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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5화 〉탐식마(貪食魔) (275/429)



〈 275화 〉탐식마(貪食魔)

 현은  닫힌 어둠을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둘러보았다.
‘딱히 방심한 건 아니었는데...잡힐 줄이야.’

위기감을 느끼는 건 아니었다. 회색빛 오러는 여전히 활활 타올랐고, 검은 기운도 조금 줄어들긴 했어도 잘 움직였다.
이것들을 가지고도 한 번에 떨쳐내지 못한다는 사실이 어처구니없을 뿐.


그걸로 모자라서 살덩어리가 슬금슬금 조여들어오는 모습은 고개를 내젓게 만들기 충분했다.

‘난이도가 너무 양심 없이 널뛰네. 덕분에 생전 처음 버프 기술 얻긴 했지만...솔직히 운빨이 팔 할 이상이지.’


정말로 운이 좋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버프가 아니라, 세 번째로 등장한 네임드 몹에 다 찢겨 죽었거나 자신만 몸을 빼냈을 테니까.
그것도 아니면 엘더 리치 때처럼 ‘강림’에 몸을 맡기고 반 시체 상태로 끝을 보거나.

‘놈들이 이성을 되찾았다는 거에 너무 매몰됐었어. 이거저거 숨기면서 상대할 놈들도, 내가 그럴 수 있는 능력도 없는데.’
‘에잉...무슨 궁상이야. 반성은 끝나고 하자. 일단...’


 현은 혈옥에 갇히자마자 살아난 것처럼 난동을 부리고 있는 가슴에 박힌 놈의 살점을 집어삼키고자 했다. 나중은 몰라도 당장은 검은 기운을 다루는데 확신이 선 상태였다.

‘음? 뭐야 이거 아직도 연결이 안 끊어졌...어?’
‘크으윽...!’

갑자기 기억들이,  현이 봤을 수가 없는 낯선 풍경들과 핏물의 끈적끈적함, 배에 칼이 박힌 채로 중세 기사 같은 이들을 찢어 죽이는 기억들이 비집고 들어왔다.
 채로 기절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정도로 끔찍한 고통! 정신을 놓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엘더 리치, ‘펠릭스’ 그 두 괴물을 집어삼켰을 때와 비슷했다. 이런 자잘한 기억들도 없었고, 지금과는 고통도 비할 바가 아니었지만.

‘염병! 전생에서는 이런  없었는데.’

육체적인 고통은 없었지만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아직 그런 적은 없지만, 기억이 뒤섞일 수도 있으니 스쳐지나가는 장면들을 최대한 기억하고자 했다.
만약의 사태가 벌어졌을 때 피해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


‘제국...? 십자기사단? 젠장, 그 가설이 진짜였네 이놈들 진짜 외계...끄으윽...’

영겁 같던 고통의 시간도 그 끝이 다가왔다.  현은 머리를 부여잡고 휘청거렸다.

‘푸우우...매번   나면 몸이 거덜 나는 것보다 정신이 먼저 거덜 나겠군.’
‘그렇다고 능력을 안 쓸 수도 없고.’
‘그래도 소득이 없진 않으니,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류 현은 혈옥의 벽에 손을 대었다. 벽 내부에 들러붙어있는 살덩어리들이 부글부글 들끓으며  현을 역으로 집어삼키려 들었지만, 검은 기운에 노출되자 까맣게 타들어갔다.
막혀 있던 시야가 천천히 트였다.


‘상상도 못 했다. 짐,  거리던 놈이 정신체...응?’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바람이었다. 수챗구멍으로 물이 빠지는 것처럼 한 점을 향해서 빨려나가고 있는 듯한!
주변을 살필 것도 없이  현은 수챗구멍 역할을 하고 있는 게 무엇인지 볼 수 있었다.


요새가, 밖에서 보았을 때 물리법칙이 뭐냐고 조롱하는 것처럼 있을 수 없는 형태로 당당하게 서있던 요새에, 밖이 보일 정도로 커다란 금이 났다.
 현은 거의 홀린 것처럼 천천히 기운을 갈무리 하고 있는 여자와,  앞에서 허물어지고 있는 구엘  굴락을 찾아내었다.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류 현은 사태를 파악했다.

‘진짜 미친 재능이라니까. 모자란 힘 채워주자 마자 저렇게...’

분명히 마력량이나 담고 있는 기세를 보면 평소와 다를 것이 없는데,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보고만 있어도 몸서리 쳐지게 만드는 저 상태만 봐도 달리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어떻게 눈치 챈 것인지 승하가 슬쩍 곁눈질로 뒤를 돌아보더니 히죽 미소 지었다. 동료가 웃는 걸 보고 느낄만한 감정은 아니었지만, 등허리가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마스터! 몸은, 몸은 괜찮아요?”
“이, 일단 이것부터...”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드는 두 여자 때문에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희란이 거의 밀어 넣을 기세로 들이미는 포션을 받아 마신 후 입을 뗄  있었다.

“저 멀쩡하고, 아직 전투 중입니다. 포지션 유지하셔야죠. 패턴 C로 돌릴 겁니다. 뒤로 빠져서 웨인 씨랑 합류하세요. 그리고 제가 신호하시면 청뢰를 쏴주시면 됩니다.”
‘한  남겨두겠다고 고집부리다가 이 사단이 났으니...화도  내겠군.’

등을 떠밀다시피 하고 나서야  여자를 후방으로 물릴  있었다. 류 현은 소리 없이 한 숨을 삼키며 승하에게로 다가갔다.


그녀는 일어서려고 바동거리는 구엘 뒤 굴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놈은 재생조차  수 없는지,  밖에 남지 않는 몸으로 헛힘 쓰는 중이었다.

“이거 어떻게 하지? 목 날려도 다시  갈아탈 거 아냐? 지금 상태 보면 못 갈아타는 거 같기도 한데. 목 치면 다시 원하는 대로 갈아타는  아냐?”
“방법 찾았습니다. 일단 이놈 목부터 날리죠.”
“그래?”

스칵! 텅! 가볍게 휘두른 검에 목이 떨어져나갔다. 류 현은 회색빛 오러에 휩싸인 것 외에는 평소와 별 차이가 없는 승하를 훑어보았다.

‘기세나 마력이 움직이는  평소랑 똑같은데...’


그것들을 배제하고 느낌만 생각하면 온 몸에 칼날을 세우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래서, 이제 뭐 어떻게 해? 스페어 거덜 날 때까지 잡아 죽여?”
“예, 그리고 저 제단도 부숴야 합니다.”

놈이 정신체이니 정신체가 깃들 육신과 정신체를 붙들고 있을 오브젝트를 부숴야 한다는 설명을 류 현은 한 문장으로 축약했다.
정확하게는 기억의 파도 속에서 이해한 부분이 딱  정도였다.


‘왕의 권능이니 통합된 의지니 뭐니...반의반도 이해 못 했으니...’

“그래?  지금 같은 상태면 별 상관없지. 시험해 보고 싶은 것도 있고.”

우웅! 텔레포트 마법진이 사방에 떠올랐다. 틀에 찍어낸 것처럼 똑같이 생긴 구엘 뒤 굴락들이 나타났지만 승하와 류 현은 무심한 눈으로 놈들의 머리 위만 살폈다.

“엥, 이름이 안 뜨는데? 튄 거 아냐?”
“제단을 두고 튀지는 못할...음?”


그 때, 놈들의 흐리멍덩한 눈에 불꽃이 튀는 것처럼 적의가 서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머리통 위에 글자도 떠올랐다.
라가로드 구엘 뒤 굴락.
눈을 벌겋게  놈들이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척 봐도 백은 훌쩍 넘기는 숫자. 놈들은 하나 같이 붉은 오러를 제 몸 위로 피어올리고 있었다.
그것을 봤는지 뒤편에서 화련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현은 애써 못 들은 채 했다.


“이젠 진짜 하다하다...저걸 뭐라고 해야 해? 분열? 분신술? 본체가 쓰던  다 쓰네.”
“어차피 다 잡아야 하는 건 똑같습니다. 저렇게 동시에 여러 몸을 움직이면 놈도 포기해야 하는  많고요.”
“뭔가 말하는 게 되게 확신하는 것 같다.”
“놈의 머리통에 들어갔다 나왔거든요.”
“...뭔 소리야?”
“그런 게 있습니다. 일단 이놈부터 잡고 얘기하죠. 제가 눕히면 승하 씨가 끝내는 걸로.”
“혼자서도  것 같은데?”
“안 됩니다. 놈이 1/n이 된 게 아니라서 아까처럼 힘을 집중해서 덩치를 확 불릴 수도 있거든요.”
“뭐가 뭔지 모르겠네. 좋아, 그럼 앞장서시죠. 대장.”


 현은 픽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눈에 불을 켜고 몰려드는 놈들을   훑어보고는,


화르르! 회색빛 오러의 기세를 있는 힘껏 돋웠다.
그리고,


‘...이렇게 하면 되나?’

 현은 검은 기운을 다섯 갈래로 나누고, 쭉 늘어뜨려 갈퀴처럼 만들었다. 본 드래곤을 무처럼 썰어버렸던 그 때처럼. 일단 길은 터 놓고 시작할 생각이었다.
있는 힘껏 휘두르려는 순간,


푸쉭! “...어?”

피부 위를 힘차게 돌던 검은 기운이 거짓말처럼 흩어져버렸다.
거기에 당황스러움을 표현하기도 전에,


“야, 야. 류 현,   왜 이래?”
“자, 잠깐만 부탁드립니다.”

다리가 풀려버렸다. 승하에게 반쯤 안긴 채로 류 현은 염두를 굴렸다.

‘뭐야, 마력은 아직 한참 남았는데?’

마력이 바닥나기 전에 이런 식으로 반강제로 끊긴 적은 없었다.
정신 줄을 놔버린 경우는 어떨지 알 수 없으나, 매번 마력통이 텅 빈 상태로 깨어나는 것만 봐도 거의 그에 준하는 상태까진 간 게 분명했다.
제 의지로 중단한 것도 아닌데, 기력이나 마력이나 남아도는 상황에서 ‘강림’이 풀려버린 건 처음 있는 일.

‘거기다가 이 두통은 또 뭐야...끄응...’
“너 이 회색 때문에 무리하고 있는  아냐?”
“그건 아무런 부담이 없는데 끄응...머리가...조금만 더...”
“야, 야. 안 되겠다. 너 뒤로  빠져있어. 이 불꽃같은 거 유지되는 동안은 나 혼자서도 될 것 같으니까 몸  추슬러. 꺼지면 나도 바로 빠질 테니까.”


혼자는 안 된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아래로 꺼졌다.
객관적으로, 주관적으로 봐도 도무지 싸울 상태가 아니었다. 목 아래로 몸이 사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가면 갈수록 온 몸에 뻗친 감각들이 무뎌졌다.


승하는 왼팔로 류 현의 허리께를 붙잡아, 그의 팔은 제 어깨 위로 걸게 한 뒤에  칼을 앞으로 내밀었다.

푸욱! [캬르륵! 끄르륵...]

틈이라고 생각한 건지 달려들던 구엘  굴락이 목을 관통당해 피거품을 내뿜었다. 그녀는 칼을 비틀어 뽑아 목을 끊어놓았다.
회색빛 오러를 받기 전과는 너무 다른 모습이었다.
류 현은 가물가물해지는 시야 속에서 아무런 손상도 없는 칼날을 보았다.
‘격이 맞춰졌다는 게 이런 거였군.’


“련아! 화련! 빨리 와 봐!”


기다렸다는 듯이 화련이 날아왔다.  현은 정신을 붙잡으려고 했지만 화련에게 넘겨지자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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