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5화 〉탐식마(貪食魔)
가까이서 올려다본 검은 성벽의 존재감은 강렬했다. 이래도 네가 넘을 수 있겠나 하고 말하는 것 같은 존재감은 류 현으로 하여금 여러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어휴...”
속에 있는 말 대신 한 숨이 터져 나왔다.
정말 간만에 주변 시선을 신경 쓰지 않은 행동이기도 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원정대 총괄대장을 떠안은 이후로 자기 텐트 안에서도 언행을 조심해온 류 현이었다.
“그렇게 안 내키시면 그냥 자기들끼리 하라고 하는 게 낫지 않아요? 어제 보니까 굳이 마스터가 안 나서도 알아서 함락시킬 수 있을 거 같던데.”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피해를 감수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이래봐야 뒤돌아서면 싹 다 잊을 인간들인데 속도 좋으셔.”
“저 좋자고 하는 일인데요. 뭘.”
류 현은 입 꼬리만 슬쩍 끌어올리며 화련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화련은 고개를 내저었다.
“회귀 소설들은 다 엉터리라니까. 미래 꿀을 빨긴 개뿔.”
“그런 것도 보십니까? 좀 의왼데요.”
“진짜로 회귀한 마스터를 모시고 사는데 그런 거라도 봐야겠다 싶어서요.”
“그래서 좀 도움은 되셨습니까?”
“아뇨. 싸이코 아니면 중2병 환자 밖에 안 나오던데요.”
화련의 대꾸에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조용히 킥킥거리는 류 현을 올려다보던 화련은 황당하다는 듯이 말했다.
“이런 거 보면 아주 틀린 건 아닌 것 같기도 하고요.”
“음, 평가를 수정하려면 열심히 해야겠군요.”
“네네, 그러세요.”
건선으로 대꾸하며 화련이 손을 슥 내밀었다. 류 현은 거리낌 없이 손을 맞잡았다.
“그럼 가요.”
화련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두 사람의 몸이 천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류 현은 화련의 몸 주변에서 아지랑이처럼 꿈틀거리는 마력과 발밑에 생겨난 무색의 발판을 보았다.
‘볼 때마다 신기하단 말이야.’
염력도, 부유 마법도 아닌 화련만의 방식. 이번 생에서도 수차례 설명을 듣긴 했지만 여전히 신기하기만 했다.
“이제 곧 망루에요.”
위쪽에 시선을 고정시킨 상태로 어떻게 류 현이 정신 팔려 있는 걸 눈치 챘는지 화련이 치고 들어왔다.
어느새 두 사람의 시야에 성 벽 위의 망루가 가득 차 있었다. 망루 안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라가 주술사의 가면에 난 흠집이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
그러나 라가 주술사는 두 사람이 망루에 올라설 때까지 졸기만 하였다.
심지어,
“음, 저번에도 느낀 거지만 이 성벽 자체가 억제기 역할을 하는 것 같아요. 최대한 성벽에 안 걸치려고 했는데도 마력이 쭉쭉 빨리네요. 희란이랑 마스터 지원 없으면 그냥 정공법이 더 효율적일 정도로요.”
“외부 마력을 흡수하는 성질을 가진 것 같더군요. 전생에서는 엘더 리치도 이런 걸로 성을 짓지는 못했는데...”
“공격 무기로 확인 안한게 다행이죠. 아무래도 닥치는 대로 마력을 빨아들여서 무기로는 못 쓸 것 같지만요.”
“예, 아무래도 그래서 이렇게 성만 지은 것 같군요.”
두 사람이 코앞에서 한가하게 담소를 나누어도 반응이 없었다.
“그나저나 굉장하군요. 소리나 냄새차단은 물론이고 탐지결계 파장까지 실시간으로 흉내 내다니.”
류 현이 화련과 자신의 몸 주변을 감싼 오색빛막을 슥 둘러보며 말했다. 화련이 이번에 새로 개발한 굴절 가차원인지 뭔지라고 했었다.
‘전생의 화련 씨도 이런 건 못 했었는데.’
류 현을 슥 올려다보는 화련의 눈동자에는 주변에 둘러쳐진 공간같이 오색빛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화련이 불퉁거렸다.
“전생의 저랑 비교하는 눈빛 좀 거둬주시죠. 마스터. 너어무 황송해서 부담감에 마법이 풀려버릴 것 같으니까.”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찔린 류 현은 찔끔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거나 말거나 관심없다는 듯 화련은 제 할말을 늘어놓았다.
“최근에 구분되기 시작했는데 마스터가 전생 생각할 때는 얼굴에 엄청 티나요.”
“...예?”
류 현은 저도 모르게 제 얼굴을 짚었으나, 그런다고 뭔가를 알 수는 없었다.
“평소에는 절대로 안 보여주는 감정? 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게 보인다고요. 처음 몇 번은 긴가민가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마스터가 그런 얼굴 할 대상이 몇 없더라고요. 전생 얘기 중에서 애인 얘기는 빼버렸을 수도 있지만, 이번 생에서는 그 애인을 만난 것 같지도 않고. 세아 언니 일이면 다 때려 부수고 뛰어서라도 한국으로 돌아갔을 테고요.”
류 현이 생각해도 화련의 지적은 틀린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애인 같은 건 있지도 않았고, 친구라고 할 수 있는 이는 이번 생에서 아예 인연을 만드는 걸 피했으니 대상은 전생의 용잡이 팀원들 밖에 없었다.
자신이 그렇게 티내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지만 말이다.
“어...음...”
“이해는 하는 데 그런 시선 받는 입장에서는...에이씨, 이게 아닌데...”
제 머리를 마구 헤집던 화련은 한 숨과 함께 무어라 웅얼거렸다. 류 현의 귀에 들리지 않을 정도로 불분명하게.
“예?”
“...마음대로 해요. 마음대로.”
그 말과 함께 화련의 품에서 한 뼘 길이의 커다란 침이 열댓 개가 튀어나왔다.
아프리카 대륙에 와서 처음 발견한 순수 현철로 만든 창을 쪼갠 것으로, 하나같이 끝부분이 뻘겋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한계까지 밀어넣은 마력으로 말이다.
쉬익! 화련이 손을 옆으로 내젖는 것을 신호로 대침들이 쏜살이 되었다. 목표는 성벽 위에 퍼져있는 망루에 서있는 라가 주술사들이었다.
피익! 퍽! 바람 빠지는 소리가 일으킨 광경은 참혹했다.
이마에 500원짜리 동전만한 구멍이 뚫려 뇌수를 질질 흘리는 놈, 아예 뒤통수가 터져서 두부의 형태가 일그러진 놈, 목줄기가 뜯겨나간 놈 등 십 여 마리의 보초가 동시에 절명했다.
그리고,
피익! 퍽! 피잇!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는 성벽 위에 서 있던 모든 라가들의 숨이 끊어질 때까지 반복되었다.
“후우-”
숨을 내쉬자 나풀거리던 머리카락들이 내려앉았다. 화련은 대침들을 거둬들이며 류 현을 돌아보았다. 방금 전에 내뱉은 불평은 없던 일로 하자는 것처럼 무덤덤한 표정으로.
“이제 끌어 올려요?”
“...예. 부탁드립니다.”
“제 마력 쓰는 것도 아닌데 뭘 부탁까지야.”
화련은 대침을 품안에 집어넣고 양팔을 벌리더니 오케스트라 지휘자처럼 휘적거렸다. 그 움직임을 따라 마력의 파도가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화련의 눈동자에 하얀 빛이 어렸다.
“무슨 재미를 봤길래 이렇게 늦어?”
화련의 인도에 따라 성벽위로 올라온 승하가 궁시렁거리면서 다가왔다. 뒤이어 희란이, 백혜라가, 호지슨 버넷이 성벽 위에 올라섰다.
화련은 멈추지 않았다. 근 이천에 달하는 플레이어들이 모두 성벽위에 올라설 때까지.
***
“이게 잘한 짓인가 모르겠어. 난.”
뒤편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익숙해서 꿈에서도 들을 지경이었다.
류 현은 뒤돌아보지 않은 채 대꾸했다.
“어쩌겠습니까. 이만큼 사람이 모였고, 이만한 인원이 모였으면 효율만 추구할 수는 없는 거니까요. 차라리 이런 게 낫습니다.”
“대체 무슨 상황을 생각했길래 이게 낫다는 거야?”
“몸 사린다고 내빼는 상황까진 가정해봤죠. 대충 반절 정도.”
“...너도 제정신은 아닌 거 같아.”
“여기 있다는 것 자체가 제정신은 아니라는 증표나 다름없죠. 제정신이면 갑자기 솟아난 땅에, 그것도 전자기기가 먹통이 돼서 대대급 화기 정도 빼곤 던전 식으로 싸워야하는 데 클리어 조건도 모를 곳에 오겠습니까.”
“다들 미쳤으니 난 미친 게 아니라는 소리를 되게 꼬아서 하네.”
승하가 옆에 벌렁 드러누웠다. 류 현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그녀가 검은 봉투 같은 걸 들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류 현의 시선을 눈치 챈 승하가 봉투를 내밀었다.
“뭡니까?”
“선물.”
“...우리 아직 작전 중입니다. 승하 씨.”
“뭐 어때. 취하고 싶을 정도로 마시고 싶어도 마실 것도 없는데.”
승하는 그리 말하더니 봉투에서 맥주캔 하나를 꺼내 들이켰다. 류 현은 한 숨과 함께 봉투를 받아들었다.
한 모금 들이키나 꽉 막힌 속이 그래도 좀 풀리는 기분이었다.
“쟤들 자기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는 있을까?”
승하가 눈짓으로 가리킨 곳에는 석조 건물이 있었다. 창문을 통해서 삐져나온 집안의 그림자들이 안에서 약소한 파티가 벌어졌음을 보여주었다.
원래 이 성의 관리자였던 라가로드와 챔피언들의 거처였던 건물이었다.
오늘 낮만 해도 라가들에게 노예로 부려지던 ‘인간 노예’들이 원정대가 나눠준 술에 취해 ‘주인들’이 지내던 곳에 술을 흩뿌려대는 중이었다.
그렇게 하면 끔찍했던 기억이 씻겨 내려갈 것처럼.
“죽기 싫다고 내빼면서 다른 사람들까지 충동질하는 것 보다는 낫지요.”
“...너 이상한 생각하는 것 아니지?”
어느 새 몸을 일으킨 승하가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류 현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이틀 손해 봤지만, 손해라고 볼 수 없지 않습니까.”
“네 계산법이 이상한 거야, 아님 내가 심하게 멍청해서 모르는 거야?”
“‘대소환’을 견디려면 단순한 덧셈 뺄셈으로는 부족합니다.”
“...계속해봐.”
“민간인들이 생각보다 많이 갇혀있다고, 이 성이 튼튼하니 구호소로 삼자는 얼리엇 씨와 추종자들의 주장은 승하 씨의 계산 내에서는 비효율적이겠죠. 실제로도 비효율적이고요. 원정대 활동시간을 깎아먹을뿐더러, 저들이 우리가 돌아올 때까지 살아있을 거라는 보장도 없으니까요. 군인들이 남더라도 말입니다. 차라리 우리가 빠르게 카이로로 진입해서 네임드 몹을 때려잡는 게 생존 확률이 더 높을 겁니다.”
승하는 미간을 찌푸린 채 툭 내뱉었다.
“나라고 안 구하고 싶어서 그런 말을 한 건 아냐.”
“압니다. 왜 모르겠습니까. 민간인들 생존 확률을 재보고 그렇게 결정하신 것 알고 있습니다. 저도 그래서 처음에 민간인 노예들을 보고도 구출작전을 거부했던 거고요.”
하지만 류 현의 반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처음 발견한 이 검은 성을 화련과 함께 정탐하러 왔다가 천여 명의 인간 노예들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대충 얼버무리거나 숨기고 넘어가기에는 너무 많은 숫자였다.
그리고 그것이 류 현이 결국 이 성을 함락시키고 구호소로 쓰자는 의견에 굴한 이유였다.
인간 노예가 너무 많았다. 알려진다면 자신의 인격 논란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에게서 희망을 뺏어갈지도 모를 정도로.
“하지만 너무 숫자가 너무 많았습니다. 솔직히 톡 까놓고 말해서 아주 무시 못 할 건 없지요. 원정대 파견국가들도 이 천에 달하는 플레이어, 사 만에 조금 못 미치게 남은 베테랑 군인들과 몇 명이 살아남았는 지 알 길이 없는 민간인 노예를 저울질 하면 후자가 다 죽더라도 전자를 남기는 게 낫다고 생각할 테니까요. 더욱이 아프리카 대륙전체가 봉쇄된 상황이니, 무시했어도 다음에 이런 자리를 맡는 데는 별 문제가 안 됐을 겁니다.”
“그럼 왜 굳이 리스크를 떠안아?”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덧셈 뺄셈으로는 못 버틸 테니까요.”
류 현은 말을 멈췄다가 캔 맥주를 단숨에 털어 넣고는 말을 이었다.
“괴수를 죽이는 건 플레이어들이 하겠지만, 플레이어들만 싸워서는 가망이 없습니다. 그렇게 싸울 수도 없고요. 전 세계 플레이어들을 다 합쳐봐야 100만도 안 됩니다. 이번 사태에 아프리카 대륙의 플레이어가 못해도 60프로는 갈려나갔을 겁니다. 그럼 대충 7만 가량 죽었겠군요. 전 세계 인구가 80억에 플레이어 각성비율이 일 대 만 정도니 적게 잡아도 8,9프로가 죽었군요.”
류 현은 한탄하듯이 내뱉었다.
“플레이어 숫자가 너무 적어요. 아무리 대단한 아티펙트가 있다고 해도, ‘대소환’ 때문에 성장이 빨라져도 플레이어들만으로는 답이 안 나옵니다. 쓰레기 같은 소리인 줄은 압니다만, 소총탄 한 발이라도 쏘고 죽어줄, 저 유럽의 데스 나이트처럼 죽음으로 네임드 몹의 시간을 0.1초라도 뺏어줄 이들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싸우게 만들려면 희망이 필요하고요. 잡혀있는 민간인 노예들을 외면하면 늦든 빠르든 소문이 퍼질 거고, 그런 소문이 하나 둘 더해지면 우린 한 줌도 안 되는 플레이어들로 ‘대소환’을 막아야 될 겁니다.”
류 현은 음울한 어조로 말했다.
“그렇게 되면 이번에는 아지다하카에 닿지도 못하겠지요.”
말을 마친 류 현은 승하를 슥 돌아보았다. 승하는 드물게 표정 없는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류 현의 시선을 피하는 것처럼 고개를 돌려 밤하늘로 시선을 돌리곤 말했다.
“죽어줄 사람이 필요해서 사람을 구한다니...우리 신세 참 처량하네.”
류 현은 동의를 표하지도, 다른 대꾸를 내뱉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