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8화 〉탐식마(貪食魔)
“다음!”
소리 높여 외치기 무섭게 화련의 마력이 류 현의 몸을 공간채로 움켜쥐었다. 류 현은 그것을 거부하지 않았고, 그의 몸은 매에 채인 토끼마냥 휙 떠올랐다.
휙! 상승보다 하강은 훨씬 갑작스러웠다. 거의 추락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
담이 어지간히 큰 이라도 움찔할 정도의 속도였으나 익숙한 류 현은 다음 표적을 똑바로 노려봤다. 막 여성 플레이어 위에 올라타서 목덜미를 물어뜯고 있는 라가 챔피언을.
뻐억! 푸홧! 콰당! 라가 챔피언은 뜯어낸 살점을 삼키기도 전에 뒤로 넘어갔다. 기둥 같은 목 위로 머리가 사라진 채로.
워낙 창졸간에 벌어진 일이라 쓰러져있는 플레이어의 동료가 멍하니 류 현을 바라볼 정도였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 치료에 들어갔으나 류 현은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이라고 외치지도 않았다.
류 현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제 주먹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단단해.’
제 주먹이 먹히지 않아서 한 생각은 아니었다. 10분도 채 안 되는 시간에 라가 로드를 포함한 상위 라가류를 스물 넘게 거꾸러뜨렸으니까. 이 천에 달하는 플레이어 중에서 압도적인 전과였다.
‘상위 괴수들만 그런 게 아니야. 전선이 확실하게 밀린다.’
그 플레이어 무리는 라가의 파도에 밀려나고 있었다. 언덕 아래에서 치고 올라오는 적에게 말이다.
류 현도 예상 못한 일은 아니었다. 단순 머릿수 차이만 두 배니까.
거기에 원정대 머릿수 대부분은 일반병들이었다. 전부 전투원도 아니고 개 중의 절반 정도만 이 전투요원이었고, 나머지는 총은 쏠 수 있지만 그 역할이 아니었으니까.
전투요원들도 끝까지 항전시킬 생각도 없었다. 그럴 수도 없고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눈에 띄게 밀릴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데스 오라도 데스나이트 본체가 거리 안에 있어야 적용되는데 대체...’
키이익! 얼굴가죽이 벗겨진 원숭이 같은 몰골의 라가가 상념을 끊고 들어왔다.
퍼엉! 라가는 단말마도 내지르지 못하고 폭사했다. 류 현은 가면이 벗겨진 채로 달려든 라가였던 시체를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호전성도 비정상적이고. 이정도면 거의 언데드 수준인데. 대체 무슨 수작을 부렸길래 이런 거지?’
‘내구력은 거의 두 단계 올랐고, 호전성은 거의 언데드급. 그런데도 전선을 유지하고 있다라...’
류 현이 느끼기에 라가로드의 몸뚱이는 거의 블랙몹급이 되었고, 라가챔피언은 못해도 준 퍼플급이 되었다.
물론 몸뚱이 내구력이 올랐다고 몹 수준이 그 급이 되는 건 아니지만, 그 사실을 모른 채 싸우게 된 플레이어들에 느끼는 충격은 그 이상이었다.
한끝 차이까지는 아니어도, 괴수의 급에 맞춰서 기술 운용을 할 수준은 되는 베테랑들이었으니까.
그렇기에 피해가 더 했다.
피륙을 찢고, 힘줄을 끊어야 할 검격이 겉가죽만 긁고 끝내는 건 단순히 놀라고 끝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스펙 차이가 하늘과 땅 수준인 플레이어와 괴수간의 싸움에선 말이다.
마력을 펑펑 써서 적을 찍어 누르고, 시험 삼아 팔을 내줘도 문제없는 괴물은 그 혼자였다.
첫 충돌에 수백 명이 죽어나가지 않은 게 그들의 기량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카이로에 있는 놈이 정신 지배 가진 건 확정이고 문제는 육체 버프인데...’
“끄아악!”
“찬, 찬! 젠장, 힐러! 의무병! 이 개새끼들아 빨리 오라고!”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비명이 류 현의 상념을 끊어놓았다. 류 현은 엎어진 동료를 끌어안고 소리치는 이들을 돌보는 대신 허공을 향해서 외쳤다.
“화련 씨!”
훅! 화련은 대답대신 류 현의 몸을 솟구치게 했다. 화련이 떠있는 곳까지 도달한 류 현은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자신을 감싸고 있는 화련의 마력이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거...써야하는 거 아니에요?”
걸고 있던 목걸이를 들어 보이는 화련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언덕 위를 점점 빼앗기고 있는 원정대에 고정된 채였다.
“그렇게까지 세부 조정은 안 되지 않습니까.”
“그래도요.”
류 현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숫자가 너무 많고, 광범위하게 퍼져있습니다. 또 이곳에서 개미지옥을 공개하는 건 예정에 없던 일이고요.”
화련은 쥐고 있던 개미지옥을 놓아버렸다. 큼직한 녹색빛 장식물이 옷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화련은 의구심 섞인 시선을 류 현에게 보냈다.
‘정말로 안 쓰실 거에요?’ 말 한마디도 없었지만 류 현은 그녀의 속내를 읽었다.
“예. 안 됩니다.”
“...알겠어요. 그럼 다음은 어디로 보내드려요?”
“저기 호지슨 씨가 분투 중인 저 곳이요.”
화련은 고개도 끄덕이지 않고 손목을 까딱해서 류 현이 원하는 곳으로 날려 보냈다.
‘우리는 상대에 대해서 아는 게 없는 데 패를 다 깔 수는 없어. 이런 수작을 부릴 놈이면...어떻게든 이쪽을 보고 있겠지. 일단은 최대한 버틴다.’
***
콰직! 망치를 끌어당기기도 전에 핏물과 뇌수가 얼굴을 덮쳤다.
호지슨 버넷은 그것을 닦아내지도 않고 다시금 제 허리통만 망치 머리를 내던지는 것처럼 휘둘렀다.
째앵! 우지직! 뿌직! 강철방패를 앞세워 호지슨을 압박해 들어오던 라가 무리는 공격 한 번에 반수를 잃고 물러나야만 했다.
호지슨은 그 정도로 협상에 응할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후웅! 우직! 빠악! 호지슨은 성난 들소마냥 라가무리 사이로 뛰어들어 닥치는 대로 짓뭉갰다. 걸리는 것이라곤 없었다.
머리통이 분리되거나, 몸 안으로 쑤셔 박힌 라가들이 쓰러지기 전에 호지슨은 제자리로 돌아왔다.
“후우, 후우. 젠장. 무슨 라가가 이렇게 단단해?”
망치질 네 댓 번으로 열에 달하는 라가를 저세상으로 보낸 이답지 않은 말이었으나, 호지슨은 이 상황에 큰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반발력이 와이번 수준인데 이게 대체 어떻게 되먹은 거지? 여기 와서 처음 잡았을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그러나 상황은 호지슨에게 생각에 빠질 여유를 주지 않았다.
“대장! 빨리!”
“젠장, 간다 가!”
[크워어!] 쿠직! 라가 챔피언의 곤봉 궤적에 걸린 인영이 장난감처럼 허공을 날았다.
“스탠! 젠장, 아르가 빨리 와! 힐! 힐!”
“대체 무슨 놈의 힘이...”
“저거 라가 챔피언으로 의태한 다른 뭔가 아냐?”
“개소리 말고 자리 지켜! 씨발, 대장을 대체 언제 오는 거야!”
“여기 왔다 이놈들아!”
쩌엉! 라가 챔피언의 머리 높이까지 점프한 호지슨은 관자놀이를 향해 냅다 망치머리를 휘둘렀다.
하지만 공격은 곤봉에 막혔고, 호지슨은 라가 챔피언의 근력마저 평소와 전혀 다르다는 사실마저 알게 되었다. 전혀 알고 싶지 않았던 나쁜 소식이었다.
‘뭐가 이래? 던전 보스였던 놈들도 이렇진 않을 텐데...’
머릿속이 복잡하게 엉켜가는 것과 다르게 호지슨은 단호함이 느껴질 정도로 신속하게 움직였다.
그의 괴력과 맞서서 가드가 풀린 라가 챔피언의 몸 쪽으로 파고들어,
콰드득! 올려치기로 턱을 뭉개놓은 다음,
우직! 앞으로 넘어지는 라가 챔피언의 관자놀이에 망치 마리를 한 자(尺)가량 쑤셔 박았다. 왼쪽 눈이 밀려나와 덜렁거릴 지경이었다.
쿠웅! 당연히 라가 챔피언은 그대로 고꾸라졌다.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았는지 어깨와 손가락이 꿈틀거렸으나, 머지않아 숨이 끊어질 게 분명했다.
“야 이 새끼들아. 라가 챔피언 하나 못 감당해서 어쩌자는 거야?”
“대장도 방금 상대해 봤으니까 알 거 아냐. 저건 그냥 라가 챔피언이 아니라니까? 힘만 봐도 블루퍼플 보스몹은 그냥 해 먹겠구만.”
“단단하기는 그 이상이고. 왜 라가류만 하나같이 이런 거야?”
“라가로드 그놈 잡느라고 힘을 빼서 그런 거지. 그러고 보니 라가로드 끌고 온 놈들은 어디 갔어? 그놈들 때문에 우리 다 뒈질 뻔 했잖아!”
“팔 다리 잘리고 턱도 나간 놈들을 우리가 다 잡을 때까지 그냥 두겠냐. 후송해갔어. 나중에 찾아가서 지랄하든지 말든지.”
한바탕 잔소리를 쏘아붙일 생각이었던 호지슨은 부하들의 불평에 그것을 다 꺼낼 수도 없었다.
“불평은 나중에 하고, 여기부터 정리한다. 괜히 혼자서 상대한다고 설치다가 부상당하지 말고 확실하게 3인 1조로...”
“대장, 저거 상태가 좀 이상한데?”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돌아보자 호지슨이 고꾸라뜨린 라가 챔피언의 시체가 있었다. 반쯤 깨진 머리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모두 내 뒤...!”
퍼엉! 호지슨이 경고를 다 내뱉기도 전에 라가 챔피언의 머리가 폭발했다. 폭발과 함께 검붉은 살점이 파도처럼 일어나 일행을 덮쳐들었다.
그 직전, 호지슨은 본능적으로 제 몸 위로 마력장막을 둘렀다.
치이익! “아아악!” “끄아아악!”
비명소리가 터져나오자 호지슨은 제 몸을 뒤덮은 살점들을 떼어내며 살점의 늪에서 튀어나왔다.
그도 아무런 대가없이 그러진 못했다. 팔다리를 놀릴 때마다 마력장막 유지에 마력이 쭉쭉 빠져나갔다. 5분 정도만 더 이러면 마력고갈로 리타이어 될 것 같았다.
호지슨이 가장 먼저 발견한 부하는 왼팔이 어깨 죽지까지 검붉은 살점 뒤덮여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쉭! 호지슨은 망설임 없이 허리춤에 달고 있던 보조 장비를 빼들어 그 팔을 썩둑 잘라내었다. 놀랍게도 숨 삼키는 소리 한 번외에는 비명이 뚝 멎었다.
“스탠, 괜찮나?”
“괘, 괜찮습니다. 이것들을 오래 달고 있으면 안 됩니다. 대장, 빨리...”
발치에 깔린 검붉은 살점들을 가리키며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여준 호지슨은 다른 부하들에게도 스탠에게 해준 일을 반복했다.
누구는 다리를, 또 누구는 주로 쓰는 오른 손을, 옆구리 살을 뭉텅 베인 자도 있었다. 개중 누구도 호지슨에게 불평을 내뱉거나, 원한 어린 시선을 보내지 않았다.
출혈부위를 억누르며 신속하게 뒤로 빠질 뿐.
부하들이 빠지는 것을 확인한 호지슨은 한 번 펄쩍 뛰더니 주변을 휘돌아보았다.
‘어디 갔지? 혼자서 내빼진 않았을 텐데.’
찾는 남자가 보이지 않자 입술을 짓씹던 호지슨은 머리 위에서 다가오는 거대한 기척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곤 격하게 손을 휘둘렀다.
류 현을 향해서.
“여깁니다!”
***
카이로라고 불렸던 토지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제단은 처음 인류에게 목격 되었을 때보다 더 높고, 넓어진 상태였다.
제단의 주변에는 횃불이 원을 이룬 채 몰아내고 있었고, 기백이 넘는 횃불보다 많은 숫자의 라가로드와 라가 챔피언들은 제단을 향해서 절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제단의 계단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던 ‘라가로드’ 구엘 뒤 굴락은 더 찢어질 것도 없어보이던 입가를 찢으며 웃었다.
[나의 아이들아, 더 다가 오거라. 더. 그래, 그쯤이면 되겠구나.]
구엘 뒤 굴락은 제단 계단의 바로 아래 미어터질 정도로 옹기종기 모인 라가들을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더니 별안간,
찌직! 푸슉! 오른 손으로 제 왼팔을 잡더니 그대로 몸에서 뜯어내었다.
잡아 뜯은 왼팔을 아래의 무리에게 휙 던져준 구엘 뒤 굴락은 오른 손으로 제 가슴을 쑤시기 시작했다. 오른 손이 들락날락 할 때마다 핏줄기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생명체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수준의 출혈이었으나, 구엘 뒤 굴락은 평온한 표정이었다. 고통도, 출혈로 인한 현기증도 느끼지 않는 듯했다.
[먹거라. 내 살을, 내 피를 취하여 너희의 것으로 만들거라. 그것이 너희의 힘이 되어줄 것이니. 마음껏 몸뚱이를 살찌우거라. 내 아이들아.]
구엘 뒤 굴락의 선언이 떨어지자 게걸스러운 식사가 시작되었다. 던져준 왼팔은 뼈조차 남지 않았고, 흩뿌린 피는 흙바닥에 뿌려진 것조차 흙 채로 라가들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구엘 뒤 굴락은 미소 지었다.
[이번에는 조금 먹을 만한 사냥감이 있는 것 같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