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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2화 〉탐식마(貪食魔) (282/429)



〈 282화 〉탐식마(貪食魔)
바깥보다 더 빨리 어둠이 찾아든 방안에는 두 남녀가 손을 맞잡고 앉아있었다.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둘은 옷차림이 얇았다. 무슨 처리를 했는지 안이 비쳐 보이지 않는  신기할 정도로.


눈을 감은 채 손을 맞잡고 있던 남자, 류 현은 슬쩍 실눈을 떠서 희란의 안색을 살폈다.


‘진짜 집중력 하나는 끝내준다니까. 평소에 좀 나사 풀려 보이는 것도 이거 때문인가?’

처음에 옷차림새 때문에 민망해 하던 기색은 온데간데없고, 그녀는 완전히 몰입한 상태였다. 자신과 류 현을 하나의 통로로 삼아서 흐르고 있는 마력의 흐름에.

‘평소에도 이 모습 반만이라도 좀 똑부러지면...아니, 나한테 의사표현이라도 확실하게 해줬으면 좋겠는데.’

두 사람을 하나로 묶는 흐름은 이미 안정되었기에 류 현은 딱히  것이 없었다.
아직 상처를 본격적으로 다스린 것도 아니고, 마력도 사실상 텅  거나 마찬가지여서 뭘  수도 없었다.


마력통이 너무 텅 비어 있어서 까딱 잘못하면 희란을 대상으로 마력을 빨아들일 수도 있으니 처음에야 좀 조심하긴 했지만, 마력의 흐름이 완전히 희란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니 건드리지 않는 게 도와주는 일.
그러니 이 부끄럼 많은 아가씨를 빤히 쳐다보면서 이런 저런  생각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곧 그 생각을 철회했지만.

‘배부른 소리지. 성격이 크게 모난 것도 아니고, 할 때는 이렇게 잘 해주는데...괜히 지랄말자  현.’

조금은 힘에 붙이는 지, 희란의 이마에 땀에 송글송글 맺히고 호흡이 조금씩 거칠어졌다. 그녀가 눈매까지 파르르 떠는 것을 보고  현은 마른 침을 삼켰다.
‘이거 일단 중단시켜야 하는 거 아냐?’


주도권을 넘겨주긴 했지만 중단정도는 시킬  있다.
 대가로 내상이 터지고, 그 내상 때문에 화련과 승하에게 죽도록 바가지를 긁히겠지만 희란에게 문제가 생기는 것보다는 나을 터.

‘흐름이 계속 빨라진다...일단 멈추고 보자.’

손 놓고 있던 류 현이 흐름에 끼어들려는 때였다.


후르르! 열기 없는 불꽃이, 회색빛 오러가 두 사람 몸 위로 확 타올랐다.  현이 당황해서 주변을 살피는 동안, 눈을 뜬 희란이 슬며시 미소 지었다. 짧은 시간동안이지만 집중력을 쏟아 부은 탓인지 그녀의 얼굴에는 핏기가 없어 보였다.


눈을 마주친 류 현은 그 눈동자 안에 어떤 열망이 서려있는 것을 느꼈다.
열망의 존재는 읽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아내지 못한 류 현은 평소대로 나가기로 했다.

“고생하셨습니다. 진짜로 해내셨네요. 저도 쓸 때마다 긴가민가 하는 힘인데...정말 대단하십니다.”

희란은 헤헤 웃기만 했다. 류 현도 그 웃음에 휩쓸려 같이 웃었다.


“오늘은 슬슬 정리하고 다시 시간을...”

정리를 위해서 맞잡은 손을 빼고 일어서려던 찰나였다.
쾅! 문이 부술 것처럼 열어젖히고 작은 인영하나가 방으로 들어섰다. 그 뒤를 그보다 머리통 하나 반은 더 큰 인영이 뒤따라 붙었다.
작은 인영이 부들부들 떨었다.


“진짜! 사람 속을 뒤집어 놔야 잠이 와요? 아니, 어떻게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어! 그냥 넘어가는 법이!”


그 작은 몸에서 어떻게 그리 큰 소리가 나왔나 싶을 정도로 화련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복도까지  울렸는지, 여기저기서 인기척이 쏟아져 나왔지만 문 곁에 서있던 승하의 눈빛을 받고 모두  방으로 돌아갔다.

“어, 언니 그게 아니고 제가 먼저...”
“희란아, 너도 그래. 내가 몇 번이고 말했었잖아. 마스터가  하려고 해도 안 된다고 해야 한다고. 그런데 네가...”
“죄송해요...”


희란이 어깨를 붙잡힌 것처럼 움츠렸다. 고개를 떨구고 웅얼거리는 모습이 화가 난 화련이 보기에도 애처로웠는지 더 타박하진 않았다.

“마스터.”


류 현의 고개가 뻣뻣하게 목소리의 주인에게로 돌아갔다. 화련이 분노로 눈을 불태우고 있었다.
난방은 빵빵하게 들어오고 있을 텐데  현은 어쩐지 춥다는 느낌이 받았다.

마른 침을 삼키며 처분을 기다리는 그를 빤히 바라보던 화련은 한 숨을 푸욱 내쉬었다. 그녀의 분노를 따라 끓어오르던 기세도 팍 수그러들었다.
같이 기운도 빠져버렸는지, 화련은 류 현의 앞에 철푸덕 주저앉았다.


“저도 알아요. 마스터가 급한 마음이 들 만한 상황이라는 것도, 그게 마스터를 탓할  아니라는 것도.”

화련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방금 전까지 분노를 불태우던 것이 거짓말 같아 보일 정도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젖어있었다.

“매번 제일 어려운 부분은 마스터한테 떠넘기거나, 아님 아주 자리에 없거나. 어쩌다 자리에 있으면 저번처럼 멘탈 나가서 방해나 안 되면 다행인 그런...”
“아닙니다.”

류 현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부정했다. 그냥 말로 하는 것을 부족하다고 생각한  현은 움직이지 않는 다리 대신 양팔로 바닥을 밀어 그녀에게 다가갔다.
화련을 양손을 감싸 쥔 채로  현은 다시 힘주어 말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해줄 말은 무수히 많았다.
굳이 끔찍한 얘기를 해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대충 생략했던, 전생의 네임드 몹 공략 과정이라던지.
아직도 원인을 알지 못하는, 전생과 다르게 네임드 몹이  마리씩 튀어나와서 아무리 자신이 회귀했지만 혼자서는 절대 감당할 수 없다는 원론적인 것부터, 팀의 존재로 정신적인 안정감을 얻고 있다는 입 밖으로 꺼내긴 좀 민망한 얘기까지.

하지만  현은 그런 말들을 늘어놓진 않았다. 어떤 가까운 사이라도 말을 해야 안다는 말이 있지만, 말로 늘어놓으면 지리멸렬해지는 그런 감정도 존재하는 법이니까.
류 현은 말 대신 흔들림 없는 눈으로 화련을 마주봤다.
차오른 눈물 탓인지, 아니면 정신적으로 흔들려서 그런 것인지 일렁거리던 화련의 눈동자가 그에게 옮은 것처럼 점차 안정을 찾아갔다.
그 모습을 확인한 류 현은 다시 힘주어 말했다.

“그렇게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앞으로 그럴 일도 없습니다.”

안정을 찾은 듯한 화련이 볼멘소리를 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가라앉은 상태였다.


“그럼 지금 이건 뭐라고 받아들여요?”
“오늘 일은...하도 하릴 없이 놀기만 하다니 보니까...우려하시는 그런 생각을 품고 벌인 일은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흠흠.  말이 없어진 류 현은 헛기침을 하며 슬쩍 시선을 피했다.
그래서 화련의 입매가 비틀리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러니까. 그냥 있기 심심해서, 남  타들어 가는 거 뻔히 알면서 이런 일을 벌이셨다 이거죠?”

발화는 갑작스러웠다.
류 현은 꺼졌던 화련의 기세가 다시 타오르는 걸 느끼고 몸을 뒤로 빼었다.
골반 아래로 움직이지 못하는 몸뚱이를 뒤로 빼어봐야 거기서 거기였지만,  이글거리는 눈빛에서 조금이라도 거리를 벌리고 싶었다.


‘망했다.’


등허리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조금 오그라들어도 분위기 좋게 넘어갈 줄 알았는데, 어느 부분인지 몰라도 그녀의 분노에 불을 당긴 모양.


“마스터.”
“예...”
“동료가 부상 회복에 신경 써줬으면 하는  무리하거나, 무례한 요구가 아니죠. 그쵸? 마스터가 방금 전에 짐덩이로 생각 안 하신다고 하셨으니까. 저 말할 자격 되는  맞죠?”
“예...말씀하신 대롭니다.”


대답을 할수록  무덤을 파는 꼴이었지만, 부정할 수는 없었다.
어깨를 움츠린 류 현을 바라보던 화련은 콧김을  뿜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신경 쓰실까봐 말씀 안 드렸는데, 세아 언니가 사흘에 한 번씩은 연락해 오시거든요? 아프리카에 박혀있는 동안 연락을 못해서 요 며칠 동안은 거의 하루에 한  꼴로 연락해오시고요.”

‘진짜?’
류 현은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복잡한 심정이 되었다. 당혹스러움, 섭섭함과 부끄러움 조금.  그 외에도 갖가지 감정이 뒤섞여, 류 현의 안면근육은 그것을 표정으로 만드는 데 실패했다.


‘아니, 왜 나한테가 아니고...?’


화련은 거의 무표정에 가까운 그의 표정에서 그 의문을 정확히 짚어내었다.

“마스터가 거짓말을 하니까 그렇죠. 마스터 한정으로 세아 언니는 거의 거짓말 탐지기 수준이에요. 각성하고 나서 감이  좋아져서, 이젠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다고 하시던데.”

 현은 떫은 감이라도 씹은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요즘 들어서 통화 내용이 뭔가 간결하다 싶었는데 거짓말 한 걸 들켜서 그런 거였나?’


아프리카 대륙에 있는 동안 연락이 되질 않았으니, 세아의 성격상 한동안 시달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그 기간이 짧긴 했었다.
설마 다른 구멍으로 정보를 얻고 있었을 줄이야. 덜컥 겁이 났다. 화련이 있는 대로  말했다면 뒷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물론, 저도 있는 그대로 다 말씀드리진 않았어요. 세아 언니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마스터가 당한 일이나 지금 상태 들으면 당장 협회에 쳐들어가서 당직자 멱살 잡고 아프리카로 가자고 외치실 분이니까. 대충 마스터가 거짓말 할 만했다고 생각할 정도의 수준의 정보만 풀었죠.”
“아...가, 감사...”
“그런데 제가 잘 못 생각했던 것 같아요.”


류 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화련을 봤다. 그녀는  숨을 푸욱 쉬더니 자리에서 털고 일어났다.


“제가 멍청했던 거죠. 마스터를 한두  본 것도 아닌데, 그냥 얌전히 몸을 돌볼 거라고 생각했다니. 세아 언니가 옆에 있어도 끊임없이 일거리 찾아오시던 분인데.”
“아, 아니 그게 아니고요 화련 씨...”
“그래도 호위로 붙인 희란이를 꼬셔서 그러실 줄은 생각도 못했어요. 갑자기 방에서 익숙한 기운이 확 솟구치는 거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여기로 뛰어오는 동안  생각이  들었죠. 설마, 약속했는데. 괴수라도 숨어들어온 건가?”
“크흠...”
“이쯤 되면 싫어도 인정해야겠죠. 전 마스터를 말릴 방법도, 능력도 없다는 거요.”

그대로 자리를 뜨려는 화련을 류 현이 몸을 날려서 붙잡았다. 심히 모양새가 빠져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류 현은 필사적이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화련이 이대로 떠나게 두면 그녀가 할 일은 뻔했다.


“아, 아니 말씀하시다 마시고 어딜 가십니까.”

화련은 무심한 눈으로 그를 슬쩍 돌아봤다.


“제가 입 아프게 말씀드려봤자  이런 일 벌이실 텐데, 그냥 털어놓고 속이라도 편해지려고요. 안 그래도 매일 거짓말 하느라 소화도  안 됐는데.”
“화련 씨, 제발!”


 현의 절박한 외침에 화련은 눈을 감았다. 아주 잠깐 동안 생각에 빠진 듯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착 가라앉은 눈을 하고 있었다.

“마스터.”
“예, 예에. 듣고 있습니다.”

화련은 쪼그려 앉아 류 현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녀는 류 현이 그랬던 것처럼 그의 손을 감싸쥐었다.


“많은  바라진 않아요. 각서 같은 것도 필요 없고, 조건도 걸고 싶지 않아요. 그냥 마스터가 저희한테 그랬던 것처럼, 그냥 약속해주시고 그걸 지켜주셨으면 좋겠어요.”
“...예.”


류 현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화련은 그것으로 만족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몸을 일으켰다. 류 현이 눈으로 어딜가냐고 묻자 화련이 말했다.


“괜히 그냥 뒀다간 저 인간들이 지휘부 붕괴! 같은 개소리를 퍼 나를 테니 수습해야죠. 승하 언니랑 다녀올게요. 희란아, 조금만 더 고생해줘.”
“네, 네에...”


이번에는 붙잡는 목소리는 없었다. 화련은 그대로 방밖으로 나섰다. 승하가 바로 따라붙었다.
말없이 따라오던 승하는 첫 번째 모퉁이를 돌자 툭 내뱉었다.

“야, 너 손에서 피나. 힘  빼.”
“......”

 움켜쥔 두 주먹에서 핏방울이 뚝뚝 흘러내렸다.
화련은 손바닥을 펴보았다. 손톱 모양대로 손바닥이 푹푹 패여 있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이 걸어 나온 길을.


그리고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 화련에겐 다행스럽게도 그녀의 피는 바닥에 닿자마자 증발했기에 흔적은 남지 않았다.
제 손바닥의 상처보다 흔적이 남는 걸 더 신경 쓰는 이상한 여자를 바라보던 승하는 한 숨과 함께 말했다.

“속상한 건 알겠는데, 그렇게 네  괴롭힌다고 답이 나오는 건 아니잖아.”
“...이렇게라도  하면 미쳐버릴 것 같으니까.”

대답하는 건지, 혼잣말인 건지 구분이 안가는 말을 하는 화련에게 승하가 다가섰다.
화련이 자신을 올려다보려는 그 때, 승하는 그녀의 어깨에 제 팔을 걸치고는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화련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지금 뭐하는 거에요?”
“음, 동지애를 공유하는 중?”
“팔 빼요. 확 꺾어버리기 전에.”
“에이, 괜히 빼지 말고. 무심하고 무모한 대장님 모시고 같이 고생하는 사람들끼리라도 위로하고 살아야지 안 그래?”
“...무심하진 않거든요. 아까 들었잖아요.”
“그럼 눈치가 더럽게 없는 걸로.”
“...그건 그렇죠.”

화련의 대답에 승하는 낄낄 웃었다. 그녀는 어깨동무를  자세 그대로 좌우로 몸을 기울이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신장 차이 때문에 승하에게 거의 파묻혔다가 빠져나왔다가 하느라 표정이 좋지 못하던 화련이 말했다.

“우리...앞으로 어쩌죠.”
“뭘 어쩌긴 어째.  덩어리 취급은 아니니까 빨랑빨랑 따라잡아야지. 따라잡을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근처에라도 도달 할 수 있으면 방해는 안 되겠지.”
“...언니는 천재잖아요.”
“그 녀석 보면 내가 천재 맞는지 의심스러운데...근데 그럼 그렇다고 그냥 손가락만 빨고 있을 거야? 네임드 몹 잡고 나서 류 현 저럴 때마다 도움 못 됐다고 속으로 끙끙 앓고?”
“진짜 말을 해도 꼭...”
“사실 그보단 멘탈이나 상황 대처 능력이 더 급하긴 하지만. 우리 이번이 두 번째야 알지?”
“.....”


화련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승하가 앞뒤 다 떼고 말했지만 못 알아들을 그녀가 아니었다. 네임드 몹과 전투 중에 치명상을 입은 류 현을 보고 포지션을 깬  이번이 두 번째다.

‘페릭스’와 ‘업화의 아이들’ 때는 떨어져서 싸웠으니 그럴 수가 없었고, 엘더 리치, 본 드래곤 때와 이번까지 합쳐서 두 번.
‘업화의 아이들’ 때는 위험했을지언정, 훨씬 침착하게 싸웠었던 걸 생각하면 가볍게 볼 문제가 아니었다.


“대장이 너무 믿음직해도 문제라니까.”

승하는 간단하게 이 문제를 축약했고, 화련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동의했다.


“뭐, 이건 당장 해결   있는 게 아니니까 천천히 생각해보기로 하고...일단 지휘부가 분열했다는 소문부터 막으러 가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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