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1화 〉탐식마(貪食魔)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하란 말씀이십니까! 이미 한 해 농사는 날린 거나 다름없게 되었습니다. 우리 연구팀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그놈이 오래 머문 곳은 사기(死氣)가 지력을 훼손시킨다고 했습니다. 하루 빨리 놈을 치우지 않으면...
“...이보세요. 장관님. 나한테 뭐 맡겨 놨습니까?”
-뭐, 뭐요?
“내가 데스나이트 목을 날려주겠다고 무슨 보증이라도 섰습니까. 지휘권 나한테 이관할 때 어떻게든 수도만 안 털리게 해달라고 당신네 대장이 사정사정한 걸 나만 기억하나?”
일국의 대통령을 ‘당신네 대장’으로 격하시키는 지벡의 폭거에 할 말을 잊은 것인지, 상대는 잠깐 동안 말이 없었다.
잠깐 동안만.
-지벡 건터! 네가 아무리 안하무인 개망나니라도 해서는...!
“선을 넘은 건 그쪽 돼지새끼들이고. 아직 뒈지지도 않은 괴수를 사체를 국제관례에 따라서 분배하자? 중계료는 잘 챙겨 주겠다? 미친 건 너네지. 참고로 내가 지휘권 넘겨받은 뒤로 모든 통화를 녹음 중이거든? 발뺌할 생각은 버리는 게 좋아. 그 개소리를 전달한 새끼도 열심히 조지는 중이니 너희 중 어느 돌대가리가 그딴 소리를 했는지도 곧 알 수 있겠지.”
기다렸다는 듯이 쏘아붙이는 지벡의 공세를 다 받아낸 상대는 다시금 할 말을 잊은 듯하더니, 저 너머로 뭔가 깨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어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걸로 봐선 말소리 내용은 안 들려도 뭐라고 하고 있을지 훤했다.
‘장관 본인이 한 소리는 아닌가 보군. 하긴 아무리 돌대가리라도 국방부 장관이 이 시국에 그딴 소릴 하면 총 맞아 뒈져도 할 말 없는 거지.’
-후...지벡 건터 씨.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것 같은데...
“착오는 무슨. 실제로 착오더라도 이게 무슨 동네 조기축구회인가? 대충 좋게좋게 넘어가자고? 그럼 나도 뭔가 착오로 데스나이트가 키예프까지 가는 길을 열어주면 되겠네? 응?”
당연히 그럴 생각도 없고, 그럴 생각이 있다고 해도 내뱉을 필요가 없는 위험한 발언이었지만 지벡은 망설임 없이 뱉었다.
‘당장은 뭔 지랄을 해도 날 어떻게 못 해. 같이 뒈질 게 아니면.’
자신이 있었으니까. 정말로 자신이 자리를 이탈하지 않는 한, 지금 이 발언을 터뜨리는 건 물론이고 자신에게 위해를 끼치지 못할 거라는 자신이.
사태파악을 못하고 부산물 분배가 어쩌고 하는 놈들이 나오긴 했지만, 여전히 데스나이트라는 거대한 위협은 존재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지난 3주 남짓한 시간동안 뼈저리게 깨달았을 것이다. 지벡 건터가 이끄는 유격대 없이는 3주는커녕, 3일 안에 수도가 뚫리고 말았을 거라는 걸.
‘데스나이트 놈을 잡고 나면 지금 이 대화를 녹음 해봤자 찌라시 파는 놈들한테 파는 것 말고는 쓸 곳도 없어질 테고.’
지금 상황을 믿고 그냥 덮어두고 막 나가는 것도 아니었다. 시간을 끌기 위해서 제 악명을 조금 이용하고 있을 뿐.
‘개새끼 이미지를 이런 식으로 써먹게 될 줄 몰랐는데 말이지.’
“물론 나도 그런 불상사는 바라지 않아. 여기 인간들이 다 같은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아무리 개새끼라도 정도라는 게 있는 법 아니겠어?”
-크음...
“그런데 말이야. 아직 일이 끝난 것도 아니고, 누구는 지금도 시궁창에서 뒹구는 중인데 분배가 어쩌고 하면 착오가 일어날 확률이 높지 않겠어? 응?”
-그 부분은 우리 뜻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아아아, 그런 뻔한 대답을 들으려고 꺼낸 말이 아니야. 그쪽도 대충 알고 있지? 아프리카로 갔던 팀 하나가 이쪽으로 합류했는데...”
아프리카로 갔던 팀. 그것으로 설명은 충분했다. 아직 죽지도 않은 데스나이트의 부산물 분배 소리가 튀어나온 이유도 용잡이 팀을 봤다는 유격대원들의 증언 때문이었으니까.
유명세보다 실적을 쌓아올리는 속도가 더 빠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세계 최강의 팀의 합류.
철통같은 보안을 자랑하는 정규부대여도 소문을 제어하기 어려울 텐데, 부대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급조된 단체에서는 새어나가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다.
더군다나 그 팀은 네임드 몹을 연이어 격파한 팀이니, 유격대에게 있어서 구세주 그 자체로 보였을 터. 들뜬 유격대원 중 하나가 과하게 호들갑 떤 게 분배 소리가 나오게 만드는데 일조했을 것이다.
“그 쪽도 보통 큰일이 아니어서 아주 멀쩡하진 못하거든. 뭐 아주 전력이탈을 할 정도로 큰 부상은 아니긴 한데...다친 몸으로 괴수 잡아주겠다고 요양 안가고 바로 이 좃같은 곳까지 날아와 줬는데 그런 소리가 들리면 좀 서로 그렇지 않겠어? 그쪽이나 그쪽 대장은 좀 심각하게 곤란해질 수도 있고 말이야.”
-이보게 지벡. 그 일에 대해서는 각하께 말씀드려서 정식으로 사과 서한도 보내고 그 씹어죽일 놈도 징계를 꼭 먹이겠네. 그러니 응?
“글쎄, 나야 그 정도면 좀 짜증나도 넘길 수 있겠지만. 사실 내 스타일대로면 이렇게 입으로 나불대는 것보단, 직접 그 돼지를 찾아서 족치는 게 더 성미에 맞으니까. 근데 그 친구들은 안 그렇게 생각할 가능성이 더 높은 것 같단 말이지.”
“다 그렇잖아? 아플 때 주변에서 자꾸 건드리면 평소면 그냥 넘어갈 것도 막 화내게 되고...알지? 내가 대충 들어보니 그 팀 대장이 이리로 바로 오는 걸 강행한 거라 분위기도 별로던데. 뭐라도 건수 잡히면 짐이라도 쌀 분위기라니까.”
분위기가 별로인 이유가 팀내 유일한 환자인 류 현의 주변을 경계하느라 그런 것이라는 건 쏙 빼고 말했지만 지벡은 양심의 통증 따위는 느끼지 않았다.
어차피 그들은 그 사실을 확인할 수도 없을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정말 자신의 말한 대로의 이유로 분위기가 안 좋은 것처럼 보일 테니까.
실제로 한 번 더 분배니 어쩌니 얘기가 나오면 류 현은 몰라도, 교대로 껌딱지처럼 붙어 다니는 세 여자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짐 싸서 떠나는 척이라도 할 테지.
‘이미 뒤끝 생길 여지는 넘치도록 있지만. 벌써 적어두기 시작한 것 같은 눈치던데.’
거기까진 얘기해 줄 의리도, 의무도 없었다. 애초에 이렇게 우크라이나 국방부 장관을 붙잡고 노가리를 까는 것도 그 류 현이 부탁해서 하는 일이었다.
국방부 장관이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우는 소리를 해대었지만 지벡의 귀에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는 대충 대꾸해주며 이 웃기지도 않는 짓을 부탁해온 괴물을 생각했다.
‘...그놈도 제정신은 아니야. 잡아놓고 분배나 보상 문제로 지랄하는 것도 아니고, 당하는 놈들 정신머리가 글러먹었다고 꾀병질이라니. 아, 꾀병은 아닌가.’
류 현은 유격대에 합류한 지 나흘째인 지금도 제 스스로 걸어 다니지 못하는 상태였다.
말하는 걸 들어보면 팀원들이 거의 강제로 그 상태로 붙들어 두고 있는 것 같긴 했지만, 정확한 사정을 알 도리가 없었다.
묻고 싶어도 류 현 옆에 한 명씩 딱 붙어있는 여자들 때문에 도무지 그럴 기회가 나지 않으니, 현실적인 고민을 할 수밖에.
‘겉으로 보기에 문제는 없다. 문제는...검성 그 미친년이 데스나이트 네임드 몹을 막을 수 있냐 이건데. 씨발, 아주 완벽하게는 못 막아도 시간 끌기는 할 수 있겠지?’
-지벡? 지벡? 듣고 있는 건가?
“아, 그 친구들이 지금 미팅하자네. 오늘 통화는 이만 하는 걸로.”
-부탁하네. 내 자네가 힘 써준 건 절대 잊지 않을 테니까. 응?
“말은 해보겠는데, 너무 큰 기대는 마시고.”
국방부 장관은 그럴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티를 팍팍 내고는 물러났다. 지벡은 상의 앞섶을 당기면서 한 숨을 푸욱 내쉬었다.
“어쩌다 내 신세가 이렇게...”
말을 마치기도 전에 위성전화가 무섭게 울어대었다. 잠시간 전화기를 노려보던 지벡은 못 들은 것으로 하기로 하고 자리에서 털고 일어났다.
거의 두 시간 동안 통화를 연이어 했더니 안면근육에 경련이 일 것 같았다. 이리저리 몸을 풀던 지벡은 방금 전에 했던 생각을 다시 떠올리곤 얼굴을 구겼다.
“씨발, 생각해보니 벌써 사흘째잖아? 수련은커녕 놀고먹기만 하던데 진짜로 상대 가능한 것 맞아?”
말을 내뱉고 보니 점점 불안감이 커졌다. 검성이 데스나이트 체페슈를 압도하는 것을 봤지만, 엄밀히 말해서 언데드 군단을 상대한 건 아니었으니까.
거기에 한 번 검성에게 데인 데스나이트가 이전에 보였던 패턴을 계속 보일 거라는 보장도 없었다.
약한 척을 하며 매복지로 유인할 정도의 지능을 가진 놈이니, 이제까지 보인 널널함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씨발 지들이 눈에 무슨 스카우터라도 달렸나? 그 날 딱 한 번 붙어본 게 다면서 어떻게 될지 안 될지 지들끼리 된다 안 된다 정해?”
혼자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씨근덕거리던 지벡은 결심을 내렸다. ‘이대로 두 손 놓고 있다간 진짜 좃된다.’ 그는 두어 번 마른 침을 삼키고 집무실을 나섰다.
***
[푸히이이잉!][캬아아아!] 유령마의 고통스러운 외침이 협곡을 쩌렁쩌렁 울렸다. 일반인은 그 소리만으로도 심적인 타격을 입을만한 끔찍한 소리였다.
지벡 건터는 그 끔찍한 비명을 귀를 막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멍하니 전부 받아들이고 있었다. 반쯤 벌어진 입으로는 한탄 같은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 와중에도 그의 눈은 끊임없이 데스나이트와 검성을 쫓았다. 동체시력을 초월한 움직임 때문에 정지화면을 접붙인 것 같은 장면이 대분이었지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미친...미친!’
집무실을 박차고 나와 검성과 마주쳤을 때 이렇게 되리라곤 상상조차 하지 않았었다.
정말 조심스럽게 너무 준비가 없지 않냐고 물었을 때, 검성이 수긍한 기색을 보이는 걸 보고 가슴을 쓸어내렸었다.
검성이 류 현에게 전화를 거는 걸 보고 속으로 기겁하긴 했지만, 별일 있을까 싶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자신답지 않은 정말 건실한 건의였으니까.
그런데 대체 뭐가 잘 못된 것인지 화련을 대동한 류 현이 눈앞에 나타났고, 그대로 이 협곡까지 날아왔다.
문자 그대로 실전 검증을 위해서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지금 당장 시험 삼아 언데드 군단이랑 정면으로 붙을 수는 없으니. 오늘은 네임드 몹과 상위 괴수 저지력 정도만 시험해보도록 합시다.”
이 소리를 할 때만 해도 농담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협곡으로 텔레포트 하고나서도 기동력 확인 차라고 생각하고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었다.
곧 자신이 이 미치광이들을 과소평가했음을 인정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진짜 말도 안 되는 새끼들...이놈들은 다 미쳤어. 아니 시발 그런 소리 했다고 바로 실전 테스트 꼬라박는 게 말이 돼?’
무덤덤하게 협곡 아래를 바라보다가 평을 내뱉는 류 현을 보고 있자니 더욱 정신이 이상해지는 기분이었다.
“흠...아무래도 인원수가 부족하니 저지력이 제대로 발휘되진 않네요. 네임드 몹은 마크가 되는데...희란 씨?”
“네.”
콰릉! 벽력이 협곡 아래를 내달렸다. 승하를 포위한 채로 차륜전을 펼치려던 데스나이트들이 강바닥에 내팽개쳐졌다.
그것을 신호로 받아들인 승하가 크게 검을 휘둘러 데스나이트 체페슈를 떼어내자 화련이 그녀를 붙들고 텔레포트를 시전했다.
순식간에 협곡 아래에서 류 현 옆으로 날아온 화련은 꽤 호흡이 거칠어진 상태였다.
“당장 본부로는 못 돌아가요. 거리가 제법 되서 한 삼십분? 그 정도는 기다려야 할 것 같은데. 그래도 한 사 오백 미터짜리 짧은 거리는 계속 쓸 수 있어요.”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희란 씨, 이번에는 유성우를.”
“어디에 쏠까요?”
“협곡 윗부분에 대충 깔아놓는 느낌으로 쏴주시면 됩니다.”
희란은 곧바로 손가락에 낀 청뢰를 빼고 유성우를 움켜쥐었다. 그녀의 손 안에서 붉은 전류 같은 것이 하늘로 솟구쳤다.
그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던 승하가 툭 내뱉었다. 뭔가 불만에 찬 듯한 표정이었다.
“나 아직 팔팔한데. 그냥 내가 밑에서 쟤들 붙잡고 있다가 쿨타임 차면 튀는 게 낫지 않아?”
“저기 리치도 껴있습니다. 그리고 놈이 내뿜는 데스오러 때문에 텔레포트에 변수가 생길 수도 있고요. 뭐하러 변수 덩어리 근처로 갑니까? 그렇게 안달 안하셔도 나중에 실컷 붙게 되실 테니 오늘은 좀 참으세요.”
그렇게 승하를 달래는 류 현을 보며 지벡은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미친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