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57화 〉탐식마(貪食魔) (257/429)



〈 257화 〉탐식마(貪食魔)
잘 닦인 견갑이 햇볕을 반사하며 번쩍였다. 그 위에 얹어진 창날은 양쪽이 낚시처럼 휘어져있어 찔릴 이에게는 매우 유감스러운 형태였다.
하늘을 날고 있는 샌 드래곤의 등위에는 강철로 짜인 등자는, 등자라기보다도 가마에 가까운 형태였다. 그 강철 가마 안에는 라가 주술사들이 저주의 구름을 뭉클뭉클 뿜어내고 있었다.

어떻게 봐도 제대로  대장간에서 벼려낸 것이 분명해 보이는 무구들. 그 무구들로 완전 무장한 라가 무리가 사선으로 전진해오고 있었다. 조잡하게나마 육, 공 조합을 맞춘 상태로!

그 모습을 언덕 위에서 바라보던 류 현의 표정은 당연히 좋지 못했다.


“장난 아닌데...? 일반병들 뒤로 빼야하는 거 아냐?”


승하마저 학을 떼며 고개를 내저을 정도였다. 그만큼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라가가 허술해 보이는 장비를 갖춘 채 모습을 드러낸 적은 많았으나, 이런 수준의 무구를 갖춰서 나타난 건 처음이었다.
이런 장소가 아니었다면 무슨 영화촬영이라도 하나 싶었을 것이다. 문제는 발을 딛고 있는 이 땅이 던전화가 진행 중인 아프리카 대륙이라는 것과,


“일반병 애들 뒤로 빼야하지 않아? 숫자가 한 둘이라서 다 못 막을  같은데.”

어설픈 사선진을 이룬 채 다가오고 있는 라가와 기타 괴수 무리의 숫자가 원정대 전체 인원의  배는 족히 넘어 보인다는 것이다.


최소 2만. 전생에서 괴수 군단을 수없이 상대해 본  현이다. 거의 본능적으로 까맣게 몰려드는 놈들의 숫자를 헤아렸다.


‘어떻게 이 지점으로  찝어서 보낸 거지? 연락할 수단이라도 있었던 건가? 그런데...종이 다르잖아? 그 때 잡은 리치들이 라가가 리치가 된 건가? 그게 가능해?’

예상을 뛰어넘는 광경을 목도하자 물음표가 머릿속에 휘몰아쳤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던 와중,  현은 자신이  상황을 지휘하고 있는 개체가 있음을 전제로 깔고 있음에 놀랐다.

어지간해서는 상정하고 싶지 않은 상황.

그것을 저도 모르게 받아들일 정도로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상식을 초월했다.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하는 놈이 없다고 생각하는 게 이상하지. 라가 로드만 해도 이보다 훨씬 작긴 해도 무리를 통솔해서 군대처럼 부리곤 하니까.’


무장의 질이나, 병력의 수, 병력의 질에서 비교도 안 될 지경이었으나 류 현은 단순하게 접근하기로 했다.
빠른 판단이 필요한 상황.
라가 로드의 몇 십 배의 장악력을 가진 괴수가 이 병력을 보내왔다고 전제하기로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하는 놈은 여기 안온 것 같고.’

눈에 띄는 커다란 마력 파동은 없었다. 장거리 텔레포트라는 변수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것까지 넣기 시작하면 끝이 없었다.
 지휘를 맡은 개체는 이 자리에 없다. 판단이 서자 류 현은 곧바로 움직이기로 했다.

“버넷씨.”
“...예!”

뒤편에서 턱이 빠져라 입을 쩍 벌리고 있던 호지슨 버넷이 갑작스러운 호명이 후다닥 앞으로 나왔다.


“일반 병사들을 중앙에 두고, 플레이어들이 양익을 맡을 겁니다.  충돌 전에 저지력을 충분히 발휘하는  중요하니 특수탄으로 전부 갈아두라고 하시고요. 배치는 C-02로. 나머지는 버넷 씨가 저보다 잘 아실 테니 맡기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호지슨 버넷은 대답을 다 내뱉기도 전에 후다닥 언덕을 내려갔다. 그의 부하들이 언덕을 내려가는 것까지 본 승하가 물었다.

“중앙에 둔다고? 빼는 게 아니라? 쟤들 저거  보여?”


승하가 손가락질 하는 곳을 돌아볼 필요도 없었다. 번쩍번쩍 햇볕을 반사하고 있는 판금갑옷을 가리키고 있을 테니까.
판금 갑옷이라고 총알이, 그것도 대 괴수탄이 안 통할 리는 없겠지만 효과가 급감할  분명하다. 아무리 저급 괴수라도 화기에 대한 저항력은 어지간한 대형 동물 이상이니까.
거기에 판금 갑옷까지 걸쳤다? 그것만으로도 일반 병사들을 뺄 이유로는 충분했다. 방어력이 증강된 괴수가 탄막을 뚫고 접근하면 대처할 능력이 전혀 없으니까.
류 현도 언덕 위에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그냥 물렸을 것이다.

“그들을 빼버리면 우리가 가진 대군 저지력이  이하로 떨어집니다. 그렇게 하더라도 숫자가 많긴 해도 저것들을 잡는 데는 문제없겠지만...숫자에 밀리는 곳이 나오는 건 막기 어려울 겁니다.”

지룡이나 샌 드래곤, 라가로드, 라가챔피언 같이 퍼플급 괴수들이 대충 봐도 백에 다다를 정도지만 결국 절대 다수는 라가 하위몹들이었다.

문제는  하위 몹들이라도 저만한 숫자가 난전을 걸어오면 병력 피해가 없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플레이어라도 모두가 류 현처럼 단단하면서 회복도 빠른 몸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니까.

보급약품으로 회복될만한 상처든 아니든 손해는 손해.


‘재수 없어서 사망자라도 하나 나오면 끔찍해지는 거지.’

원정대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상태다. 가뜩이나 제반 여건이 좋지 못한 편이라 시간에 쫓기고 있는데, 연달아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피부에 와 닿는 피해를 입기 시작하면 원정대 분위기는 정말 끔찍해질 것이다.

“최대한 쓸  있는 건  써야죠. 일단 중앙군의 앞은 막아둘 겁니다. 승하 씨가  맡아주셨으면 하는데...괜찮겠습니까?”
“오케이. 앞을 틀어막으라는 거지?”
“일단은 돌격팀을 데리고 중앙군 옆으로 이동해 계십시오. 자세한 건 무전 치도록 하겠습니다.”

승하는 군말 없이 몸을 돌려 달려 나갔다. 무전으로 자신이 맡은 돌격팀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희란  이리 앞으로 나와 주시겠습니까?”
“네? 네엣!”

희란이 넘어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후다닥 튀어나왔다.  현은 흐트러진 망토를 정리해주려다가 희란의 하얗게 질린 얼굴을 보고 그만두었다.
함께 한 지 하루 이틀도 아닌데 어떻게 대해야할지 영 감이 안 오는 아가씨였다.

복잡한 심경과는 별 개로 류 현은 침착하게 언덕 아래 지점을 가리켰다.


“이곳, 그리고 이곳. 저곳을 차례대로 유성우로 타격해주셨으면 합니다. 가능하시겠습니까?”
“네에...할 수 있을 거 같아요. 꼭 할게요.”


고개가 떨어져라 끄덕거리는 모습이 조금 불안하긴 했지만 류 현은 다른 말을 하진 않았다. 겉보기에는 첫 원정을 앞둔 초짜 같았지만, 그녀의 마력 흐름은 잔잔한 호수 같은 상태였으니까.


“어, 어디요?”
“다시 짚어 드릴 테니 일단 저곳부터 무너뜨리시면 됩니다.”
“한 점 집중으로요?”
“예, 범위 타격은  번째부터 저놈들 머리 위에 떨어뜨리는 걸로 하죠.”

희란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가슴팍에서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주머니를 털자 반지  개가 나왔다.
각각 붉은 빛과 푸른빛을 품고 있는 반지들.청뢰와 유성우였다.
 현은 희란이 제 몸을 지킬만한 수준이 되었다는 판단이 서자  아티펙트를 희란에게 넘겼다. 괜히 꼭꼭 숨겨뒀다가 필요할 때 그 자리에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으니까.
‘펠릭스’ 때 습격을 당한 이후  현의 생각은 더 굳어졌다. 거의 떠넘기다 시피 희란의 손에 쥐여주었다. 희란도 몇 번 거절을 표하더니 귀까지 빨개져서는 마지못해 끄덕거렸었다.

 유성우를 왼손 검지에  희란은 반지에 마력을 밀어 넣기 시작했다. 몇 번이고 희란의 마력을 받아들였던 유성우는 탐욕스럽게 마력을 빨아들였다.


쿠구구구! 이내 하늘에 검은 구름이 몰려들더니 대기를 긁는 것 같은 굉음에 터져 나왔다. 굉음을 끌고 온 것의 모습이 드러났다. 이전과는 다르게 검붉은 불꽃에 감싸인 커다란 바윗덩어리들!
유성우가 쏟아져 내렸다.

콰아앙! 빛이 세상을 집어삼킬 것처럼 내뻗더니 폭발음이 뒤따라 터져 나왔다.
첫 번째 유성이 떨어졌음에도 희란은 이를 악물고 집중력을 돋웠다.
유성우는 청뢰와 비교해서 마력 소모량이나 파괴 범위까지 많은 부분이 달랐으나, 그 중 가장 차이가 심한 것은 이 아티펙트가 더럽게 조종하기 어려운 물건이라는 것이었다.


쿠앙! 뻐엉! 불덩이들이 대지를 찢어발겼다. 다른 소리는 용납하지 않을 것처럼 굉음이 대기를 뒤흔들었다.
이 어마 무시한 광경에 다가오던 라가 군단은 물론, 유성우의 존재를 소집일 오리엔테이션을 통해 통보받은 원정대조차 움찔할 정도였다.
대부분이 넋을 빼놓고 있는 가운데 누군가가 홀린 것처럼 중얼거렸다. “저게 인간인가?”

그러거나 말거나 희란은 류 현이 가리키는 지점을 향해서 2차, 3차 유성우를 쏟아 부었다. 신경이 끊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청뢰도 그렇긴 하지만 유성우는 컨트롤 미스가 나면 대형 참사를 일으킬 수 있는 아티펙트다.
계속되는 유성의 공격에 대지가 찢겨나가며 울부짖었다.

“후우...”

5분도 안 되는 시간 만에 3차례 유성폭풍을 쏟아 부은 희란은 식은땀과 함께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었다.

“고생하셨습니다. 네  째가 필요하면 제가 무전을 칠 테니까 저놈들 최후미에 때려주시면 될 겁니다.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지만요.”
“바, 바로   있어요. 아직 마력도 많이 남았고...”

그렇게 대답하던 희란은 그것이 류 현에게서 퍼온 마력이라는 것을 떠올리곤 그의 눈치를 살폈으나,  현은 그녀가 그런 생각을 하는 줄도 몰랐다.
유성우가 일으킨 먼지구름이 걷히자 처참하게 후벼 파인 대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라가 군단은 갑작스럽게 생겨난 구덩이 때문에 전진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유니크 아티펙트 숙련도 쌓는 속도가 빨라. 그래도 이 정도 화력이 나올 거라곤 생각 안했는데 말이지.’

“아직 전투 초반입니다. 초장부터 힘을  필요는 없지요. 혜라양, 희란 씨를 좀 부탁드립니다.”
“걱정 마세요. 딱 붙어서 안 떨어질 테니까요.”
“화련 씨는 절 좀 서포트 해주셔야겠습니다. 가시죠.”

화련은 대꾸 없이 언덕을 내려가는 류 현을 따랐다.  현은 한 시간 돌리는데 억이 깨지는 무전기로 각  팀장들을 호출하기 시작했다.

***

[캬아아악!] 뻐억! 뿌지직!
파쇄권이 터질 시간도 없이 손가락이 라가로드의 머리통을 찢어놓았다. 반쯤 찢어진 머리가 허연 물을 찔끔찔끔 내뿜었다.
류 현은 그것에 다시 시선조차 주지 않고 외쳤다.


“다음!”

외침과 함께  현의 몸 주변 마력이 끓어올랐다. 그리곤 몸이 두둥실 떠오르는가 싶더니,  바람에 채인 비닐봉투처럼 날려갔다.
멈춰선 그곳에는 막 플레이어의 팔을 물어뜯어낸 라가로드가 있었다.
놈도 멀쩡하진 못했다. 옆구리로 내장이 비어져 나와 있었고, 허리에는 장검이 박혀있어 어떻게 움직이는지 신기할 지경.

그러거나 말거나  현은 발을 놀렸다.


빠각! 퍼엉! 후두두둑! 발등이 라가로드의 인중에 닿자마자 머리가 수류탄마냥 터져나갔다. 뇌수와 핏물, 두개골 조각을 뒤집어 쓴 플레이어들이 움찔했으나 류 현은 지체없이 다시 외쳤다.


“다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