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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6화 〉탐식마(貪食魔) (276/429)



〈 276화 〉탐식마(貪食魔)

푹! 찌직! 투둑! 가볍게 손목을 비틀어 빼자, 걸리는  없이 검이 빠져나왔다. 머리통이 피를 잔뜩 흩뿌리며 허공을 날았다.
머리통이 몸과 분리된 놈에게는 별로 좋은 소식은 아니겠지만, 승하는 플레이어가 돼서 진검을 잡은 이후로 이토록 몸이 가벼운 적이 없었다.

‘마력검 꺼도 되지 않을까?’


그런 장난 같은 생각마저 들었을 정도였다. 마력검을 있는 대로 끌어올려도 단단한 가죽은커녕, 쇠기둥을 후려치는 듯했던 놈의 몸뚱이가 갑자기 썩은 무로 변한 것 같았다.
그냥 대충 유지하고 있는 마력검에도 저항 없이 뚫렸고, 빼낼 때도 검의 손상이나 손목의 부담 같은  아무래도 좋다는 식으로 빼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실제로 변한  놈의 몸뚱이가 아니라 자신이겠지만, 승하가 느끼기에는 그랬다.

‘그래도 이 느낌이 없었으면 좀 힘에 부쳤겠는 걸.’

눈을 벌겋게 뜨고 꾸역꾸역 밀려드는 놈들은 하나 같이 머리통 위에 이름을 띄우고 있었고, 하나 같이 같은 기운과 같은 용량을 품고 있었다.
아무리 일격일살을 실행할 정도로 컨디션이 올랐어도, 수적 열세에서 오는 압박감과 저렇게 괴상한 방식으로 인해전술을 펼쳐오는 놈을 상대하면서 정신적으로 지치지 않을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회색빛 오러에 휩싸이고 나서 그녀를 감싸고 있는 이 거대한 존재감이 아니었다면.


‘진짜 끝내주네.’


[캬아아악!] 승하가 정면에서 달려드는 놈의 허리를 끊어주고 검을 거둬들일 때였다. 뒤쪽 발치의 땅이 터져나가며 구엘 뒤 굴락이 솟구쳤다.
완벽하게 사각을 점한 습격은,

꾸웅! 놈의 머리를 짓누르는 압력에 의해 실패로 돌아갔다. 화련은 제가 눌러놓은 구엘 뒤 굴락 중 하나가 승하에게 목이 잘리는 걸 보지도 않고 시선을 돌렸다. 사방에서 몰려드는 놈들을 견제하느라고 한 눈팔 시간이 없었다.

이쪽을 향해서 파 들어오는 땅굴을 붕괴시키고, 높이뛰기 선수마냥 뛰어 활강하는 놈은 저 멀리로 쳐낸다.
승하에게 한 번에 달려드는 놈들을 숫자를 조율하는 그녀의 이마에 송글송글 맺혔다.

이전이라면 놈의 항마력에 막혀서 마력낭비가 됐을 일이 아주 쉽게 이루어졌다. 부정형 공간을 몇   겹칠 필요도, 성질 반전을 통해서 반발력을 늘릴 필요도 없었다.
그냥 적당히 무겁고, 적당히 단단한 공간을 짜서 후려갈기면 되었다. 놈이 가졌던 성벽 같던 항마력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화이트 몹급 정도의 항마력 정도만 남았으니까.

‘이거 뭔지 마스터한테 물어봐도 모르겠지?’


화련은  피부 위로 타오르고 있는 회색빛 오러를 곁눈질 하며 생각했다.
회색빛 오러는 그냥 기력을 북돋아 주는 정도가 아니었다.
네임드 몹의 항마력이 사라진 것처럼 느껴졌고, 무엇보다 이 안정감이, 절대 무너지지 않을  같은 거대한 존재에게 편입된 것 같은 이 안정감이 전투력을 유지하는데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실제로 류 현이 죽은 듯이 희란의 등 뒤에 업혀있는 상황임에도 감정적인 동요가 일지 않았다. 자신이 이렇게 덤덤해도 되나 슬쩍 겁이 날 정도로.

아무런 근거도 없는   현이 괜찮을 거라는 막연한 확신이 들었다. 그가 부리는 회색빛 오러가 여전히 잘 타는 걸로 봐선 근거가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정상은 아니었다.

‘...승하 언니한테 총대 매고 물어봐달라고 해야겠다.’

콰릉! 벽력이 땅을 기며 회색빛 살덩이의 물결을 갈라놓았다.
청뢰! 화련의 옆에 떠있던 희란은 사납기 그지없는 푸른 뇌수(雷獸)가 땅위를 마음껏 활보하도록 마력을 밀어 넣었다.
청뢰에 스친   즉사한 놈은 없었지만, 파도처럼 몰려들던 놈들의 진형을 붕괴시키기엔 충분했다.

하지만 희란은 그에 만족하지 않고 청뢰에서 번개를 한 가닥 뽑아내었다. 그것으로 땅을 후려치는 그녀의 얼굴에는 감정의 편린조차 보이지 않았다.
평소의 희란을 아는 이라면 상상조차  수 없는 모습. 회색빛 오러에 가장 크게 영향을 받은 건 희란이 분명해 보였다.

‘희란이 때문에라도 물어봐야 해.’


***


류 현이 정신을 차렸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역겨움이었다. 핏물과 내장이 뒤섞여 피워 올리는 악취가 진동했다.
반사적으로 제 후각을 죽여 놓은 류 현은 기대로 있던 등에서 몸을 일으켰다. 등이 꿈틀하더니, 희란이 그를 돌아보았다.

“정신 드셨네요. 어지럽진 않으세요?”
“예, 걱정해 주신 덕분에.”


희란답지 않은, 너무나 차분한 태도에  현은 속으로 움찔했지만 가까스로 티를 내지 않을 수 있었다.
희란은 그 이상 뭐라고 묻지 않고 류 현을 내려주고는 포션병 하나를 슥 내밀었다. 거절하지 않고 받아 마신 류 현은 공터가 얼마나 참혹하게 변했는지  수 있었다.

“...제가 정신을 잃고 얼마나 지난 겁니까.”
“한 시간 조금 안  거 같아요. 시계가 망가져서 정확하게는 모르겠네요.”
‘진짜 이 버프 주면 둘이서 네임드 몹도 잡을 수도 있겠는데.’

여전히 제 몸 위로 타오르고 있는 회색빛 오러를 보며 류 현은 생각했다. 몸을 잃은 머리통과 허리부근이 단칼에 잘린 시체, 가슴에  머리통만한 구멍이 난 시체  구엘 뒤 굴락의 시신들이 공터 곳곳에 핏물의 꽃을 피워내는 중이었다.
그 중 압권은 핏물을 잔뜩 뒤집어쓰고 뭐가 그리 신나는 지 허공에 대고 검을 이리저리 휘두르는 승하였다. 그녀가 기척을 눈치 채고는 돌아봤다.

“어, 깼어?”


무슨 낮잠 자고 일어난 사람을 대하는 듯한 어투였다. ‘엄청 덤덤해 보이네.’
걱정 때문에 미쳐 날뛰길 바랐던 건 아니었지만, 이것도 정상적인 반응은 아니었다.
승하의 옆에 서있던 화련의 반응도 별 다르지 않은 걸 보면...


‘아무래도 이것 때문인 것 같은데.’

회색빛 오러를 들여다봐도 안 보이던 원인이 갑자기 보일 리는 없었다. 류 현은 의구심을 애써 눌러놓으며 물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어떻게 되긴, 너 기절하고 개떼처럼 달려들길래 다  죽인거지. 한 이삼백은 됐지?”
“대강 삼 백 오십쯤 될 걸요. 언니가 아주 갈아버린 놈들 때문에 정확하진 않지만요.”
“그렇데.”

히히 웃으며 말하는 걸 보고 류 현은 할 말을 잃었다. 공터 뒤편을 돌아보자 여기저기 구멍 난 제단이 보였다.
중간중간 희란이 최대 출력의 청뢰로 대 여섯 번 후려쳤는데도 제단은 무너지지 않았다.
그것을 신호로 알아들었는지, 승하와 화련이 다가왔다.

“저것도 깨부숴야 하지?”
“예, 어떻게 보면 저게 본체거든요.”
“라이프 배슬 같은 건가?”
“좀 많이 다릅니다. 저걸 부순다고 놈이 소멸하는 건 아니거든요. 약화야 되겠지만. 리치랑 다르게 순수 정신체라서 매개체가 없어도 약화는 될지언정 소멸하진 않습니다.”
“엥, 그럼 말짱 황 아냐?”
“그냥 부수기만 하면 그렇겠죠.”

스읍, 후. 류 현은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단순히 호흡을 가다듬기 위해서가 아닌, 자신이 가슴 깊숙이 눌러둔 것을 꺼내기 위해서였다.
지끈하는 통증이 등허리를 달렸다. 보이지 않는 손이 뒷머리를 움켜쥐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츠츠츠- ‘강림’. 류 현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검은 기운을 끌어올렸다. 같이 딸려 나온 검은 안개가 용틀임을 하듯 솟구쳤다.

“야,  현 너 아까도...”
“금방 끝낼 거니까, 괜찮습니다.”


그것을 듣기라도 했는지 제단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쿠구구! 콰르르르! 청뢰를  번이고 얻어맞고도 형태를 유지하던 제단이 위쪽부터 무너져 내렸다. 그들은 제단이 피워 올리는 흙먼지 속에서 일어난 시뻘건 기운을   있었다.

후르르르! 제단이 무너져 내린 그곳에는 불덩이로 이루어진 거인이 서있었다.
불덩이로 보일 정도로 맹렬하게 타오르는 붉은 오러로 이루어진 구엘 뒤 굴락이.

“와...얘 진짜 징하다. 까도까도 뭐가 나오네. 지가 무슨 양파야?”

승하가 불평을 하든 말든, 놈은  할 일을 했다. 놈은 제 어깨높이로 팔을 들어 올리고  펼친 손으로,


[키이익!] [흐아아아!] 요새 내의 괴수들의 생명을 거둬들이기 시작했다. 괴수들의 몸뚱이에서 흘러나온 허연 연기 같은 것을 흡수한 놈의 덩치가 점점 불어났다.

“으악!”
“뭐야?”
“끄으응...”


마법을 건 리치들이 놈의 손에 전부 죽은 것인지, 아니면 마법 유지를 포기하고 도망친 것인지 비눗방울 같은 구체에 갇혀있던 원정대원들이 해방되자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몇몇은 공터로 뛰어오려는 기색을 내비쳤지만,


“진정하시고, 통제에 따라주시길 바랍니다. 일단 이곳에서 몸을 빼는 게 최우선 과제입니다. 각 조 조장분들은 힘드셔도...”

뒤에 빼놓은 웨인이 눈치 좋게 그들에게 붙어서 그것을 막았다. 백혜라도 상황이 돌아가는 걸 파악했는지 그에게 동참했다.

[화신이여! 너를 삼키고  또한 화신으로 거듭날 것이다!]

주변에서 느껴지는 괴수의 기척이 모두 사라지자 놈이 다시 날뛰려는 기색을 보였다. 놈이 뿜어내는 기세가 공터를 진동시켰다.
놈이 흩뿌려대는 기세만으로도 원정대 여기저기서 정신을 잃는 자가 속출했으나, 류 현의 옆에 선 팀원들은 태연하기만 했다. 회색빛 오러가 마주 으르렁거리는 것처럼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너 쟤한테 뭐 떼먹은 거 있어? 아까 전부터 난리도 아니네.  기절했을 때 뭐 내놓으라고 난리던데.”
“...지금 그런 농담이 나오십니까.”
“뭐 어때? 어떻게 해도 질 것 같지가 않은데.”

그리 말하며 히죽히죽 웃는 승하를 보며 류 현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말에 스스로도 동의하고 있었으니까.


‘죽을 뻔했다가 이러는 것도 웃기지만...진짜 어떻게 해도 질 것 같지가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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