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0화 〉탐식마(貪食魔)
사람들은 자신의 인지 밖의 일, 그러니까 듣도 보도, 상상하지도 못한 일에 직면하면 얼이 빠져서 그 상황보다 더 이상한 행동을 하곤 한다.
하지만 그것이 완전히 무너져 내린다는 의미는 아니다. 완전히 무너지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개 중에 훌륭한 책임감과 냉철한 판단력을 갖춘 이가 나서서 수습을 하곤 하니까.
그래서 너무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했을 때 사람들이 받는 정신적 데미지는 생각보다 적은 편이다.
그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뉴스에서 스쳐지나가듯이 봤을만한 재해나 불행이 직접 닥쳤을 때 사람들이 받는 정신적 데미지를 상상을 초월한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원인은 그것이 상상보다 훨씬 더 끔찍하다는 것 일거다.
누구도 뉴스를 보면서 자기 가족을 집채로 날려버린 토네이도나, 자살폭탄 테러에 노출되거나 움직이는 자살폭탄으로 뽑힌 이들의 심정을 100프로 이해하진 못할 테니까.
자신을 삼키려는 괴수 아가리에서 몸을 빼내거나, 폭탄처럼 터져나가는 식물사이로 몸을 던지는 일을 숱하게 겪어본 경험 많은 플레이어들이 반쯤 미친 채로 펄쩍펄쩍 뛰고 있는 건 그 때문이었다.
“방패 들어 새끼야! 방패 들라고! 씨발!”
“내 손! 내 손이!”
“대가리 숙여! 대가리 방패 밖으로 내미는 새끼는 나한테 대가리 터질 줄 알아라!”
“씨발 새끼들아! 다 죽으라는 거냐! 이렇게는 못 죽...케엑...!”
“지랄하고 있네 병신이. 내빼고 싶은 새끼는 앞으로 나와. 제일 먼저 보내준다.”
“병신새끼들아 눈 감지 말라고! 눈 뜨고 창 찔러! 들러붙게 내두면 다 죽는다. 눈 똑바로 뜨고 제대로 찔러!”
“라가를 노리지 말고 발밑 땅을 노려! 몸뚱이 통째로 증발 못시키면 그쪽이 낫다. 뛰지마 멍청한 새끼야! 아군의 마법에 휘말린다. 한 번 쏘고 세 발, 한 번 쏘고 세 발 물러난다!”
콰앙! 폭음이 터져 나오면 여지없이 전선이 출렁거렸다.
아니, 전선이라고 할 만한 것은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다.
미국소속 플레이어들이 방패와 방어 아티펙트로 방어선을 구축할 때 다른 이들은 도망가는 게 반, 어물어물 저들끼리 모여서 자리를 지키지도 도망가지도 못하는 이들이 반.
도망가려는 이들이나 자리를 사수하려는 이들이 앞뒤를 맡아서 선 것도 아니어서 혼란은 더했다.
‘싸움이라고 할 것도 없군. 끔찍한데.’
류 현은 발아래 펼쳐진 지옥을 보며 짧게 평했다. 평소라면 능숙하진 못해도 지시를 내리거나 선두에서 독려라도 해볼 텐데, 그런 게 먹히고 말고 할 상황이 아니었다.
‘물량공세로 피로를 축적시키는 것도 아니고 그냥 자폭으로 꼬라박다니 대체 뭐야?’
콰앙! 플레이어들의 필사적인 저지에 전선에 도달하지 못하고 두 다리를 잃은 라가 하나가 고꾸라짐과 동시에 폭발했다.
그가 집중하자 류 현의 눈은 그 장면을 연속 촬영하듯이 한 컷 한 컷 잡아내었다.
폭발의 충격이 다가 아니었다. 라가의 몸뚱이가 터지면서 그 중심에 있던 이질적인 살덩이가 수류탄처럼 날카로운 파편을 흩뿌리며 플레이어들의 몸을 찢어놓았다. 단 번에 찢지 못하면 들러붙어서 녹였다. 희란이 ‘연결’을 시도했던 그 살덩이가 말이다.
일회성 방어 아티펙트도, 전신갑옷도 아무짝에 쓸모없었다.
‘저번 전투 때 재미를 보곤 본격적으로 써먹는 건가? 아무리 그래도 라가 소모가 너무 심한데?’
이런저런 추측들이 머릿속에 떠올랐으나 류 현은 금세 그것을 그만두었다. 고민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으니까.
라가들이 닥치고 돌격 후 폭발해버리는 정신 나간 상황을 정리할 수 있는 건 압도적인 화력뿐이었고, 그걸 가진 건 류 현 본인뿐이었다.
‘희란 씨만 그렇게 안 됐어도 좀 수월했을 텐데.’
때 늦은 후회였다. 뭣보다 ‘연결’을 권유한 건 자신이었으니까.
류 현은 도움도 안 되는 자책을 계속할 생각은 없었다.
대신 자기 주변에 떠있는 두 여자에게 주의를 줬다.
“최대 세 번입니다. 그 이상은 절대 쏘시면 안 됩니다. 당장 피해가 커보여도, 희란 씨 상태가 저런 이상 두 분까지 이탈해버리면 정말 답도 없어지니까요.”
“전 원래 다섯 번까지는 되는 데도요?”
“안 됩니다. 그 다섯 번은 맘놓고 휴식할 수 있을 때 기준이지 않습니까. 이 땅위에서 그런 도박을 할 순 없습니다. 두 분이야 지금까지 멀쩡하시지만, 원정대에서 피로가 회복이 잘 안 된다고 호소하는 인원도 계속 나오고 있는 마당에 탈이 날만한 여지를 남겨두고 싶진 않군요.”
아닌 게 아니라, 던전처럼 변해 버린 땅은 전자기기만 먹통으로 만드는 게 아니었다. 이 땅에 발을 디딘 이후로, 원정대 소속 플레이어들은 꽤 심한 피로감을 호소하고 있었다.
던전에 진입해서 느끼는 긴장으로 인한 피로감을 헷갈릴 정도로 경험이 적은 이들이 아니니 헷갈렸을 가능성도 현저했다.
검은 벽의 붕괴와 함께 솟아난 이 땅이 플레이어들에게 좋지 못한 영향을 끼친다는 건 거의 확정이라고 모두가 생각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그냥 피해를 감수하고 뒤로 빠져버리고 싶습니다.”
“...그랬다간 원정대가 공중분해 될 걸요. 일이 끝난 뒤에는 각 국에서 마스터를 법정에 세우겠다고 난리칠 거고요.”
“그래서 내키진 않지만 이렇게 시간 끌려고 하고 있지 않습니까.”
화련은 류 현에게 시선을 향한 채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일부러 이러는 걸까. 아니면 이게 진짜 모습인걸까. 평소에 세심하게 챙기는 거 보면 가식이라는 느낌은 전혀 안 들었는데. 이럴 때보면 꼭...’
그게 다 연기 같아. 화련은 생각조차 구체화하지 않기 위해 애썼다.
콰앙! 땅이 들고 일어나는 것 같은 폭음이 그녀를 도와주었다. 그녀는 말 그대로 생지옥으로 변하고 있는 발아래를 내려다보다가 손에 쥔 목걸이를 들어보았다.
녹색 보석이 기하학적으로 세공되어 있는 펜던트는 안에 빛을 품고 있는 것처럼 은은한 녹색 빛으로 빛났다.
개미지옥. 류 현이 전투불능이 되고, 라가들이 갑자기 자폭돌격해오는 난리 통에 결국 꺼내들기로 한 히든카드.
류 현은 기어코 다시 한 번 더 주의를 주었다.
“세 번입니다. 그 이상은 서로한테 독이 됩니다. 잊으시면 안 됩니다.”
“진짜...귀에 딱지 앉겠어요. 알았어요. 세 번 쏘고 저기 언덕에 짱 박혀서 꼼짝도 안 할 테니까 그만 좀 쪼아요.”
투덜거리는 화련을 두고 백혜라를 돌아보자 그녀는 알고 있다는 듯이 고개를 까딱였다.
“그럼, 조금 있다가 뵙지요.”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 안 되겠다 싶으면 그냥 빠져요. 전처럼 또 내상 끌어안고 끙끙거리지 말고요.”
류 현은 대꾸 없이 몸을 아래로 내쏘았다. 몇 번이고 경험해본 덕에 화련이 펼쳐놓은 위상공간은 류 현의 의지를 따라서 부드럽게 그를 땅위에 내려놓았다.
서로 뒤엉켜 뒤로 빠지는 것도 못하고 있는 원정대와 조금 떨어진, 라가 돌격대 제 2파가 다가오고 있는 평야에.
[캬아아악!][크르륵!] 땅에 내려앉자 눈이 뒤집힌 라가들이 그를 격하게 반겨왔다. 너 나 할 것 없이 거품을 물고, 피눈물을 흘리며 달려오는 라가의 파도를 류 현은 멀뚱히 쳐다봤다.
‘아마도 지금 저놈들을 통해서 이쪽을 보고 있겠지.’
희란이 정신을 잃기 전 내뱉은 말은 류 현의 의심을 확신으로 바꿔놓고, 류 현은 이 일의 배후에 네임드 몹이 있음을 확신했다.
그놈이 지금의 자폭돌격을 획책했다는 것도 확신했다.
라가가 생체 폭탄이 된 것도 그렇고, 언데드 뺨치는 무조건적인 공격성을 보이는 것도, 그 외에는 설명이 안 되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류 현은 무어라 표현하기 힘든 찝찝함을 느끼고 있었다. 예상대로라면 놈은 지금 부하를 갈아 넣어서 원정대 전력을 간을 보고 있는 것일 터.
‘머리 좋은 놈 상대로 패 까는 건 찝찝하지만 별 수 없지.’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무대응으로 응수할 수도 없었다.
화련이 말한 것처럼 이대로 저 미치광이 자폭병들을 막지 않고 후퇴했다간 전멸은 아니어도, 원정대가 공중분해 되기에는 충분한 타격을 입을 터이니 말이다.
‘별 수 없지.’
류 현은 미련과 잡생각을 떨쳐내고 제 안으로 침전해 들어갔다.
그 효과는 바로 다음 순간 드러났다.
푸스스! 증기 기관의 이음새에서 증기가 새어나오는 것처럼 검은 마력이 스며 나와, 뭉글뭉글 그의 주변을 떠돌았다.
류 현은 합장을 하듯 손을 모았다.
그는 눈을 감은 채로 천천히 제 안의 기억의 편린을 더듬어갔다. 엘더 리치로부터 흡수한 기억을.
후와악! 주변을 떠돌던 검은 마력이 그의 등 뒤로 솟구쳤다. 날개 죽지 주변에서 뻗어나간 마력의 무리는 언뜻 보면 날개처럼 보였다. 류 현은 그것을 여섯 가닥으로 나누었다.
좌우로 여섯 줄씩 열두 줄로 나뉜 검은 마력은,
류 현이 오른 손으로 전방을 슥 훑자 날개의 오른쪽 부분이 갈퀴질하는 것처럼 대지를 긁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쩌적! 푸확! 걸리는 것을 긁어모으는 것이 아니라 닥치는 대로 갈라버렸다는 것! 대지도 예외 없이 커다란 상흔을 입었고 그 상흔은,
콰아앙! 숨통이 끊긴 라가들의 연쇄폭발이 헤집어놓았다.
폭발의 열기나 충격파 자체는 류 현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으나, 그것이 날라온 살점은 달랐다.
치이익! 옷 위나 등 뒤의 날개에 들러붙은 살점이 꾸물거리며 옷과 날개를 갉아대다가 검게 타서 부스러져나갔다.
처음부터 맨살에 닿은 것들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바닥으로 미끄러져 내렸다.
“역시나 저주나 폭발 마법 같은 게 아니었군.”
류 현은 주춤하는 기색도 없이 계속해서 밀려드는 라가들을 보곤 한 숨을 푹 내쉬었다. 직접 닿아보니 확실해졌다.
“에너지 드레인은 좀 뒤로 미루고 싶었는데...”
별 수 없군. 류 현은 불평을 중얼거리는 대신 제 안에 꽉 눌러둔 뚜껑을 슬쩍 비켜놓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류 현이 억눌러둔 ‘탐욕’은 기다렸다는 듯이 튀어나왔다. ‘탐욕’이 조용히 검은 마력으로 엮인 날개에 섞여들었다.
스칵! 푸확! 후두둑! 류 현은 이번에는 왼손을 휘둘러 열 걸음 안까지 다가온 라가 무리를 쓸어내었다.
이번에는 달랐다. 라가의 몸뚱이에서 배어나온 핏물이 대지를 질척하게 적셨음에도 폭발이 일지 않았다.
류 현은 조금 놀란 표정으로 제 왼손을 내려다봤다. 있어야 할 폭발이 일지 않아서 놀란 건 아니었다. 제어하기 힘든 검은 안개를 불러일으킨 건 이러려고 그런 거였으니까.
“미친. 대체 뭘 해놨길래 마력이 이렇게 들어와?”
라가로드도 아니고, 일개 라가 몇 십 마리를 한 번에 썰었다고 들어올 수 없는 마력이 자신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양뿐이면 모르겠지만, 그 질마저도 엄청났다.
마치 전생에 네임드 몹을 한입 뜯어먹었을 때처럼.
‘뭐야 설마 이 많은 라가가 네임드 몹놈 분신이라거나 그딴 건 아니겠지?’
[쿠와악!][쿠룩!] 계속해서 밀려드는 라가 무리가 류 현의 상념이 계속되는 것을 막았다. 놈들이 코앞에서 터진다고 그에게 문제될 건 없지만, 원정대의 대다수 인원들은 아니었다.
‘...일단 이거부터 막고 생각하자.’
류 현은 여러 가닥으로 나누었던 날개를 다시 모아 채찍처럼 길게 늘어뜨렸다. 몸에 닿아있던 연결부위가 손잡이로 변했다.
류 현은 늘어뜨린 검은 채찍을 곁눈질했다. 7성리치의 불채찍과 색깔만 다르지 거의 판박이었다.
‘자꾸 리치놈 흉내 내는 거 같아서 좀 그렇지만...이 형태가 제일 효과가 좋으니까.’
심경정리를 대충 끝낸 류 현은 가볍게 두 팔을 휘둘렀다.
그러자,
슈륵! 쒸이잉! 콰아아! 검은 번개가 대지를 헤집으며 휘몰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