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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6화 〉탐식마(貪食魔) (266/429)



〈 266화 〉탐식마(貪食魔)

“어떻게든 버티고 있을게요. 어떻게든.”

별로 미덥지 못한 대사라고 생각했지만 류 현은 믿는다는 눈빛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자폭병 백 마리만 밀고 들어와도 성 버리고 도망가야겠지만.’

그것과 별개로 그의 머리는 냉혹한 현실을 계산을 끝낸 상태였다.


플레이어 기백명과 병사 이천으로는 도무지 버티는 게 불가능할 것이다. 성벽을 전부 커버할 수 있는 규모도 아니고, 자폭병을 상대할  있는 전력은 더더욱 아니다.


애초에 주변 정리도  되었는데 상대에 비하면  줌도 안 될 병력으로 농성을 한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였다.


아프리카가 여러 가지 의미의 신천지로 변하고, 데스 나이트가 유럽 전역을 강제 할로윈으로 만들지만 않았어도.
이런 상황만 아니었다면 류 현은 체니 얼리엇이 뭐라고 하든, 반병신으로 만들어서라도 끌고 갔을 것이다.
원정대원들이 어디 보통 전력이던가? 모두가 세계구급은 아니어도, 해당 지역에서는 먹어주는 이들이다. 조국으로 돌아가면 vip대접은 받고도 남는 이들.
현 아프리카 상황이 류 현이 생각하기에도 비상식적이라 거의 업혀가는 상태지만, 내버릴 생각은 요만큼도 없었다.
오히려 어떻게 최대한 전력보존을 해서 돌려보낼까 하는 고민에 매일 골치를 썩을 정도였다.

그래서 체니 얼리엇이 끈질기게 달라붙으면서 잔류를 요청했을 때 손을 쓸까하고 진지하게 고민도 했었다.
중요한 플레이어 전력이 개죽음 당하는 것 보다야  달 요양하고 전선에 복귀할  있는  훨씬 남는 장사니까.
그 후 자신에게 겨눠질 원한은 차치하고서라도 말이다.


하지만 승하에게도 말한 것처럼 붙잡힌 인간노예들이 너무 많았다. 아주 현실성이  느껴질 정도로  숫자도 아니고, 대충 불의의 사고로 넘기기에는 넘치는 숫자.
사람들에게 불안과 절망을 전염시키기에 충분한 숫자.

‘손해라는  뻔히 알면서 손해 봐야하는 상황이라니.  원...’

그 부분을 감안해도 내키지 않는 건 변함이 없었다. 어젯밤 승하에게 어울리지도 않게 심정을 털어놓은  자체가 그 증거였다.

그건 자기변명이자, 자신을 납득하기 위한 되뇌임 같은 행동이었다.


‘솔직히 이건 천천히 자살하는 거나 별 다를 게 없어. 자폭병들이 밀고 들어왔을 때 바로 죽는 게 아니면 이건 죽기 전까지 고통스럽기까지  테지. 그 전에 우리가 라가로드인지 뭔지 머리통을 날려버리고 돌아와도 이만한 인원을 안고 다시 항구까지 가는 건...’

“..불가능하지.”
“네?”
“아뇨, 아닙니다. 여기 분들을 잘 부탁드립니다. 얼리엇 씨.”
“제가 원해서 자청한 일인 걸요. 행운을 빌겠습니다.”


성의 관리자로 임시 직위를 받은 체니 얼리엇과 악수를 나눈 류 현은 그대로 등을 돌려 성 밖으로 빠져나왔다.
이동을 준비하고 있는 원정대로 인해 성 밖은 거의 시장 바닥을 방불케 하는 상태였다.


류 현은 자신을 찾아와서 징징거리는 팀장들이 없다는 걸 확인 한 후, 자신이 빠져나온 성을 올려다봤다.


“그렇게  내키시면 지금이라도 무르는 게 어때요?”
“화련 씨.”

화련은 제 몸뚱이보다 커다란 짐을 옆에 띄운 채 다가왔다. 그의 옆에선 화련이 성벽을 올려다보며 계속 말했다.


“저 사람들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덜 끔찍하게 죽냐 문제잖아요.”
“행운이 따른다면 우리가 돌아올 때까지 버틸 수도 있지요. 구엘 뒤락인지 뭔지가 여태 한 짓들을 보면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고요. 우리가 본대인 걸 눈치 채지 못할 리도 없고요.”
“......”
“...왜 그러시는 지?”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빤히 바라보던 화련은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저었다. 그를 한두 해   아니니 무슨 생각을 품고 저런 소리를 하는 건지  것 같았다.


‘다 죽어도 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보여주기 식으로라도 병력을 남겨서 목적은 이미 달성했으니까.’

성을 함락시킨 날 자고 있는데 불쑥 찾아온 승하에게 들었었다.
평소면 일이 터지고 나서 따지면 ‘너희도 아는 줄 알았지.’ 식으로 대꾸했을 승하가 묻지도 않았는데 찾아와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숨길 길이 없는 음울함을 풀풀 풍기면서 말이다.
그가 어떤 생각으로 이런 말도 안 되는 행동에 동의했는지.

그리고 화련은 거기서 조금 더 나아갔다.

‘마스터의 머릿속에선 남은 인구수가 시뮬레이션 게임 인구수처럼 취급되고 있겠지.’

 현이 회귀를 고백한 이후 그녀는 끊임없이 기록하고, 생각했다.
류 현이 쏟아내는 전생의 이야기를.
그 사이사이에  인간이라서 어찌할  없는 그가 느낀 감정들 또한.

‘그 이상 취급하기에는 실망을 너무 많이 느꼈을 테니까.’

인류에 대해 그가 느낀 실망감들을.

인류의 본성에 좌절마저 느꼈으면서 살기 위해서 그들을 살려야 하는 남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인가?
류 현의 회귀 고백 이후 그녀가 끊임없이 자신에게 던져온 화두였다.

그리고 그녀가 지금 류 현의 머릿속 생각을 유추하면서도 안쓰러운 시선을 보내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런 속사정을  리가 없는  현은 주변을 살피며 입을 떼었다.

“대충 준비가 다   같군요. 화련 씨, 준비  되신 것 같은데 희란 씨를 좀 봐주실 수 있겠습니까? 요즘 컨디션이 많이 안 좋아 보이셔서요.”
“짐은 같이 다 싸놨고, 옆에 혜라가 붙어있으니까 걱정 안하셔도 되요. 저도   거고요. 마스터 짐 받고 나서요.”
“저야 ‘가방’에 전부...”
“에이, 그건 아니죠. 전투도 혼자 다 감당하시면서. 무기랑 보존식 빼고 다 주세요. 다른 길드 인간들 하는 소리 듣고 제가 얼마나 민망했는지 알아요? 세상에, 솔선수범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원정대 대장이 잉여병력도 넘치는  자기 짐  지고 다니면 어떻게 해요?”
“아니 뭐, 솔선수범 그런 거라기보다는 버릇이 돼서...마력소모도 그렇게 부담되지도 않고요.”
“마스터?”

화련의 닦달에  현은 결국 통짜 현철의  같은 전리품과 침낭 등을 내놓아야만 했다.
제 몸집보다 더  짐 덩어리를 두 개나 띄운 화련은 뭐가 기분 좋은지 옅은 미소와 함께 떠나갔다.


“...이해가  간다니까.”

혼잣말을 중얼거린 류 현도 얼마가지 않아서 자리를 떴다.


원정대가 목표로 하는 변화의 중심인 카이로까지 거리가 얼마나 남았는지  수 없고, 성을 함락시키느라 2일을 소모했으니 서둘러야했다.


***

류 현은 자신의 감을 꽤 신뢰하는 편이지만 맹신하는  아니었다.

하지만  현은 지금 이 광경을 앞에 두고 자신의 감을 부정할 생각이 도무지 들지 않았다.

“아니 뭔...괴수놈들은 물리 법칙 엿 먹이는 게 취미래요?”

억눌린 신음처럼 새어나온 화련의 말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싶은 것이었다.  충동을 억누르며 류 현은 시야를 꽉 채운 구조물을 눈으로 훑었다.

대지에 단단히 뿌리를 박고 하늘 끝까지 뻗을 것 같은 붉은 색 탑은 아파트 3층 높이에서 부채꼴로 쫙 퍼져나갔다. 대지에 뿌리박고 있는 부분이 탑이 아니라 젓가락처럼 보일 정도로 넓게.
대충 보면 지면과 닿은 부분이 눈에 안 들어와서 공중에 뜬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뭐 저렇게 커?’

얹힌 부분은 어림잡아  두 채는 들어가고도 남음 직했고, 그마저도 끝이 아닌지 최상단부분에 공사를 진행하고 있는 흔적이 역력했다.

무너지지 않은  이상할 정도로 몸체 부분이 비대한 팽이형태의 구조물.

이것이 시야에 들어오자마자 류 현이 한 생각은 ‘카이로다.’였다.
[카이로에 어서 오십시오.]라는 표지판 따위 없었지만 류 현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거 구엘 뒤 굴락의 요새겠지? 젠장, 이놈들 대체  이래? 어느 놈은 유전만 골라서 불을 싸지르질 않나, 또 어느 놈은  짓고 노예 굴리는 걸로도 모자라서...’


카이로가 아니라면, 진짜 ‘라가로드’라는 네임드 몹이 있는 곳이 아니라면 저런 정신 나간 구조물이 존재할 리가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카이로에 이변이 벌어졌을 때 보고 받았던 모습과는 영 딴판이었지만, 그 때만해도 갑자기 수령이 100년은 훌쩍 넘는 것 같은 나무들이 중심지에 자라나있었다고 했었으니 어떻게 변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요새 지은 걸 보니까. 마법계열인가? 씨발, 지중해 리치성처럼 그런 거면 피곤해지는데.’

저 괴악한 요새를 리치 성에 대입해서 생각하니 욕지기가 절로 끓어올랐다.
전에 함락시킨 검은 성의 항마력과 강도를 생각해보면 더 성을 짓는 데 성공한 전생의 엘더 리치보다 더 끔찍하면 끔찍했지 덜할 것 같진 않았다.

‘그런 거면 원정대는 여기 떼놓고 우리끼리 진입하는 게 훨씬 나은데...말을 들을 리가 없지. 네임드 몹 발끝도  봤는데 말을 들을 리가...’

“마스터.”
“?”

옷깃을 잡아당기는 손길에 돌아보니 화련이 성 아래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뭔가를 가리키고 있는 손가락은 천천히 이동 중이었는데, 따라서 안력을 돋우니 시뻘건 덩어리가 걷고 있는 것이 보였다.

‘오우거?’

아프리카 대륙에 발을 디딘 이후로 한 번도 보지 못한 괴수였다.
아프리카 대륙이  꼴이 되기 전, 어느 괴수보다 많은 사상자를 꾸준히 적립해온 아프리카 내에서는 사탄보다 더 유명한 악마 같은 괴수.


‘그 많던 오우거가 다 어디 갔나 했더니 잡아서 길들인 건가? 자폭병이랑 섞어서 돌격해오면 피곤해지겠는데.’

“화련  일단 처리를.”
“알겠어요.”


화련이 품에서 현철 대침을 꺼내 전방으로  날렸다. 대충대충 하는 듯한 행동과는 상반되게 대침의 기세는 무시무시했다.
오우거를 일격살까지는 아니어도, 치명상 정도는 입힐 수 있을 정도.

카앙! 그러니 쇳소리와 함께 대침이 튕겨져 나온  보고 화련이 얼빠진 소리를 낸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어?”

류 현은 안력을 더욱 끌어올렸고, 오우거의 몸뚱이가 그냥 붉기만 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 폭발하는 라가와 싸웠을 때 끄집어낸 육괴가 온 몸을 뒤덮고 있었다.


‘뭐야 그거 라가 말고도 다른 괴수한테도 적용되는 거였어?’

“화련 씨 일단 뒤로 물러나서 다른 분들을...”

류 현이 앞을 막아서며 정찰대를 그녀에게 맡기려고 입을 열었다.


퍼엉! 설렁설렁 걸어오던 오우거가 화련의 공격에 반응한 것인지 지면을 터뜨리며 멀리뛰기를 시작한 것이다. 지면과 거의 평행을 이룰 정도로 낮게 뛰어올라서 나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안력을 돋우어야 겨우 윤곽이나 보이던 거리가 순식간에 반으로 줄더니, 그보다 짧은 시간 안에 또 반으로 줄었다.
육체적 능력이 뛰어난 오우거 라도 있을  없는 가속.


“쯧.”

류 현은 일단 오우거를 잡은 후에 생각하기로 했다.
그의 의지에 따라 오른 주먹에 한껏 모인 마력이 파쇄권을 발하려던 찰나,

[생각보다 늦었구나. 인간.]

20보 가량을 앞두고 갑자기 멈춰선 오우거의 아가리에서 인간의 말이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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