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89화 〉탐식마(貪食魔) (289/429)



〈 289화 〉탐식마(貪食魔)

“염병할!”

쨍강! 크리스털 재떨이가 벽에 부딪히며 산산조각이 났다.
제프 리어던은 박살난 재떨이 조각을 한  내려다 봤다가, 재떨이를 던진 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좀 덜 위험한 걸 던지시는  어떻겠습니까. 각하. 비서실 친구들이 이것저것 준비해 놨더군요.”
“자네는 지금 그런 소리가 나오나!”


씨근덕거리는 미합중국의 대통령을 보며 부통령은 어깨를 늘어뜨렸다. 상관이 저리 흥분해 있으니 자신은 오히려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각하께서도 이미 예상하신 일이고요.”
“지금은 아니야! 지금은 아니었다고! 어떻게 이런 타이밍에...!”
“각하.”
“제프, 제프! 이 친구야, 이건 대충 넘길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거 자네도 잘 알지 않나!”
“예, 알고 있지요. 각하께서 계속 신경 써오신 문제니까요.”

계속되는 제프 리어던의 무덤덤한 대꾸에 조금 흥분을 가라앉힌 제럴드 던컨은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는 셔츠 단추를 두 개를 풀어내고 심호흡을 몇 번 하였다.

“이대로 넘길 수는 없네. 이대로 넘겨서는 안 되는 일이야.”
“그렇다고 외교 채널로 항의해봐야 들어 먹히지도 않을 겁니다. 당장 발등에 불이 활활 타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평시라도 들어 먹힐지 의문이군요.”
“나도 알고 있네. 그래서 더 골치 아픈거지.”

제럴드 던컨은 손톱을 짓씹었다. 20년 넘게 정치적 파트너로 함께 해온 이의  적 없는 모습에 제프 리어던은 속으로 한 숨을 삼켰다.


“...첫 단추부터   시작된 일입니다. 각하께서 자책하실 일이 아닙니다.”
“그 단추를 다시 꿰는 것도 내 일일세. 제프. 아니면 누가 날 뽑아줬겠나? 그런 식으로 면피하면 끝이 없네. 그리고 상황상 그럴 수도 없고.”

제럴드 던컨은 그렇게 말하곤 서랍에서 시가 하나를 꺼내서 만지작거렸다.
일국의 대통령이, 그것도 미국의 대통령이 성공했던 금연을 물리고 다시 담배에 손을 댈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 제프는 달갑지 않았다.

“그렇다고 당장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도가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이건...”
“나도 알고 있네. 인식을 망가뜨리긴 쉬워도 망가진 인식을 바로잡기는 어려운 법이지. 거기에 작업을 10년 넘게 했다면...어쩌면 내가 살아있는 동안 성과를 보지 못할 수도 있겠지. 아마, 그럴게야. 하지만 아무것도 안 하고  놓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일단은 관망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뭘 하든 간에 우리가 예상한 것과는 다른 반응이 튀어나올 겁니다.”
“끄응...”


제럴드 던컨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플레이어에 대한 인식 변화는 그가 지난 임기동안 끊임없이 시도한  중 하나였으니까.
협회가 대놓고 지적은  해도 은근히 불편해 하는 플레이어의 군부대 편입도 그 일환이었다.

서류상으로는 사설 길드에서 파견해주는 식이었지만, 실무를 조금이라도 봤다면  가리고 아웅 이라는 걸 알 수 있음에도 협회가 대놓고 지적 안 하는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초기에 가장 플레이어를 핍박한 땅에서, 플레이어에 대한 인식이 가장 빠르게 개선되고 있었으니까. 가장 빠르다고 해도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역시 손 놓고 있는 건 말이 안 돼...7함대를 그리로 보내야겠어.”
“각하! 우크라이나 정부는 물론이고, 중국, 러시아도 들고 일어날 겁니다!”
“이렇게  놓고 있다가 재차 테러가 들어가면? 그러다가 그 친구들에게 문제라도 생기면?”
“당장 러시아가 기갑사단을 보내도 그 친구들을 어떻게 하진 못 할 겁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외부 평가는 어떨지 몰라도, 백악관 내에서 용잡이 팀에 대한 평가는 걸어 다니는 핵폭탄 그 이상이었다. 그것도 괴수에게만 반응해주는 아주 고마운 폭탄.
관련 보고서도 항상 최우선으로 확인하고 전담팀도 꾸릴 정도니 말 다한 셈.


“이 친구야, 내가 어디 그런 부분을 걱정하는 거겠나. 그 부분은  다시  번 더 이런 일이 터졌을 때, 그 친구들이 돌아서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하겠나?”
“......”


장담할 수 없었다. 아니, 현재도 돌아서지 않았다는 보장은 없었다. 몸에 이상이 없다곤 해도, 정신적 충격을 추스르고 있느라 침묵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으니까. 그들이 당한 일을 생각하면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으니까.


“당장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할 수는 없으니,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나더라도 면전에서 터지는 건 막아야 하지 않겠나. 우크라이나 놈들이 정신만 제대로 붙들고 있었어도 이런 고민은 안 해도 됐겠지만 말일세. 젠장, 멍청한 놈들. 자기네 나라 살려주겠다고 목숨 걸고 싸우는 젊은이들 취급이 그 따위라니.”
“...하지만 너무 부담이 큽니다. 각하, 그렇지 않아도 유라시아 쪽에 괴수의 등장이 잦아서 국경지대에 더 신경 쓰고 있다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차라리 비공식 라인으로 군 파견을 조용하시는  낫습니다. 서로 체면 구길 일도 없고요.”
“자넨 일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방치한 놈들을 믿고 싶은가? 정치적 부담 좀 지는  네임드 몹을 상대할  있는 유일한 카드를 어이없게 잃는 것보다야 낫네. 제프, 그리고 우린 아직 뉴욕의 ‘천공성’을 해결하지 못했네. 가장 급한 건 우리야.”


천공성(穿孔城). 용잡이 팀이 X던전을 클로징 한  나타나 1년 넘게 뉴욕 상공에 떠있다고 몇몇 플레이어들이 증언하는 환영의 성.
아마 미국이 아니었다면 진작 천공성의 존재는 퍼져나갔을 것이고, 제럴드 정부는 워터게이트 이상의 정치 스캔들에 휩싸여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을 것이다.

“X던전이 나타났던 카이로, 아니 이집트는 이젠 이름을 새로 붙여야 할 지경으로 변했네. 뉴욕에서 주, 연방할 것 없이 정부 청사들은 빼내고 있긴 하지만...”


뉴욕은 여전히 번성했다. 사정을 알고 있는 수뇌부는 매일 같이 그 광경을 보고 고뇌해야만 했다.


“숨기자는 결정을 내린 내가 할 생각은 아닌건 알고 있네만 요즘 들어 그런 생각이 드네. 나는 대통령이라는 자리를 시민들의 목숨을 저울질해도 되는 자리라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
“그 안에서 네임드 몹이 튀어나오면 뉴욕이 문제가 아니라 미전역 중 안전한 곳은 없을 겁니다. 각하께서 자책하실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내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 그곳에서 뭔가 튀어나온다면 뉴욕 시민들이 가장 위험할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당장의 혼란을 막기 위해서 뉴욕의 시민들을 목숨을 담보로 시간을 벌고 있는 거나 다름없지.”
“각하...”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에 대한 책임은 확실하게 지게 될 테지. 거기에 러시아나 중국과의 마찰을  얹는다고 큰 문제가 되진 않을 거고.”

나이에 맞지 않게 킬킬 소리 내어 웃는 던컨을 바라보던 제프 리어던은 한 숨을 푹 쉬었다.

“비서실 친구들은 각하가 알아서 설득하십시오. 전 모르는 일입니다.”

미국의 대통령과 부통령의 우려를  몸에 받고 있는 류 현은,

“씨발.”


콰긱! 엄한 맥주캔을 따지도 않고 으스러뜨리면서 화를 삭히는 중이었다.

류 현의 시선은 한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한 시간 전만 해도 화련에 앉아서 눈물을 훔치던 맞은 편 자리에.

“...좃같네.”


예상을 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예상은 했었다.
예상만 했었다.


그 반응들을 보고 자신이 어떤 느낌을 받을 것인가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었다.
이렇게 기분이 더러울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생각보다 동요가 심하기도 하고. 승하는 그런대로 견디는 것 같긴 하지만...’


털고 일어나는데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데 네임드 몹을 상대하게 할 수는 없는 노릇.


‘회복된 후에도 시간을 줘야한다.’


심리학적 지식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막 정신적 충격에서 막 회복된 사람을 싸움터로 밀어 넣는  좋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그 짓을 반복하면 끔찍한 결말이 기다린다는 것도.

문제는 느긋하게 회복할 시간을 줄 상황이 아니라는 것.

‘일이 잘 풀린다 싶으니까 이런 악재가 끼는군.’

아프리카에서 의외의 수확이 있어 세 여자만으로 데스나이트 체페슈를 틀어막을 수 있게 되었지만, 그녀들을 빼면 유격대는  번의 공격도 겨우겨우 막을 정도의 전력이었다.
이상하리만치 지벡 건터에게 집착하는 놈의 이상행동도 더 이상 기대하긴 힘드니, 세 여자가 빠져버리면 곤란한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터.

아무리 위기감 조성을 위해서 시간을 끌었다지만, 인간들이 마구 죽어나가도 좋아서 그런  아니었다. 괜히  빼가면서 언데드 군단을 억누른 게 아니었다.
기분 같아선 그다지 고려하고 싶진 않지만, 당장 터져 나오기 시작한 일반인들의 불만도 다시 피해가 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어질 터.

류  자신이야 못 본 척, 못 들은 척 넘겨버리면 그만이라지만, 이번일로 크게 충격 받은 듯한 그녀들은 그러기 힘들 것이다.

아니, 견딜 수 있다한들 그런 경험을 더 시키고 싶진 않았다.


‘...무리 안 하겠다고 약속 한지 나흘은 됐나?’

류 현은 고개를 젖혀 소파에 기대며 혼자 낄낄거렸다.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웃는 걸 멈춘 그는 제 가슴께를 손으로 짚었다.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자연스러운 회복을 위해서 일부러 억누르지 않은 내상이었다.


아픈 척이라도 해야 하는 상황상 굳이 무리해서 회복할 필요가 없고, 화련과의 약속도 있고 해서 그냥 내버려둔 것이었는데 이젠 이유가 사라졌다.


‘별 수 없군. 무리를 좀 하는 수밖에.’
“스읍...”

 현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들숨을 따라 방안의 마나가 들썩거렸다.
그냥 들이쉬는 것이 아니라, 본 드래곤과 엘더리치를 잡은  얻은, 승하에게 알려준 호흡법이었다.  비었던 류 현의 마력 통에 물이 차오르듯 마력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방안에 차있던 마나가 바닥나고, 막사 내부의 마나를 다 빨아들여서 막사 전체가 이른 아침을 맞이하는데 채 10분이 걸리지 않았다.
모두가 마력의 흐름의 중심인 류 현의 집무실 앞으로 몰려들었지만, 누구도 문을 열지 못했다.
뒤늦게 화련, 희란, 승하 세 여자가 당도했을 때는 막사 주변 2km 내의 마나가 마르다시피 한 후였다.  현이 마나 호흡을 시작한  30분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녀들이 문을 부술 기세로 문으로 달려들려던 때, 집무실 문이 열렸다.

“마스터...?”
“야, 너 벌써...?”

 두 다리로 선 류 현이 모습을 드러냈다. 공식적으론  현의 회복문제 때문에 데스나이트 공략을 미루고 있었던 터라, 뒤쪽이 소란스러워졌다.

“뭐야, 어제만 해도 못 걸어 다녔었는데?”
“그러게, 꽤 오래 못 걸었다고 들었는데 재활 없이 바로 저렇게 걸을 수 있나?”
“젠장, 그럼 그 무시무시한 놈이랑 붙어야 한다는 거잖아?”
“멍청한 새끼. 여자 셋만 끼어들어도 그 정도였는데 대장이라는 놈이 끼면  쉬워지겠지 새꺄.”
“에이, 검성이 이미 싸우고 있었는데 확 달라질 리가 있나.”

류 현이 한 걸음 복도로 내딛자 웅성거림이 뚝 멎었다.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구경하던 무리가 뒷걸음질 쳤다.

멀쩡하게 두 다리로 걷는  현을 바라보는 세 여자의 표정은 미묘했다. 부상에서 회복한 동료를 보는 것이라기에는 이상했다.


“마스터 설마  때 한...”
“너,   어쩌려고 벌써 그렇게...”
“약속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깨게 된  죄송하지만, 이번만큼은 제 고집대로 해야 할  같아서 말입니다.”


 현이 하는 말을 들은 세 여자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그에 응하는  현은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 여유로워 보이는 모습에 승하는 더 화가 치밀었다.


“야, 너 진짜 이번에는 나도 못 참...”
“일단, 그놈부터 정리합시다. 아니, 제가 정리하겠습니다. 이야기는 그 뒤에 나누는 게 맞는  같습니다. 어떤 이야기든 간에  뒤에  받아드리죠.”

협상거리도 안 되는 억지였지만, 세 여자는 저도 모르게 그의 기세에 말려들었다.
이전과는 다르게  현이 억지를 밀어붙이자, ‘되지 않을까?’, ‘반대해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자꾸 고개를 들며 생각을 방해했던 것.


‘그 회색 오러 진짜 버프 말고 다른 뭔가 있는 거 아냐?’


헬기로 이동하는 동안 내내  여자는 같은 고민으로 골몰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