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7화 〉탐식마(貪食魔)
찰나라고 하기에도 짧은 시간 동안 류 현의 머릿속을 수많은 말들이 헤집고 지나갔다. 류 현은 그 중 제 심정을 가장 적절하게 대변할 수 있는 말을 내뱉었다.
“말할 줄 아는 붉은 오우거한테 초대받은 기억 같은 건 없는데.”
당황한 기색은커녕 뚱한 대꾸에 화련이 어이없다는 기색을 내비치며 류 현을 빤히 쳐다봤다. ‘혹시 이런 일도 겪었어요? 아직 말 안 한 과거일 중에서?’
눈만 마주쳐도 그런 글자가 읽힐 것 같은 빤한 시선이었지만 류 현은 돌아보지 않았다.
뭐가 그리 웃긴지 철판 긁는 소리를 내며 웃는 오우거를 노려볼 뿐.
[캬하하..그래, 그 때는 인간의 목을 빌리긴 했었지. 아마, 이렇게 들렸을 것 같은데.]
그르렁거리던 목소리가 철판을 뒤트는 듯한 소리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건 류 현이 이미 한 차례 들어본 목소리였다. 목소리의 특이성을 제쳐두고, 그 상황의 특수성이 그 목소리를 그의 뇌리에 박아두었다.
“잭 서튼...”
[그래,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기도 하군.]
네임드 몹의 말을 전하다가 최초로 죽어버린 남자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대체 무슨 조화인지는 몰라도, 붉은 살덩이에 파묻힌 오우거는 죽어버린 잭 서튼이 마지막으로 내뱉었던 목소리를 그대로 내었다. 라가로드의 전언을 전하고 죽은 그 남자의 목소리를.
류 현에게는 넘치도록 충분한 추측거리였다.
“...라가로드로군.”
[짐의 초대에 늦은 것 치고는 눈치가 무디진 않군. ]
“짐...?”
[짐? 그리 들리는가? 이 마법을 건 마법사의 역량부족 때문인가.]
오우거가 다시금 철판 긁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어느 새 바짝 붙은 화련이 옷깃을 당겨왔지만 류 현은 손으로 제지하고는 계속했다.
“날 찾은 목적이 뭐지?”
[말하지 않았느냐. 초대라고. 짐이 이곳으로 떨어지고 나서 본 인간들 중에서는 네가 가장 왕에 가까워 보이니.]
“왕?”
[아, 이 곳의 인간들이 왕을 섬기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섬기지 않는다고 해서 왕의 자질을 가진 자가 사라지는 건 아니니 말이다.]
그리 말하곤 오우거는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류 현은 그것이 미소 짓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화련의 생각은 좀 다른 모양이었다.
화련은 이제 근력이 아니라 마력까지 동원해서 그를 잡아끌었다. 류 현은 여전히 돌아보지 않은 채 그녀를 향해서 손을 내저었다. 화련이 무어라 웅얼거리긴 했지만 류 현은 무시했다.
[헌데...이리 가까이서 보니 내 눈이 틀렸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군. 왕의 자질이 아니라, 네가 왕이었군.]
“왕 같은 거 된 기억 없을뿐더러...너 같은 괴물한테 그런 소리 들어도 기분만 더러운데.”
쩌엉! 오우거가 류 현의 말에 반응하기도 전에 거센 마력의 파도가 오우거를 집어삼켰다.
흙먼지가 가라앉기도 전에 오우거가 벌떡 일어섰으나, 상태가 빈말로도 좋진 못했다.
검격을 받아낸 양팔은 붙어있는 게 신기할 정도로 깊게 패였고, 그리 막았는데도 가슴이 뭉개져서 핏물이 주르륵 쏟아지고 있었다.
충격이 감당이 안 되는 지 오우거가 죽은 피피를 토하며 땅을 짚었다.
“와, 나름 힘 좀 쓴 건데 버티네. 미친 거 아냐?”
오우거가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자마자 검격을 날린 승하는 자신이 더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류 현의 옆에 내려섰다.
“저거 대체 뭐길래 대화를 나누고 있었어?”
“라가로드의 아바타 비슷한 거 같습니다. 승하 씨 검격에도 버티는 거 보면 꽤 힘을 많이 주입한 모양이군요.”
“...이제 더 놀랄 기운도 없다. 진짜 별의 별 짓을 다하네. 그래서 더 얘기할 거 있어?”
“먼저 질러놓고 그런 걸 물어보셔도...”
[그랜드 마스터 수준에 달한 자가 또 있을 줄이야.]
피를 다 토한 오우거가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덜렁거리던 양팔이 천천히 아무는 것이 보였다.
검격에 담긴 마력을 생각하면 충격적인 일이었다. 오우거가 중얼거린 말은 신경 쓸 겨를이 없을 정도로.
그 모습을 본 승하가 질겁했다.
“와, 미친. 재생하는 거 봐.”
[이해할 수가 없군. 전체적인 수준이 그토록 떨어지는데 그랜드 마스터가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서로 할 말만 내뱉는 괴수와 여자 사이에 끼인 류 현은 바쁘게 머리를 굴렸다. 별 의미는 없었지만.
‘그랜드 마스터?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젠장 알아먹을 수 있는 말이 없네.’
[이치에 맞지 않아. 마나를 제대로 이해도 하지 못한 연약해 빠진 인간들이 대륙을 재패하고, 이해라곤 하나도 없이 이능력을 다루다니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야.]
[그러면서도 그랜드 마스터에 달한 존재가 둘. 아니, 제 기예로 달한 자는 하나인가.]
훑어보는 오우거의 시선에 승하가 움찔하며 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방금 전의 장면이 잊히지 않아 쉽사리 검을 휘두르진 못했다.
[별 수 없군. 직접 뜯어보는 수밖에.]
그리 말하며 입을 크게 찢어 불온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오우거의 구강구조상 당연한 일이었지만, 류 현은 좋지 않은 느낌을 받았다.
[그대, 짐의 초대를 받아들일 생각이 있는가?]
“저 요새로?”
[그렇다.]
“거절하겠다면?”
[그렇다면 별 수 없지.]
붉은 오우거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손가락을 튕겼다.
“뭣...?”
그러자 눈앞의 꽉 채운 요새 외에는 아무것도 없던 벌판에 시뻘건 불빛이 솟아올랐다.
게이트 마법진. 마법적인 소양은 전무하다시피 했지만, 류 현은 단박에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열린 출구로 쏟아져 나오는 존재감 때문에!
순식간에 벌판이 시뻘건 덩어리들로 가득 찼다.
검붉은 육괴가 머리 전체를 뒤덮고 있는 자폭병, 눈앞의 오우거 보다는 빨간 부분이 적지만 반신이 육괴에 뒤덮인 오우거.
최소 6성은 되어 보이는 리치, 그 밑에서 라가들을 잔뜩 태운 채 으르렁거리고 있는 지룡.
못해도 천을 헤아리는 괴수들이 정면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류 현은 계속해서 좌우, 후방에서 내뿜어지는 게이트 마법의 마력에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반사적으로 돌아보니, 정찰대를 기다리고 있던 본진이 술렁거리는 모습이 눈에 그대로 들어왔다.
“마스터. 본진을 불러야겠어요. 방금 전에 게이트가 못해도 삼천 곳은...아니, 물러나는 게...”
“물러나는 건 힘듭니다. 본진을 불러주십시오.”
화련은 류 현의 지시에 저항하려고 했으나, 눈앞의 붉은 오우거를 노려보는 그의 모습에 입안에 고인 말을 내뱉지 못했다. 그녀는 그대로 뒤로 몸을 날렸다.
“이게 뭐하는 짓이지?”
기대 없이 내뱉은 말이었다. 괴수와 의사소통이 된다는 초유의 사태와 포위되었다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류 현은 말 대신 주먹부터 날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최대한 많이 살려서 집으로 돌려보내야할 인간들이 본진이 수두룩했으니까.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야 했다. 저 괴수들이 다 달려들면 제 아무리 류 현이라도 반의반도 못 건질 게 뻔했지만, 그저 한 명이라도 생환자를 더 늘려야만 했다.
그래서 빌어먹을 괴수에게,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괴수에게 말을 걸 상황이 아님에도 말을 걸었다.
그리고 류 현의 예상과는 다르게 대꾸가 돌아왔다.
[그대가 초대를 거절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별 수 없이 초대에 응하도록 만드는 수밖에. 그동안 지켜본 바에 따르면 그대는 저기 저 숫자만 많은 벌레들을 꽤 신경 쓰는 것 같더군. 그대 옆의 그랜드 마스터 하나보다 못한 놈들인데 말이지.]
“뭐?”
[그대가 내 초대에 응한다면 저 벌레들은 내버려두겠다는 의미다.]
류 현은 저도 모르게 옆에 서있던 승하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눈빛으로 물었다. ‘제가 잘 못 들은 겁니까?’
승하가 곧바로 대꾸했다. ‘나도 모르겠으니까. 묻지 마!’
당황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전생, 현생을 통틀어서 처음 겪는 일.
괴수와 대화를 하는 것도 대화를 나누고 있는 지금도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원한과는 상관없이 일단 주먹부터 날리고 봤을 것이다. 꿈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차원에서.
그런데 초대에 응하라고 협박하는 괴수라니?
불행히도 오래 고민할 여유는 없었다. 화련이 지시를 전했는지, 본진이 빠르게 거리를 좁혀오고 있긴 했지만 그보다 더 빠르게 4면에서 괴수군단이 조여들어왔으니까.
이제 와서 본진을 멈출 수도 없었다.
멈추거나 말거나 선두의 지룡이 난동을 부리는 순간 류 현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학살을 막을 수 없을 테니까.
붉은 오우거는 고민하는 류 현의 행태가 재밌다는 양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괴수군단을 살피던 류 현이 입을 떼었다.
“초대에 응하도록 하지.”
붉은 오우거가 입가를 찢으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