.
“뭘 보고 있냐?”
뭐로 보나 명백한 도발.
하지만 데스나이트 무리는 쉽사리 덤벼들지 못했다. 도발은 알아들었을 리가 없지만, 인간에 대한 적의가 괴수 중에서 최고 수준인 언데드, 그것도 언데드 네임드 몹 답지 않은 행동.
‘이것만 봐도 아프리카 그놈이랑 이놈이랑 급수차이가 나는 건 확실하네.’
류 현은 제 몸 주변에서 타오르고 있는 회색빛 오러를 슬쩍 돌아보았다. 놈들이 적극적으로 덤비지 못하고 있는 이유의 반은 이것 때문일 것이라고 류 현은 생각했다.
‘그 이상일 수도 있지만 그건 내가 알 수 없는 노릇이고.’
‘그건 그렇고 진짜 편리하네, 이거. 반쪽짜리라도 ‘강림’까지 제어할 수 있을 줄이야.’
회색빛 오러를 유지한 상태에서 ‘강림’의 제어가 수월해지는 것도 나머지 반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었다.
마력 소모는 더 극심해졌지만, 검은 기운을 휘두르거나 하지 않으면 버티기는 더 용이해졌다. 의식을 갉아 먹히는 느낌이나, 짓눌리는 듯한 느낌이 사라진 것.
“안 오면 내가 가고.”
탓- 후웅! 가볍게 발을 구른 것 뿐인데 류 현의 몸이 순식간에 데스나이트 무리에게 도달했다.
놈들도 멍청하게 손 놓고 있지만은 않았다. 류 현의 몸뚱이만한 대검 셋이 딱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류 현의 목, 쇄골, 골반을 노리고 들어왔다. 그에 대응해 류 현은,
슬쩍 내민 주먹으로 파쇄권을 터뜨리는 것으로 응수했다.
파캉! 우지직! 대검들이 유리로 만든 것 마냥 깨져나갔다. 그것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데스나이트 넷이 뒤에서 짓쳐들어오고 있었지만, 류 현의 손속이 더 빨랐다.
스륵- 휘릭- 그의 피부 위로 빠르게 회전 중이던 검은 기운이 더듬이 같은 걸 내뻗는가 싶더니, 데스나이트들을 그대로 휘감았다.
대검만 망가졌을 뿐, 멀쩡한 상태의 그놈들을,
츠츠츠-![---!][-!!!] 산 채로, 아니 그 상태 그대로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놈들의 몸뚱이 일부인 검은 갑옷이 가장 먼저 쪼그라들다 못해 바스라 졌다.
갑옷이 사라지자 온전한 영체도, 육신도 아닌 시커먼 무언가가 드러났지만 그조차 오래가지 못해 쭈그러들더니,
퍼석!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사기(死氣)와 상위 언데드 특유의 내구성 때문에, 전생에서 전위든 후위든 모든 플레이어들이 꺼렸던 괴수 세 마리가 장난처럼 같은 방식으로 소멸했다.
사기도, 마력도 남김없이 삼켜졌다.
류 현은 소리 없이 포효 짓쳐들어오는 네 개의 대검에서 몸을 슥 빼내었다. 놈들은 바로 쫓지 않았다. 셋이 비어버린 곳을 채우기 위해서 대형을 재정비 할 뿐.
‘음, 승하 때랑 똑같이 반응하네. 이건 좀 피곤하겠는데.’
네임드 데스나이트 탓인지, 제 몸을 버리면서 덤비는 저돌성은 그대로인데 치고 빠질 때를 알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리 시간 끌기를 전제로 했다곤 하나, 회색 오러 버프까지 받은 승하의 칼질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언데드 인걸 감안하면...이성이든 지능이든 회복폭이 점점 커지고 있는 건 확실해.’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지금 이렇게 데스나이트들을 가지고 놀고 있지만, 원래 가질 수 없는 힘이 추가돼서 이렇게 된 것이니까.
회색빛 오러가 없었다면 이젠 시야를 가릴 정도로 농축된 저 데스 오러에 꽤 고생을 했을 것이다.
저 검붉은 데스 오러가 데스나이트가 띄는 사기와 마찬가지로, 생명체에게 상극인 기운이라 전생에서도 꽤 고생을 했었다.
재생력이 제대로 듣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엉켜서 가만히 숨만 쉬어도 피를 토하면서 꾸역꾸역 엉킨 부분과 내상을 치유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먼저 잡으려고 찍은 놈이 그렇게 강해서 재수가 더럽게 없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결과적으로는 호재가 되네.’
구엘 뒤 굴락에게서 회색 오러를 얻지 못했다면, 데스오러 때문에 이런 무모한 특공을 감행할 시도도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강림’의 운용이 이렇게 쉽지도 않았을 것이고.
벌써 30분 째 이 상태임에도 어지러움 하나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오면서 채워놓은 마나통이 맹렬한 기세로 비어져가곤 있었지만.
‘별 피해 없이 마력만 좀 써서 네임드 몹 치울 수 있으면 남는 장사지.’
후욱! 류 현의 몸 주변으로 검은 안개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주변으로 퍼져나가는 모습과 뒤를 비쳐 보이지 않는 농도가 전과는 차원이 달랐다.
‘강림’의 부담 때문에 직접 타격 시 외에는 에너지 드레인을 자제했는데, 지금까지 멀쩡한 걸 보면 그리하지 않아도 될 듯 싶었다.
‘이 버프빨로 어디까지 할 수 있나 해보자고.’
전처럼 수를 남겨두고 간을 볼 생각은 요만큼도 없었다. 그러다가 피를 한 번 크게 볼 뻔한 게 한 달도 되지 않은 일 아닌가?
‘약속 하나를 깼으니 새로 한 약속은 그래도 지켜야지.’
류 현은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그리고 날아오를 때보다 두 배는 더 빠른 기세로 데스나이트 군단을 향해 내리꽂혔다.
***
[---!][푸흐흐흥!] 퍼억! [캬악!] 우지직!
날 리가 없는 혈향이 코끝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저도 모르게 코끝을 훔친 승하는 미간을 찌푸렸다.
괜히 후각에 신경 쓴 탓에 차단했던 시체 썩는 내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진짜 몇 번을 맡아도 적응이 안 되네. 감각 차단하는 법을 못 배웠으면 언데드랑 싸우는 건 포기했을지도.’
그런 시답잖은 생각이 들 정도로 협곡 아래에서 펼쳐지고 있는 싸움은 일방적이었다.
콰직! 빠지직! 키이이잉! 까앙! 유령마를 잃고, 연이어 대검마저 잃은 데스나이트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머리통이 뽑혀 나갔다.
상위 언데드였기에 머리가 뽑힌 정도로는 죽지 못한 놈은 끔찍한 고통 속에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죽어갔다.
승하가 고통 속에서 죽어갔을 거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남겨진 놈의 몸뚱이가 관절 역방향으로 꺾이면서 발광하다가 축 늘어지더니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광경을 이번이 다섯 번째로 보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친구는, 류 현은 10분도 안 되는 사이에 데스나이트 일곱을 추가로 죽음의 품으로 돌려보냈다. 데스나이트 체페슈가 그들을 당장 다시 불러내지 못할 정도로 완벽하게, 놈들을 분쇄했다.
‘와, 아무리 내가 싸우는 거 보고 그동안 견적을 냈다지만...이게 말이 돼?’
우악스럽게 밀고 들어가서 또 한 놈을 자신의 거리에 안에 집어넣고 다리인 유령마를 소멸시키고, 휘둘러지는 대검을 쥔 팔 채로 박살내 버리는 모습은 누가 괴수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지경이었다.
놈들의 대검에 서린 위협적인 사기도, 언데드들을 진짜 불사의 존재로 만들어주는 데스 오러도 그의 앞에서는 무의미했다.
사기는 검은 안개조차 뚫지 못했고 데스 오러는 회색 오러의 가호 아래의 류 현의 생기를 상하게 하기는커녕, 데스나이트의 사기마저 빨아먹는 그의 무시무시한 먹성 앞에서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류 현이 이 협곡에 두 발을 딛고, 언데드 군단을 뚫고 중심부까지 길을 낼 때와 똑같았다.
이 자리에 있는 플레이어 중 가장 약한 이도 혼자 잡는 구울과 최상위 그룹 다섯이 모여야 대적이나 할 법한 데스나이트에 구분이 없었다.
그의 앞에서는 모두 똑같은 최후를 맞이했다. 단지 한 번의 공격이냐, 네 다섯 번의 공격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마력이든 사기든 죄다 빨려 데스오러의 가호 아래에서도 소생하지 못하는 건 다 똑같았다.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데스나이트야 다시 일어날 가능성도 있겠지만,
‘그 전에 네임드 몹 머리통이 날아가겠지.’
류 현의 움직임만 봐도, 이곳에 오기 전에 약속한 2시간 내로 자신의 활동을 끝낼 생각으로 가득해 보였다.
그리고 그 무모해 보였던 약속은 정말 실현 직전에 온 상태였다. 이제 겨우 약속 시간의 반이 되려는데 데스나이트 근위대 중 이제 남은 건 둘 뿐이었으니까. 데스나이트 체페슈 자체도 중간에 끼어들었다가 흉갑이 다 박살난 상태였다.
‘상성이...진짜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끔찍하게 별로네. 류 현이 말한 대로면 이 반대여야 하는데...저 오러가 진짜 크긴 크네.’
언데드의 특유의 전투지속력과 그것을 극대화시켜주면서 류 현의 재생력도 억누를 데스오러, 류 현이 몸을 던지는 적극적인 전술을 펼치지 못하게 만들었어야 할 사기가 회색빛 오러 하나에 막힌 꼴이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데스나이트 측은 가진 장점이 다 막혔는데, 류 현은 제 장점을 극대화시켜주는 버프까지 달고 온 셈이었으니까.
‘데스나이트부터 잡으려고 들었으면 그거대로 피 봤겠네. 이걸 선택운이 좋았다고 해야 하나?’
아프리카 때 구엘 뒤 굴락에게 몰렸던 일을 생각하면 이런 생각자체가 가당찮게 느껴지는데, 막상 아래를 내려다보면 그렇지도 않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반대 순서로 잡았다면 아마 두 번 다 고생했을 테니까.
따라오라고 시키지도 않았는데 따라붙은 유격대 놈들의 넋 나간 표정을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이젠 그냥 하얗게 질린 채, 속으로 삼키는 듯한 신음소리만 간헐적으로 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과 동 떨어진 세상에 있는 것처럼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협곡 아래를 바라보고 있는 네 명을 보고 있자면 자신이 너무 속 편한 것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 네 명 안에 지벡 건터가 들어가 있다는 사실 때문에 더더욱.
네 명 중 표정이 구린 이유가 같은 건 류 현이 내건 약속을 아는 화련과 희란 둘 뿐이겠지만 말이다.
‘그녀석 련이랑 희란이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그렇게 막 우격다짐으로 넘긴 거지.’
그러고 보면 그런 어린애 떼쓰기 같은 약속에 져준 것이 스스로도 이상했다. 화련과 희란, 자신도 서로 말은 안 했지만 같은 것을 느끼고 있으리라.
‘회색 오러 그거 진짜 뭔가 다른 기능 있는 거 아냐? 막 절대 복종이라던가...’
오오오! 그녀의 망상을 깨부수려는 듯이 시기적절하게 환호성이 바로 옆 무리에서 터져 나왔다. 승하는 급하게 협곡 아래로 시선을 돌렸다.
검은 기운을 집채만 하게 키운 류 현의 주먹이 데스나이트 체페슈의 가슴을 뚫고 나와 있었다.
류 현은 머뭇거리지 않고 놈의 턱을 꽉 움켜쥐고는,
콰직! 찌직! 뿌드득! 놈의 목을 뽑아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