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62화 〉탐식마(貪食魔) (262/429)



〈 262화 〉탐식마(貪食魔)
“제 5열 쉴드 전개!”
“쉴드 전개!”


복창과 함께 반투명한 막이 머리 위로 드리웠다. 장발의 흑인 사내는 그것을 확인하고는 다음 말을 외쳤다.


“제 2열 거창!”
“창 들어 새끼들아! 거창! 거차앙!”
“씨발, 존나 무겁네!”
“창 내리지 마라 병신새끼들아!  내렸다가 뚫리면 몰살이다! 똥꼬 꽉 조이고 버텨라!”

이백이 넘는 검고 기다란 막대가 늘어섰다. 툭 치면 부러질 것 같은 갈대 같은 검은 막대가 검은 아교와 자루나무를 짜깁기한, 자루 당 5억이 넘는 물건이었다.
찌르면 검은 아교가 자루나무로 된 창 끄트머리를 녹여서 찔린 대상에 붙어버리는 물건.

장병기 보다는 스트라이커들의 발판으로  만한 특성이었으나, 접근과 동시에 펑펑 터져나가는 라가 생체폭탄들을 상대로는 꽤나 유용했다. 접촉하거나, 숨이 끊어지지만 않으면 놈들은 폭발하지 않고 나약한 라가 그대로였으니까.


푸욱! 치익! [키아아악!] 검은 창이 라가의 허벅지를 뚫고, 지면에 박히자마자 창날이 창대에서 분리 되었다. 마력차단으로 
분리된 창날은 그대로 안에 들어있던 검은 아교에 녹아내려, 라가의 오른쪽 다리와 지면을 붙여버렸다.
창을 든 전열들은 뒤이어 터져 나오는 팀장들의 외침에 따라 침착하게 열 발자국 후퇴했다.

[키에에엑!] 푸각! 치이익! 쩌적!

그 사이에 접근해온 라가들을 재차 찌르고, 이번에는 그 배를 뒤로 이동했다.
마법사들의 원거리 공격만으로는 물량 공세를 다 막아낼 수 없기 때문에 쥐어짠 고육지책.

그리고,


쉬링! 쉭! 푸확! [캬아아악!][끄르르륵!]

우회하는데 성공한 놈들만 잡으면 다른 놈들은 모두 처리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에 기반한 전술이었다.


류 현은 검은 채찍이 켜켜이 엮여 구멍처럼 보이는 중심부에 서서  역할을 수행하는 중이었다.
그 본인도 이해하지 못하는 복잡한 수식들이 머릿속에서 조립되어 새로운 채찍을 뽑아내고,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류 현의 이마에 식은땀이 배어나왔다.

‘규모가 늘어난 건 좋은데...이런 문제가 있을 줄은 몰랐는데...’

팀원 중 누군가가 봤다면 기겁하며 만류했겠지만, 하얗게 질린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류 현을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승하는 아직 휴식이 필요한 희란에게 붙였고, 백혜라와 화련에게는 최종 저지선을 맡겼다. 웨인과 버넷은 지휘하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다.


‘네임드 몹 본체를 뜯어먹어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턱까지 흘러내린 땀이 거슬렸지만, 류 현은 제멋대로 내버려둔 팔을 올려 닦으려는 시도를  수가 없었다. 채찍이 라가의 목숨을 하나 앗아갈 때마다 몸이 터져나갈 것 같았기 때문에.

‘...이런 경험은 또 처음이네. 젠장, 화룡 상대로 에너지 드레인 쓸 때도 이렇진 않았던 거 같은데.’


쉭! 푸홧!

라가의 목숨이 하나 꺼뜨려질 때마다 채찍을 타고 여지없이 흘러들어오는 마력 탓이었다. 일개 라가의 것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농밀하고, 탁한 마력 말이다.
네임드 몹의 것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는 마력은 류 현의 추측을 확신으로 바꿔 주었으나, 동시에 곤란함도 같이 선사했다.

끝없이 밀려드는 라가의 파도 때문에 빨아들인 마력을 갈무리할 새가 없었다. 그냥 담아놓기에는  색깔이 너무 뚜렷하여, 류 현조차 마냥 받아들이는 건 슬슬 한계였다. 그렇다고 라가를 잡아 죽이는 걸 멈출 수도 없었다.
그랬다간 원정대가 하위몹을 상대로 정말 무가치하게 죽어나갈 테니.


‘여기서 내상 터지면 골치 아픈데. 일단 중단하고, 원정대를 더 뒤로 빼야하나? 라가가 얼마나 더 있는지  수도 없으니...염병, 왜 자꾸 듣도 보도 못한 것들이 자꾸...’


 현이 전격적인 후퇴를 염두에 두기 시작했을 때, 미친 듯이 달려들던 라가들이 갑자기 전진을 멈추었다.
그것에 그치지 않고, 뒤돌아서더니 달려들 때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전장을 이탈하기 시작했다. 이전의  번의 공격에서 그랬던 것처럼.

“...봐도 봐도 적응이 안 되네.”

조심스럽게 풀어헤친 채찍들을 흩어놓은 류 현은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보는 눈들을 신경 쓰기에는 너무 지친 상태였다. 억지로 눌러 담은 마력들이 당장이라도 몸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오늘도...긴 밤이 되겠구만.’


빠르게 자신을 향해서 날아오는 화련을 보고 류 현은 벌렁 드러누웠다. 화련이 소리치는  같았지만 류 현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 눈을 감았다.

***

류 현은 검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소리도, 마력의 유동도 없는 상승은 조용함과는 별개로 가속에 박차를 가하여, 순식간에 류 현이 검은 바다를 굽어볼 수 있게 해주었다.
검은 바다의 양쪽 끝을 돌아본 류 현은 그 깊이를 보고자 했으나, 그것만큼은 불가능했다.
아래에 웅크리고 있는 것의 형태나 겨우  뿐.
몇 번이고 실패했던 일이기에  현은 실망하지 않고 떠오르는 것을 재개했다. 이번에는 의식이라는 수면 위로 부상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생각보다 빨리 깼네.”
“제가 얼마나 잤습니까?”


승하는 손목시계를 흘끔 내려다보곤 답했다.

“세 시간 정도.”

그리 마음에 드는 대답은 아니었다. 류 현은 침음성을 삼키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승하가 류 현의 몸을 슬쩍 밀었다. 맥없이 뒤로 넘어가는  현을 보고 승하는 픽 웃었다.


“좀  누워있어. 아직 결산 안 끝나서 좀 기다려야 해.”
“결산이  끝났으면 제가...”
“안 돼. 너 지금 거기가면 눈뜬 시체가 들어온 걸로 보일 걸.”
“...그렇게 안 좋아 보입니까?”
“넋 빠져 보이는 건 둘째 치고,  감으면 있는 줄도 모르겠다. 너 정말 괜찮은 거 맞아?”

류 현은 더는 일어나려고 애쓰지 않았다. 한바탕 라가를 썰고 나면 찾아오는 마력 공백은 원인을 모르진 않았으나, 찝찝하긴 했으니까.
외부에서 긁어모은 마력을 흡수하느라 마력 운용이 먹통이 되는 건 그도 처음 겪는 일이었다.
‘집어넣으면 다 씹어 먹을 줄 알았는데, 소화불량도 걸려보네.’

“글쎄요. 저도 이런 건 처음이라.”
“끙...네 미래 지식에 안 기대겠다고 다짐하긴 했는데 이런 상황이 오니까 그게 아쉽네. 사람 마음 참 간사해.”
“저부터가 그런데요 뭘.”
“저림이나 탈력감 같은 건 없어?”
“예. 어지럽지도 않고, 보이는 것도 똑바로 보입니다. 배부른 느낌도 전이랑 똑같이 드네요.”
“거 참...하루 종일 먹은 것도 없는데. 그래도 오늘은 못 빼줘. 련이가 자기가 먹는 거 확인하겠다고 했거든.”


류 현은 작게 앓는 소리를 내며 돌아누웠다. 그 모습을 보고 승하는 킥킥 웃기만 했다. 이미 차있는 배로 영양 맞춘다고 꾸역꾸역 식사를 해야 하는 류 현이 좀 안 됐지만, 원칙적으로는 화련이 옳았다.
억지로 먹고 탈이 나면 모르겠는데, 류 현의 위장은 전부 소화해냈기에 류 현을 거들어줄 명분도 없었다.


“지금까지 상황을 종합해보면 그 자폭병들 안에 든 마력이 너도  방에 소화하기 힘들 정도라는 건데...”
“좋은 소식은 아니죠. 네임드 몹이 자폭병들한테 마력을 너무 나눠줘서 쪼그라든 게 아닌 이상에야.”
“쪼그라들었을 수도 있잖아? 반토막 났다.  수준은 아니어도 결국에는 마력에는 한계가 있을 텐데. 솟아난 땅 위가 마력 농도가 짙긴 해도 던전 정도는 아니고. 게다가 살점을 떼준 것 같다며?”
“재생력이 강한 놈이면 회복은 했겠지만...”
“육체 손실은 그렇게 쉽게 쉽게 회복되는 게 아니지. 외형은 복구해도 내구성이 시원찮거나, 마력 총량이 뭉텅 깎여나가는 게 보통이니까. 못해도 공격 한 번에 팔다리 하나씩은 떼줬겠구만.”


대형 괴수일 경우에는 허벅다리 살 정도로 그칠 수도 있겠지만, 반복 손상될 경우 결과는 별로 다르지 않았다.
손상을 주길 반복하다가 내구성이 바닥을 치면, 그 거대한 몸뚱이를 제대로 지탱하지 못하게  테니, 이쪽이 편하다면 더 편했다.

어느새 몸을 다시 돌린 류 현이 슬쩍 덧붙였다.

“그래도 최악의 경우를 가정해보는 게...”
“알아, 알아. 그럼 최악의 가정해보자고. 일단 저 자폭병들을 양산하고도 아무런 타격이 없는 회복력과 마력통에.”
“크기는 최대 5미터정도, 소형급.”
“우리를 지치게 하려고 이 짓을 엿새 동안 반복할 수 있는 인내심이랑 지능을 가졌고.”
“정신계 능력을 가졌거나, 최소 그에 준하는 카리스마를 가진 괴수.”


주거니 받거니 하던 둘은 살짝 굳어진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다른 건 모르겠는데 소형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저놈들 다 쓸모없어질 거 아냐.”

승하는 고개 짓으로 텐트 밖을 가리켰다.
그녀의 말대로 네임드 몹이 소형괴수일 경우 원정대는 네임드 몹과의 싸움에 보탬이 안  것이다. 대형의 경우라고 엄청난 차이가 있진 않겠지만, 개입을 자제시켜야 하는 소형과는 천지차이라 할만 했다.

“차라리 그냥 쾅 붙을 수 있으면 우리끼리 그렇게 소형이랑 붙는 게 나을 수도 있습니다. 후퇴 타이밍을 안 놓치고 뒤로 물려놓으면 피해는 이쪽이 오히려 덜 할 겁니다.”
“끙...하긴 초기 보고서에도 무인 초소 같은 게 적혀있었으니 그대로 있진 않겠지. 지금까지 꼬라박은 라가 숫자도 아프리카 대륙에 있는 놈들 다 긁어모은 거 생각하면 많은 숫자도 아니고.”
“그렇겠죠. 뭘 어떻게 한 건진 모르겠지만 리치도 조종할 수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 말입니다.”


라가 자폭병의 첫 번째 러쉬 이후, 자폭병 러쉬에는 조금씩 라가가 아닌 다른 괴수들이 섞여서 밀려들어왔다. 라이프 배슬을  몸에 담고 달려드는 리치도  다른 괴수 중 하나였다.
 현이 뿜어낸 검은 채찍에 찢기는 신세를 피하진 못했지만.

“리치들이  지어놓고, 거기서 농성하면서 빼돌린 자폭병이 옆구리 치고 들어오면 진짜 골 때리겠네. 그렇다고 세월아 네월아 하고 주변 정리를 하고 있을 수도 없고.”
“그게 진짜 문제죠.”

사실 가장  문제는 시간적인 여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초반에 허를 찔려서 회복약 같은 보급품 소모가 막심한 것도 뼈아팠지만, 정말   지금도 유럽이 데스 나이트에게 속수무책으로 유린당하고 있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인명피해 갱신속도보다 더 빠르게 퍼져나갈 언데드 몹의 공포는 데스 나이트의 머리통을 날려버려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인명피해  자체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부분이었다. 유럽을 유린하고 있을 괴수가 데스 나이트라는 사실.


그리고 그건 아직 넘을 산이 많은 인류에게 별로 좋은 신호는 아니었다.

‘여기서 이렇게 발목이 잡힐 줄은...내가 잘 못 생각한 건가?’


오죽하면 의미 없다는 걸 알면서 이렇게 자문해  정도였다. 그 심정이 표정으로 그대로 드러났고, 그 모습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던 승하가  내뱉었다.

“류 현.”
“예? 예에...”
“우린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자. 지벡 그놈이 의무감에 몸을 던질 놈은 아니어도, 지 목숨은 끔찍하게 생각하는 놈이니 잘 버틸 거야.”


승하는 그리 말하며 류 현의 어깨를 툭 치며 일어섰다. 그녀가 텐트 입구로 다가가는 것을 보고 류 현은 한 무리가 몰려왔음을 깨달았다. 생각보다 컨디션이 훨씬 좋지 못했던 모양.

‘그래, 승하 말대로 일단 여기를 정리하는  맞아. 예상외로 농성전이 되더라도 엘더 리치의 지식이 있으니 외려 그쪽이  수월할 수도 있어.’


류 현은 애써 자신감을 북돋웠다.
일주일 후, 카이로가 있었던 장소에 자리한 거대한 요새와 마주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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