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63화 〉탐식마(貪食魔) (263/429)



〈 263화 〉탐식마(貪食魔)

저물어가고 있는 태양이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하려는 것처럼 황혼을 불사르는 시간이었다.


“허어...”


류 현과 그가 이끄는 정찰대는 황혼 아래서 강렬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는 검은 성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멀찍이 떨어져있음에도 그런 거리적 문제 따위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성벽의 존재감은 강렬했다.

‘대체 얼마나 마력을 때려 박은 거지?’

뒤에서 저물고 있는 황혼빛보다 더욱 강렬한 검은 빛을 은은하게 뿜어내고 있었으니까.

‘이건 그냥 리치를 갈아 넣는 수준이 아니야. 몇 놈은 진짜로 소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을 거다. 이런 걸 별 의미도 없이 세웠을 리가 없는데.’


류 현의 눈이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당장 눈에 들어오는 것은 검은 성벽 주변에 작은 규모로 꾸려진 조그마한 성채들이었다.
그것들도 눈앞의 것과 마찬가지로 검은 벽돌들로 이루어져있다는 사실이 두통을 유발했다.

‘대체 이건 뭐라고 받아들여야 해?’

의미가 없으니까. 그래서 추론하기가 어려웠다.


류 현이 아는 한, 리치를 제외한 괴수는 이런 행동을 하지도 않고,  필요도 없다.
아니, 리치조차 이렇게는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지상과제는 코앞에 있는 인간을 죽이는 것이며, 거기에는 이런 성은 필요가 없었으니까.
정확히는 필요 여부를 생각할 이성이 남아있지 않았으며, 그나마 남아있는 네임드 몹도 이런 짓을 하진 않았었다.
전생에서 만난 엘더 리치조차 마나맥을 장악하자마자 일본을 초토화시켰을 정도니까.
제 몸을 지키기 위한 하나의 성  다른 성들? 가장 겁많은 리치조차 코웃음을 칠 것이다.

‘아무리 봐도 이런 게 움직일 수 있을  같진 않은데. 움직일 수 있어도 낭비고.’


검은 성은 굳건하게 대지 위에 뿌리박은 상태였다. 꽤 멀리서 보고 있음에도 저걸  넘어뜨려야 하나하고 고민이 들 정도였다.


마법이 존재하니 장담은 하지 못하겠지만, 굳이 저걸 움직일 필요성은 없어보였다.
결정적으로, 겉으로 보기에는 리치의 성보다는 인간들이 짓던 성에 가까워보였다.

‘결국 안을 들여다봐야 뭐가 나와도 나오겠네.’
“제가  번 보고 올까요?”

류 현의 눈치를 살피던 화련이 타이밍 좋게 물어왔으나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저기  벽에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거 보이시잖습니까. 혼자서는 안 됩니다. 그냥 단순히 단단하게 만들려고 저 정도 마력을 때려 박았을 리는 없고, 요격이든 경보든 달아놨을 텐데...어느 쪽이든 곤란해질 겁니다.  자폭병이 없을 것 같진 않으니까요.”

류 현의 말에 모두의 표정이 굳어 들어갔다.
요 며칠간은 류 현이 혼자 라가 자폭병 러쉬를 받아낸 덕에 피해가 없다시피 하지만, 자폭병의 위력을 잊은  아니었다.
이렇게 트인 지형에서는 맞닥뜨리게 되면 끔찍할 거라는 사실도.

“다함께 정면의 성벽 기준으로 오른쪽에 있는 성채부터 탐색하겠습니다. 최선두는 저와 화련 씨, 다른 분들은 평소 대열을 유지해 주십쇼. 대응 순서는 패턴A. 그럼 출발합니다.”


류 현의 말이 떨어짐과 함께 스물에 달하는 인영이 날듯이 내달렸다.


***

“신이시여 맙소사...”
“필, 내 머리 좀 세게 때려봐. 이거 꿈맞지?”
“젠장 흰소리 그만해. 나도 머리가 터질 거 같으니까.”
“...말세야. 종말이 왔어.”

웅성거리는 소리 속에는 그냥 흘려 넘기기 힘든 발언들도 섞여있었으나, 류 현은 대충 흘려버렸다. 더 신경 써야 할 이가 있었으니까.


류 현은 성벽 끄트머리에 서서 고꾸라질 것처럼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승하를 불렀다.

“승하 씨.”

승하는 아예 듣지 못한 것처럼 시선을 고정시킨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류 현은 한 숨을 삼키며 그녀의 뒤로 이동했다.

“승하 씨.”


손을 툭 치며 부르자 승하가 그제야 류 현을 돌아보았다. 그마저 평소에 비해 반 박자 느린 반응이었다.

“류 현.”


승하의 목소리에는 가늘지만 떨림이 섞여있었다. 검자루를 움켜쥔 손은 너무 힘을 줘서 하얗게 질린 채였다.

“일단 물러나야 합니다. 성벽에 올라오는 것까지야 화련 씨가 커버하셨지만, 감시역들을 죽이면 어떻게든 반응을 할 겁니다.”
“...알아. 아는데...”

화련은 도무지 발이 떨어지지 않는지 애꿎은 입술만 짓씹었다.  현은 같은 말을 반복하는 대신 손을 잡아끌었다.

“흥분해서 날뛰는  저들에게는  독으로 작용할 겁니다. 얼마나 잡혀있는지, 어떻게 배치했는지, 감시꾼 외의 괴수가 얼마나 있는지도 모르니까요.”
달래는 말에도 승하의 표정은 풀어질 줄 몰랐다. 거의 질질 끌리다시피 걷던 승하는 성벽 턱에 가로막혀 시야가 가려지자 그제야 한 숨을 내쉬었다.

“...전에도 이런 거 본 적 있어?”

승하는 자신이 바라보던 방향을 그대로 노려보며 물었다. 당장이라도 성벽 아래로 뛰어들어 깽판 칠  같은 기세에 류 현은 붙잡은 손을 확인하곤 대꾸했다.

“없습니다. 비슷한 것도 본 적 없어요.”
“그럼 이건 대체...”
“글쎄요. 놈들 생각을 알 수가 없으니 당장 눈에 보이는 것만 생각하면...농장을 꾸린 거겠죠.”


빠득! 치아 건강이 염려되는 소리가 승하의 입안에서 터져 나왔다. 입술을 타고 흐르다 증발하는 핏줄기를 보면 뭔가 깨진 게 확실했다.
그 때문에 류 현은 뒷말을 다 내뱉지 않고 속에 담아두었다.
‘인간을 노예로 삼아서 말입니다.’

분노를 감추지 못하는 승하와 달리 류 현은 꽤나 덤덤한 상태였다. 화가 난다기 보다도, 황당했으며, 황당함 속에서 친숙감을 그는 느끼고 있었다.


‘이런 짓을 벌이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성까지 짓고, 이젠 노예까지 부린다 라...처음에 자폭병으로 간보다가 밀어 넣는 것도 그렇고...이성을 찾은 정도가 아니라 무슨 인간 흉내를 내는 거 같은데.’


좋은 신호는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강한 놈들에게 뒤통수를 후려 맞을 수도 있는 가능성이 생긴 셈이었으니까.


‘개체 특성이었으면 좋겠지만...얼굴도 못  상황에서 이런 추론은 무의미하지.’


류 현은 슬쩍 성벽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곳에는 거지꼴을 한 인간들이 붉은 대나무 같은 것을 채취하고 있었다. 라가들의 서슬퍼런 감시 아래에서.


류 현은 작게 한 숨을 내쉬었다. 뒤에서 씨근덕거리고 있는 승하가 듣지 못할 정도로 작게.


괴수 밑에서 노예로 부려지고 있는 인간들에게 대한 연민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어차피 못 본 척 하고 넘어갈 수도 없어. 본 눈이 너무 많아. 당장은 흥분해서 구해줘도 살아남지 못할 거라는 말도 소용없을 거고.’


의미 없는 봉사를 해야겠군. 류 현은 다시 한 숨과 함께 그 말을 가슴에서 흩어놓았다.

***


“예,  서튼 씨. 기록했습니다. 서튼 씨라고 불러드리면 되겠습니까?”
“생명의 은인이시니 어떻게 부르셔도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래도 이왕이면 잭, 잭이라고 불러주셨으면 좋겠군요.”
“알겠습니다. 잭 씨, 국적이 영국이라고 하셨는데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셨는지 들을  있겠습니까?”
“봉사 활동으로 왔습니다. 유니셰프에서 운영하는 육손 봉사단이라고 있는데, 거기에 참가하면 플레이어 호위를 붙여주거든요. 올해가  년차입니다.”
“그렇군요. 원래 어디에서 봉사할 예정이셨습니까?”
“에티오피아의 디레다와라는 곳입니다. 이곳에서...어 음, 여기가 어디인지 들을  있을까요?”
“저도 알려드리고 싶습니다만, 알  있는 방법이 없군요. 특징적인 지형지물도 전부 바뀌고, 땅도 마음대로 솟아난 터라. 대충 이집트 어딘가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허어...직전 거리로 해도 거의 2, 3천키로 미터 떨어진 곳까지 왔군요. 그래서 그렇게...”
“혹시 이동할 때 어땠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 힘드시면 억지로 떠올리실 필요는 없습니다.”


라가들이 노예처럼 부리던 이들은  부상 없이 구출되었지만, 눈앞의 꾀죄죄한 남자를 제외하면 제정신을 유지한 이가 극히 적었다.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어도 구출 이전부터 가지고 있던 부상 때문에 간이 수술부터 들어간 인원을 빼고 나니 질문에 대답할  있는 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셋이 전부였다.
그 중 두 명은 여성이었고, 그녀들을 화련과 호지슨 버넷의 휘하 여자 부대원이 맡기로 했다. 유일한 남자는 이렇게 류 현과 마주하고 있고 말이다.


남자, 잭 서튼은 아직도 진물이 배어나오는 손등을 긁적거리면서 우물거렸다.

“별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괜찮습니다. 지금은 작은 정보라도 아쉬운 상황이라서요.”
“음...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디레다와에 잡아놓은 호텔에서 짐을 풀고 쉬려는데 경보가 울리기 시작하더군요. 아프리카에 왔다하면 하루에 두 세 번은 매일 같이 듣던 거라 그러려니 했었습니다만, 리치가 아파트 세 체를 한 번에 뭉개버리는 걸 보고 제가 잘 못 생각했다는 걸 깨달았죠.”


류 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잭이 계속할 것을 종용했다.

“사실 그 뒤로는 제 발로 뛰어다녔는데도 기억나는  거의 없어요. 사방에서 괴수는 쏟아지고, 도망 다니다가 중간에 봉사단에 붙은 호위들이랑도 떨어졌거든요. 그러다가 시외 벌판에서 커다란 라가랑 마주쳤죠. 솔직히 그  다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입이랑 손이 피범벅인데 어우...그런데 놈이 저를 죽이질 않더군요.”
“아마 그 커다란 라가는 라가 챔피언일 겁니다. 그 놈한테서 뭔가 눈에 띄는 특징 같은 건 없었습니까? 몸에 커다란 혹이 불거져 나왔다거나, 눈 전체가 빨갛다거나 하는 거요.”

잭이 눈을 동그랗게 뜨곤 맞장구를 쳤다.

“맞습니다. 어떻게 아신 거죠? 그놈 눈이 흰자위 하나 없이 새빨간 색이었습니다.”
“여기 오면서 그런 놈을 몇 놈 만났거든요. 계속해 주시죠.”
“아, 그렇겠네요. 어쨌거나 그놈은 저를 멀뚱히 보더니 슬쩍 집어서 제 등 뒤에 내려놨었습니다. 그제야 그놈 뒤에서 줄을 서있던 사람들이 보이더군요. 못해도 백 명은 족히 되어보이더군요.”
“놈 혼자서  인원을 다 통제한 겁니까?”
“아닙니다. 그놈보다 좀 더 작은 라가들이 다섯 정도 있었습니다. 왔다 갔다 하면서 줄을 관리하는 놈들 말입니다. 그놈들도 사람들이 줄에서 삐져나오면 창으로 찌르는 시늉만 할 뿐 아무 짓도 안하더군요. 중간에 탈출을 시도하려는 사람은 망설이지 않고 때려죽이긴 했지만...”


용감한 청년의 끔찍한 최후를 떠올린 잭은 잠깐 침울해졌지만, 눈앞의 류 현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진 것을 보고는 찔끔해서 재빨리 말을 이었다.

“무리에 식량 주머니를 짊어지고 걷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주로 젊은 남자들이었고, 팔 하나를 잃은 플레이어들도 있었죠. 어쨌거나 그것들을 나눠먹으면서 한 사흘 정도 걷기만 한 것 같습니다. 해가 지면 노상에서 자고, 동이 트면 걸었죠. 그러다가 괴상한 돌탑 앞에서 멈춰 섰는데, 글쎄 거기에 리치가 떡하니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요?”
“다시 난리가 났죠. 열 댓명 정도가 이대로는  죽는다고 도망가고, 덤볐다가 다 죽었습니다. 리치 손가락질  번에요.”


잭은  때의 몸서리쳐지는 광경을 떠올렸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좀처럼 진정하지 못하다가 류 현이  한 컵을 건네자 그제야 떠는 것을 멈췄다.

“사람들이 고분고분해지자 놈들이 우릴 돌탑 안으로 밀어 넣었어요. 거의 스치듯 본 거긴 한데, 그 탑이 어떻게 서있는지 아직도 이해가 안 가네요. 안이 거의 다 비어있었거든요.”


아주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었는지 잭이 횡설수설 하면서 탑에서  것들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류 현은 받아 적는 채 하며 한 가지 사실만 머릿속에 넣어두었다. ‘현실에 튀어나오고서 지은  아닐 수도 있겠군.’

“안에 들어가니까 바닥에 마법진같은게 그려져 있더군요. 갑자기 빛이 확 솟구치는데, 눈 떠보니 리치는  보이고, 영 다른 동네더라고요. 그리고 계속 걷고, 돌탑에 들어가고 걷기를 반복했죠.”
“혹시 돌탑에 몇 번 들어갔는지 기억하십니까?”
“어, 잠깐만요. 기억이 좀...제 기억이 맞다면 일곱 번일 겁니다. 여기까지 오는 데는 일곱 번이 맞아요.”

일곱 번이라고 받아 적던  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잭이 말한 일곱 번에 다른 뜻이 있는 것 같아서였다. 고개를 들어 잭을 보자, 잭은 입이 근질거린다는 걸 엉덩이를 들썩이며 온 몸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혹시 더 말씀하실 게 있으신 건지?”
“예, 있습니다. 있고말고요. 지금 수술 받고 있는 친구들이 깨어나면 더 확실하게 들으실 수 있을 겁니다. 저와 플레이어 셋, 그리고 아까 데리고 나가신 여자 분까지  다섯 명이 이 작업장에서는 거기까지 갔다 왔었습니다.”
“거기라니요?”
“머리 위에 이름이 붙어있는 괴수요! 뭐라고 했었지? 아, 그래. 네임드 몹! 그놈을 봤습니다! 우리가 봤었다고요!”
“...네임드 몹을 보셨다고요?”


‘카이로까지 끌고 갔다고 왜?’


류 현은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지만 잭은 시간을  생각이 없는 듯 했다.

“라가로드 구엘  굴락! 우리가 그를 봤습니다! 그가 이 농장의 주인이었다고요!”

잭은 거의 경기를 일으킬 것처럼 몸을 떨면서 고래고래 소리쳤다. 입가에 흐르는 허연 거품이 그가 정상적인 상태임을 말해주었다.


“잭? 잭? 일단 진정하시고...”


 현이 그를 붙잡으려고 손을 뻗었지만 잭이 귀신같이 몸을 빼내곤 계속 소리쳤다. 그의 눈은 실핏줄이 다 터져서 흰자위가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가 말했습니다. 우리를 보고 이렇게 말했어요! 그에게 전하라, 길게 기다리지 않을 것이니 어서 오는 것이 좋을 거라고. 끄르륵...”


말을 전하자마자 잭이 줄 끊어진 인형처럼 무너졌다. 쓰러진 그의 입과 코에서 핏물이 흘러나왔다.
류 현은 그의 맥을 짚어보고는 한 숨과 함께 주저앉았다. 즉사였다.

“진짜 가지가지 하는군. 젠장, 이걸 전파해야하나 말아야 하나.”


“꺄악!”


근처 텐트에서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터져 나와 그의 고민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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