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84화 〉탐식마(貪食魔) (284/429)



〈 284화 〉탐식마(貪食魔)

“또 거기 인가요.”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아뇨, 아닙니다. 제가 좀 예민하게 군  같네요. 루넬, 미안합니다. 전화는 거기 두고 가시면 됩니다. 제가 알아서 하지요. 바쁘실 텐데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아뇨. 그럼...”


루넬이라고 불린 금발 아가씨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정수리가 훤히 보일 정도로 깊게 허리를 숙여보이고는 방을 나섰다.
웨인은 그녀의 기척이 어느 정도 멀어지자 두 손으로 얼굴을 덮고 한탄 같은 한 숨을 내어쉬었다.
그의 가슴은 여전히  막힌 것처럼 답답했다.

‘이젠 체면조차 차리질 않는군.’

류 현을 포함한 용잡이 팀이 데스나이트가 날뛰고 있는 우크라이나로 떠난 지 19일째. 라가 로드 구엘 뒤 굴락이 죽은 지는  3주째.

웨인 크로이츠는 자신이 지휘권을 위임받은 아프리카 원정대의 일이 아니라, 저 멀리 우크라이나에 있을 데스나이트 유격대 때문에 전화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아프리카 대륙의 일을 묻는 전화도 있었지만, 횟수가 4배 이상 차이 났다. 웨인이 전화상담원이 된 기분을 느끼는 것도 전혀 무리가 아니었다.
아니, 그 보다 더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전화를 걸어오는 인간들은 이곳에 전화하는 게 맞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연락해오는 것이니까.


‘이리로 전화 하지 말라고 화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제발 받아주는 척이라도 해달라는 지벡 건터의 애원 아닌 애원과 류 현의 부탁을 받은 터라 이런 식의 전화를 거부할 수도 없었다.
류 현이 무조건 전화를 받아달라고 부탁한 건 아니었지만, 상황을 대충 알고 나니 저쪽으로 가는 연락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

문제는 사정을 알고 있다고 해서 웨인의 피로도가 줄어드는 건 아니라는 점이었다.

‘정말 다 때려치우고 한 세달 정도는 산속에만 박혀있고 싶군.’


세상이 이렇게 더 이상해지기 전에 웨인이 꽤 자주 쓴 휴식 방법이었다. 휴대폰이고 뭐고 전자기기들 다 내버리고 산속에 쳐박히기.
지금은 고인이 된, 사냥과 산을 사랑하던 부친의 성향을 그대로 물려받은 웨인은 요즘 들어 산이 정말 그리웠다.
전 재산을 기부하면 산으로 보내주겠다고 해도 고민하지 않고 그러겠다고  정도로.

그런 그를 닦달하는 것처럼 위성전화가 울었다. 웨인은 받지 않고 그것을 가만히 보기만 했다.
거의 1분여를 요란하게 울어대던 전화기가 조용해졌다. 우묵한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던 웨인은 다시금 한 숨을 내뱉었다.

‘전화를 피한다고 속이 편해지지는 않는군.’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 일은 전혀 해결되지 않았고, 이대로 방치할 경우 더 악화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웨인 크로이츠라는 사내는 그런 상황을 병적으로 꺼리는 이였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은 협회의 간판이 되고, 수많은 암살위협에 시달리면서도 스스로를 갈아 넣는 워커홀릭을 형상화한  같은 존재가 바로 그였다.
류 현 식으로 말하면 능력 있고 의욕도 충만한 젊은 영웅이었고, 승하 식으로 말하면 곧 장례식장에서 보게 될 미친놈이었다.


그런 일에 미친 영웅 웨인 크로이츠는 위성전화기로 손을 뻗으려다가 멈추었다.


‘그냥 전화기만 붙들고 있을  아니야. 생각을 해보자 생각을.’
‘유격대는 당장 데스나이트를 잡을 생각이 없어. 그렇다고 분탕질 치게 두지도 않겠지. 지금까지 전화내용을 생각하면 문제될 수준의 피해는 억제하고 있다.’


이쪽으로 오는 문의를 적당히 받아넘겨 달라던  현은 모든 정보를 건네주진 않았다.
생각보다 현장의 상태가 별로라, 한동안은 그냥 시간을 끌 것이라는 속내만 완전히 밝혔다.


‘나를 여기저기서 찔러오는  보면 아마 그쪽은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진 않겠지. 지벡 건터의 증언만 봐도 상태가 더 심각한 건 확실해.’
“끙...”

지벡 건터가 징징거리면서 늘어놓은 말들을 떠올리자 없던 두통이 생겨나는 기분이었다.

‘미친 작자들. 아직 목숨 걸고 싸우는 이들이 있는데...’


도리 이전에 판단능력을 상실한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아직도 사태파악이 안 되는 건가?’
‘아무리 찾아온 위기 비해서 적은 피해로 빠르게 봉합을 했다지만...’

더 실망할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새삼 인간에게 실망감을 느낄 것 같았다.
피해를 덜 봐서, 그 피해를 최소화 시킨 영웅에게 그런 대접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질 않았다.

심지어 그들은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적을 치우자마자, 회복도  된 몸으로 우크라이나까지 날아간 상태가 아닌가?
유격대를 통해서 직접 상황을 전해 듣는 이들이 삼주 가까이 지난 지금 시점에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을 터.

‘그들이 해준 일에 비하면 그들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결국 일본이 정산을 중간에 그만둔 것도 아무 말 없이 넘어가줬고.’


본 드래곤과 엘더 리치에게 도쿄를 폭격당하고, 시모시마섬이 엘더 리치의 기상조작 마법에 갇혔을  일본은 출진을 미루는 용잡이 팀에게 수많은 것들을 약속하며 꾀었었다. 결국 그것으로 꾀어내진 못했지만 말이다.
용잡이 팀이 재정비를 마치고 출진했을 때도 가짓수와 액수가 조금 줄어들었을 뿐, 비공식적으로 많은 것들을 약속했었다.

X던전 사태 때, 최상위 플레이어들이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었던 일본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에 벌어진 일.

그리고 일본은 사태가 해결되자 마구잡이로 뿌린 공수표의 지급을 미뤘고, 지금에서는 미루기 위한 연락조차 거의 끊어진 상태였다.
용잡이 팀에서는 원하던 괴수 사체와 아티펙트를 챙기고 나자 별 신경도 쓰지 않았다.
 여자는 조금 불쾌해 하긴 했지만, 얼마가지 않아 그것을 잊었고  현은 처음부터 기대도  했다는 듯  일을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일을 규모를 생각하면 사실상 무급봉사를 한 것과 별 다를  없었다.
그 뒤로도 용잡이 팀은 네임드 몹을 때려잡을 때 별 다른 대가를 요구하지 않았다.

칼리프 클랜이 지금처럼 웅크리게 만든 ‘페릭스’와 ‘업화의 아이들’은  이름이 퍼져나가기도 전에 때려잡았고, 그 뒤에 칼리프 클랜에게 대접받기는커녕 불편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상태.

이번 아프리카 원정에서는 원정 준비 과정에서 이것저것 조금 챙긴 듯 했지만, 그들이 챙긴 것보다 원정대 보급품을 대준 업자들이 더 챙겼을 거라고 웨인은 장담할 수 있었다.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인가.’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대가를 요구하지 않고 무상봉사를 반복한 끝에 그들이 당연한 것이라고 말한 것도 아닌데, 주변에서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된 것이다.


‘좋지 않아. 이런 흐름은...위험해.’

우크라이나에서 시간을 끌면서 언데드 군단을 저지하고 있는 것도 대가를 요구하기 위한 행동이 아니었다.
그럴 생각이었다면 인간노예 구출대로 바뀐 아프리카 원정대에 남아서 류 현의 부상을 다스리면 될 일이니까.
티나게 시간 끈다는 인상을 주지 않고, 이미지 손상도 거의 가지 않을 최상의 선택지.

‘그렇게 급하게 날아간 것만 봐도 이런 상황은 상정 안에 없었겠지. 데스나이트를 잡으러 그렇게 급하게 간 게 확실하다. 그곳에 가서 접한 상황이 데스나이트의 주살을 2순위로 끌어내릴 정도로 심각했을 뿐.’


위기감의 촉발.
용잡이 팀이 시간이 끄는 이유는 확실했다. 류 현이 대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속내를 밝히면서 확신하기에 충분한 근거가 되었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해야 할 일은?’

웨인은 이런 저런 것들을 떠올렸다가 대부분을 머릿속 쓰레기통으로 던져버려야 했다. 아프리카 원정대를 인간 노예 해방단으로 부리고 있는 그가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의 몸은 하나고, 구엘  굴락이 죽었다고 아프리카가 정상이 된 건 아니었으니까.

당장 이곳 일만 해도 만만한 게 아니었다. 할 일이 사라진 원정대를 무사히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만 해도 분배부터 시작해서 머리가 깨질만한 일인데, 아직 그건 시작도 못한 상태였다.
구엘  굴락의 성채로 가기 전에 발견한 인간노예들 때문이었다. 구엘 뒤 굴락이 죽었다고 노예해방령이 떨어진 것 마냥 인간들이 자유가 된 것은 아니니까.
오히려  위험한 상황이었다. 인간들을 잡아서 노예로 부리거나, 부리다가 제물로 삼을 정도로 이성이 남아있는 강력한 지도자의 죽음은 어떻게든 감시자로 남은 라가들에게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높았으니까.


붙들려 있는 인간노예들을 찾아서 해방시키고 그들이 지낼 임시 숙소를 만들고, 신원파악과 동시에 소속국에 연락을 넣고 송환일정을 잡고, 일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찾아들었다.
얼마나 격무에 시달리고 있냐면, 웨인의 밑에서 그를 돕고 있는 협회 출신 인사들은 카이로로 향해 원정하던 때보다 지금이 꼴이 더 처참할 지경이었다.
항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항모전단  병력이 기 싸움까지 벌였다면 정말 다 그만두고 본국으로 도망이라도 쳤을 것이다.
그러나 민간인 구조라는 기치 앞에서 그들은 날치기로 지휘권을 양도 받은 지휘관을 따르기로 했고, 웨인 개인에게는 불행스럽게도 구조작업은 착실히 진행 중이었다.
너무 진행이 잘 돼서 일에 치여 죽을 지경일 정도로.


그런고로 웨인이  멀리 우크라이나에서 짜증나는 꼴을 보면서 언데드 군단을 저지하고 있을 이들을 도울 방법은, 아니, 택할 수 있는 수단은 매우 한정적이었다.
전화 한 통으로 대충 절차를 끝마칠  있어야만 했다. 계속 신경 써줄 여유도 없을뿐더러, 아니면 정말로 웨인 자신이 과로로 쓰러질 테니까.

‘이것 밖에 없나...’


웨인은 오른 손으로 제 이마를 짚고, 왼손으로는 책상을 톡톡 두들겼다.

이미 결론은 났는데,  내키지 않아 자신에게 유예를 주기 위한 행동이었다. ‘정말 이 방법뿐일까?’
당연한 얘기지만 그런다고 수단을 가릴 수 없는 처지에 놓인, 과로사 직전의 남자의 머리에 좋은 생각이 그렇게 쉽게 떠오를 리가 없었다.

결국 웨인은  숨과 함께 제 미련을 털어냈다. 그는  ‘가방’에서 종이봉투를 꺼냈다.
그 안에는 사진이 들어있었다. 보통 사진기로 찍은 것은 아니고, 마법과 공학이 적당히 버무려진 사진기 같은 것으로 찍은 것이었다. 한 장 찍는데 억소리가 날 정도의 재화가 들어갔지만 웨인에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후우...”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던 웨인은 한 숨을 푹 내쉬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사진들을 갈무리한 그는 더는 망설이지 않고, 행정반이라고 명명된 건물로 향했다.

그로부터 3일후.

유럽 시민들은 매일 같이 보면서 심드렁해진 데스나이트에 관한 기사가 아닌 것이 1면에 실린 것을 보고, 신문사의 대담함을 놀라워했다가 기사 내용을 보고  번째로 놀라게 되었다.
1면을 장식한 기사에는 사진 하나가 대문짝만하게 확대 되어 있었다. 제국주의가  쉬었던 시절, 노예제도가 당연시 되던 시절에나 볼  있던 장면이 찍혀있었다.

헐벗고, 더러움에 노출된 기색이 역력하며, 채찍에 얻어맞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찍혀있었다.


이것뿐이라면 분노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을 것이다. 어떻게 현대 사회에 이런 반인륜적인 행위를  수 있냐고, 성토하는 이들이 더 많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노예를 부리고 있는 존재가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았다. 사진 속에서 채찍을 휘두르고 있는 것은 같은 인간이 아니라, 라가, 즉 괴수였다.

사람들은 이 상황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워 했다. 냉철한 이들은 조작론을 재기했지만, 충격으로 그 생각을 떠올리지 못한 이들이 훨씬 많았다.

혼란한 와중, 기자 하나가 기사를 빙자한 자신의 감상을 밝혔다.
그리고 그것은  대중들의 구호가 되었다.

[신이시여, 우리를 버리시나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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