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61화 〉탐식마(貪食魔) (261/429)



〈 261화 〉탐식마(貪食魔)
쉬링! 콰아아! 콰르르! 검은 선이 대지를 헤집으며 내달았다.
그런 검은 선들이 모여 있는 모습은 언뜻 하늘로 솟아오르려는 검은 번개 같기도, 대지 위에 피어난 검은 연꽃 같아 보이기도 했다.

스걱! 푸홧! 콰가각! 궤도 안에 들어온 것들은 생물, 비생물 가리지 않고 갈라버리는 흉악함은 연꽃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검은 선은 목숨 하나를 앗아갈 때마다 생기가 돌아오는 것 같은 움직임을 보였다.
핏물을 머금으면 눈에 띄게 활발해졌고 길이가 늘어났으며, 찢겨진 부분이 매워지기도 하였다.
더하고 뺄  없이 소름끼친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광경.


그러나,

눈이 뒤집힌 라가들에게 그런 것은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앞서간 동족들의 끔찍한 최후에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라가들은 미친 듯이 내달렸다. 자신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검은 선들을 향해서.


[크르락!]푸홧! [캬아악! 케엑!] 스칵!

검은 선 또한 그런 라가들을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베어 넘겼다.


[크아아악!] 쉭! 쉬링!

최선두에서 피거품을 물고 달려들던 라가 챔피언은 마지막 숨을 내뱉을 새도 없이 몸통이 세 토막이  채로 바닥에 뒹굴게 되었다. 그 뒤를 판금갑옷을 입은 라가병사가, 주술사가 따랐다.
수백의 라가 중에서 토막 쳐지는 신세를 피한 놈은 없었다.

그리고 화련은 그런 참상을 연출하고 있는 류 현은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게 무슨...”


피 냄새를 맡을 수 있을 리가 없는 거리임에도 화련은  냄새를 맡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냥 비린 정도가 아니라, 끈적끈적하게 코에 들러붙어서 남아서 저녁을 포기해야  정도로 지독한 피 냄새!


“단기간에 저 정도로 규모를 늘리는 게 가능한가?”

화련이 놀라고 있는 방향은 조금 달랐다. 그녀는 밀려드는 라가 자폭부대를 믹서기 마냥 갈아버리고 있는 검은 선 뭉치의 행태가 아니라, 류 현이 저런 것을 뿜어내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놀라고 있었다.
웬만한 마법사들은 저 광경을 보고 마법사를 자칭하지 못하게 될 정도다.


‘전에 분명히 파쇄권도 컨트롤 문제랑 내상 때문에 주력 삼은 거라고 했었는데...’

류 현이 전생의 일을 이야기하면서 털어놓은 이런 저런 이야기에는 자신의 싸움방식도 들어가 있었다. 중간 중간 승하가 끼어들어서 털어놓게  것이지만 말이다.
그  류 현은 ‘강림’상태가 아니면 파쇄권 이상의 규모는 육체 내구력이 받쳐주질 않아서 잘 쓰지 못한다고 했었다.
그 괴물 같은 재생력도 제 마력 때문에  상처는 잘 회복되지 않기 때문에 꼭 필요한 게 아니면 오래 걸려도 마력검이나 파쇄권으로 해결을 본다고. 마력검은 정밀 컨트롤이 좋은 편은 아니라 무기를 부숴먹는 통에 파쇄권이 주였다고 했었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에너지 드레인이라는 괴수의 방어력을 무시하는 수단을 가진 류 현이니, 재생력이라는 방패를 앞세우고 에너지 드레인이라는 창과 함께 지구전으로 몰고 가면 당해낼 상대가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도 류 현은 아지다하카라는 괴물까지 혼자서 요절을 내지 않았는가.


그런 류 현이 대마법사 뺨치는 규모의 힘의 행사를 벌이고 있는 광경은 화련에게 걱정을 불러 일으켰다.

‘같은 엘더 리치의 기억인데...차이가 나도 이렇게 날 수가 있나? 아무리 마스터 마력양이 차원이 다른 수준이라지만...진짜 무리하고 있는 거 아니겠지?’


화련은  안의 녹색 펜던트를 만지작거렸다. 류 현이 제약을  세 발  두 발만 쏜 상태였다. 개미지옥을 발동시키는데 예상보다 마력 소모가 크긴 했지만 세발 째를 쏘는 데는 문제없었다.


최선두로 날아간 류 현 때문에 한 발 아껴두고 있었던 것뿐. 류 현이 고립될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서 말이다.


원정대의 철퇴가 생각보다 매끄럽게 진행되었고, 그녀가 개미지옥을 두  발동해 들러붙은 라가 무리를 저지하자 철퇴에 더욱 탄력이 붙어 그녀는 갈등할 필요도 없이 세발 째를 남겨둘 수 있었다.

지금은 전혀 다른 고민을 안게 되었지만.

‘일단 가서 멈춰야 하나? 근데 접근이나 할 수 있을까? ‘강림’썼을 때보다 규모가 훨씬 큰데 접근해도 되나?’

화련이 고민하는 동안에도 라가들은 무모한 돌격 끝에 갈려나갔고, 핏물을 머금은 검은 선 뭉치는 덩치를 불려나갔다.
화련은 도무지  안에 있을  현을 찾을 수가 없었다.
어떤 상태인지 볼 수 없다는 점이 그녀의 불안감을 더욱 부추겼다. 화련은 결정을 내렸다.


‘일단 가서 부르기라도 해보자. 어떤 상태인지 알아야 사람을 불러오든 말든...’


화련이 검은  뭉치를 향해서 몸을 날리려던 때였다.
단말마를 내지르며 절명해가는 동족의 모습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돌격하던 라가들이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 와중에도 검은 선이 사정거리 안에 멈춰선 놈들의 머리통을 날려 보냈지만 공격을 피하려고 움직이는 놈은 없었다.

“뭐야? 쟤네 갑자기 왜 저러...”

아슬아슬하게 검은 선의 사정거리 밖에서 멈춰선 라가 한마리가  돌아서더니, 판금갑옷으로 중무장한 겉모습이 무색하게 뛰기 시작했다. 놈보다 뒤에 서있던 라가들도 뒤따르듯 뒤돌아서 뛰기 시작했다.
 때와는 조금 다르게 절도 있는 동작으로.

“...지금 도망가는 건가?”

화련은 잠깐 동안 눈앞의 광경을 이해하지 못했다. 병력 손실을 생각하면 당연한 후퇴긴 했지만, 도저히 그런 판단을 할 이성이 남아있는 것 같지가 않았으니까.

 현이 뽑아낸 검은 선에 죽은 놈만 물경 수천에 달했다. 라가들의 적극적인 호응이 없었다면 이렇게 단시간에 도달할 수 없는 수치.
그 정도로 눈이 뒤집혀서 달려들던 놈들이 갑자기 피해 정도를 깨닫고 후퇴를 한다?


“뭐야, 쟤들  먹은 거야?”

화련의 입에서 이런 소리가 나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지경.
급격한 상황 변화에 멍하니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화련은, 시야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검은 덩어리가 사라진 것을 알아채고는 모든 의문을 접고 하강하기 시작했다. 모습을 드러낸  현에게로.

***

[쉭!쉭!][푸르륵!] 허파에서 바람 새는 소리를 내는 구울이 비대화된 왼팔을 질질 끌면서 걸었다. 그 뒤를 데스나이트를 태운 유령마가, 뼈마디를 떨그럭거리는 스켈레톤들이 뒤따랐다.
죽은 자의 군대가 세상 어떤 군대 보다 조용하게 도시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우크라이나의 도시인 체르니우치는 도시의 주인들이 모두 떠나버린 죽은 도시가 된 채로 죽은 자의 군대를 맞이했다.
국경선에서 그들을 막지 못한 우크라이나 수뇌부가 도시를 포기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데스나이트와 놈이 이끄는 죽은 자의 군대가 도시 파괴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확인되었기에 내릴 수 있는 결정이었다.
루마니아와 몰도바에서 삼십만이 넘는 인명피해를 입고 나서 확신하게 된 패턴.

 와중에도 죽은 자의 군대는 계속해서 늘어났다. 도시 외곽의 공동묘지에서, 어떤 시체는 보도블럭을 뚫고 죽음에서 기어 올라와 행렬에 동참하였다.
다 삭아 반절 밖에 안남은 시체든,  죽은 군인이든, 데스나이트에게 머리통이 잘린 플레이어든 가리지 않고 전부 구울이나 스켈레톤이 되어 언데드 군단에 합류했다.

 결과가 거의 90만에 달하는 대군을 이루게 되었다. 현실에 모습을 드러낸 지 채 한 달은커녕, 이제 이주가 조금 넘어간다는 걸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증식속도였다.


그리고 그 끔찍할 정도로 빠르게 불어나는 언데드 군단을 상대하고 있는 지벡 건터는 다 집어치우고 도망가고 싶다는 충동과 싸우는 중이었다. 유럽 땅을 다시 밟은 후 계속되어온 싸움이었다.
눈앞의 대머리 사내 덕에 그 싸움이 두 배로 격렬해지는 것을 느끼며, 지벡은  숨과 함께 내뱉었다.

“그래서...발 빼고 휴가라도 떠나시겠다?”
“너도 이미 알고 있을 텐데. 이건 이길  있는 싸움이 아니야. 아니, 싸움이라고  것도 없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싸움이라고 하진 않으니.”
“허, 배당에 눈멀어서 기어들어온 놈이 그런 걸 생각할 머리가 있는  몰랐는데.”

지벡의 비아냥거림에 대머리 사내의 머리에 핏줄이 솟아올랐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은 김이라도 피어오를 것 같았다.
지벡은 참 생긴 대로 단순한 놈이라고 혼자서 수긍했다.

“지벡 건터. 말조심하도록. 여기에 모인 이들 중에서 네놈한테 폭언을 들을 사람은 아무도 없어. 우리 모두 목숨을 걸었다.”
“사람은 없지. 다 개새끼들만 모였으니까. 안 그래? 파비오 룸펜?”


대머리 사내는 대꾸 없이 이만 갈아붙였다. 솥뚜껑만한 손이 허옇게 질릴 정도로 주먹 쥐어졌지만 지벡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


“우리 솔직해 지자고. 지중해에 떴던 검은 리치성을 잡고 제일 재미 본건 너네 아발론이랑 레기온이었잖아? 부산물 확보는 웨인 크로이츠가 제일 많이 했지만, 그쪽은 수익창출이랑은 거리가 머니까. 그  좋은 기억 때문에 제일 먼저 머리를 디민  아냐?”
“...우리는 어디까지나 유럽의...”
“그 소리는 데스나이트 뜨자마자 루마니아로 날아와서 했어야지. 한국에 있던 내가 여기로 와서 유격대 모집할 때까지 간을 보던 놈이? 낯짝도 좋아. 나라도 쪽팔려서 그런 소리는 못할 텐데.”
“이 이상 모욕한다면...”

대답할 말이 궁색해진 대머리 사내는 노골적으로 투기를 내비쳤으나,

“파비오, 네가 여자 뒤꽁무니 쫓아다니느라 녹슨 거야, 아님 내가 너무 세진 거야? 젠장, 그런 괴물들만 보고 오니까 이거 헷갈리네.”
“무슨...”

제 턱밑을 겨누고 있는 무색의 마력탄을 보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지벡은 의자를 뒤로 젖혀 책상에 다리를 걸친 껄렁한 자세로 말을 이었다.


“너희도 솔직하게 심경을 밝혔으니, 나도 솔직하게 말하지. 너흴 보내 줄 순 없어. 그 머리가 모자걸이가 아니라면 이미 알겠지. 너희가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너네 나라에서 그걸 거부할 거야. 이건 그냥 누가 더 손해보고 말고 하는 문제가 아냐.  뒈지든가 아니면 좀 많이 죽던가 하는 문제지. 너흰 그래도 운이 좋은 편이야. 윗대가리들이 가족 머리통에 총 들이밀고 가라고 하기 전에 제 발로 와서 영웅대접은 받을 수 있을 테니까. 살아만 있다면.”
“그걸 지금 말이라고...열흘 동안 얼마가 죽었는지 알고나 하는 소린가?”
“알지. 아주 잘 알아. 그거 파악하고, 그걸로 욕 쳐먹으려고 내가 대장질 하고 있는 건데. 처음에 삼천으로 시작했고, 증원이 추가로  됐고, 지금 이천 남았으니까.  뒈졌네.”


대머리 사내, 파비오 룸펜은 욕지기를 뱉으려다가 턱밑에 겨눠진 마력탄의 존재감에 말을 쥐어짰다.

“열흘 동안 이천이 죽었다. 플레이어만  천명! 이건 작전도 뭣도 아니야, 움직이는 열차에 계란을 던져서 멈추려는 병신짓이라고!”


파비오가 피를 토하려는 심경이거나 말거나, 지벡은 심드렁했다.

“그 중 반은  공격 때 뒈졌잖아. 너네가 공로 세우겠다고 멍청하게 들이박았다가. 그 때 뒈진 놈들 때문에 증원 오기 전에 피해가 두 배는  커졌지.”
“젠장, 지금 그런 걸 따진다고...!”
“알아. 지금 그걸 따진다고 뒈진 놈들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미친 언데드들이 발을 절게 되는 것도 아니지. 아, 그건 지금도 그런가? 어쨌거나 내 말은,  뒤의 피해만 보면 그럭저럭 버틸만한 수준이라는 거야. 첫 작전과 두 번째 작전에서만 천 사백이 뒈졌어. 그 후에는? 여드레 동안 육 백. 거기다가 작전을 거듭할수록 피해도 조금씩 줄고 있어. 멍청한 놈들이 미리 뒈져서 그런 거 같지만.”
“...그래도 이대로 가면 전멸뿐이다. 우리는 저놈들 숫자를 하나도 줄이지 못했어.”
“그것도 맞아. 죽은 놈들이 재생까지 해대고, 아무리 스트라이커를 꼬라박아도 데스나이트한테 흠집도  냈으니. 네 말대로 이대로 계속 꼬라박으면 머지않아서 전멸하겠지.”


아무리 유격대 성격이 짙은 부대라지만, 전멸을 이야기하는 것치고 지벡의 표정은 너무나도 평온했다. 그것에 위화감을 느낀 파비오 룸펜은 미약한 희망을 담아서 물었다.

“...무슨 대책을 숨겨놓고 있는 건가?”
“야, 내가 아무리 쓰레기라도 생목숨이 갈려나가는데 그런 걸 감추고 있겠냐. 내가 가지고 있는  아니고, 그걸 가지고  미친 괴물들을 알고 있긴 해.”
“그건 또 무슨...”
“날 여기로 보낸 괴물 하나있어. 지금쯤 아프리카에 뜬 괴물 하나 조지고 있을 걸. 아, 생각하니까 또 좃같네. 씨발. 그 새끼가 무사귀환 하길 빌어야한다니.”

지벡은 그 기억을 떨쳐내기 위해서 고개를 내젓고는, 손뼉을 짝 쳐 보이며 말했다.


“어쨌든.  괴물들이 올 때까지 버틸 수만 있으면  세상이 너흴 존나게 빨아줄 테니까  때까지만 버텨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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