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9화 〉탐식마(貪食魔)
마른 침을 삼키던 지벡은 입을 몇 번 여닫다가 간신히 말을 짜냈다.
“확실하게 해두고 싶은 게 있는데.”
“말씀 하시죠.”
“변명처럼 들릴 거 아는데. 아니 100프로 변명으로 듣겠지만, 난 문밖에서 엿들으려고 애쓰는 저놈들 데리고 나름 최선을 다한 거라는 걸 고려해줬으면 좋겠어. 변명이라고 생각하더라도.”
그 말에 류 현 일행은 서로를 한 번 마주 보았다. 승하가 가장 먼저 움직였다.
그녀는 고개를 까딱하며 눈빛으로, ‘잡아올까?’ 하고 물었다. 류 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바람처럼 문 밖으로 달려갔다.
비명이 울리는 듯 하더니 뭔가 질질 끄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얼마가지 않아 실체를 드러내었다.
“지들이 도둑고양이야 뭐야? 귀엽지도 않은 놈들이.”
제 몸집의 두 배는 족히 넘어 보이는 남정네 둘을 방안에 던져놓은 승하는 손을 탁탁 털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무슨 일을 당한 것인지, 두 남자는 넋이 반쯤 나간 상태였다.
“파비오...”
이 멍청한 새끼. 지벡은 덩치 큰 대머리 사내를 보고 중얼거렸다. 유격대 내의 서열을 정한 적은 없지만, 암묵적으로 지벡 자신 다음은 파비오 룸펜이었다. 서유럽의 두 패자 중 하나인 아발론 클랜의 실세.
그는 유격대의 대장이지만 유격대 내부에서는 고립된 거나 마찬가지인 지벡에게 유격대 내부의 의견을 전하는 실질적인 대표였다.
‘아니 저 미친놈은 지 따까리한테 시킬 것이지...아오...’
그런 놈이 엿듣다가 잡혀올 줄이야.
짜증나는 놈이었지만 유격대 대표격이나 다름 없는 놈이 이런 식으로 이미지 박히는 건 지벡도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파비오 룸펜이라는 다섯 글자만 구글에 검색해도 성인인증을 걸어야 할 법한 것들이 쏟아지겠지만, 사생활이 아무리 개판이라도 직접 목격하는 것과는 다르지 않은가.
“어쩔까? 얘네.”
승하의 물음은 당연하게도 지벡이 아니고 류 현을 향한 것이었다.
뭘 어쩌긴 어째! 지벡은 그 소리가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가지 않도록 혼신의 힘을 쏟아야만 했다.
지휘권을 넘긴 적은 없지만, 류 현과의 관계나 망한 작전을 수습해 준 것을 생각하면 이 정도 행동은 용인할 수 있을 정도다.
용인할 수 없다고 소리 지르더라도 할 수 있는 것도 없겠지만.
‘씨발, 차라리 아티펙트로 도청 시도를 했어야지!’
파비오의 행동이 제 권위도 손상시키는 일임에도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뭘 어쩌긴 어쩝니까. 그냥 내보내야죠. 화련 씨.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러려고 익힌 기술은 아니지만...알겠어요.”
슬쩍 희란의 손을 잡은 화련은 잠깐 눈을 감고 집중하는가 싶더니,
따악! 손가락을 튕기는 것으로 덩치 큰 두 남자를 방안에서 지워버렸다.
“징계는...지벡 건터씨가 차후 알아서 해주실 거라고 믿습니다.”
“어? 지휘권 안 받아가게?”
“방금 일만 봐도 지휘권 인수인계 받으려면 한 세월을 걸릴 거 같던데요. 아닙니까?”
한 세월이 아니라 인수인계 자체가 엎어질 수도 있었다. 지벡이 쥐고 있는 지휘권이라는 것도 이젠 누구한테 주려고 해도 다들 거절해서 버릴 수도 없고, 아예 내려놓을 수도 없는 그런 거였으니까.
언데드 군대를 상대로 어떻게 해도 공을 세우 긴커녕, 파국을 피할 수 없다는 걸 깨들은 뒤부터, 주도권 다툼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렇다고 지벡이 갑자기 난입해온 인간에게 지휘권을 양도하겠다고 하면 튀겠다는 말로 이해할 것이다.
그렇게 이해해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로 유격대의 현실이 처참했다.
‘그럼 유격대놈들 백프로 들고 일어난다.’
지벡은 그 사실을 어떻게 잘 둘러서 말해야 이 미친 괴물이 자극을 덜 받을까 고민했다.
“물어서 뭐해. 한 세월 정도가 아니라 파병국들이 지벡 저놈 모가지부터 치려고 들 거 같은데. 아까 오면서 분위기 개판인 거 봤잖아? 우리 예상보다는 멀쩡한데 파병국 입장에서는 그렇게 느낄 리가 없잖아.”
승하의 깔끔한 정리에 지벡은 감사를 표해야 할지, 저 무식하기까지 한 정리 방법에 화를 내야할지 헷갈렸다.
“어떻게 보면 다행한 일이긴 한데...”
“다행은 무슨. 데스나이트 잡고 나면 바로 개소리 듣게 생겼구만. 전선 최대한 지연시키면서 피해 최소화 시킨 건 기억도 못할 걸? 그놈들 아직 발등이 불이 안 붙었어. 급하면 데스나이트가 시체 일으킨다고 하든 말든 공습부터 때렸을 거 아냐? 적어도 유격대 분위기가 이런 식으로 개판은 아니었겠지.”
제 욕을 하는 것도 아닌데 지벡은 왠지 계속 위축되는 느낌이었다. 검성이 내뱉는 말이 하나같이 다 맞는 말인데다가, 자신이 생각해본 일들이라서 더욱 그랬다.
‘이걸 기뻐해야해, 아님 좃같아 해야 해? 일단 좃빠지게 구른 건 인정해줄 거 같은 분위기이긴 한데...’
“뭐 어쩌겠습니까. 마음 같아선 발등에 불붙은 거 온 몸으로 옮겨 붙어서 애원할 때까지 내버려 두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는걸요.”
류 현의 말에 승하가 한 숨으로 대꾸를 대신했다. 잠자코 듣고만 있던 두 여자까지 어깨를 늘어뜨리자 분위기가 축 쳐졌다.
지벡이 뭐라고 해야 할지 눈치를 살피고 있는데, 류 현이 입을 열었다.
“지휘권을 넘겨주실 수 있는 상황이라도 받을 수도 없는 상황이고요. 아프리카 쪽 인수인계도 대충 끝내놓고 급하게 온 터라.”
“어, 음...아프리카 쪽은 잘 끝난 건가?”
망해서 도망쳐 온 거 아니지? 지벡이 진짜 던지고 싶은 질문이었다.
정상적으로 원정을 끝냈다면 다는 아니어도 원정대 일부와 합류하지 않았을까?
류 현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일단 제일 급한 불은 껐다고 할 수 있겠죠. 갑자기 팽창한 땅 같은 건 도무지 해결방법을 알 수가 없어서...그리고 출발 전부터 데스나이트가 날뛰고 있었잖습니까. 대충 원정대끼리 귀환할 수 있는 거리까지만 오고 우리 팀만 이리로 온 겁니다.”
“대체 어떻...”
따악! 그 의문에는 화련이 손가락을 튕기는 것으로 대꾸를 대신했다. 더는 자세한 설명을 할 생각이 없었던 그녀는 지벡에게서 다시 시선을 떼었다.
설명이 충분치 않았던 지벡은 화련과 류 현을 번갈아보다, 류 현이 고개를 끄덕거리자 반쯤 넋이 나간 얼굴이 되었다.
‘아니 미친...그게 말이 돼? 아무리 열 명도 안 되는 인원이라지만...아까 그 두 놈을 옮기는 것 정도의 짧은 거리가 아니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상식이 뒤엉키는 기분이었다. 지벡은 이집트에서 이곳까지 텔레포트로 이동할 때 들 막대한 마력과 엄청난 내상을 계산하는 걸 포기하기로 했다.
“사실 유격대 상태가 더 엉망진창일 거라고 생각하고 급하게 온 겁니다만...생각보다 상태가 훨씬 더 괜찮군요. 피해내역도 충분히 상정 내였고요.”
“...멍청이들이 알아서 죽어줘서 그래. 아예 처음부터 거를 수 있었으면 반까지는 아니어도 4할 정도는 덜 죽었겠지.”
“어쩌겠습니까. 이거저거 거를 수 있을 정도로 플레이어가 많으면 이 고생도 안 하겠죠.”
‘이런 괴물이랑 심적으로 통할 줄은 몰랐는데.’
“아까 대충 봤겠지만 사망률이 거의 50퍼센트 수준이라 사기가 아주 개판이야. 첫 번째랑 두 번째 전투 때 몰아죽어서 좀 덜하긴 한데, 시체놈들이 줄어들지를 않으니 체력적으로는 멀쩡해도 정신이 거덜 난 놈들이 한 둘이 아니라 빠릿빠릿하게 움직여주거나, 장시간 전투지속은 불가능해. 저번에 해보니까 두 시간이 한계야. 중간 중간에 로테이션이라도 돌렸으면 모르겠는데...”
당장 사상자들 자리 채우기도 급급한 상황인데 그럴 여유가 있을 리가 없다.
쥐어짜내면 없진 않겠지만, 유럽 국가들은 서로 눈치만 보고 있는 상황. 속내가 아주 뻔했다.
데스나이트가 당장 자국 국경을 넘어오면 현재 자국에 대기 중인 플레이어들 외에는 지연시키는 것도 어려우니 유격대가 붕괴하지 않는 선까지만 지원하겠다는 속셈.
“오, 두 시간이래. 생각보다 훨씬 상태가 괜찮다. 그지?”
“그러네요. 사실 큰 기대는 안 했었는데...”
‘대체 어느 수준까지 생각하고 왔길래...이 꼴을 보고 그런 소리가 나와?’
지벡이 보기에 유격대는 거의 붕괴 직전의 상태다. 누가 봐도 그럴 것이다.
절반 이상이 PTSD 전조가 분명한 이상증세를 보이고 있으며, 나머지 절반은 빠져나갈 궁리만 하고 있는 게 뻔히 보일 정도였다.
연신 상태가 예상보다는 낫다고 말하는 눈앞의 괴물들이 그는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이봐, 여태 이끌어놓고 이런 말 하는 건 좀 그렇지만...여기 놈들은 도저히 도움이 될 만한 전력이 아니야. 숫자만 겨우 채우고 있는 거라고. 온 지 얼마 안 돼서 그나마 멀쩡한 놈들도 내뺄 생각뿐이고...싸움이 시작되면 그쪽이 기대하는 전력의 반의반도 안 나올 거야.”
“누가 뭐 걔들보고 데스나이트 상대해 달래? 그런 건 기대도 안 해.”
“승하 씨 말씀처럼 저희도 큰 걸 기대하는 건 아닙니다. 아까 보니 지벡 씨가 거의 전담하다 시피 네임드 몹을 맡던 것 같던데...맞습니까?”
“...왜인지는 몰라도 그놈은 나를 보면 날 가지고 노는 데만 신경 써서 그걸로 어떻게든 버텼지. 이번에 매복에 당하면서 그것도 깨질 뻔 했지만.”
“그 동안에 언데드들을 어떻게든 나머지 인원들이 상대했을 거고요.”
“상대한다기보다도 묶여서 억지로 버틴 거에 가깝긴 한데...지들끼리 어찌어찌 버티기는 했지.”
류 현은 만족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링만 만들어지면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하지.”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검성의 모습에 지벡은 이런저런 우려를 모두 삼켰다.
눈앞에 있는 예쁘장한 괴물은 순간이었지만 단독으로 데스나이트를 압도했으니까.
결국에는 언데드 군단이 몰려드는 걸 피해서 몸을 빼긴 했지만, 정말 제대로 된 링만 마련된다면 놈을 잡는 게 꿈은 아닐 것이다.
‘문제는 그 링을 만드는 게 지금까지 버틴 것보다 더 좃 빠질 거 같다는 거지만.’
“일단은 보급품 현황부터 확인을 해봐야겠군요. 우크라이나 정부랑 벨로루시, 몰도바 쪽도 접선을 해봐야겠고요. 놈들의 진격로 상에 회전을 치르기 적절한 지형이 있으면 좋겠지만...없으면 전장을 다른 곳에서 찾아봐야겠죠.”
“아마 우크라이나 안에서 끝장내라고 난리칠 거 같은데 그냥 아무 말 않고 유인하는 게 낫지 않겠어요? 괴수가 발광해서 그렇다고 하면 지들이 뭐 어쩔 거야.”
“저도 그렇게 쉽게 넘어가면 좋겠지만요.”
“?”
“그냥 조용히 있을 것 같진 않아서요.”
류 현의 우려는 정확히 한 시간 후에 현실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