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78화 〉탐식마(貪食魔) (278/429)



〈 278화 〉탐식마(貪食魔)

지벡은 내뻗은 손을 잡지 않았다. 팔이 엉망진창이라 잡을 수 없는 상태기도 했지만, 멀쩡했어도 잡지 않을 생각이었다.


“네가 왜...”

네가 왜 여기 있지? 지벡이 내뱉고 싶은 말은 그것이었다. 말 대신 죽은피가 쏟아져 나오며 말문을 막았다.

“이야, 그래도 나름 대장 노릇 열심히 했나 보네? 생각보다 훨씬 많이 남아있더만.”

조롱하는 투가 아닌데도 왠지 놀림당하는 기분이었다.
지벡은 반박이 아니라 욕지거리라도 하고 싶었지만, 목구멍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과 계속해서 솟구치는 핏물에 한 마디도 내뱉을 수가 없었다.
눈빛으로 욕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승하를 노려보던 지벡의 눈이 커졌다.

‘염병, 뒤!’

후웅! 카앙! 쿠우우! 지벡의 염원이 닿기라도 한 것일까? 승하는 뒤에서 덮쳐오는 데스나이트 체페슈의 일격을 가볍게 받아치더니,

키이이익! 뻐벙! 카아아앙! 잠깐 멈칫하더니 검은 검기를 확 쏘아내었다. 전과는 비교도 하기 힘들 정도로 굵직한 선을 검끝으로 자아내었다.
데스나이트의 대처도 보통은 아니었다. 놈은 어지간한 성인남자 몸통만한 폭의 대검을 방패막이로 삼았다. 검은 검기가 뚫기 위해서 악착같이 비비적거렸으나, 놈의 검에서 검붉은 오러가 확 치솟자 굉음과 함께 흩어졌다.
아무런 희생이 없는 건 아니었다. 놈은 승하에게 걷어차였을 때보다 멀리 나가떨어졌다.

“나쁘지 않은데? 집속에  신경을 쓰긴 해야겠다.”


‘뭐야 씨발. 저 미친 괴물년 대체 아프리카에서 뭘 하고  거야?’

검을 휘휘 털고 있는 승하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지벡은 제 입이 벌어진 것도 모르고 있었다.
데스나이트 체페슈의 검붉은 오러와 대치되는 듯한 기운을 내뿜는 저 회색빛 오러도 이상했지만, 그녀가 내보이고 있는 무위는 아프리카 가서 일은 안하고 수련만 했다고 해도 납득이 안 갈 정도였다.
그녀의 실력을 다 파악한 건 아니지만, 자신이 유럽으로 떠나올 때와는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데스나이트를 저렇게 가지고 놀다니...’


데스나이트 체페슈는 지벡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듯이 곧바로 달려들었다. 놈의 몸이 정지영상 속에서 혼자서 빨리 감기라도 한 것처럼 닥쳐들었다.


콰앙!  팔로 휘두른 것이라고 믿기지 않는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일격을 받아낸 승하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더니, 두 팔에  힘을 슬쩍 풀었다.
스칵! 힘을 대치가 풀리자 짓누르던 놈의 자세가 무너졌고, 그대로 올려 벤 승하의 검이 놈의 투구 장식물들을 잘랐다.

간발의 차이지만 틈을 얻은 놈은 놓치지 않고 발을 날렸다.
카앙! 놈에 비하면 연약하다고 해야 할 승하의 몸이 공중을 날았다. 그녀는 억지로 힘을 죽이지 않고  번 구른 후에 자연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쯧...”


발차기를 받아낸 검면에는 거미줄처럼 금이 가있었다. 검면 위로 연기를 피워 올리는 검붉은 흔적을 확인한 그녀는 미련 없이 새 검을 꺼내들었다.


“진짜 류 현 말대로 난이도 상승 속도가 양심 없네. 인류측은 버퍼라고 해봐야 근력 100키로도 못 늘려줄 텐데. 류 현 녀석 없었으면 진짜...”


승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눈치 챈 것인지, 데스나이트 체페슈의 몸뚱이에서 검붉은 오러가 훅 치솟았다. 기습으로 날려버린 왼팔이 돋아나는 걸 보고 승하는 사납게 미소 지었다.


“그래, 이 정도는 해줘야...”
“언니!”
“끙...”


머리 위에서 터져 나온 익숙한 목소리에 승하는 거의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뭐라고 잔소리를 들은 것도 아닌데, 저 목소리만 들으면 자동으로 이렇게 반응하게 되었다.


‘...류 현도 쟤가 얼마나 잔소리꾼인지 알아야 하는데.’

본인이 들었으면 입에서 불을 뿜었을 지도 모를 생각을 하며 승하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자신을 엄격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화련을.

“알았어. 팔다리 한 번만 더 끊고 빠지자. 저놈 너무 팔팔해서 아니면 뒤 물릴지도 몰라. 저놈이나 맡아줘.”
“진짜 내가 못살아.”

화련이 투덜거리며 손을 내젓자 지벡의 몸이 두둥실 떠올랐다. 떠오른 지벡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화련을 바라봤다. 제 항마력을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하고 다룰 줄은 몰랐다는 표정.


“재미 보겠다고 이상한 짓 하지 말고  할 것만 해요.”

화련은 지벡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승하에게 말했다.


승하는  들은  하며 발을 굴렀다. 그녀의 몸이 쏜살이 되었다.

카앙! 방금 전 나누었던 검격이 재현되었다. 역할이 반대가 되었다.
승하가  몸을 내던지며 내려친 검격을 받아낸 데스나이트 체페슈의 발이 땅속으로 움푹 꺼졌다. 부츠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데스나이트 체페슈의 힘을 생각하면 문제가  것도 없는 일이었지만, 승하에게는 충분한 틈이었다.
놈이 발을 빼면서 저가 했던 대로 반격을 날리려고 멈칫하는 순간을 승하는 놓치지 않았다.
키리릭! 터엉! 스칵! 힘의 대치가 풀리자마자 대검을 밀어낸 그녀는, 놈의 가슴을 걷어차는 것과 동시에 놈의 팔뚝을 베어내었다. 지벡의 마법을 수 백 차례 받아낸 장갑은 이번에도 버텨내지 못했다.
놈의 팔을 단숨에 잘라내지 못했지만 승하는 실망하지도 멈추지도 않았다.
키이이익! 키아악! 검은 검기가 내달렸다.
놈은 다시  번 거대한 대검면으로 받아내려고 했으나,

키이잉! 콰직! 텅! 덜렁거리던 왼팔이 떨어져나가자 균형이 무너졌다. 다행이 힘겨루기를 하던 검은 검기는 대검면을 타고 하늘로 솟구쳤지만,


쉭! 카각! 푸쉭! 승하는 가만히 있을 생각이 없었다. 이번에는 왼쪽 허벅지 절반을 내주고서야 물러날 수 있었다.
절단면에서 검은 연기를 뭉클뭉클 쏟아내고 있는 놈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보였다.

“스읍...후-”

그러거나 말거나 승하는  호흡에 집중하는 중이었다. 그녀는 매몰되듯이 제 호흡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전장에 퍼져있던 악취도, 데스나이트가 내뿜던 지독한 사기도, 소총과 다른 화기들이 뿜어내는 소음도 그녀의 안에서 사라졌다.
솜털이 곤두서며 시간의 흐름마저 느껴지는 듯 했다.

심장박동이 느려졌다. 아니, 한계까지 예민해진 그녀의 감각이 심장박동을 쪼갰다. 느려진 세상 속에서 승하는 웃었다.
느려진 세상이 그녀에게 길을 내주었다.

검의 길을.

스읏- 대치하고 있는 데스나이트에게는 장난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아니면 숨고르기 라고 생각했거나.
그녀가 천천히 검을 내려친 순간 양자 간에는 검기를 내쏘아도 맞추기 어려운 거리가 존재했으니까.

하지만,


시잉! 푸학!  장난 같은 휘두르기를 무시한 놈은, 이미 팔뚝 중간부분까지 날아간 왼팔이 어깨 죽지까지 잘리는 것과 왼쪽 허벅지를 절단 당하는 대가를 치러야했다.

[----!]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놈의 몸이 허물어졌다. 놈이 검붉은 오러를 사방으로 흩뿌리며 추가공격을 대비했지만, 승하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련아!”

뒤를 향해 외치자 익숙한 기운이 온몸을 감싸 안았다. 그대로 두둥실 떠오른 승하는 히죽히죽 웃다가 옆구리에 뜨끔한 통증에 뒤로 눈을 흘겼다.


“뭘  했다고 째려봐요? 이거 봐. 또 내상 도져서  질질 흘리네. 혜라한테 다 일러바칠까보다.”

승하는 꼬집힌 곳을 살살 쓰다듬으며 화련의 시선을 피했다. 집중하느라 몰랐는데, 코피와 입에서 핏줄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들키면 잔소리형 3시간은 확정이었다. 백혜라의 잔소리에서 최대한 빨리 벗어나려면 화련의 잔소리 정도는 감수해야했다.
할 말이 사라진 승하는 괜히 지벡에게 짜증을 부렸다.


“뭐, 왜. 뭘 그렇게 봐?”

억울했지만 지벡은 입을 다물기로 했다.


***
지벡은 깁스에 덮인 제 양팔을 내려다 보다 한 숨을  내쉬었다. 부상 때문에 내쉬는 한숨은 아니었다. 작살난 양팔은 깁스 안을 가득 채운 살살이 풀인지 뭔지 하는 걸로 만든 점토 덕에 실시간으로 아무는 게 느껴질 정도.

한숨의 원인은 제 안에 있었다.
안도감과 무기력감, 짜증 등이 뒤섞인 그런  숨이었다. 개중 가장 큰 것은 안도감과 무기력감이었다.


‘대기타고 있던 항모전단 쪽에서 무슨 기미가 있다곤 했지만 이렇게 빨리 올 줄은...’

아프리카로 떠난 원정대가 귀환 중인  같다는 정보를 접한 게 바로 이틀 전일이었다.
귀환했다. 도 아니고, 귀환 중인  같다는 정보 같지도 않은 정보.


아프리카 대륙에 인접할수록 통신상태가 개판이 되는 이상현상은 점점 더 심해졌고, 원정대를 기다리고 있을 항모전단과의 연락은 하루에 10분도 제대로 이루어지질 않았다. 그마저도 문장 하나 제대로 전달될까 말까.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다. 원정대가 아프리카 대륙에 발을 딛고 1달쯤 지났을 때부터 급격하게 심해졌고, 그래서 아프리카에 플레이어 전력을 쏟아 부은 국가들도 그  즈음부터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유럽도  때 데스나이트의 심각성을 피부로 느끼기 시작했으니까.
아프리카 대륙이 그런 상태가 아니었다면 진작 원정대 통제권을 개판 내고 강제로라도 귀환을 시켰을 것이다.

그런 인류가 이룩한 문명의 이기들 태반이 되는 마경에서 살아나온 것도 용한데, 이틀 만에 이곳 우크라이나까지 날아왔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돼. 바다를 가로질러서 왔어도 이 시간 내로는 우크라이나까지 오는  불가능하다. 심지어 이집트가 팽창해서 거리는 더 멀어졌고.’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이루어 진 덕에 구명된 주제에 의심하는 것도 웃기다고 생각은 했지만, 한 번 고개를 든 의구심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검성, 그 미친년은 이젠 진짜 밑도 안 보일 정도로 세진 것 같고.  현 그놈 옆에 붙어 다니는 여자들도...아프리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비행기가 아니면 하루 안에 도저히   없는 거리임에도 소식보다 사람이  빨리 왔으니 뭔가를 파악할 수 있을 리가 만무.


‘거기다가  현 그놈은 휠체어에 앉아있었고. 아까 보니까 그냥 장난으로 앉아있는  같진 않던데...부상이 심각해서 아프리카에서 퇴각한 건가? 그런 것치고는...’


그 때.


“야, 들어간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문이 열렸다. 노크를 왜 하는 지 모르냐고 쏘아주려던 지벡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다짜고짜 방 안으로 들어선 무뢰배들 중에서 만전의 자신이라도 당해낼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는 이가 하나도 없었으니까.


그 선두에 있는 승하는 방을  번 휘둘러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뭐야, 생각보다 훨씬 소박한데? 너 여기 애들한테 갈굼 먹으면서 살아?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리가 없는데.”
“...꾸밀 필요가 없으니까.”
“흠...너 같은 인간도 변하긴 하는구나.”
“뭘 무게 잡고 있어요. 좀 들어가요 들어가. 환자도 있구만.”


승하를 떠밀어 방안으로 밀어 넣은 화련도 방안을 한 번 휘돌아보더니 뒤로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그녀의 손짓을 따라 바퀴 없는 휠체어 같은 것이 딸려 들어왔다. 그 위에 앉은 류 현도 같이.


“침대에 앉으라고 하긴 좀 그런데 쿠션이라도 더 덧대드려요?”

화련의 물음에 류 현이 겸연쩍게 볼을 긁적거렸다.


“괜찮습니다. 지금도 딱히 불편하진 않고요.”

화련은 그 말을 못 들은 것처럼 소파의 쿠션 하나를 기어코 류 현의 등 사이에 끼워 넣었다.

“큼큼,  그럼 지벡 건터 씨?”
“엉? 어어...”


휠체어 같은 것에 앉아있는 류 현의 모습에 정신이 팔려있던 지벡은 흠칫했다.

“지금까지의 진척 상황을 듣고 싶은데요.”


 현 본인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긴 했지만, 옆에 붙어있는 여자들의 눈빛이 살벌했다. 그녀들은 아프리카에서 눈빛으로 말하는 법도 배워온 듯 했다.


‘빨리 끝내! 빨리!’ 그리 말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지벡은 마른 침을 삼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