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68화 〉탐식마(貪食魔) (268/429)



〈 268화 〉탐식마(貪食魔)

“여기 카이로 맞긴 맞아? 무슨 아마존 같은데.”
“땅을 밀어내고 새 땅이 솟아나는 판국에 나무랑 풀 뙈기 좀 자라는 건 이상한 것도 아니잖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도 봤을 거 아냐. 이 요새가 얼마나 큰지. 이게 두세 달 만에 뚝딱 쌓아올릴 규모야? 거기다가 저 돌탑들 봐라. 비바람에 닳은 거  보여?”
“아까 리치 숫자 봤잖아. 기세만 보면 5성 이하는 있지도 않더만. 리치가  짓는 속도 생각하면 졸라 갈아 넣었으면 안 될 것도 없지. 돌탑은...나도 모르겠다. 던전이나 원래 현실에 있던 돌탑이라도 뜯어온 건가?”
“그러고 보니 뼈다귀 새끼들이 왜 그 오우거를 따르는 거지?”
“낸들 알겠냐. 우리 대단한 대장님이면 모를까.”
“젠장, 그냥 따라와 달라더니 진짜 사정 설명하나 없네.”
“그 덕에 아직 살아있긴 하잖냐. 오우거한테 저당 잡힌 신세긴 하지만.”
“...아까 그냥 싸웠어야 했어.”
“그리고 너랑 나는 시체도  남기고?”
“에이씨,  진짜 이럴래?”

‘생각보다 반발은 적군.’


뒤따라오는 본진의 궁시렁거림은  현의 귀를 피하지 못했다. 내용으로 봐선 그다지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지만. 숫자가 숫자다 보니 걸러듣는 것도 일이었다.
 현 또한 그다지 큰 의미를 부여하며 귀를 기울이진 않았다. 무리를 이탈해서 난리를 치지 않는 것만 해도 감사해야할 지경이니까.
아무리 용빼는 재주가 있어도 이 많은 인원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는 없는 노릇. 목숨이 걸린 일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식생은...나도 처음 보는   많은  같고. 돌탑들은 닳아빠진 모양새를 보면 아예 자기 땅에서 가지고 온 것 같은데...저거 가지고 나오는데 마력이 보통 들어간  아닐 텐데 대체 왜 들고 나온 거지? 감시탑처럼 마력의 유동이 느껴지지도 않는데...’

“류 현.”


주변을 살피며 상념에 잠겨들던 그를 승하의 목소리가 붙들어 매었다. 돌아보자 승하가 목소리를 죽인 채 말을 쏟아내었다.


“어쩔거야. 이대로 계속 따라갈 거야?”
“다른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류 현은 눈짓으로 괴수의 존재감이 느껴지는 곳을 가리켰다. 요새 밖에서 보았던 것들보다는 숫자는 적었지만, 원정대를 싸먹기에는 부족함이 없어보였다.

“그렇다고 이대로 계속 간다고 수가 생기는 것도 아니잖아.”
“...그건 그렇죠.”

애초에 이리저리 재보고 내린 결정이 아니었으니 대책이 없는 것도 당연했다. 수락하지 않았으면 그 자리에서 원정대가 결딴났을 테니 수락한 것이니.
더욱이 현생에서 맞닥뜨린 네임드 몹들은 하나같이 류 현의 경험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는 상황 아닌가?


‘맞닥뜨리자마자 눈 까뒤집고 달려드는 놈이 하나도 없었으니...젠장, 이 상황을 어떻게...?’

인간을 보자마자 눈을 까뒤집고 덤벼들어야 할 놈들이  나름대로 재보고, 치고 빠지고,  현의 약점인 세아를 물고 늘어지는 등 골머리를 앓게 만드는데, 그것에 적응해 볼만한 시간도 없었다.
거기다가 현재는 한 명이 아니라, 만에 달하는 인원을 커버해야하는 상황.

‘...어차피 다 살려서 보낼 수도 없어. 그냥 지금   감고 저거 목 비틀고 붙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안내대로 갔다가 1할도 못 살려 보낼 수도 있어.’

선도하고 있는 붉은 오우거의 뒤통수를 보고 있으니 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거의 다 왔으니 그렇게 안달할 필요 없다.]
“......”

마음이라도 읽었는지 말없이 걷던 오우거가 돌아봤다. 류 현은 티를 내지 않기 위해서 얼굴에 힘을 주었다.

오우거의 말이 진짜였는지, 10미터 앞도 분간이 안 갈 정도로 수목이 뒤엉킨 구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저건  대체...뭐가 저렇게 높아?’


서서히 열리는 길 끝에는 성벽처럼  장소를 둘러싸고 있는 거목들의 벽이 보였다. 그 중심에 있는 회색빛 돌로 쌓아올려진 제단 또한.
뒤따르던 이들도 그것을 보았는지, 웅성거림이 커졌다.


‘제일 위에 있는 건...단인가? 제단?’

 현의 머릿속이 뒤엉키든 말든 선도하는 붉은 오우거는 계속해서 걸었다. 5분여쯤  걷자 거목들의 벽 앞에 도달할 수 있었다.

[도착했다.]


툭 내뱉은 오우거는 멈추지 않고 그대로 터벅터벅 걸어가더니 이내 수풀너머로 사라졌다.

“이건  무슨...”
“뭐야?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젠장, 설명을 좀 하라고!  입은 장식이냐!”

오우거가 내뱉은 말을 모두가 들었는지, 모습이 사라지자마자 원정대 전체가 술렁거렸다. 몇몇은 무기를 빼들고 소리쳤고, 몇몇은 대놓고 퇴로를 살피는 행동을 보였다.
승하가 그들이 흩뿌리는 적의에 미간을 찌푸리며 칼을 빼들고, 류 현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아 뜯어말리려 할 때였다.

[왕에 대한 기본적인 경의도 없는 무도한 놈들이로군.]

귀가 아니라 머릿속에 울리는 ‘말’이 그들을 잡아끌었다. 그들의 시선을 제단 뒤의, 엄청나게 높은 계단 끝에 자리한 권좌에 앉은 존재. 라가로드 구엘 뒤 굴락에게로 말이다.

“라가...로드라고?”
“네임드 몹...”
“저게 왜 라가로드야! 그럼 우리가 잡아온 라가로드는...”
“염병 진짜 더럽게 걸렸네...”

권좌 위에 늘어져 있어 정확한 신장은  수 없지만  봐도 2미터는 넘어보였다. 근육으로 꽉 짜인 몸뚱이에는 수많은 사선을 넘나든 흔적으로 가득했고,  위로도 사정이 그리 다르진 않았다.
왕이라기보다도 투사에 가까운 모습.
구엘 뒤 굴락은 유리알 같은 눈을 굴려 원정대를 슥 훑어보았다. 시선을 받은 이들이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몸을 뒤로 빼었다.

[역시 벌레는 벌레. 직접 봐도 변하는 건 없군.]
[보면 볼수록 이해가  가는구나. 저런 벌레들이 무슨 가치가 있다고 그리 마음을 쓰는 것인지.]
“뭐? 벌레?”


대놓고 누군가를 지칭하진 않았으나, 내려다보는 시선만으로도 누구를 지칭하는지 알기에는 충분했다.
누군가 발끈해서 되묻기는 했으나, 구엘 뒤 굴락의 시선이 향하자 내딛었던 발을 뒤로 물려야만 했다.
어떤 적의도, 마력적인 작용도 없었지만 구엘 뒤 굴락의 시선에는 무어라 설명하기 힘든 힘이 있었다.
항거할 수 없는 위압감이.

[그에 비해서 그대는 짐을 실망시키지 않는군. 놀라워. 그랜드 마스터급 정도인 줄 알았거늘.]


구엘  굴락이 권좌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 이상한 세계에서 이런 식으로 견문을 넓히게 될 줄이야. 수작을 부린 마법사에게 감사인사라도 하고 싶은 기분이로군.]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전혀 모르겠는데.”
[어려울 것 없는 얘기다. 짐이 그대에게 더 큰 흥미를 갖게 되었다는 얘기일 뿐이니. 그대의 살점의 맛이 궁금해질 정도로 말이다.]
“끄르르륵!”
“커어억...!”

구엘 뒤 굴락이 천천히 권좌에서 내려오자 원정대 본대에서 소란이 일었다.
목을 부여잡고 호흡곤란을 호소하는 자, 심장마비라도  것처럼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지는 자, 눈을 까뒤집고 거품을 무는 자.


“염병!”

칼을 빼든 승하가 욕지거리와 함께 발을 쿵 굴렸다. 발끝에서 터져 나온 파장이 스쳐지나가자 바람 빠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더 볼 것도 없어.  현, 당장 왕창 죽어나가는 게 아까워도 어차피 저놈 못 잡으면 다 죽는다고.”


승하는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였다. 어느  본대에서 튀어나온 화련과 희란, 백혜라가 그녀의 뒤에 서 있었다.


‘본대 쪽에 웨인만 두는  좀 그렇지만...별  없지. 빠르게 잡는 게 피해를 줄이는 길이야.’


 현이 고개를 끄덕이려던 찰나였다.


[벌레들이 신경 쓰여서야. 그대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겠지.]


따악! 손가락을 튕기는 것이 신호였는지, 사방에서 마법진이 빛을 뿜었다.
구엘 뒤 굴락이 아닌, 요새 내부에 존재하던 수많은 라가 주술사와 리치들이 숨죽이고 숨어있던  그만두고 허공을 향해서 마력을 내쏟았다.


“어어?”
“씨발 이거 뭐야?”
“젠장! 안 깨져!”
“마법사들 뭐하는 거야! 씨발 어떻게 좀 해보라고!”
“염병, 말이면 다하지!”

투명한 막이 생겨나 일시에 만을 넘기는 원정대원들 하나하나를 감싸더니 두둥실 떠오르기 시작했다.
막을 깨겠다고 마력검을 불러일으켜서 찌르거나, 불꽃을 내쏘는 이들이 있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카아앙!   명만이 막을 깨는데 성공했을 뿐이었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도를 움켜쥔 웨인 크로이츠는 속수무책으로 허공으로 떠오르는 이들을 한  훑어보고는 류 현에게로 달려갔다.

“하나하나 깨는 건 답이 안 나옵니다.”

웨인의 단언에 류 현은 곧바로 미련을 버렸다.

‘어차피 꺼내도 싸움에 끼울 수는 없으니 그대로 두는 게 나을 수도 있어.’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고 있는 구엘 뒤 굴락을 주시하던 그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용종도 아닌 놈이 이런 피어를 내뿜을 줄이야.’

구엘 뒤 굴락이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고 있음에도 다가올 때마다 피부 위로 정전기가 튀는 듯 했다. 상위 용종 괴수에게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농도 짙은 피어.
수적 우세를 누릴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이정도 피어라면 원정대가 방해될 지경이었다. 구엘 뒤 굴락이 포효할 때마다 심장마비로 죽어나자빠지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없다.
그 증거로 지룡의 피어나 본 드래곤과도 싸워 본 희란마저 손끝이 가늘게 떨고 있었다.


‘좀 거리를 벌리게 해야 하나. 웨인한테 맡기고  떨어지게 해야겠군.’

이러나저러나 희란이 이 팀의 화력의 중추였다. 정신을 잃지 않는 한, 어지간해서는 ‘연결’을 놓지 않고 유지할 정도로 단련이 되었다지만  현은 도박하는 취미는 없었다.
류 현은 속삭이듯이 말했다.


“웨인 씨, 희란 씨를 부탁합니다. 전장을 주시할  있는 한계거리에서 최대한 자주 움직여주세요. 절대, 희란 씨를 혼자 두고 돌격하시면 안 됩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웨인은 곧바로 희란에게 다가가 팔을 쓱 들이밀었다. 희란은 눈을 질끈 감더니 그에게 몸을 내맡겼다. 웨인은 가볍게 발을 굴러 뒤로  빠져나갔다.

“화련 씨는 평소처럼 승하 씨를 보조하는 데 주력해주시면 됩니다. 저놈 사이즈가 작아서 저지하는데 신경 쓰시는 것보다는 기동성 확보에 신경 쓰시는  훨씬 나을 겁니다. 저번 자폭병들 기억하시죠? 절대로 10미터 내로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알겠어요.”


류 현이 지시를 내리는 동안 구엘 뒤 굴락은 어느새 지면에 발을 디뎠다. 구엘 뒤 굴락은 지시를 내리느라 바쁜 류 현을 보며 입가를 찢으며 웃었다.


[부디 짐을 실망시키지 말아다오. 그대의 살점이 짐이 취하기에 충분한 것이라는 걸 보여주었으면 좋겠구나.]


그 이상 대화는 필요 없었다. 류 현은 날듯이 땅을 박차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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