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4화 〉탐식마(貪食魔)
뻐억! 렉킹 볼 같은 커다란 주먹과 성인 남자의 주먹이 일으킨 충돌은 전혀 생각지 못한 결과로 이어졌다. 커다란 쪽이 움푹 들어가며 먼저 나가떨어진 것이다.
꾸웅! “흐음...”
류 현은 나가떨어진 구엘 뒤 굴락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제 주먹을 내려다봤다.
주변부에는 회색빛 오러가, 피부 위로는 검은 기운이 회전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류 현은 제 팔에서 소모되고 있는 마력의 흐름에 집중했다.
‘단순히 효율이 좋은 정도가 아니라 마력 소모가 거의 없는 것 같은데?’
회색빛 오러는 불타는 듯한 비쥬얼과 달리 별다른 마력소모를 요구하지 않았다. 검은 기운이 마력통에 구멍을 뚫고 쭉쭉 빨아내는 느낌이라면, 회색빛 오러는 오히려 기운을 북돋워주는 느낌이었다.
소모를 동반한 순간적인 도핑 같은 게 아니라, 외부에서 기운이 공급되는 그런 느낌.
‘저놈 대체 정체가 뭐야?’
이 능력의 원본인 구엘 뒤 굴락을 보고 그런 생각이 들 정도.
두 눈이 시뻘게 진 놈의 모습으로 봐선 알아내는 것은 요원해 보였지만 말이다.
[네놈이 어찌...! 있을 수 없는 일이야!]
화르르! 붉은 오러가 하늘까지 닿을 것처럼 치솟았다. 방금 전까지 유지하고 있었던 여유로운 태도와 맞바꾼 거친 기세 그대로 놈이 들이쳐 왔다.
시작은 놈의 기척이 희미해지는 것이었다. 류 현이 뒤로 훌쩍 뛰자, 입을 맞춰놓은 것처럼 놈의 손아귀가 밀고 들어왔다. 정말 간발의 차이로 닿지 않은 것까지는 그의 예상대로였다.
‘이건 어떻게 하는 건지 감도 안 오네. 포기해야겠다.’
[노옴!]
그 때 구엘 뒤 굴락의 노호성이 터져 나오더니,
슈슉! 빨리감기 라도 한 것처럼 놈이 정지자세에서 재가속했다. 지면을 스칠 정도로 낮게 휘둘러진 어퍼컷이 가드 위를 두들겼다.
뻐억! 류 현은 날려가면서도 구엘 뒤 굴락의 몸뚱이를 살폈다. 10년 가까이 쌓아온 전투 경험으로 인한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기세가 확 깎여나갔다. 거의...반?’
놈이 바로 추가타를 넣기 위해서 뛰어오지 못하는 것만 봐도 잘 못 본 것은 아니었다. 회복속도가 어마어마하긴 했지만, 그 회복속도에도 불구하고 바로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소모가 어마어마한 게 분명했다.
‘아까부터 바로 끝장 못낸 게 이유가 있었군.’
류 현은 날려가던 기세를 억지로 죽이지 않고 네댓 바퀴 구른 후에 자연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쿵!쿵!쿵! 뒤늦게 놈이 달려오는 꼴을 보니 더욱 확신이 들었다. 붉은 오러의 강맹한 기세는 그대로였지만 놈의 움직임이 부자연스럽기 그지없었다. ‘데미지가 저렇게 쌓였는데 몸을 안 갈아탄다 이거지?’
꾸웅! 콰과꽝! 양손을 서로 맞잡은 놈이 망치질을 하듯이 류 현의 발 바로 앞의 땅을 내려쳤다. 붉은 오러가 땅을 헤집으며 그를 덮쳐왔다.
“흥.” 화르르! 강맹한 기세가 무색하게 붉은 오러의 파도는 회색빛 오러의 벽에 가로막혀 그에게 닿기는커녕, 가세한 검은 기운에 파 먹히기만 했다.
류 현도 가만히 있진 않았다. 슬쩍 내뻗은 손을 따라 검은 기운이 창처럼 뻗쳤다.
그리 빠르지 않은 속도였지만, 붉은 오러가 파 먹히는 광경에 넋이 나간 놈에게는 충분히 치명적인 속도였다.
퍼걱! [끄아아악!]
왼쪽 눈을 관통당한 구엘 뒤 굴락은 그대로 뒤로 굴러 거리를 벌리더니, 검은 기운을 뽑아내려다가 왼팔마저 파 먹히는 진퇴양난에 빠졌다.
잠깐 멈칫하던 구엘 뒤 굴락은 제 왼팔을 끊어버리더니, 창을 그대로 움켜쥐고 있는 왼팔을 오른손으로 잡아끌어 창을 뽑아내었다. 놈이 내지르는 비명에 공터가 쩌렁쩌렁 울렸다.
‘...미친 저걸 견디네.’
공격자인 류 현마저 아연해질 정도였다.
잔존한 검은 기운이 퍼져나가던 왼쪽 눈가마저 뜯어낸 놈은, 원독어린 한 쪽 눈으로 류 현을 노려봐왔다.
‘저 지경이 됐는데도 안 갈아탄다는 건...진체인지 뭔지가 갈아타는데 걸린다는 건가?’
‘생각보다 쉽게 풀리겠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류 현은 차분하게 놈의 동태를 차분하게 분석했다.
그래서 놈이 손가락을 튕겼을 때 덮쳐오는 기척에 곧바로 대응할 수 있었다.
뻐억! 퍼거걱! 슬쩍 뒤로 내민 주먹에 두개골이 깨져나가는 감각이 걸렸다.
뒤를 돌아보자 커지기 전의 구엘 뒤 굴락의 몸뚱이가 머리가 깨진 채로 뒹굴고 있었다. 그 뒤를 이어 수풀을 헤치고 놈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서른...쉰...대체 스페어를 몇 개나 준비해 둔 거야? 이새끼 증식이라도 하는 건가?’
머리 위의 글자와 흐리멍덩한 눈깔, 붉은 오러라는 차이점이 없었다면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따악! 화르륵! 진짜 구엘 뒤 굴락이 다시금 손가락을 튕기자, 모든 구엘 뒤 굴락의 몸뚱이에서 붉은 오러가 치솟았다.
류 현이 놈들의 차이를 찾으려고 훑었지만, 기력의 차이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이건 말이 안 돼. 업화의 아이들도 한 몸 안에서 분열 됐어도 차이가 있었는데...’
[짐이 너무 쉽게 생각했어. 몰락한 신격의 소유더라도 사도는 사도. 그만한 것을 삼키려면 짐 또한 모든 걸 걸어야겠지.]
[그렇더라도 왕의 권능을 깨우치는 게 아니라 흡수할 줄이야. 이 이상 여유 부리는 건 만용이겠지.]
따악! 그 소리와 함께 류 현을 향한 수십 쌍의 눈동자에, 초점 없이 흐리멍덩한 눈들에 생기가 어렸다. 이글거리는 적의가.
[캬아아악!][크아아아!]
공세는 아무런 전조도 없이 시작되었다.
붉은 오러를 두르고, 맹렬한 적의까지 탑재한 놈들이 몸을 사리지 않고 밀고 들어왔다.
슈륵! 서걱! 퍼걱! 류 현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검은 기운이 낭창거리며 놈들을 토막 내고, 씹어 삼켰다.
그가 장난치듯이 뻗은 주먹에 심장이 터져나가며 하나가 절명했고, 슬쩍 허공을 툭 차니 회색빛 오러에 둘의 몸뚱이가 꿰였다. 회색빛 오러는 둘의 몸뚱이에 어린 붉은 오러까지 모두 집어삼켰다.
[끼아아아악!][끄르륵!]
죽어나자빠지는 속도가 충원되는 속도를 상회했지만 놈들은 그런 것은 상관없다는 듯이 목숨을 도외시하고 달려 들어왔다.
류 현의 근처에서 죽어나자빠지는 게 지상과제라도 되는 양.
‘이 새끼 설마 내빼려고 이런...?’
약간의 여유가 생긴 류 현이 구엘 뒤 굴락을 돌아봤을 때, 놈이 입가를 찢으며 미소 지었다.
그리고,
콰직! 놈은 손아귀가 찢길 정도로 있는 힘껏 주먹을 거머쥐었다.
뿌북! 슈르륵! 슈왁! 류 현은 갑자기 사방이 어두워지는 것을 느끼곤 아직 덜 막힌 뒤를 돌아보았다.
류 현이 박살내거나 토막 낸 구엘 뒤 굴락의 몸뚱이들이 녹아내린 핏물들이 벽을 세우는 것처럼 일어나고 있었다.
그는 있는 힘껏 회색빛 오러와 검은 기운을 일으켜 떨쳐내고자 했지만,
텁! 핏물의 장벽은 기운이 뻗친 곳이 조금 불룩해졌다가 다시 원형을 되찾았다.
[크흐흐...역시 권능을 깨우친 지 얼마 되지 않았었나 보군.]
구엘 뒤 굴락은 제 몸을 내려다보곤 다시금 웃음을 흘렸다. 시야의 반이 날아갔고, 왼팔이 뜯겨져나간 환부로 끊임없이 기력이 빠져나갔다. 내부에 쌓인 데미지는 그것을 다 합친 것보다 더 컸다.
[재생도 듣질 않는 걸 보니 권능이 하나가 아니었군. 생텀도 없는 곳에서 어떻게 두 신격을 섬기게 됐는지는 모르나, 짐에게는 다시없을 기연이로구나. 이 정도의 힘을 삼킬 수 있다면 준비한 제물을 다 쏟아 부어도 남는 장사이지.]
구엘 뒤 굴락은 천천히 제 혈육으로 만들어진 구체를 향해서 손을 뻗었다.
아직도 저항의 기색이 느껴졌지만 뚫고 나오지 못할 거라는 확신이 담긴 몸짓이었다. 만약을 대비해서 남은 시체들도 핏물로 만들어서 구체의 주변을 감쌌다.
그 순간,
꽈앙! 스칵! 옆구리가 터질 것 같은 압력이 몸뚱이를 후려치더니, 그것이 가시기도 전에 불로 지지는 듯한 통증이 오른쪽 팔꿈치를 꿰뚫었다.
터엉! 밀려나던 몸을 멈추기가 무섭게, 오른팔이 떨어져나갔다. 전방을 노려보는 구엘 뒤 굴락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차림새는 반라 상태지만 혈색만큼은 전투 전보다 좋아진 승하가 혈옥(血玉)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녀의 피부 위로 회색빛 오러가 불탔다. 그녀의 뒤를 이어 화련과 희란이 달려와 혈옥을 살폈다.
[짐에게서 왕의 권능을 흡수하자마자 하사하였다고? 그런 게 가능할 리가...]
그녀들은 류 현처럼 대화를 나눌 생각은 요만큼도 없었다. 구엘 뒤 굴락은 다음 순간 그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꾸웅! 보이지 않는 모루가 머리와 어깨 위로 떨어진 듯한 압력이 덮쳐들었다.
그것을 떨쳐내려고 고개를 들었을 때, 놈이 본 것은 머리통을 쪼갤 기세로 내려쳐지는 검날이었다.
퍼걱! 찌직! 뿌득! “쯧-”
구사일생으로 머리통이 쪼개지진 않았으나, 놈은 왼쪽 허벅지를 내주어야만 했다. 한 칼에 끊어지진 않았으나 결과는 비슷했다. 뼈가 끊기자, 근육과 살가죽으로는 하중을 버티지 못했다.
쿵! 거대한 몸뚱이가 뒤로 벌렁 넘어갔다. 승하가 그 틈을 향해 비호처럼 달려들었다.
[쯧...]
슈르륵! 파앙! 놈도 가만히 목을 내밀진 않았다. 류 현을 집어삼킨 혈옥 주변에 고인 핏물들이 살아있는 것 마냥 휙 날아, 승하의 등 뒤를 후려쳤다.
임무를 완수한 핏물은 놈의 끊어진 팔다리로 몰려들어, 팔다리를 대신했다.
승하는 그런 놈을 노려보며 제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진정하자. 진정. 류 현이 탈출할 때까진 물고 늘어져야 해. 나승하, 정신 좀 차리자. 정신 줄 놓고 지랄발광 말고.’
류 현을 집어삼킨 혈옥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심상찮았지만, 승하는 류 현이 탈출 못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자신을 감싸고 있는 회색빛 오러가 그녀에게 커다란 안정감을 주었다. 끊임없이 솟아나는 활력만으로도 안정감을 주기엔 충분했지만, 그 이상의 뭔가가 있었다.
이 기운의 주인이 쓰러질 리가 없다고, 더 나아가서 기대어도 된다고 그리 속삭이는 듯 했다.
“쓰읍...후...”
승하는 가로막는 것은 모두 밀어버릴 기세로 밀고 들어오는 구엘 뒤 굴락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봤다.
전투 도중 집중력을 잃은 듯한 모습이었으나, 사실은 정반대였다. 극한의 집중 상태에 들어간 그녀는 더 이상 눈으로 놈을 주시할 필요가 없었다.
솜털 하나하나가 마력의 흐름을 읽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놈이 몰고 오고 있는 바람의 흐름도, 붉은 오러의 다음 궤적도 훤히 보이는 듯 했다.
시간마저 그녀의 감각 속에서 일그러진 듯 했다. 모든 것이 느리게, 너무 느리게 흘렀다.
승하는 천천히 검을 올려 베었다.
슥- 쩌억! 닫힌 요새의 하늘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