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5화 〉탐식마(貪食魔)
류 현은 꽉 닫힌 어둠을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둘러보았다.
‘딱히 방심한 건 아니었는데...잡힐 줄이야.’
위기감을 느끼는 건 아니었다. 회색빛 오러는 여전히 활활 타올랐고, 검은 기운도 조금 줄어들긴 했어도 잘 움직였다.
이것들을 가지고도 한 번에 떨쳐내지 못한다는 사실이 어처구니없을 뿐.
그걸로 모자라서 살덩어리가 슬금슬금 조여들어오는 모습은 고개를 내젓게 만들기 충분했다.
‘난이도가 너무 양심 없이 널뛰네. 덕분에 생전 처음 버프 기술 얻긴 했지만...솔직히 운빨이 팔 할 이상이지.’
정말로 운이 좋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버프가 아니라, 세 번째로 등장한 네임드 몹에 다 찢겨 죽었거나 자신만 몸을 빼냈을 테니까.
그것도 아니면 엘더 리치 때처럼 ‘강림’에 몸을 맡기고 반 시체 상태로 끝을 보거나.
‘놈들이 이성을 되찾았다는 거에 너무 매몰됐었어. 이거저거 숨기면서 상대할 놈들도, 내가 그럴 수 있는 능력도 없는데.’
‘에잉...무슨 궁상이야. 반성은 끝나고 하자. 일단...’
류 현은 혈옥에 갇히자마자 살아난 것처럼 난동을 부리고 있는 가슴에 박힌 놈의 살점을 집어삼키고자 했다. 나중은 몰라도 당장은 검은 기운을 다루는데 확신이 선 상태였다.
‘음? 뭐야 이거 아직도 연결이 안 끊어졌...어?’
‘크으윽...!’
갑자기 기억들이, 류 현이 봤을 수가 없는 낯선 풍경들과 핏물의 끈적끈적함, 배에 칼이 박힌 채로 중세 기사 같은 이들을 찢어 죽이는 기억들이 비집고 들어왔다.
선 채로 기절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끔찍한 고통! 정신을 놓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엘더 리치, ‘펠릭스’ 그 두 괴물을 집어삼켰을 때와 비슷했다. 이런 자잘한 기억들도 없었고, 지금과는 고통도 비할 바가 아니었지만.
‘염병! 전생에서는 이런 일 없었는데.’
육체적인 고통은 없었지만 손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아직 그런 적은 없지만, 기억이 뒤섞일 수도 있으니 스쳐지나가는 장면들을 최대한 기억하고자 했다.
만약의 사태가 벌어졌을 때 피해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
‘제국...? 십자기사단? 젠장, 그 가설이 진짜였네 이놈들 진짜 외계...끄으윽...’
영겁 같던 고통의 시간도 그 끝이 다가왔다. 류 현은 머리를 부여잡고 휘청거렸다.
‘푸우우...매번 이 꼴 나면 몸이 거덜 나는 것보다 정신이 먼저 거덜 나겠군.’
‘그렇다고 능력을 안 쓸 수도 없고.’
‘그래도 소득이 없진 않으니,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류 현은 혈옥의 벽에 손을 대었다. 벽 내부에 들러붙어있는 살덩어리들이 부글부글 들끓으며 류 현을 역으로 집어삼키려 들었지만, 검은 기운에 노출되자 까맣게 타들어갔다.
막혀 있던 시야가 천천히 트였다.
‘상상도 못 했다. 짐, 짐 거리던 놈이 정신체...응?’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바람이었다. 수챗구멍으로 물이 빠지는 것처럼 한 점을 향해서 빨려나가고 있는 듯한!
주변을 살필 것도 없이 류 현은 수챗구멍 역할을 하고 있는 게 무엇인지 볼 수 있었다.
요새가, 밖에서 보았을 때 물리법칙이 뭐냐고 조롱하는 것처럼 있을 수 없는 형태로 당당하게 서있던 요새에, 밖이 보일 정도로 커다란 금이 났다.
류 현은 거의 홀린 것처럼 천천히 기운을 갈무리 하고 있는 여자와, 그 앞에서 허물어지고 있는 구엘 뒤 굴락을 찾아내었다.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류 현은 사태를 파악했다.
‘진짜 미친 재능이라니까. 모자란 힘 채워주자 마자 저렇게...’
분명히 마력량이나 담고 있는 기세를 보면 평소와 다를 것이 없는데,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보고만 있어도 몸서리 쳐지게 만드는 저 상태만 봐도 달리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어떻게 눈치 챈 것인지 승하가 슬쩍 곁눈질로 뒤를 돌아보더니 히죽 미소 지었다. 동료가 웃는 걸 보고 느낄만한 감정은 아니었지만, 등허리가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마스터! 몸은, 몸은 괜찮아요?”
“이, 일단 이것부터...”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드는 두 여자 때문에 그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희란이 거의 밀어 넣을 기세로 들이미는 포션을 받아 마신 후 입을 뗄 수 있었다.
“저 멀쩡하고, 아직 전투 중입니다. 포지션 유지하셔야죠. 패턴 C로 돌릴 겁니다. 뒤로 빠져서 웨인 씨랑 합류하세요. 그리고 제가 신호하시면 청뢰를 쏴주시면 됩니다.”
‘한 수 남겨두겠다고 고집부리다가 이 사단이 났으니...화도 못 내겠군.’
등을 떠밀다시피 하고 나서야 두 여자를 후방으로 물릴 수 있었다. 류 현은 소리 없이 한 숨을 삼키며 승하에게로 다가갔다.
그녀는 일어서려고 바동거리는 구엘 뒤 굴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놈은 재생조차 할 수 없는지, 반 밖에 남지 않는 몸으로 헛힘 쓰는 중이었다.
“이거 어떻게 하지? 목 날려도 다시 몸 갈아탈 거 아냐? 지금 상태 보면 못 갈아타는 거 같기도 한데. 목 치면 다시 원하는 대로 갈아타는 거 아냐?”
“방법 찾았습니다. 일단 이놈 목부터 날리죠.”
“그래?”
스칵! 텅! 가볍게 휘두른 검에 목이 떨어져나갔다. 류 현은 회색빛 오러에 휩싸인 것 외에는 평소와 별 차이가 없는 승하를 훑어보았다.
‘기세나 마력이 움직이는 건 평소랑 똑같은데...’
그것들을 배제하고 느낌만 생각하면 온 몸에 칼날을 세우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래서, 이제 뭐 어떻게 해? 스페어 거덜 날 때까지 잡아 죽여?”
“예, 그리고 저 제단도 부숴야 합니다.”
놈이 정신체이니 정신체가 깃들 육신과 정신체를 붙들고 있을 오브젝트를 부숴야 한다는 설명을 류 현은 한 문장으로 축약했다.
정확하게는 기억의 파도 속에서 이해한 부분이 딱 그 정도였다.
‘왕의 권능이니 통합된 의지니 뭐니...반의반도 이해 못 했으니...’
“그래? 뭐 지금 같은 상태면 별 상관없지. 시험해 보고 싶은 것도 있고.”
우웅! 텔레포트 마법진이 사방에 떠올랐다. 틀에 찍어낸 것처럼 똑같이 생긴 구엘 뒤 굴락들이 나타났지만 승하와 류 현은 무심한 눈으로 놈들의 머리 위만 살폈다.
“엥, 이름이 안 뜨는데? 튄 거 아냐?”
“제단을 두고 튀지는 못할...음?”
그 때, 놈들의 흐리멍덩한 눈에 불꽃이 튀는 것처럼 적의가 서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머리통 위에 글자도 떠올랐다.
라가로드 구엘 뒤 굴락.
눈을 벌겋게 뜬 놈들이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척 봐도 백은 훌쩍 넘기는 숫자. 놈들은 하나 같이 붉은 오러를 제 몸 위로 피어올리고 있었다.
그것을 봤는지 뒤편에서 화련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류 현은 애써 못 들은 채 했다.
“이젠 진짜 하다하다...저걸 뭐라고 해야 해? 분열? 분신술? 본체가 쓰던 거 다 쓰네.”
“어차피 다 잡아야 하는 건 똑같습니다. 저렇게 동시에 여러 몸을 움직이면 놈도 포기해야 하는 게 많고요.”
“뭔가 말하는 게 되게 확신하는 것 같다.”
“놈의 머리통에 들어갔다 나왔거든요.”
“...뭔 소리야?”
“그런 게 있습니다. 일단 이놈부터 잡고 얘기하죠. 제가 눕히면 승하 씨가 끝내는 걸로.”
“혼자서도 될 것 같은데?”
“안 됩니다. 놈이 1/n이 된 게 아니라서 아까처럼 힘을 집중해서 덩치를 확 불릴 수도 있거든요.”
“뭐가 뭔지 모르겠네. 좋아, 그럼 앞장서시죠. 대장.”
류 현은 픽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눈에 불을 켜고 몰려드는 놈들을 한 번 훑어보고는,
화르르! 회색빛 오러의 기세를 있는 힘껏 돋웠다.
그리고,
‘...이렇게 하면 되나?’
류 현은 검은 기운을 다섯 갈래로 나누고, 쭉 늘어뜨려 갈퀴처럼 만들었다. 본 드래곤을 무처럼 썰어버렸던 그 때처럼. 일단 길은 터 놓고 시작할 생각이었다.
있는 힘껏 휘두르려는 순간,
푸쉭! “...어?”
피부 위를 힘차게 돌던 검은 기운이 거짓말처럼 흩어져버렸다.
거기에 당황스러움을 표현하기도 전에,
“야, 야. 류 현, 얘 또 왜 이래?”
“자, 잠깐만 부탁드립니다.”
다리가 풀려버렸다. 승하에게 반쯤 안긴 채로 류 현은 염두를 굴렸다.
‘뭐야, 마력은 아직 한참 남았는데?’
마력이 바닥나기 전에 이런 식으로 반강제로 끊긴 적은 없었다.
정신 줄을 놔버린 경우는 어떨지 알 수 없으나, 매번 마력통이 텅 빈 상태로 깨어나는 것만 봐도 거의 그에 준하는 상태까진 간 게 분명했다.
제 의지로 중단한 것도 아닌데, 기력이나 마력이나 남아도는 상황에서 ‘강림’이 풀려버린 건 처음 있는 일.
‘거기다가 이 두통은 또 뭐야...끄응...’
“너 이 회색 때문에 무리하고 있는 거 아냐?”
“그건 아무런 부담이 없는데 끄응...머리가...조금만 더...”
“야, 야. 안 되겠다. 너 뒤로 좀 빠져있어. 이 불꽃같은 거 유지되는 동안은 나 혼자서도 될 것 같으니까 몸 좀 추슬러. 꺼지면 나도 바로 빠질 테니까.”
혼자는 안 된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아래로 꺼졌다.
객관적으로, 주관적으로 봐도 도무지 싸울 상태가 아니었다. 목 아래로 몸이 사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가면 갈수록 온 몸에 뻗친 감각들이 무뎌졌다.
승하는 왼팔로 류 현의 허리께를 붙잡아, 그의 팔은 제 어깨 위로 걸게 한 뒤에 쑥 칼을 앞으로 내밀었다.
푸욱! [캬르륵! 끄르륵...]
틈이라고 생각한 건지 달려들던 구엘 뒤 굴락이 목을 관통당해 피거품을 내뿜었다. 그녀는 칼을 비틀어 뽑아 목을 끊어놓았다.
회색빛 오러를 받기 전과는 너무 다른 모습이었다.
류 현은 가물가물해지는 시야 속에서 아무런 손상도 없는 칼날을 보았다.
‘격이 맞춰졌다는 게 이런 거였군.’
“련아! 화련! 빨리 와 봐!”
기다렸다는 듯이 화련이 날아왔다. 류 현은 정신을 붙잡으려고 했지만 화련에게 넘겨지자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