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0화 〉탐식마(貪食魔)
“뭐?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내 말투? 지랄하고 있네. 너 말고 말 더 잘 통하고, 똑똑하고 권한 큰 놈 다시 데려와 끊는다.”
쾅하고 위성전화기를 탁자에 내려치다시피 한 남자 지벡 건터는 미간을 주물럭거리며 제 신세를 한탄했다. 그리 할 수밖에 없었다.
‘씨발. 그 인간이 합류했다는 소리는 어떻게 알고...젠장 생각할 것도 없지.’
유격대 이인자인 파비오 룸펜마저 그 추태를 보였는데, 그 밑의 놈들은 안 봐도 훤했다.
‘정보 유출을 하려면 똑바로 하던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화내는 포인트가 좀 아니다 싶긴 했지만, 아프리카 원정대가 전멸했냐는 문의만 열 번 받고 나니 그 생각이 안 들 수가 없었다.
‘거짓말은...아니겠지? 그래...얼마 안가서 탄로 날 구라를 칠 이유가 없지. 구라치는 거면 이리로 안 오고 자기네 나라로 튀는 게 맞고.’
하도 시달리다 보니 그런 의심마저 들었다. 아프리카 원정대는 괴멸했고, 저 괴물들만 빠져나온 게 아닐까하는 생각.
‘염병. 멍청한 새끼들 덕에 나까지 괜한 생각 들잖아. 그냥 배터리 뽑아놓고 있어야...’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열리지 않는 문을 멍하니 바라보던 지벡은 가까스로 대꾸의 말을 떠올렸다.
“들어와.”
방안으로 들어선 건 두 명의 남녀였다. 둥둥 떠 있는 의자에 앉아있는 남자 류 현과 그를 띄우고 있는 마법사 화련.
지벡이 힐끔 얼굴을 살핀 화련의 표정은 좋지 못했지만, 그녀는 대화에 낄 생각이 없다 듯이 류 현의 뒤에 서서 그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좀 어떻습니까?”
“간단하게 말해, 아님 별 잡것들 개소리까지 전부 말해줘?”
“자세하게요.”
“제일 많은 건 그쪽이 아프리카 원정대 버리고 튄 거 아니냐는 문의. 씨발, 실제로 튄 거라도 내가 여기서 어떻게 안다고 지랄하는 건지. 진짜로 튄 거면 나한테 말할 리가 없잖아. 안 그래? 그게 그렇게 의심가면 항모전단 쪽에 연락할 것이지...묻길래 아니라고 했더니 증거를 내놓으라네? 이게 말이야 똥이야.”
반나절 사이에 쌓인 게 많은 지 지벡 건터는 끊임없이 투덜거렸다.
투덜거림의 끝이 지휘권 양도였으면 하는 바람에 있었으나, 아무 말 않고 서있기만 하는 화련의 존재 때문에 운조차 띄울 수가 없었다.
자신을 향하고 있진 않지만, 아까 류 현을 챙기던 모습이나 흉흉한 기세를 보면 그런 말을 꺼내면 좋을 꼴을 보기 힘들 거라는 건 확실해 보였다.
‘염병, 죽으나 사나 내가 책임 물고 가게 생겼네.’
“벌써부터 전리품 타령하는 놈들도 있고.”
지벡의 스트레스를 가장 유발시키는 놈들이었다. 현장일은 쥐뿔도 모르면서 운 좋게 그 시기에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꿀 빨면서 거드름 피는 꼰대들.
며칠 전만 해도 유럽 전역에 365일 할로윈이 선언될 위기였다는 걸 벌써 잊은 걸 보면 치매가 의심될 지경이다.
“그건 좀 그렇군요...혹시 입단속은...?”
“할 것도 없어. 나한테도 한 번 거쳐서 전달된 거라. 왕따가 아니면 귀가 안 들리는 놈까지 다 들었을 걸.”
이곳에 온 뒤로 시종일관 여유롭던 류 현의 표정이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이런 식으로 여유가 생기길 바라진 않았는데. 루마니아가 그 꼴 난 걸로는 경각심을 가지게 하긴 무리였나?’
데스나이트가 유럽을 정신적 식물인간 상태로 만들어 버리는 최악의 경우만 생각하고 달려온 터라, 이런 상황은 상정해두지 못했다.
아니, 더 여유 있는 상황이었더라도 이런 상황이 될 거라고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지벡 건터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잘 막아주긴 했지만...이게 말이 돼? 상대는 데스나이트 네임드 몹이라고.’
이보다 훨씬 약한 전생의 데스나이트도 영국을 결딴내고, 서유럽 국가의 수도들을 반파시켰다.
류 현이 놈을 잡기까지 세 달이 조금 걸리지 않은 시간동안, 유럽에서 놈은 죽음의 상징으로 군림했다.
놈이 남긴 상흔 중 정신적인 데미지가 가장 컸는데, 유럽은 한동안 그 여파에 신음하다가 거대 군벌들마저 무너져, 아지다하카가 나타나기 전까지 유럽은 유럽이라는 간판을 다시 쓰지 못할 지경에 몰렸었다.
그럴진대, 아직 놈의 목도 치지 못했는데 벌써 이문 계산에 들어간 인간이 있다니?
이 유격대 일원에게 그런 말을 전달시킬 정도의 커넥션을 가지고 있다면 그냥 보통 멍청이도 아닐 터.
‘놈이 마지노선까지 가게 내버려두기라도 해야 하나?’
오죽하면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네임드 몹 피해를 최소화 시킨 게 이런 식으로 돌아오나...’
그만큼 허탈감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류 현의 얼굴 표정에는 별 변화가 없었지만, 화련이 변화를 눈치 채었는지 슬쩍 다가섰다.
류 현은 억지로 입가를 끌어올리며 괜찮다고 미소 지은 후 미간을 주무르며 말했다.
“택도 없는 소리입니다. 당장 놈을 치우더라도 아프리카가...”
열변을 토해내려던 류 현은 스스로 입을 다물었다. 저가 내뱉는 말에 대한 반박들이 머릿속에 마구 솟구쳤기 때문이다.
아직 잡지도 못한 네임드 몹.
그것도 시체 군단을 이끌고 벌써 두 개 나라를 정신적으로 결딴내놓은 놈의 전리품부터 탐하고 보는 인간들마저 나왔다.
그런 인간들이 전부가 아니긴 하지만, 다른 이들이 제 3차 ‘대소환’을 얼마나 가볍게 생각하고 있는지의 예시로 삼기에는 충분했다.
불이 발가락으로 옮겨붙을랑말랑 하는 지금 같은 상황에서도 그런 소리가 튀어나올 정도인데, 활동하기가 어지간한 던전보다 어려운 아프리카 대륙을 정상화,
아니, 응급조치라도 제대로 하려고 들까? 이미 플레이어들이 상당히 소모된 이 상황에서?
‘절대 아니지. 계산기 두드리기 전에 일단 빼고 본다. 그래야 거기에 뭐가 있든 협상을 주도할 수 있을 테니까.’
이번만큼은 류 현도 표정관리에 실패하였다. 딱딱하게 굳은 류 현의 얼굴을 살피던 지벡은 대화를 되돌리려고 애를 썼다.
“아프리카는 당장 얘기 꺼내도 아무런 반응도 못 이끌어 낼 거야. 그리고 그쪽 말대로 데스나이트가 죽은 것도 아닌데 벌써 아프리카를 논하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내 담당은 저 빌어먹을 데스나이트 뿐이니까. 제발 아프리카 얘기는 너희들끼리 하라고.’
지벡의 속내를 알 턱이 없는 류 현은 한 숨과 함께 복잡한 마음을 추슬렀다. 그는 화련을 돌아보며 부탁했다.
“승하 씨 좀 불러주실 수 있겠습니까?”
화련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휴대폰을 몇 번 두드리고는 다시 주머니로 원위치 시켰다. 불렀냐고 확인해볼 새도 없이 문이 부서질 것처럼 열렸다.
“불렀어? 무슨 일 있어?”
칼을 빼든 채로 방안으로 뛰어든 승하의 모습을 보고 지벡은 질겁했다.
‘저거 왜 저래? 왜 저렇게 오버해? 아니, 원래부터 미친년이긴 했는데. 그래도...’
“일은 앞으로 터질 건데 아직은 아니니 칼부터 집어넣으세요. 대체 왜 그렇게 오버하시는 겁니까? 저 멀쩡합니다.”
“야, 네가 그 때 네가 어떤 몰골인지 못 봐서 그래. 련이만 해도 거의 소리만 들었는데도 저런데. 나 정도면 아주 침착한 거거든? 그리고 너 지금 힘 못 쓰는 것도 사실이잖아.”
“아니 난 또 왜 걸고 넘어져요?”
‘힘을 못 쓴다고?’ 지벡은 동요를 나타내지 않기 위해서 안면에 힘을 주었다.
‘저 괴물이? 아프리카가 그렇게 심각했었나?’
저 괴물팀이 자신을 구명해주고 나서 묻고 싶은 게 한가득 이었는데, 대답을 들은 건 정말 몇 되지도 않았다.
거기에 그것들을 합친 것만큼 커다란 의문이 더해지자 지벡은 더 이상 입을 닫아걸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몸에 문제가...있는 건가? 그럼 진작 말을 했으면 의료반을...”
“아뇨, 그런 문제는 아닙니다.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문제라서요. 그리고 꼭 시간 보낼 것 없이 당장이라도...”
“진짜, 해봐요.”“그렇게 하기만 해봐.”
화련과 승하가 합이라도 맞춘 것처럼 동시에 쏘아붙여 오자 류 현은 걷어붙인 팔을 내려야만 했다.
‘아니 뭐 길래 저렇게 살벌해? 염병, 뭘 더 캐물을 수가 없네.’
“어쨌거나 다시 돌아가서, 승하 씨 대충 생각하지 마시고 진지하게 생각하고 답 해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아주 나설 수 없다는 전제하에, 네임드 몹을 포함한 언데드 군단과 붙었을 시에 몸을 빼실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응? 야, 너 그 상태로 나설 생각이었어?”
“마스터, 그건 절대로 안...”
“일단 답부터 주셨으면 합니다.”
더 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답을 촉구해오자 승하는 팔짱을 끼고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고민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 몸을 뺀다는 거 유격대 놈들이 뒤 안 물리게 체페슈? 그놈이랑 그놈 사단 내가 묶어두고 있다가 나중에 빠지는 거 말하는 거지?”
“예.”
“그 회색 오러 있으면 될 거 같은데. 아니 돼. 백프로 까지는 아니어도 구십프로는 장담할 수 있어. 그 때 썰어보니까 생각보다 더 단단하더라고.”
뻐기는 기색도 없이 담담한 승하의 말에 지벡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저 미친년이 뭐라고 한 거야? 내 귀가 벌써 갔나?’
네임드 몹과 그 휘하 상위 괴수를 혼자서 묶어 둘 수 있다고 장담하는 미친 여자.
더 어이없는 건 그 말을 받은 류 현의 반응이었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희란 씨랑 화련 씨가 나머지 10프로는 채워주실 거고요. 바로 그런 상황에 돌입할 것도 아니고, 몇 번 시험 해보면 더 확실해 지겠지요.”
‘아니 미친 그걸 할 수 있다고 말한다고 덜컥 믿냐!’
지벡은 그리 외치고 싶은 기분이었다. 검성, 나승하가 데스나이트 체페슈를 압도하는 광경을 봤기에 입 밖으로 내뱉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너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런 짓 하려는 건 아니지? 너 분명히 약속했었어. 회복되기 전에는 안 나서기로.”
“맞아요. 이상한 짓 하시려고 들면 세아 언니 옆으로 보내 버릴 거에요.”
“...뭘 생각하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생각하시는 그런 짓은 아닙니다.”
“그럼 뭔데?”
류 현의 입을 주시하던 지벡은 저도 모르게 등을 뒤로, 등받이에 바짝 붙이게 되었다. 류 현의 입에 걸린 삐뚜름한 미소는 알 수 없는 스산함을 품고 있었다.
“아무 말도 안하고 열심히 일만 해주니 저쪽이 고마움을 모르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번 기회에 생색을 좀 내려고요.”
“...그게 대체 뭔 소리야?”
“다 모인 자리에서 한 번에 말씀드리죠. 아, 그리고 건터 씨?”
“어? 어어...”
“입이 꽤 무거우시다고 들었는데, 그 무거운 입 저도 믿어도 되겠지요? 아무래도 이번 일은 알려져도 일이 엎어지진 않겠지만, 그래도 알려져서 좋을 게 없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지벡의 이성이 외쳤다. ‘아니, 믿지 말고 이 자리에서 빼줘!’
하지만 지벡의 입은 주인의 의사를 배반하고 류 현이 원했을 답을 내놓았다.
“그, 그럼. 당연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