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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6화 〉탐식마(貪食魔) (286/429)



〈 286화 〉탐식마(貪食魔)
“이거  더 빨리 찾아뵐 것을 그랬습니다.”
“제 생각을 대신 말씀해주시는군요.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저 또한. 곧 좋은 소식이 들려올 테니 그 때 다시 뵈었으면 좋겠군요.”
“정말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서로 손을 맞잡은 청년과 중년의 신사는 그 상태로 5분여를 더 서로의 얼굴에 금칠하는  썼다.
청년이 허공에 둥둥  있는 의자에 몸을 맡긴 환자가 아니었다면 정말로 건물 밖으로 나갈 때까지 그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중년 신사는 5분여의 작별인사가 끝나자 깔끔하게 떠나갔다. 문밖으로 떠나가는 그의 모습을 보며  현은 속으로  숨을 내쉬었다.


“에휴.”

입으로 뱉는 한 숨은 화련이 대신해주었다. 류 현의 시선을 받자 화련은 입을  가렸다. 아무래도 방금 떠난 이가 들을 수도 있다고 책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
류 현은 바로 그녀의 오해를 풀어주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숨 좀 돌리겠네요.”
“고생은 마스터가 다 하셨죠.”

류 현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현이 환자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덕에 화련이 배로 수고를 해야만 했다.


“아으으, 노인네들 진짜 힘도 좋지. 저렇게 힘이 넘치면 자기네 나라 일이나  돌볼 것이지 왜 여기까지 날아와서 환자 괴롭히고 난리람.”


그 나라를 유지하고 싶어서  것일 거라는 소리는 굳이 하지 않았다. 투덜거리는 화련도 잘 알고 있는 이야기일 테니까.
헛소리를 찍찍하다가 갑자기 태세 전환한 인간들이 짜증나서 괜히 하는 소리일 테다.


인간 노예 기사가 터지고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자 안면몰수  인간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이곳으로 날아오기 시작했다. 업무가 바빠서 오지 못해서 유감이라고 뻔  핑계로 피하던 최전방으로 말이다.
볼꼴 못 볼꼴  본 류 현도 이 상황이 귀찮고 짜증나는데 화련은 오죽할까.


“그래도 저가 최고인 줄 아는 군벌들 하나하나 붙들고 협상하는 것보다는 저 치들 상대하는 게 낫지요. 적어도 이쪽이 뭔가를 쥐고 있는 한 눈치는  테니까요.”
“어, 음.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진짜 할 말 없네요.”
“그래도 이쪽이 훨씬 보람이 있을 거라는 의미로 드린 말씀입니다. 사실 저도 이 상황이 썩 즐겁지는 않거든요. 이런 식으로 자기 최면을 거는 거죠.”
“...이럴 때는 승하 언니가 부러워요. 누구는 징글징글한 영감들 상대하는데 자기 좋아하는 칼질에 푹 빠져선, 일 어떻게 돌아 가냐고 물어볼 생각도 안하고. 혜라가 그렇게 어른스러운 게 아마 언니 때문 일거에요.”

이번만큼은 친구를 커버해줄 수가 없었다. 류 현은 그냥 허허 웃기만 했다.


“술 먹고 노는 것보단 낫지 않습니까. 듣자하니 요즘 술은 아예 입에도 안 대시는 거 같던데.”
“술까지 마시고 놀았으면  따까리하고 시원해지기라도 했겠죠. 수련하는 거니 뭐라고 할 수도 없고.”
“각자 잘 하는  나눠 맡았다고 생각하기로 하죠. 솔직히 승하 씨가 도와준다고 해도 말려야 할 판 아닙니까.”

화련은 끄덕거리긴 했지만 뚱한 표정은 그대로였다. 자신이나 류 현이나 이런 일을 잘하거나, 좋아해서 맡은 게 아니었으니까. 용잡이 팀 인원이 너무 적어서 벌어진 어쩔 수 없는 일.
국내에서 활동할 때야 문민호나 서해란을 비서 대신 부려먹었지만, 국외로 나와서도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쩌다보니 웨인 크로이츠가  역할을 해주는 경우도 있었지만, 네임드 몹이 등장한 이후에는 그러기도 어려웠다. 그도 싸움에 참가했어야 했으므로.


“제가 지금이라도 비서팀 꾸리자고 하면 화내실 거에요?”
“화를 내긴요. 그런데 말입니다. 비서팀을 꾸리면 화련 씨는 그 친구들을 믿으실  있겠습니까?”


화련은 대번에 떫은 표정이 되었다.


‘믿어? 어떻게?’

그녀는 비서팀이 생길 경우 그들이 만지게 될 정보들을 떠올려보았다. 그리고 그런 정보를 다루게  이들을 믿을 수 있는지 자문해 보았다.
결론은 순식간에 나왔다.

“아뇨...절대로 안 믿을 거 같은데요.”

류 현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있으나 마나 일겁니다. 오히려 스트레스거리가 하나 늘어나겠죠.  친구들이 중간에서 헛짓거리를 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우리 정보를  받고 뿌리고 있지 않을까. 하고요.”
“으음...”
“사실 이 정도야 여느 길드나 다 감수하고 있는 일이긴 합니다만, 우리팀은 그렇게 안일하게 넘어갈  없지 않습니까.”


지금 하고 있는 짓 만해도 유럽국가들이 대놓고 비난을 안 해서 그렇지, 억단위 사람들에게 욕을 들어먹을만한 일이었다.
사실을 알고 있는 이들이 눈치 보는 걸로 먹고 사는 정치인과 유격대 내부자들이라서 별문제 없이 넘어가고 있는 것뿐.

“아무리 우리가 신경 써도 비서팀 누군가는 정보를 취합해서 우리의 의도를 파악할 겁니다. 거기서 끝나면 좋겠지만...”


이런 상황에서 류 현의 말처럼 팀 가까이서 정보를 취합할 수 있는 이들을 만든다? 큰 해를 끼칠 순 없더라도 골치를 아프게 만들 수는 있을 것이다.
특히 화련처럼 팀 상황상 그런 부분을 신경 쓸 수밖에 없는 입장이라면.


“...제가 생각이 짧았네요.”
“아뇨, 저도 직접 당해보고 깨우친 거니까요. 솔직히 대충이라도 비서진 꾸려볼까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고요.”
“당해보셨다고요? 언제요? 전생?”
“진짜 비서진은 아니었고, 전생에서 누나를 케어하려고 그 비슷한 걸 만들었다가 뒤통수를 제대로 얻어맞았죠. 욕심에 눈이 머니 리스크 같은 건 계산도 안하고 지르더군요.”

그 일은 류 현에게 크나큰 교훈을 주었다.
돈이나 상하위계로 만들어진 관계에서 약점을 보이면 원한관계가 있든 없든 언제든 배신당한다는 교훈을.


그리고 사람들은 때때로 자신의 계획을 과대평가한다는 것도.

류 현은 그들에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교훈을 주었다. 죽음으로서.
아주 쉬웠다.
그 자들은 플레이어 류 현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전혀 없었으니까. 류세아의 동생  현만을 알고 있었을 뿐.
결정적으로 자기 자신과 계획을 너무 과대평가했었다.

비서팀을 꾸리고, 비서팀이  자들처럼 자신들의 계획을 과대평가해서 수작질을 부려봐야 그런 일은 벌이지 못하겠지만,  현은 사고가 터질만한 여지를 만들 생각은 없었다.
좀 피곤하긴 하지만 지금도 충분하니까.

“뭐 우리팀 정보를 뿌린다고 해서 팀이 해체되거나 그럴 일은 없겠습니다만, 괜히 부스럼거리를 만들 필요는 없겠지요.”
“...별 수 없네요. 이대로 갈리는 수밖에.”

화련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는 모습에 류 현은 웃었다.


“하하, 그래도 곧 이 고생도 끝날 겁니다. 이제 더 못 찾아오게 될 테니까요.”
“그게 무슨 뜻이에요? 일주일 후까지 약속이 잡혀있는데. 아, 슬슬 데스나이트를 다른 곳으로 몰려고요? 하긴, 차라리 그놈 상대하고 있는 게 속은 편하죠. 언제 시작하시게요? 한동안 책상에만 앉아있어서 좀 준비가 필요한데.”
“아뇨, 그 전에 아마...”


콰앙! 폭음이 건물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화련이 쳐놓은 방음층은 방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소리를 막는데 중점을 두었지만, 문에 바짝 붙어서 말하지 않는 이상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도 비슷한 수준이로 막았다.
즉, 폭발음이 들릴 정도면 보통 규모가 아니라는 의미.
류 현이 이마를 짚으며 한 숨을 내쉬는 것처럼 말했다.


“이거 설마...벌써?”
“마스터 이게 지금 무슨...”

그때 집무실 문이 부서질 것처럼 열렸다. 문을 걷어차고 들어온 승하는 검을 뽑아든 채로 집무실을 살폈다.

“너희 괜찮아?”
“예, 괜찮습니다. 유격대 인원 중에서 발화계나 폭발계 능력을 가진 분이 사고 친  아니지요?”


침착하다 못해 무덤덤해 보이는 류 현의 모습에 승하의 표정에 의아함이 깃들었다. 그녀는


“아냐. 폭탄이었어. 폭탄 터지자마자 멀리서 소총으로 갈겨대더라. 정확한 숫자는 모르겠는데 그리 많아보이진 않았어. 들어올 생각은 안하고 총만 쏴대기에 다른 목적이 있는  알고...”


이리로 왔지. 승하는 방안을 마저 다 살폈지만 이상이라곤 없었다. 화련이 좀 많이 놀랐는지 동그랗게 뜬 토끼눈을 자신과  현을 오락가락 했으나 부상이나 폭발로 인한 검댕은 보이지 않았다.

“목적은 이미 달성했을 테니 아마 곧 물러날 겁니다. 제 예상이 맞다면요.”
“그게 무슨 소리...응?”

승하가 오른쪽 귀 안쪽을 짚었다. 미간을 찌푸리고 뭔가 주의 깊게 듣는가 싶던 그녀는 검을 갈무리하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탁자 위에서 마실 것을 찾던 그녀는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고는  숨을  내쉬며 물었다.


“우리 쪽에서 치고 나가려니까 뒤도 안 돌아보고 내뺐다네. 너 대체 어떻게 안 거야?”
“그게 무슨 소리에요? 좀 자세하게 말해봐요. 자세하게!”
“폭탄 터뜨린 놈들이  몇 발 쏘다가 그 이상 아무것도 안하고 그냥 도망갔다고. 류 현, 이번  아주 자세한 설명이 필요해 보이는데.”

말하는 승하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추측일 뿐입니다. 아닐 수도 있는데 괜히 미리  밖으로 꺼내서 심란하게 만들고 싶진 않습니다.”
“이미 꺼내놓고 뭔 소리래.”


류 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순간적으로 옛날 기억이 떠오른 탓일까. 너무 경솔하게 입을 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으로 류 현을 쪼던 승하가 흠칫 떨더니 다시 오른쪽 귀를 짚었다.

“아, 잡았어?  놈? 어어, 이리로 데리고 와. 뭐? 지랄하지 말라고 하고 그냥 끌고 와. 근처에 접근한 것만으로도 감빵에  넣을 수 있구만 무슨.”
“왜요? 뭐래요? 잡았데요?”
“어, 잡았다는데 잡힌 놈들이 헛소리를 하는 모양이야. 자기들은 민간인이니 놔달라면서...”
“민간인이요?”

화련은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반면 승하는 코웃음을 치면서 제가  말을 반박했다.


“민간인은 무슨 이 동네 ‘위스프’같은 놈들이겠지. 그리고 진짜 민간인이어도 무슨 상관이야? 민간인이면 아예 총기 소지법이랑 폭발물 관리법부터 걸리는 거 아냐? 거기에  이 동네는 다른가?”
그렇게 말하면서도 테러를 가한 이들이 민간인이라고는 생각도 안하는 모습이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일반인 비율이 높은 걸로 유명한 ‘위스프’도 이 유격대를 공격하진 않을 테니까. 전력에서 밀리는 문제는 둘째 치고, 그럴 이유가 없지 않은가.
테러를 가하는 인간들이 정상적인 이유를 따지겠냐만은, 목적조차 모호한 상황이니 직접 족쳐서 알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셋이나 잡았다고 하니까 그놈들 족치면 알 수 있겠지.”


‘예거즈’가 멀쩡하던 시절 비슷한 일을 몇 번 겪어본 승하는 제 뒷머리를 헤집으며 짜증을 참았다.

‘대체 어디야? 클랜에서 우릴 건드릴 이유는 없는데. 진짜 이 동네 ‘위스프’같은 놈들인 건가?’

만약 그렇다면 정말 ‘위스프’보다 더 미친놈들일 것이다. 아프리카 대륙에 원정 온 클랜들을 공격하던 ‘위스프’라지만, 이와 같은 위기 속에서 언데드 군단과 대적하고 있는 유격대를 공격하진 않을 것이다.
아니, 못할 것이다. 명분이 없으니까. 공격했다간 조직을 세운 명분마저 위험해지니까.

‘젠장, 이런 놈들은 뿌리내리면 골 때리는데. 가기 전에 뿌리 뽑든가 대가리 몇이라도 쳐내고 가야겠네.’


데스나이트 잡으러 왔다가 생각도 안한 테러단체도 때려잡게 생겼다며 속으로 푹푹 한 숨을 내쉬었다.


그런 승하의 생각은 채 한 시간이 가지 못해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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