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53화 〉탐식마(貪食魔) (253/429)



〈 253화 〉탐식마(貪食魔)

“그러니까 나보고 자살 특공이라도 하라고?”
“자살 특공은 아니지요. 보급도, 병력 지원도 확실히 받을 테니까요.”
“예로부터 죽으려고 꼬라박는 놈들도 대접은 잘 받았지. 뒈질 거라는 걸 말을 안 해주는 게 대다수라서 그렇지.”
“그럴 의도가 아니라는  아시지 않습니까. 저흰 지벡 건터 씨가 오래 버텨주길 바라야 하는 입장이고요.”
“그게 끝까지 살아있길 바란다는 뜻은 아니지.”


웨인은 훅하고 콧김을 뿜고는 소파에 등을 기대었다. 이렇게 드러내놓고 감정을 표시하는 건 드문 일이지만, 그도  수 없었다.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도무지 들어먹을 생각을 하질 않는다. 차라리 다섯 살 배기 애라면 원하는  쥐어 주고 살살 달래보기라도 할 텐데, 이십대 후반을 바라보는  양아치는 사람 말을 들어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어지간한 건 다 가졌으니 협상이 쉽지 않은 건 당연했다.

‘하긴 평소 같으면 오라고 올 인간도 아니지.’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그를 불러내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설사 기적적으로 불러내는데 성공하더라도, 지벡의 말대로 자살 특공에 가까운 유격대 대장을 맡아달라는 소리를 듣자마 뛰쳐나갔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지벡이 툴툴 거리는  상황을 달리 말하자면 지벡 건터는 그런 자살 특공대에 가까운 집단의 대장자리를 맡아달라는 소리를 듣고도 뛰쳐나갈 수 없는 처지라는 의미다.


“그럴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아프리카 원정이 끝날 때까지 건터 씨가 버텨주길 바랍니다. 그 때문에 이런 것도 받아왔지요.”

웨인은 탁자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종이 한 장을 검지로 짚었다. 번잡하게 외교 용어가 나열되어 있는 문서를 한 줄 요약하면 이랬다. ㅇㅇ이 지휘할 유격대에 전적으로 협조하며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 유럽의 28개국의 대표들이 싸인한 문서치고는 내용이 상당히 조악했으나, 반대로 그 때문에 다급함이 느껴졌다.

“...대체 그 놈이 어떻게 이런 걸 받아낸 거야? 그놈들이 이렇게 빨리 움직일 리가 없는데?”
“발 바로 앞에 불이 떨어진 상황에서는 누구나 그렇게 되지요.”
“...젠장할.”

웨인의  대로였다. 아프리카에 벌어진 대륙 스케일의 이상현상에는 몸을 사리던 유럽은 언데드 군단이 루마니아의 수도가 뚫리자마자 세상의 종말이라도 온 양 온갖 곳에 손을 뻗치고 있다. 괴수와 관련된 일에 한해서 한 수 아래로 보고 있던 미국에도 손을 벌릴 정도이니 말 다한 셈이었다.

북상한 언데드 군단이 우크라이나를 국경부터 아주 갈아버리기 시작하면서 그것이 옳은 판단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이봐, 웨인 크로이츠. 내가 전에 한 말을 잊은 건 아니겠지? 난 살고 싶어서 이리로 온 거야. 그것도 내가 자는 방에 독가스를 풀거나 건물을 통째로 날려버릴 수 있는 인간들이랑 척까지 져가면서. 그런데 나보고 네임드 몹이 이끄는 언데드 군단 상대로 유격전을 하라고?  끔찍하게 죽으라는 것 밖에  돼?”

절박한 호소였지만 웨인에게는 코웃음 밖에 안 나오는 말이었다. 그렇다고 실제로 코웃음 치진 않았다.


“말은 바로 해야지요. 척을   아니라 몸을 의탁하러 오신 것 아닙니까. 거기다가 그쪽이랑 적대하는 행동을  것도 아니라 아직 리스크도 없고요. 결정적으로 저희가 얻은 게 없지 않습니까.”

사실만 말해도 지벡의 말문을 틀어막는 데는 충분했으니까. 말문이 막히는 걸 넘어서  씹은 표정으로 변하게 만드는  충분했다.

“그럼 내가  친구를 위해서 목숨이라도 걸어야 된다고?”
“그래야 한다고 말씀 드린 적은 없습니다만. 적대 행동을 해오던 이가 의탁해오면 찝찝할 거라는 건 누구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젠장, 말 꺼낸 당일에는 별 말 없었잖아.”


웨인은 다른 말은 하지 않고 빙긋 미소 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지벡 건터는 아주 바보가 아니고, 경험이 많은 플레이어이니 이것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겨서 였다.

그리고 지벡은 웨인의 미소의 뜻을 정확히 해석했다. 그는 기세가 한 풀 꺾여 변명하는 것처럼 궁시렁거렸다.

“...적대 행위 같은 건  적 없어.”
“하지만 적대행위를 하는 작자들에게 열심히 정보를 파셨겠지요.”
“그건 그 원정대에 속했던 놈이면 누구나...!”
“누구나?”

지벡은 말을 마저 내뱉는 것 대신 한숨을 내쉬었다. 그도 뻔히 아니까.


다른 이들이 했던 일이라도 그것이 면죄부가 되진 않는다. 그가 제공한 정보가  것 아니라는 사실도 별로 중요하진 않았다. 아쉬운  지벡이었으니까.


“젠장, 내가 뭘 피해서 여기 온 건지 기억은 하는 거야?”
“지벡 건터 씨가 대놓고 배신 선언을 한 것도 아니고, 눈에 띄는 행동을  것도 아닌데 그 쪽에서 어떻게 알겠습니까. 알아도 당장은 건드릴 생각은 못할 겁니다.”
“...네 이야기가 아니라 그렇게 간단하게 말할  있겠지.”
“글쎄요. 어디 간다고 암살 위협 안 받는다고 장담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던 지라.”

웨인이 웃으며 받아넘기자 지벡은 재차 말문이 막히는 수밖에 없었다. 눈앞의 남자는 정말로 세계구급 플레이어 중에서 가장 많이 습격당한 자니까. 지금이야 암살자가 불쌍해질 정도로 괴물 같이 강해졌지만 그렇다고 이전의 암살시도들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어차피 그쪽에서도 복귀 명령이 떨어졌을 텐데요. 아닙니까?”
“아주 폰에 불이 나고 있지. 씨발, 괴물 아가리에 밀어 넣을 때는 언제고...”
“유럽이 날아가면 피해규모 운운할 상황이 아니게 될 테니까요. 아무리 세력 확장이나 정치질이 좋아도 집에  불부터 끄고 봐야하지 않겠습니까.”

지벡은 여유로운 미소를 띠고 있는 웨인의 얼굴을 힐끗 훑어봤다. ‘이런 타입은 아니라고 봤는데. 웨펀 마스터도,  괴물도.’ 자신이 생각해도 무모한 정도가 아니라 멍청해 보이는 의탁시도는 팀을 이끌고 있는  현의 행보를 보고 정한 것이었다.

류 현이라는 괴물은 권력도, 재력도, 여자도, 향락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고 오직 괴수만 잡아 족쳤으니까. 괴수에 대한 원한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하고, 개인의 영달은 엿 바꿔먹은 행보를 보고 지벡은 대의라는 단어를 떠올릴 수 있었다. 조국의 배신을 알기 전에 자신이 매달렸던 것에 목숨을 건 자.


그런 인간이라도 자신을 보호해 줄 거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지만 적어도 목을 날리진 않을 거라고 여겼다. 실제로도 그의 예상은 들어맞았고, 류 현은 지벡을 없는 사람 취급할지언정 못 살게 굴진 않았다.

그것에서 희망을 보고 친구를 어떻게 빼내서 데리고 와야 하나 고민할 때 데스 나이트가 루마니아의 수도를 유령의 집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래 이게 정상이지. 정상인데...젠장.’


당연히 스폰서들로부터 귀환 명령이 떨어졌고, 지벡은 이 일을 기점으로 이탈을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데 류 현이 부탁을 가장한 명령이나 다름없는 말을 웨인을 통해서 전해온 것이다.


“내가 거기서 목숨 걸고 총알받이 하면. 보호라도 해준데?”


불과 1,2년 전이라면 상상도 못할 정도의 저자세였다. 자존심 문제를 떠나서 딱히 세력이 없는 개인에게 의탁하려고 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가족도 아니고 생판 남을 보호해줘 봐야 한계가  하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스스로 끈을 자르고 있는 연 위에 타고 있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 연이 산만한 불길로 뛰어들고 있다면 더더욱.

“글쎄요. 원래대로 라면 했어야 하는 일을 교섭재료로 쓰는 건  그렇지 않겠습니까?”
“제기랄, 그럼 나 보고 뭘 어쩌라고?”
“라고 해버리고 싶지만 류 현님께선 조금 생각이 다르시더군요. 일이 해결 나고 나면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시겠다더군요.”
“긍정적 검토? 사람을 지옥으로 밀어 넣으면서 잘도 말하는군.”
“대책 없이 사람을 지옥으로 밀어 넣을 정도로 무정하진 않습니다.”


웨인은 그리 말하곤 자리 밑에서 007가방을 하나 꺼내서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내려놓을 때 묵직한 소리로 봐선 총이든 종이들 어지간한 양이 아닌 건 분명했다. 그런다고 지벡의 표정이 풀리진 않았지만.

지벡은 마력으로 안력을 돋워 안에  내용물 중에 아티펙트도 있다는 것을 알아내었다.


“거기 가서 보급 대달라고 하면 아티펙트 같은  트럭 단위로 받을 수 있어. 각서 같은  바라지도 않으니 확언을 달라고 전해.”
“그런 말씀은 성능을 확인해본 뒤에 하셔도 늦지 않을 겁니다.”


웨인은 소파 옆에 기대어 놓은 원통형 화구통을 어깨에 메곤 턱짓했다.


“가시죠. 입 아프게 설명하는 것보단 직접 보시는  백배는 나을 겁니다.”


지벡 건터는 그로부터 3시간 후 베를린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똥 씹은 얼굴로 퍼스트 클래스를 혼자 점령한 그의 품에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화구통이 안겨있었다.

***

비릿하면서 찝찔한 바닷바람이 얼굴을 훑고 지나갔다. 류 현은 도무지 좋아지지 않을 것 같은 바다 냄새를 애써 무시하며 지평선 너머를 멍하니 바라봤다.


‘이집트에 도착하면...그 때부턴 정말 미지의 영역이군.’


항모 전단만 셋이 딸린 아프리카 원정대는 예멘에서 출발해, 이집트의 항구도시인 후루가다를 목표로 잡고 천천히 이동 중이었다. 원래라면 사흘이상 걸릴 수 없는 거리였으나, 그들은 사흘째 바다 위를 항해중이었다.  현이 타고 있는 함은 그 중에서도 선두함인 cvn-80 인디펜던스호 였다.


말이 원정대지 규모가 세계 3차 대전을 치르러 간다고 해도  정도라 이동속도가 빠를 수가 없었다. 원정대에 참가한 플레이어 숫자보다 일반병력의 수가 스무 배를 훌쩍 넘을 정도니  다한 셈이었다.


거기에 이집트가 팽창하면서 홍해가 흑해처럼 변해가고 있어 항모전단이 그 좁은 틈을 통과하자니 속도가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기껏 끌고 온 병력을 예멘에 대기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이다. 이집트가 홍해 쪽으로 팽창하는  멈추지 않았다면 정말 그랬어야 했을 것이다.

‘플레이어만 이 천이라...’

그냥 숫자만 채운 이 천명이 아니라 고르고 고른 최상위 플레이어가 오백여명에 그들과 호흡을 맞춰온 이들이 천이 조금 넘고, 나머지는 각국에서 이름난 서포터들이다. 주력 쪽은 헌팅 레벨 평균이 거의 200대를 바라보는 100대 후반이나 말 다한 셈. 그들을 아무렇게나 열  명씩 묶어서 퍼플 던전에 밀어 넣어도 클리어 하는데 문제없을 정도다.


아무리 블랙 던전이 출현하고 시간이 지나 플레이어 수준이 오르면서 헌팅 레벨의 가치도 전 같지 않다지만 어마어마한 전력임은 아무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유럽에서 때 아닌 할로윈 광풍이 불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쥐어짰다고 해도 무방한 전력이다.


‘내전이 없이 넘어간 게 크긴 크군. 블랙 던전이 예상보다 빨리 열린 탓인가? 아니면 아직 게이트가 괴수를 쏟아내지 않아서?’

 현이 아는 역사대로라면 이맘때쯤에 한창 군벌들이 발호해서 서로 물어뜯다가 소멸하는 걸 반복하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아직 류 현이 기억하는 군벌이라고 할 만한 집단은 발호하지 않았고, 인류 문명은 건재하다. 너무 건재해서 원정대 출발 전에 류 현이 언론으로부터 출전 연설 요청을 받았을 정도로 말이다.

아무리 정보를 통제해도 항모 전단이 움직이고, 플레이어들이  단위로, 그것도 어중이떠중이가 아닌 상위 플레이어들로 모았는데 정보가 안 샐 수는 없었다. 애초에 아무도 이 작전이 비밀리에 진행되어 모든  정리된 후에 결과를 발표할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았고 말이다.

류 현은 당연히 그것을 딱 거절했고, 협회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그 뒤로 언론 접촉을 아예 차단해버렸다. 그는 용사 흉내는 낼지언정 광대가 되려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얼굴 팔아서 명분을 쥘 수 있으면 얼마든지 하겠지만 아직은 아니지. 절박함이 부족해. 정부도 반응도 그렇고.’
‘타격이 그리  크니 이런 건데...이걸 좋아해야하나.’

“왜  혼자서 청승 떨고 있어요?”


류 현의 고개가 목소리의 진원지로 돌아갔다. 화련은 함교 위를 살피면서 류 현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청승이라니...자꾸  좋은 것만 닮아가네.’ 승하와 붙어 다니더니 말투마저 닮아가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팀 동료랑 붙어다니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이런저런 생각이 들어서요. 그래서 바람쐐서 기분 전환이라도 하려고 했는데 잘 안 되는군요.”
“맨날 혼자 끌어안고 끙끙 앓는 버릇들이니까 그렇죠.”

화련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그의 옆에 섰다.  현은 화련의 눈치를 살피다가 툭 내뱉었다.


“불안하시지 않습니까?”
“불안하냐고요?”
“예. 아무래도 이번 원정은 정보가 없다시피 하고...”
“뭐 그렇긴 하네요. 마스터도  겪어봤다고 하셨고.”

화련은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기지개를 켰다. 슬슬 목을 까딱거리며 푼 그녀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근데 막 불안하거나 그렇진 않네요. 마스터 때문에 간덩이가 커졌나?”


킥킥거리면서 가슴 아래를 손으로 짚는 그녀는 자신의 말처럼 불안함이라고는 없어 보였다. 화련은 여전히 풀릴 기색이  보이는 류 현의 얼굴을 한 번 들여다보곤 그의 팔을 툭 쳤다.


“괜찮아요.”
“예?”
“괜찮다고요. 마스터 혼자서 하나부터 열까지  계산하고 리스크 저울질 안 해도.”
“......”
“실컷 마스터 경험으로  빨아놓고 이런  하긴  쪽팔리는데...정보 없다고 내빼거나 마스터 의심할 일 없으니까 걱정 안하셔도 되요.”

류 현은 멍하니 화련을 바라봤다. 히죽 미소 짓는 그녀의 모습에 적절한 대꾸를 찾던  현은 그냥 마주 웃기로 했다.


“으음...마스터 웃는 표정 연습 좀 하셔야겠네요. 세아 언니랑 남매인데 왜 이렇게 다르지.”

그렇게  것을 곧바로 후회하게 되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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