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5화 〉탐식마(貪食魔)
“와, 그 양반 그렇게 안 봤는데 꽤 막가파네요. 이거 어떻게 뒷감당 하려고 푼 거지?”
화련은 제 손에 쥐여진 신문을 팔랑팔랑 흔들며 말했다. 신문의 1면에는 인간 노예들을 부리는 라가들의 사진과 인간 노예로 부려졌던 이들의 증언들이 실려 있었다.
기사에서는 아프리카 원정대 소속의 익명의 제보자라고 했지만, 그들은 웨인이 정보를 찔러 준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 말고는 이렇게 자세한 수치를, 정황까지 섞어서 제시할 수 있는 이가 없을 테니까.
“이렇게 난리날 거 모르지도 않았을 거 같은데.”
아프리카 대륙에서 구엘 뒤 굴락까지 잡고 온 그들에게는 골치는 아프지만, 받아들일 시간이 충분히 지나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 일.
하지만 대중들은 그렇지 못했다.
네임드 몹으로 인한 피해는 용잡이 팀이 국가단위로 커지기 전에 모조리 때려잡았고, 제 3차 ‘대소환’이 시작되었음에도 유예 없이 튀어나오는 괴수의 숫자는 전생과 달리 소수였으니 대중들이 피부로 위기를 느끼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기껏해야 피해 당사국 시민들이나 심상치 않다고 느끼는 정도.
그런 와중에 나온 이 기사는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지는 정도가 아니라, 호수 바닥이 뒤집어엎는 것과 다름없었다. 단순히 놀라게 만드는 정도가 아니라, 패닉을 일으켰다.
교회, 성당, 모스크 같이 종교 집회 건물들이 미어터지고 있다는 웃지 못 할 기현상은 대중들이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보여주는 일면에 지나지 않았다.
원래부터 치안이 좀 불안하던 지역은 벌써 소요사태가 일어났으며, 그것이 점차 국가 전역으로 퍼지는 중이었고 그 소요를 주도하는 놈들 중 몇몇은 ‘위스프’ 같은 조직으로 탈바꿈 하려는 기미마저 보였다.
전생의 류 현이 이때 즈음에 그 일들을 모두 겪고 난 후였는데, 그 쳐진 진도를 보충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일제히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사진 한 장과 증언 몇 줄로 일어난 일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스케일이 컸다.
“근데 이거 좀 위험하지 않아요? 마스터가 저번에...”
“예, 전생에서도 이 비슷하게 진행되다가 한 방에 우르르 무너져서 인류 전선이고 뭐고 다 없어졌죠.”
“그럼 지금이라도 수습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이러면 마스터가 기껏 피해 줄이고 한 게...”
“비슷하지만 다릅니다. 그 때는 클랜들이 이빨을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동시에 3차 ‘대소환’이 일어나는 통에 국가 입장에서는 내환과 외환을 동시에 맞아야 했거든요. 클랜들이 내전 없이 힘을 보중한 상태라지만 군벌로 재정비하기에는 많이 부족하죠. 경험도, 라인도 말입니다. 그 때와는 많이 다르죠.”
클랜간의 전쟁도, 클랜의 물밑 작업에 잠식된 정부도 아직은 없다.
잠식되어가는 중인 곳은 있을지 모르나, 노골적으로 움직이는 클랜들이 없는 걸로 봐선 아직 준비가 덜 됐거나 사태를 관망하는 걸 택한 것일 터.
사이비의 준동도, 제 2의, 제 3의 ‘위스프’의 등장도 훨씬 늦거나 규모가 작아졌다.
제 3차 ‘대소환’이 기억하는 것과 다르게 진행되고 있으니 낙관만 할 수는 없기는 했다.
이곳에 와서 과연 국가가 남아있는 게 더 나을까 싶을만한 개소리를 듣기도 했고 말이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낫다. 클랜은 아무리 커져도 일반인을 아우르지 못하니까.’
화련이나 승하, 그리고 이 사태를 일으킨 웨인 크로이츠는 아직 죽지도 않은 놈의 사체 분배가 어쩌고 하는 높으신 분들의 작태에 회의감 비슷한 걸 느끼는 모양이었지만 류 현은 이미 떨쳐낸 상태였다.
그런 감정을 며칠 동안 부둥켜안고 있기에는 더러운 꼴을 너무 많이 봤고, 해야 할 일도 많았다. 정말 상상도 못한 수준의 개소리라 사흘 정도는 골머리를 앓기는 했지만.
‘진행이 상당히 늦춰지긴 했지만 낙관할 단계는 아니야. 어차피 그놈들한테는 기대도 안 했다.’
애초에 그는 모두가 사이좋게 손잡고 아지다하카의 머리통을 날릴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저 방해만 되지 않아도 족했다.
자살희망자가 아니라면 결국 괴수들과 맞서 싸우게 될 테고 그들의 역할은 그것으로 족했다. 끝에 가서는 싫어도 협조하게 될테니까.
최소한의 인지도만 확보하고 별 다른 대외 활동을 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거기에 적극적인 도움은 지금도 열렬하게 구애 중인 미국과 은근하게 지분대고 있는 중국의 것으로 충분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사공이 너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는 법이지. 국가 단위의 지원은 필요하지만, 스폰서가 너무 많아지면 귀찮은 일에 휩쓸릴 거고.’
후자는 후에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전자는 상황을 충분히 직시하고 있는 듯 했으니 하나만 남아도 상관없었다.
전생에서도 거의 간판만 유지하고 있던 미국의 지원 하나만으로도 악룡에게 도달했었으니까.
네임드 몹들이 전생보다 훨씬 강력해졌다지만, 류 현 본인도 그 이상으로 강해졌을 뿐더러, 이젠 그 강대한 적에게 홀로 맞서지 않아도 되니까.
‘그래도 이럴 줄은 몰랐는데. 웨인 크로이츠. 원래 이런 성격이었나?’
유명 플레이어 중에서는 단명한 편인 웨인에 대해서 알 방도라곤 직접 부딪히는 것뿐이었다.
어찌어찌 인연이 닿은 후, 잦은 만남을 통해서 웨인이라는 남자의 성향 정도는 대강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류 현이 파악한 웨인은 이런 일을 벌일만한 자가 아니었다. 책임감, 성실함, 워커홀릭으로 똘똘 뭉친 남자였으니까.
머리라도 나쁘면 모르겠지만, 이런 걸 던져놓고 여파를 생각 못할 정도로 머리가 나쁜 사람도 아니었다.
‘솔직히 돌아가는 꼴이 나한테 나쁠 건 없긴 한데...’
사이비들의 발호나, 포스트 ‘위스프’들의 준동은 짜증나는 변수긴 했지만 막을 도리가 없는 일이기도 했다.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데 힘없는 사람들이 멀쩡하게 행동하길 바라는 게 더 이상한 일.
컨트롤 할 수 없는 부분이라 더 곤란한 면도 있었지만, 아주 나쁜 일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뭐, 어쩌겠습니까. 이미 일은 벌어졌고, 돌아가는 상황도 그리 나쁘지 않으니 최대한 이용해보는 수밖에요.”
“그거야 그렇긴 한데...진짜 그 양반한테 아무 말도 안 하실 거에요?”
화련은 웨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불안한 마음이 더 컸다.
지휘권을 위임받았든 어쩌든, 지금 아프리카에 머물고 있는 이 천이 조금 안 되는 플레이어를 이끌고 있는 자가 돌발행동을 벌인 거였으니까.
갑자기 눈이 뒤집혀서 더 이상한 짓을 벌이면 이쪽으로 불똥이 튈 확률이 높았다.
아니, 백프로 이쪽으로 불똥이 튈 것이다. 불똥을 두려워하는 건 아니었지만, 예방할 수 있는 사고는 예방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팀의 목적과 대치되는 결과를 낳을 가능성이 높다면 더더욱.
“오늘 새벽에 웨인 씨와 잠깐 연락을 했었습니다.”
새벽 이라는 말에 화련의 시선이 뾰족해졌다. 류 현이 찔끔하는 것을 보고 그녀는 한 숨과 함께 손을 내저었다. 말을 계속 하라는 의미였다.
“이쪽을 돕기 위해서 그랬다더군요.”
“도와요...? 이 난리판이?”
난리판이라는 화련의 표현은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지금 한창 난리가 벌어지고 있는 서유럽에서 멀찍이 떨어진, 이곳 우크라이나에서도 혼란스러움을 그대로 느낄 수 있을 지경이니까.
주로 유럽국가의 외교관들이나 국방부 관계자의 입을 거쳐서 말이다.
“여기서 데스나이트를 상대로 시간을 끌기로 한 건 위기감을 부추기기 위해서였지요.”
“그랬...었죠. 그런데 이건 좀 과한 거 같은데요.”
실시간으로 땅이 황폐화되고, 가산을 다 내버리고 피난행렬에 올라야 했던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이 소리를 들으면 펄펄 뛰었겠지만, 화련이 알바는 아니었다.
“제가 하자고 해놓고 이런 소리 하는 것도 웃기지만, 사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나 총리 말고는 큰 효과를 보지 못한 게 사실 아닙니까. 괜한 농토만 오염되고 있는 판국이죠.”
“그것도...그렇죠.”
인접 국가들도 비슷한 수준으로 불안해하며 사냥을 종용했으나 그다지 만족스러운 수준은 아니었다.
류 현이 보기에 그들은 놈이 작정하면 유럽 전역에 할로윈을 선포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벡 건터가 너무 잘 막아줬기 때문에 이렇다니, 이걸 대체 뭐라고 해야...’
“이대로는 시간을 한 달을 더 보낸다고 해도 우크라이나만 황폐화될 뿐 별다른 위기의식은 못 심어줄 겁니다. 그렇다고 놈이 날뛰게 내버려둘 수도 없고요.”
“그렇긴 한데, 이러면 민간인 피해가 너무...”
류 현으로부터 전생의 이야기를 들었기에 화련은 지금의 혼란이 상당히 큰 민간인 피해를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걸 예상할 수 있었다.
위기감은 전파할 수 있겠지만, 당장의 반응들을 보면 그 정도가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거부반응이 어마어마했다. 괴수와의 싸움이 아니라, 패닉에 빠져서 인간들끼리 피해가 날 판.
“별 수 없지요. 전 신이 아니니까요. 흘려야할 피를 적게 흐르게 노력할 순 있겠지만, 막진 않을 생각입니다.”
대꾸하는 류 현의 음색은 일말의 안타까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화련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막을 생각이 없다는 말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얼굴에 걸린 표정 때문이었지.
그녀의 마스터는 아주 드물게 이런 면모를 보이곤 했다. 이번이 두 번째.
처음으로 이런 표정을 내보인 건 세아가 입원해 있던 병원을 습격한 베니 에벌린이 죽었다는 소식을 웨인으로부터 전해 들었을 때였다.
강도 높은 심문 끝에 그 여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류 현은 이런 표정을 지었었다.
마치 심장에 흐르는 피가 차갑게 식은 이처럼, 피가 아니라 쇳물이 흐르는 이처럼.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얼굴로, 무덤덤하게 ‘그렇습니까.’하고 대답하고는 하루 종일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었다.
그 장난기 많은 승하도 그날은 류 현 근처에 얼쩡거리지 않았었다.
화련은 조심스럽게 그의 눈치를 살폈다. 당장 독일 부총리와의 미팅이 잡혀있는데, 그런 상태에 돌입한 것이라면 미팅부터 깨야만 했다.
다행스럽게도 류 현은 다시 입을 떼었을 때 평소의 그로 되돌아왔다.
“어찌됐거나 당장은 이 상황을 유용하게 써먹을 궁리를 하는 게 낫겠지요. 뒷수습을 하려거든 웨인 씨가 인간 노예 구출을 끝내고 나서야 시도라도 할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당장은 웨인 씨에게 연락해서 그만 두라고 해봐야 별 소용도 없을 겁니다. 이미 혼란은 퍼질 때로 퍼졌으니. 그렇게 할 이유도 없고요.”
“마스터 뜻이 그러시다면야...제가 더 드릴 말씀은 없네요. 괜히 심란하게 만든 것 같고...”
“아니요, 그렇진 않습니다. 저도 이야기를 나눠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이 문제는 그냥 대충 넘길 것도 아니니 미팅이 끝나고 나면 다 모여서 다시 논하기로 하지요.”
“...승하 언니가 또 난리치겠네요.”
류 현은 쓴웃음만 지었다.
그 때 문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스터, 부총리님을 모시고 왔어요.”
목소리의 주인은 희란이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일체의 떨림도 없이 똑 부러지는 목소리였다.
‘아니, 진짜 나한테 무슨 문제가 있나. 왜 나랑 있을 때는 저렇게 못 하는 거지?’
“열려있습니다. 들어오시죠.”
복잡한 속내를 감춘 채 류 현은 백발이 히끗한 손님을 맞아들였다.
독일의 부총리라는 직함을 달고 있는 신사가 오늘 세 번째로 맞이하는 손님이라는 것과, 이 뒤로도 세 명의 손님이 더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 수 없는 깔끔한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