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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8화 〉탐식마(貪食魔) (288/429)



〈 288화 〉탐식마(貪食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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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벡 건터가 폭탄을 던져놓고 방을 떠난 후, 한 동안 집무실 내에는 무거운 정적이 안에 있는 이들을 짓눌렀다.
유일하게 그 중압감에서 자유로운 상태였던  현은 조심스럽게 네 여자를 살폈다. 하나같이 고개를 숙인 상태라, 낯빛이나 겨우 살피는 정도였다.


‘...타이밍이 좋지 않아. 데스나이트를 처리하고 귀국한 후에 터질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일이 빨리 터졌다. 당장은 데스나이트가 멀쩡하게 활동하고 있는 터라 움직이지 못할 줄 알았더니, 이 땅에 사는 미치광이들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

‘어차피 맞닥뜨릴 일이긴 했지만...’

어지간한 일은 히히 웃어넘기는 승하마저 낯빛이 저 꼴인 걸 보니, 그리 넘길 수만도 없었다. 정말 끔찍한 타이밍에 테러를 당했다.
이후 일정을 수행하는데 차질이 없을 수가 없는 순간을 노린 것처럼.

‘멍청한 놈들. 최소한의 생각도 안 하나? 닦달하겠다고 공격하는  대체 어디 논리야?’

공격당했다는 사실 자체보다 그녀들이 받았을 정신적 충격에 더 화가 났다. 다른 때처럼 다독거려서 일으켜 세울만한 일이 아니었다.

‘우크라이나 정부놈들 일하는 꼴도 그렇고.’


순간적으로 우크라이나 정부 쪽에서 시간을 끄는 것에 대하여 항의 차원에서 벌인 일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들었지만, 이내 접었다.
원하는 대로 풀리든, 풀리지 않든 뒷감당이 거의 불가능한 수준으로 돌아올 텐데, 그걸 모를 이들도 아니니 이렇게 어중간하게 일을 벌이진 않았을 것이다.


‘빨리 데스나이트 정리하고 귀국하는 게 맞겠지. 추스를 시간이 필요해.’

 현이 머릿속으로 일정표를 이리저리 매만지고 있던 때였다.

“예상...하셨나요?”


화련의 목소리는 평소의 그녀를 떠올리기 힘들 정도로 늘어지고, 갈라진 상태였다. 불과 몇 분 사이에 퀭해진 그녀의 눈이 애처로운 빛을 띠었다.
 현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아까 지벡 씨한테도 대답했었지만, 이 타이밍에 이럴 줄 알았다면 우크라이나 정부를 협박해서라도 군을 동원해서 주변에 경계를 세웠을 겁니다.”

전생에서 연약하며, 평범하면서도 악한 이들에게 수많은 교훈을 받은 그였다.
그들은 보통 때에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면서, 플레이어들에게만은 한없이 악독했다. 의무와 도덕이라는 창을 앞세우고, ‘우리’라는 가면을 뒤집어 쓴 채로 플레이어들을 괴수들 앞으로 내몰았다.
 현은  때 악의라는 것이 거창한 뜻이나 목적이 없는 쪽이  짜증나고, 끔찍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그들을 바꾸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사실 또한.


그래서 이런 경험이 싸움을 계속해 가는데 도움이   없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알았고, 막을 수 있다면 막았을 것이다. 전생에서 반복된 경험 덕에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알았고, 방도도 알지 못했기에 때만 가늠했을 뿐.


“폭발음을 들었을 때 아차 싶긴 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아니길 빌었지만 현실은 냉혹하군요.”


빌지도, 그들에 대한 기대도 없었지만 그녀들을 위해서  현은 그렇게 말했다.
이곳에서 일이 터지지만 않았어도 귀라도 틀어막게 했을 텐데.  현은 그것이 아쉽고 짜증이 났다.

화련의 입 안에서 뿌득 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입가에 피가 흐르는 것을 발견한 류 현은 손을 뻗으려다가, 그녀가 떨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조용히 말했다.

“네 분 다 시간이 필요하신  같습니다. 당장 이리 모여서 머리를 쥐어짠다고  일도 아니고요. 일단, 자리를 파하고 나중에 다시 모이도록 하지요.”

화련만이 작게 끄덕였을 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류 현은 속으로  숨을 내쉬었다.


***


낮에 있었던 폭탄 테러 때문인지 막사 안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불 켜진 방이 드물어 어두컴컴한 복도가 낯설었다.
화련은 홀린 것처럼 어둠이 깔린 복도를 바라보다가 아주 천천히 발걸음을 떼었다.
마치 첫 걸음마를 떼는 아이처럼.


복도 첫 모퉁이를 돈 화련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미 기척이나, 공간점유로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한 후였지만 그녀는 두어 번 더 둘러본 후 마음을 놓았다.
그녀의 시선이 복도 끝에 위치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는 유일한 방을 향했다.
류 현이 집무실로 쓰고 있는 방이었다.


“스읍...후우...”

화련은 심호흡을  후 집무실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개했다. 여전히 조심스러웠으나, 이전보다는  빠른 걸음이었다.

-아니, 상황이 이런데..
-그러니까...는 거...


문이 가까워질수록 화련의 표정은 미묘해졌다. 문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화련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저가 열어놓고 노크도 안하고 벌컥 문을 열어젖힌 것에 흠칫 놀랐다.

“응? 뭐야, 너  잤어? 아까 보니까 방에 불 꺼지던데.”
“그러는 언니는 대체  하고 있는 건데요.”
“음...심란한 마음을 친구랑 같이 달래려고  잔?”
“이 인간이 진짜...”
“아니, 너도 나랑 같은 이유로 온 거잖아. 아냐?”
“..말을 말죠.”


승하의 손에는 어디서 들고 온 건지는 몰라도 제법 독해보이는 양주병이 들려있었다. 답지 않게 컵에, 얼음을 꽉꽉 채운 버킷까지 들고 챙겨온 그녀는 정말 술판이라도 벌일 기세였다.

“아니, 지금 상황에서 술이 넘어가요? 그리고 마스터 아직 환자거든요?”
“계속 꽁해져 있는 것보다야 낫지. 그리고 못 걷는 것만 빼면 다른 곳은 멀쩡하잖아.”
“그걸 누가 멀쩡하다고 해요? 진짜 알콜 중...”
“자자, 일단은 앉으시죠.”

 현이 자리를 권하자 화련은 눈을   흘긴  앉았다.


“너 진짜  마실거야?”
“언니! 좀!”
“지금은 마셔도 기분 좋게 마실  있을 것 같지도 않으니 다음에 같이 하기로 하죠.”
“그렇게 말하니까 별  없네.”

승하는 그대로 병을 비틀어 한 잔 가득 채우더니 단숨에 털어 넣었다. 그 모습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화련은, 마찬가지로 승하가 하는 짓을 지켜보던 류 현의 표정을 살폈다.
일단 겉으로 보기에 류 현은 평소와 별 다를 것 없어보였다.
‘그게 가능한 얘기인가? 마스터도 사람인데 화가 안  리가...설마 전에도 겪어본 건가? 낮에 지벡 건터가 말할 때 잠자코 있었던 것도 그렇고...’


“마스터 혹시...”


화련이 의문을  밖으로 내려는 그 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셋의 시선이 문쪽으로 향했다.

“저어...희, 희란이에요. 들어가도 될까요?”
“예, 들어오셔도 됩니다.”

문이 열리자 퀭한 얼굴의 희란이 들어섰다. 그녀는 선객이 둘이나 있다는 사실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별  없이 화련의 옆에 자리 잡았다. 그녀를 빤히 보던 화련이 손을 내뻗어왔다.


“희란이 너...울었니?”
“그, 그게...”


희란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집중하지 않으면 그냥 몸을 떨었다고 넘길 정도로 소심한 끄덕임이었다. 부은 눈가를 더듬는 화련의 손짓이 조심스러웠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류 현과 승하의 표정도 굳어졌다. 승하는 연거푸 양주병을 들이키더니 내팽개치듯 병을 내버렸다. 그녀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류 현, 진짜 정말로 솔직하게 대답해줬으면 좋겠어. 너 이거 알았어?”
“질문이 모호하군요. 이 타이밍에 이런 일이 터질 거라는 걸 알았냐는 질문이라면  대답은 낮에 드린 것과 동일합니다. 예상했으면 군병력을 뜯어내서 막았을 겁니다. 그게 여의치 않았다면 그냥 쓸어버렸을 거고요.”

쓸어버린다고 내뱉는  현의 어조는 고저가 없었다. 손을 가져다대면 베일  같은 적의만 있을 뿐. 섬뜩한 느낌이 들었지만 승하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이런 일이 일이 언젠가 터질 거냐고 물으신 거라면 그렇다고 대답해야겠군요. 워낙 전생이랑 많이 달라져서 시기를 가늠하는 건 불가능 하지만, 언젠가 있을 일이라고는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맞닥뜨리게 될 줄은 몰랐지만요.”
“...결국 언젠가는 맞닥뜨렸을 일이라는 건가.”

승하의 몸이 소파 위로 축 늘어졌다. 그녀는 팔로 눈을 가리더니 웅얼거렸다.
“이럴 거면...뭘 위해...”

청력을 돋우면  들을 것도 없었지만 류 현은 그러지 않았다.

“혹시...그  일을 좀 들을 수 있을까요?”


류 현이 어수선한 분위기를 정리하려는 데 화련이 치고 들어왔다. 질문의 내용에 비해서 표정이 지나치게 굳어있는  아닌가 싶었지만,  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하고 넘어가야할 이야기였다. 이 사태가  호전될 일은 없으니까.
아니, 앞으로 가면 갈수록 심해질 테니까.


전생의  현이 영웅 대접을  받은 건 미디어가 제 기능을 못할 정도로 문명이 박살난 것도 있었지만, ‘대소환’이 심화될수록 플레이어에 대한 이미지가 개판 난 것이 매우 크게 작용했었다.
  가장 크게 작용한 것은 지벡 건터가 열변을 토하면서 강조한 사냥개 이미지였을 것이다. 전생의 류 현이 가장 많이 먹은 욕도 그런 맥락에서 튀어나온 것들이었고.

‘그래도...이 이야기를 안 해도 되길 바랐는데 말이야.’


류 현마저 굳이 떠올리기 싫을 정도로 평범한 이들의 평범한 악의는 끔찍했다. 서로 죽이네 마네 하던 원수들이 흩뿌리던 살기보다  강렬한 인상을  안에 남겼다.

막말로 원수들은 그냥 쳐 죽이면 그만이었지만, 이 경우에는 그럴 수도 없었으니까.
그 뿌리가 모호하니, 책임도 모호했다. 그들이 책임을 ‘우리’라는 허상에 떠맡기고 있었던 것과 달리  현은 그 악의 앞에 인류에 대한 일말의 희망과 소속감마저 꺾여나갈 수밖에 없었다.

‘내 입으로 전생의 인류가 망할 만 했다고 전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 상황에선 쓴웃음조차 지어지지 않았다. 류 현은 씁쓸한 기분 속에서 입을 열어 저가 마주했던 절망에 대해서 풀어놓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꺼낸 화련이 듣다못해 눈물을 쏟아낼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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