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87화 〉탐식마(貪食魔) (287/429)



〈 287화 〉탐식마(貪食魔)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죠? 대체...대체...”


충격이 상당한 지 화련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작은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대체 왜...?”

완전한 문장은 아니었지만 가까스로 의문을 내뱉어낸 그녀에게 대꾸해 주는 이는 없었다. 방안에 내려앉은 무거운 공기에 모두가 입이 틀어 막힌 듯했다.

한 시간 전, 유격대 막사에 폭탄테러를 가한 놈들 중 셋을 붙잡아 심문을 했다.
사실 심문이랄 것도 없었다. 고문할 것도 없이 탁자 하나를 으스러뜨리고 윽박지르자, 자신들이 더 화났다는 듯이 전부 나불거렸으니까.
셋 중 그래도 서열이 더 높아 보이던 사내는 욕지거리를 해가며 외쳤다.

“이 쓸모도 없는 괴물새끼들! 죽는 게 두려워서 여기 숨어있는 새끼들이 쎈 척하지 마라 쓰레기들아!”


이 말을 외친  승하에게 턱이 박살난 남자는 닫히지도 않는 입으로 얼른 그놈들한테 가서 죽으라고 꽥꽥 악을 써댔다.
뒤늦게 사태를 접한 우크라이나 정부 측에서 신원 조회를 해본 결과, 정말 ‘위스프’ 같은 곳과는 연관이 전혀 없는 일반인이었다.
데스나이트가 우크라이나에 등장하면서 피난길에 올랐던 농장주.


마력은커녕, 아티펙트 하나 가진 게 없다는 걸 확인하고 설마설마했지만 진짜 일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혜라, 승하, 화련, 희란  여자는 넋이 반쯤 나갔다.


류 현과 지벡 건터만이 이성을 붙들고 있는 모양새였다.
멀쩡해 보이는 건 류 현 뿐이고 지벡 건터마저 꽤나 충격 받은 듯한 모습이었지만.

“염병...이런 날이 올 줄은 알았지만 실제로 보게 되니까 말이 안 나오네.”


지벡 건터는 말을 하면서도 숨이 막히는 지 상의 단추를 세 개나 풀어 젖혔다. 그러고도 진정이 되질 않는지 헉헉거리기까지 했다.

“...그 쪽은 예상하고 있었나? 아니면 미리 듣기라도  건가?”


생각에 잠겨있던 류 현은 슥 지벡 건터를 돌아봤다. 지벡은 조금 질린 낯빛을 한 채로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얼굴 표정 변화를 관찰해서 뭔가 캐내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둘  하나라도 해당 됐다면 애초에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막았겠지요.”
“끄응...”


지벡은 부정할 수 없다는 듯 신음을 흘렸다. 그가 생각해도 그게 맞았다. 지금 이 사태는 류 현에게 득이 될게  하나도 없었다.

“그래, 그게 정상이겠지. 그래서 어떻게  생각이야?”


넋이 빠져 있던 네 여자의 시선마저  현에게 쏠렸다. 류 현은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하는 듯하다가 입을 떼었다.

“일단 덮어야겠지요.”
“...역시 그 길 뿐인가?”
“지벡 씨도 아시지 않습니까. 지금 이걸 터뜨리는 건 불난 집에 기름 붙는 정도가 아니라 밑에 유전이 터지는 꼴이 될 겁니다.”
“그리고 그 불에 타는  플레이어들일 거고.”
“예.”

개망나니로 소문이 자자해서 플레이어들의 이미지 손상에 지대한 공헌을 한 지벡 건터가 ‘플레이어들’을 운운하니 조금 어색하긴 했지만 티를 내진 않았다.
지금 반응을 보면 그마저 그에게는 생존수단 중 하나였을  같았다.

“너네 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덮어? 이걸?”
“그, 그래요. 이걸 덮어서 뭘 어쩌자는 거에요? 아까 다 들으셨잖아요?”


화련과 승하가 더듬더듬 따졌다. 아직도 진정이 잘  되는 지 목소리가 떨리는  고스란히 전해졌다.
류 현이 설명하려는 것을 지벡이 손을 들어서 막았다. 그는 류 현을 슥 돌아보더니 눈으로 말했다. “내가 하게 해줘.”
약간의 분노와 짜증, 피로감이 뒤섞인  눈빛에 류 현은 작게 끄덕이는 것으로 허락했다.


‘아무리 괴물 검성해도 어리구만. 하기야, 그런 경험 있는 게 자랑은 아니지. 저 괴물 형씨가 이상한 거고 이게 정상이지. 암.’
“자, 잠깐 역사 공부를 해보자고. 최초의 플레이어 미국인 토리 헌터가 CIA에서 갈리고 플레이어의 존재가 알려지는 데 얼마나 걸렸을까?”

화련과 승하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옆에 류 현이 없었다면 뜬금없이 딴소리를 하는 남자를 치워버렸을 기세였다.
멀쩡한 상태의 그녀들에게 이런 눈총을 몇 번이고 받아본 지벡에게는 대충 받아넘길만한 수준이었지만 말이다. 지벡은 계속 말을 이었다.

“5년. 자그마치 5년이지. 그 뒤로 협회가 생기고 제 기능을 하는데 대충 2년이 좀 더 걸렸고, 플레이어들을 군인으로 만들지 말라는 국제협약도 그 때 생겼지. 클랜들도 그 때쯤에 생겨나기 시작했고 말이야.”
“야, 너 지금 뭐하자는...”
“들어서 손해 볼 건 없으니까 좀 들어둬. 이건 저 형씨도 모르는 얘기니까.”

승하와 화련은 동시에 눈빛을  현에게 쏘았다. ‘저 재수 없는 인간이 말하는 거 계속 듣고 있어야 해요?’
류 현이 같은 방법으로 대꾸했다. ‘예.’
두 여자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그런데 플레이어들이 언론에 제대로 노출되기 시작한 건 검성, 네가 데뷔하고 나서부터야.”
“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너만 해도...”
“난 그  일주일에 한 번은 총부리 입에 물고 국방부 장관이랑 면담하던 몸이었고. 그 전 인터뷰들? CIA놈들이 관자놀이에 권총 박아놓고 달달 외우라고 시킨 거야. 알 사디크 영감이나 파비오나, 인도의 라비 라자나 나랑 다 비슷한 처지였지. 알 사디크 영감은 좀 나았겠지만.”
“그걸 네가 어떻게...”
“알고 있냐고? 그게 공식 매뉴얼이었어. 플레이어 매뉴얼. 가족을 인질로 삼아서 던전에 밀어 넣을 때 유의사항 같은 게 적힌 매뉴얼. 농담 같지? 유럽 어딘가에 있을 ‘위스프’ 아지트 몇 개 털어보면 인쇄본이 있을 걸?”
“내가 이렇게 말하면 화낼지도 모르겠지만, 검성  굉장히 운이 좋은 케이스였어. 북한이 붕괴하면서 남한 정부는 일반 군대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괴수를 다 막을 수 없었으니까.”

운이 좋았다는 말에 승하의 미간이 꿈틀했지만, 그녀는 지벡 건터의 눈을 보고 긴장시킨 어깨에 힘을 풀었다. 비꼬는 것이라기에는 그의 눈빛이 곧았다.


“그렇다고 아프리카처럼 땅을 포기할 수준도 아니었고, 영웅이 탄생하기는 딱 적당했지. 뭐, 그 영웅이 탄생한 덕택에 득을 본 내가 할 소린 아니겠지만.”
“어찌됐거나, 네가 나타나 준 덕택에 우린 총부리를 입에 물고 면담하는 처지는 벗어날  있었지. 정부놈들은 여전히 우리 아가리에 총부리를 물리고 싶어 했지만, 보는 눈이 너무 많아져서 그러기가 곤란해진 거야. 물론, 잘난 여론 빨만 있었던 건 아니었지. 가장 결정적이었던 건 네 무용을 본 돈 많고 돈만큼이나 겁도 많은 부자들이 염두를 굴리기 시작한 것 때문일 거야.  까놓고 말해서 우리를 해방하라고 시위가 일어난  우리 존재가 알려졌던  때 뿐이잖아?  뒤로는 그 비슷한 것도 없었고.”
“내가 이런  어떻게 아냐고? 미국 버리고 망명오라고 꼬신 새끼들이 알려주더라. 그 뒤로 여기저기서 주워들을 기회도 있었지. 당연히 교차검증도 해봤고.”
“그런데 이런 곡절을 겪고 나서도 완전히 해방된 게 아니었단 말씀이지.  일반인  플레이어가 징역 얼마나 사는 지 알아?”
“...최소 2년 아닌가.”
“맞아! 최소 2년이지. 이건 어딜 가나 똑같아. 최소 2년!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치기만 해도 징역을 산다니!”
“그거야 우리랑 일반인들은 아예...”
“그래, 가진 힘이 다르지. 그런데 일반인들끼리 체급에 따라서 형량 정하는 거 본  있어? 페더, 라이트, 헤비 뭐 이런 식으로? 난 본 적 없는데.”
“야, 그거랑은 차원이 다른...”
“그럼 차원이 다른 재력(財力)을 가진 놈들은 어때? 돈이 많으면 일반인이 한 몸에 담을 수 있는 무력을 능가하는 힘을 가질 수도 있잖아? 그놈들도 재력으로 일반인들한테 해 입히면 무조건 2년 정도 감빵에서 썩나?”
“......”

지벡을 빤히 쳐다보는 승하의 표정은 ‘이 새끼 뭐하자는 거지?’였다. 지벡은 주눅 드는 기색 없이 더 기세를 올려가며 말했다.

“아니, 반대지. 기소조차 안 되는 경우가 훨씬 많을 거야. 많이 가졌다고 더 많은 책임을 지는  마블 코믹스의 슈퍼 히어로에게나 성립하는 전제지. 보통은  반대지. 불합리하다는 생각 안 들어? 세금 말고,  많이 뭔가를 가졌다고 이런 대접을 받는  우리 플레이어뿐이야. 심지어 2년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지.  법하나에 그렇게 조항 많이 붙은 건 우리 처벌하는 법 빼고는 본 적이 없어. 그거 알아? 플레이어가 위협하는 언동을 했는데 신고 받은 경찰이 구속 조치 안하면  경찰이 감봉 당한 다는 거?”
“대체 뭐하자는 거야? 너 신인류론 신봉자야?”


신인류론. 플레이어들이 가진 우월한 신체 능력과 물리 법칙을 엿 먹이는 능력들이  진화한 인류의 상징이라고 여기는, 그러니 플레이어들을 지배층으로 세계 권력을 재편해야 한다는 주장이 요체를 이루는 이론이었다.


“그럴 리가.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사회가 여전히 플레이어들을 구속하고 있으며, 열심히 세뇌도 걸고 있다는 거야. 우리가 괴수만을 물어뜯는 사냥개로 남도록 말이지.”

‘사냥개’ 라는 말에 두 남자를 제외한 모두가 움찔하였다.
승하에게 턱이 깨져서 끌려 나간 남자의 뒤를 이어 욕을 퍼붓기 시작하던 자가 내뱉었던 말이 떠올라서였다. “사냥개면 사냥개답게 괴물놈들의 목덜미나 물어뜯다가 죽어라! 괴물끼리 싸우다가 죽으란 말이다!”
플레이어로 살면서 더한 욕도 들어먹어 봤지만, 가슴에 콱 틀어박히는 말이었다.


“네가 끔찍한 경험을 했다는 건 알겠어. 하지만 그 주장은 너무 비약...”
“비약? 비약은 우리를 대하는 인간들의 태도지. 우리는 괴수를 족치는 것 외에는 다른 직업도 갖는 게 사실상 불가능해. 왜? 전부 서류전형에서 떨어지니까. 플레이어라고 하기도 힘든 능력을 가진 친구들이나 겨우겨우, 그것도 몇 번이고 검증을 거쳐야 공사판에나 나갈  있지.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플레이어가 되면 살인 전과 30범이  확률이라도 올라가나?”
“그거야 일반인들 입장에서는 플레이어랑 부딪힐 수 있는 환경자체가...”

승하는 반박을 시도하면서도 입안이 바짝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왠지 모르게 토하고 싶은 기분마저 들었다.

“이봐, 검성.  심정은 이해하는데, 아무리 변명을 덧붙여 봤자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 뿐이야. 인간들은 플레이어들을 별로 안 좋아해.  같은 놈들이 사고치는 거랑 별개로 그냥 싫어한다고. 혹은 싫어한다는 인식조차 없이 이렇게 좃같게 구는 거거나.”
“계속 말하고 있지만 그건 너무 비약이야. 아직 플레이어들을 완전히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된 것뿐일 수도...”
“그래 준비가  되긴 했지. 사냥개들을 완벽하게 제어할 목줄도,  목줄을 채울 준비도. 그놈들 입장에선 던전 안에서 뒈져야 할 놈들을 제어할 수단이 너무 적지. 너희 눈에는 좃밥같아 보이는 나만 해도 사막 한가운데  떨어져서 몰리는 게 아니면 일반인 군대 같은 건 하나도 안 무섭거든.”
“지벡 건터...너...”
“물론  내가 원해서 던전에 들락거리는 거였지. CIA에 끌려가서 텃밭에 뿌려지기 싫었으니까. 힘이 필요했고, 그 힘을 마음껏 써도 되는 던전이 싫지만은 않았어. 조금 짜증나긴 했지만. 그런데 다른 놈들은? 돈을 원해서, 명성을 원해서 들어가는 놈들도 있겠지. 그런데 다른 선택지가 있을 때도  놈들이 지금과 똑같은 선택을 했을 거라고 100프로 장담할  있나? 아니, 그 이전에 선택권 자체가 없는 건 그거랑 별개 문제잖아?”


열변을 토해서 목이 타는지, 지벡은 집무실 한켠의 냉장고에서 생수 두 통을 꺼내서 한 병을 단숨에 들이켜고, 남은 한통을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현실이 이래. 검성 너 같은 부류는 언론에서 영웅이라고 빨아주고, 던전에 꼬라박는 걸 위대한 도전이라고 치켜세워주지만 본질적으로 우리를 대하는 놈들의 태도는 던전에 집어넣는 사냥개라고. 아니라면 벌써 난리가 났겠지. 세상에는 오지랖 질을 정의구현이라고 생각하는 놈들이 널렸으니까.”
“적응? 그런 말은 던전에서 나온 물건으로 꿀 빨기 전에나 통하던 소리고. 우리가 던전 안에서 들고 나온 물건은 쓰면서, 정작 우리는 사회 안에서 고립시킨다는  무슨 뜻이겠어? 개랑은 상종하기 싫다 이거지.”
“물론, 내가 좃같은 꼴을 꽤 많이 당해서 감정적으로 과장한 부분도 있겠지. 아니, 꽤 많을 거야. 그런데 이거 하나만은 확실해. 그 전에는 어쨌든 간에 지금 이 나라에는  말처럼 생각하는 놈들이 아닌 놈들보다 훨씬 많을 거라는 거. 그리고 계속 늘어날 거라는 것.”

그 말만큼은 반박할  없었던 승하는 입술을 짓씹었다. 그 남자들이 내뱉은 말들이 웅웅 메아리치는  했다.
그 때문에 그녀는 할  다했다는 듯이 후련한 표정으로 자리를 뜨는 지벡을 붙들고 반박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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