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73화 〉탐식마(貪食魔) (273/429)



〈 273화 〉탐식마(貪食魔)

‘갑갑해...’

수은으로 이루어진 바다에 던져진 기분이었다. 가슴이 찌그러질 것처럼 옥죄여왔고, 팔다리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숨 쉬는 것조차 힘이 들어 할딱거리는 소리만 나왔다.
눈도 제대로 보이지 않아, 눈꺼풀을 들어 올리려는 시도는 옛저녁에 포기했다.

마력을 동원해서  상황을 타개해보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되지 않았다. 가슴께에 박힌 것들 때문인지 통로가  막힌 것처럼 심장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막혀서 옴짝달싹 못하는 걸로 모자라서 갉아 먹히는 중이었다.

“...현! 대답...! 정신...마!”


익숙한 목소리가 윙윙거렸지만 귀까지 막힌 것인지 도무지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류 현은 목소리에 신경 끄고 제 가슴께에서 틀어박힌 것에 집중했다.
자신을 뜯어먹고 있는 구엘 뒤 굴락의 살점들을.

‘끄으윽...’

그러자 전, 현생을 통틀어도 느껴본 적 없는 생경한 통증이 머리를 후벼 팠다. 정신을 놔서 편해질 수도 없었다. 계속해서 커져가는 통증에 속수무책으로 유린당하는  외에는 아무 것도  수가 없었다.
안쪽에서부터  존재를 뜯어 먹히는 경험은 그도 처음이었으니까.


그렇다고 아예 손을 놓지도 않았다. 고통 속에서 그는 전에 없을 정도로 간절함을 담아 마력을 움직이려고 했다.
재 존재를 뜯어 먹히고 있다는 인식은 없지만 생명체로서의 본능이 그를 닦달했다.
실패할 때마다 가슴이 찢겨나가는 통증이 그를 덮쳤으나 그는 계속해서 반복했다.

움직일 곳이 막힌 마력이 좌충우돌하자 이미 나있던 내상이 커지고 핏물이 울컥 치솟았다. 턱을 벌려서 핏물을 내보낼 힘조차 없었지만 류 현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 그의 노력에 응한 건 좀 더 깊은 곳에서 솟아나온 검은 것이었다.

‘어...?’

숨통이 트였다. 팔다리를 묶었던 압력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가슴의 통증은 남았지만 짓누르는 압력 또한 사라졌다. 여전히 마음대로 움직일 수는 없었지만 압력이 사라진 것만으로도 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직 시야가 제 몸만 보일 정도로 짧고, 그마저도 흐릿했지만 조금이나마 자유를 찾은 류 현은 거의 반사적으로 제 가슴께를 내려다봤다.
물에 검은 물감을 푼 것처럼 일렁거리고 있는 검은 것이 시야가 흐릿한 와중에도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강림’이잖아...’

정확히는 ‘강림’시 류 현이 끌어내 쓰던 검은 안개 이상의 탐욕이 담긴 무언가.
단순히 농도를 올려 제 고유 성질을 띠게 된 마력이라고 하기에는 기괴했고, 검은 안개의 응용이라고 하기에는 질적으로 차원이 달랐다.
닿는 순간 모든  집어삼키는 초월적인 무언가.  현은 대충 그렇게 결론 내려놓은 상태였다.

전생과 다르게 현생에서야 미칠 것 같은 갈증과 ‘강림’ 후 충동에 휩싸이진 않았지만, 기억이 사라진 건 아니라 류 현은 더 파고드는 것을 피하고 있었다.
애초에 자신의 의도대로 휘둘러지는 힘도 아니었고.

그랬는데,


‘뭐야, 이렇게 쉽게 되는 거였어?’

 힘이 제 의지대로 휘어졌다가 퍼졌다가, 아주 자유자재로 형태가 변했다.


그 뿐만 아니라,

후욱! ‘커윽...’

몸 안에 들이자 류 현을 옮아 매던 구속을 깨부수더니 내부 장기에 차곡차곡 내상을 넓혀가던 마력까지 집어삼켰다.

순식간에 회복한  현은 제 몸을 둘러볼 여유를 되찾았다. 그의 감각에 평소와 다른 두 가지 기운이 느껴졌다.

하나는 ‘강림’의 검은 기운이었고,


‘크기도 하다. 진짜 ‘강림’ 아끼다가 골로 갈 뻔했군.’


나머지 하나는 구엘 뒤 굴락이 제 마력과 밀어 넣은 살점들이었다. 심장을 포위하는 것처럼 박혀있는 살점들을, 안으로 들어온 검은 기운이 천천히 갉아내고 있는 중이었다.


방금 전까지 류 현이라는 존재를 뜯어먹던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무력한 저항만 간간히 보여줄 뿐.  때마다 조금 따끔거리는 통증이 일긴 했다.

‘아까 손에 잡혔을 때 밀어 넣은 거겠지? 진짜 내가 미쳤지. 그런 괴물 상대로 무슨 여유를 부린 건지...’

가슴에 박힌 살점을 향해 손을 뻗던 류 현이 멈칫했다. ‘...이거  파내도 되나?’
이런 상태는 류 현도 처음 겪는 일이었다. ‘강림’의 힘이 너무 유순하게 움직여서 이 상태에서 변화를 주는  겁이 날 지경이었다.
검은 기운이 견제하고 있는 걸 모두 제거하면 남아도는 기운이 미쳐 날뛰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한 조각만. 한 조각만 남겨두자.’

 현의 걱정을 비웃는 것처럼 검은 기운은 그의 인도에 따라 착실하게 살점들을 먹어치웠다.
그제야 부옇던 시야가 확 트였다.

승하의 등.
박살난  같은 왼팔을 뒤로 숨기고, 거적 떼기가 되어버린 차림새로 자신의 앞을 가로막아 서고 있는 그녀가 보였다.
류 현은 자신이 정신 줄 놓기 직전 상황을 떠올렸다. 정신  놓은 자신을 지킨다고 이 꼴이 된 게 분명했다.

‘그렇군.’


이상하게도 놈에게 화가 나기보다는 짜증이 치밀었다. 자신에게.

밀고 들어오는 놈의 손바닥을 보고  현은 슬쩍 손을 마주 내밀었다. 검은 기운이 뛰쳐나가며 그 대신 마중을 나갔다.

후르르! 퍼억! 촤확! 놈의 팔이 팔꿈치까지 터져나갔다.
승하가 돌아봤다. 눈 주변이 찢기고 부어올라서 제대로 보이나 싶을 정도였지만,  현은  속에 담긴 희열과도 같은 감정을 읽어낼 수 있었다.

“류...현?”
“예, 승하 씨.”

검은 기운을 갈무리한 류 현은 대꾸하며 그녀를 안아들었다. 슬쩍 봐도 더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어떻게...? 한낱 잊힌 신격의 집행자가 어찌 이런...]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후욱! 씨잉! 류 현의 눈이 검은빛을 내뿜었다. 그의 몸 위로 진득하게 비어져 나온 검은 기운이 빠르게 휘돌기 시작했다. 엘더 리치 전 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모든 것이 그의 통제 하에 있다는 것!
 현은 땅을 박찼다.


뻐억! 파각! 구엘 뒤 굴락이 본 것은  장면이었다. 류 현이 땅을 박차는 장면, 그리고 제 턱을 부순 류 현이  머리통 위로 떠오른 장면!


“기분 좃같으니까, 그만 나불대.”

 현의 발이 내리꽂혔다.

쿠앙! 뒤로 넘어갈 것처럼 젖혀졌던 구엘 뒤 굴락의 머리통이 턱밑으로  박혔다. 류 현이 뒤이어 사뿐히 착지했다.
물론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집행자가 아니었는가?! 생텀도 존재하지 않는 곳에 집행자가 어찌 존재하는가 싶었는데, 그대가 사도였구나!]

붉은 오러가 폭발하듯이 치솟으며 놈이 벌떡 일어났다. 턱과 정수리가 빠개진 상처가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르게 아물어갔다.
오히려 더 기세가 오른 것 같아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현은 혀를 찼다.

‘범용성이 딸리는 것만 빼면 데스나이트의 데스 오러...그 이상이야.’


쿵쿵 뛰어오던 놈의 존재감이 갑자기 흐릿해졌다.
뻐엉! 순간 이동한 것처럼 놈의 주먹이 갑자기 밀고 들어왔다. 한 발 빠르게, 뒤로 튕기듯 뛴 류 현은 거의 한끝 차이로 놈의 주먹을 피해낼 수 있었다. 당연히 그도 그냥 피하지만은 않았다.

류 현은 뒤로 뛰면서 놀고 있는 손을 앞으로 내뻗더니, 허공을 있는 힘껏 움켜쥐었다.
후욱! 그의 몸 주변을 휘돌던 검은 기운이 뭉클뭉클 일어나서 짐승의 대가리를 이루었다. 한껏 벌려진 턱은,

콰직! 구엘 뒤 굴락의 붉은 오러와 오른쪽 어깨를 사정없이 뜯어내었다.
구엘 뒤 굴락이 처음으로 비명 같은 괴성을 내질렀다.
[---!]

‘딜레이가 좀 있네.’

기운을 거둬들인  현은 대가리를 쳐 박고 신음하는 놈을 내버려두고 공터 뒤편으로 내닫았다.
거의  죽어가는 얼굴로 바동거리던 화련과 닭똥 같은 눈물을 떨구며 붙들던 희란은 류 현의 등장에 입을 벌렸지만 아무런 말도 내지 못했다.
방금 전만 해도 승하와 류 현이 같이 살해당할  분명했는데, 가장 중상이었던 류 현이 벌떡 일어나서 놈을 눕혀버린 것이다. 가야한다, 안 된 다로 실랑이를 벌이던 그녀들은 상황을 따라가기에도 버거웠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들 앞에 어느새 정신을 잃은 승하를 내려놓은 류 현은 제 가슴에 손을 얹고 눈을 감았다. 심장 주변부에 박힌 살점 조각 중 하나가 느껴졌다.  현은 그 상태로 방금 집어삼킨 붉은 오러를 떠올렸다.
그의 뇌리에 수많은 정보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단 하나도 제대로 이해할  없었지만, 류 현은 그것들을 팔다리처럼 다룰 수 있다는 사실에만 집중했다.

‘음...이렇게 인가? 아님...’

화르르! 그의 몸에서 회색빛 불꽃이 솟구쳤다.
검은 연기보다는 강맹하며, 지금 몸주변을 흐르는 검은 기운보다는  이질적인 회색 오러.

“그냥 신체 능력 상승에 기척 숨기는 게  인 줄 알았는데...”


그 회색 오러에 휩싸인 왼손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현은 쭈구려 앉더니,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승하에게 손을 내뻗었다.

“잠깐만요 마스...”


화련이 재지하기도 전에 류 현의 손이 승하에게 닿았다.
화르르! 회색빛 오러는 불이 옮겨 붙는 것처럼 승하의 몸으로 옮겨갔다. 화련이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이냐고 묻기 위해서 류 현을 쳐다봤지만, 그는 승하를 살피느라 바빴다.

가장 빠른 반응을 보인 건 얼굴 쪽이었다. 눈가에 자잘한 찢어진 상처와 부은 부분들이 가라앉더니 하얗게 질린 혈색이 돌아왔다. 왼팔에서는 뿌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확실히 효과 좋네.”

호흡까지 안정되는 것을 확인한 그는 손을 탁탁 털고는 뒤돌아서 두 여자에게 다가섰다.
화련과 희란은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항하시면 내상 도집니다. 평소에 마력 넘겨받으실 때처럼 편안히 계시면 됩니다.”

류 현은 화련의 어깨를 슬쩍 잡아 그녀에게도 회색 오러를 옮겨주었다. 화련은 만신창이 몸으로 어떻게 그런 힘이 났는지 몸을 홱 비틀어서 잡힌 어깨를 빼내었다.

“히끅!”


뜨거웠다.
저도 모르게 괴상한 소리를 낼 정도로 뜨거웠다. 내상들이 아무는 감각을 보면 나쁜 것은 아닌데, 불이라도 삼킨 것처럼 몸이 달았다. 고통스러운 거면 모르겠는데, 그게 아니었다.
상처가 아물면서 느껴지는 간질간질함과 뜨거움 뒤에 포근하게 감싸는 듯한 감각이 덮쳐들었다.
내상이 내상이었던 만큼 다 아물진 않았지만, 이 기묘한 충족감 때문인지 전투 돌입전보다 컨디션이 좋은 것 같았다.
아니, 당장 싸우고 싶은 기분이었다.

‘뭐, 뭐야. 내가 어떻게  건가?’


옆을 돌아보니  오러를 옮겨 받은 희란도 비슷한 상태인 모양이었다. 이리저리 몸을 뒤트는 게 심하면 심했지 덜하진 않은 모양.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현은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공터 쪽으로 다시 몸을 돌렸다.

“그냥 쉬셨으면 합니다만...”
“누구 애타서 죽는 꼴 보려고 그래요?”
“예, 그러실 리가 없죠. 그래도 상처가 아물자마자 움직이면 다시 터질 수도 있으니, 승하 씨가 정신 차리시면 같이 가세해주세요.”
“잠깐만요. 마스터, 다시 혼자서는 안...”


류 현은 아무  않고 웃기만 했다.  모습에 화련은 말문이 막혔다. 하고 싶은 말이라면 하루 온종일 쏟아낼 만큼 있음에도,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뭐야? 내가 왜 이러지?’

분명히 그냥 웃고만 있는데 왠지 항거할 수 없는 거대한 뭔가와 마주한 기분이었다.
화련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류 현이 뛰쳐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화련은 생각했다.


‘대체 뭐야? 죽었다가 살아나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소리는 들어봤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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