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1화 〉탐식마(貪食魔)
“그 표정 진짜 악당 같다. 그것도 조폭 영화에 나오는 탈법조폭 같아. 혜라 놀란 거 봐.”
“아니 무슨 비유를 해도 그런 식으로 하십니까.”
반문하긴 했지만 류 현은 흠흠 목을 가다듬는 척 굳힌 표정을 느슨하게 했다.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평소의 무덤덤한 얼굴로 돌아간 것뿐이었지만.
“흠흠, 분배율 조정 자체는 유엔이나 협회 측에서 제시한 큰 틀 외에는 별 의미가 없을 겁니다. 카이로 안에 뭐가 있는지, 카이로까지 가는 길에 뭘 만날지, 뭘 꼭 잡아야 하는 지조차 모르니까요. 정말로 안에 라가만 가득 차 있으면 분배율 자체가 의미 없어지겠죠. 항모전단을 움직이는데 든 기름 값도 안 나올 테니까요.”
“그럴 리가. 걔들도 차라리 그러길 바라긴 하겠지만...라가 군단 편성하겠다고 이 난리를 칠 리가 없지.”
“예, 아마 그렇겠죠. 그 안에 네임드 몹이 몇 마리 자리 잡고 있냐를 따져야할 정도니 말입니다.”
“네임드 몹이라니...걔들은 무슨 포화기간 같은 것도 없이 이렇게 막 튀어나와도 되는 거래요?”
화련의 투덜거림에 류 현은 어깨만 으쓱 해보일 뿐이었다. 화련도 동의나 해답을 바라고 한 소리는 아니었기에 더 투덜거리진 않았다.
“근데 카이로 중심부에 네임드 몹이 있는 거면 돌격팀 데리고 가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가봤자...”
다 개죽음 당할 텐데. 화련이 뒷말을 내뱉지 않았으나 모두가 그녀가 삼킨 뒷말을 알아차렸다. 그 부분은 류 현 또한 고심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했다. 류 현은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그렇다고 우리 팀만 돌입하는 건 말이 안 되니 참 곤란한 일이죠. 카이로까지 같이 가다가 앞에서 그쪽은 실력이 딸려서 개죽음 당할 테니 기다리고 있으라고 할 수도 없고요.”
“그랬다간 돌격팀이랑 한 판 붙어야 할 걸요.”
류 현은 쓴웃음을 짓는 것으로 동의를 표했다.
목숨 걸고 일하는 플레이어들, 그것도 지옥을 몇 번이나 몇 번이고 정면 돌파해서 지금의 경지를 이루었을 상위 플레이어들은 제 실력을 부정당하면 눈이 돌아가도 이상하지 않다.
더욱이 이번처럼 사전에 유서를 받아놓고 참가를 받는 작전에 참가하는 이들의 각오는 보통이 아닐 터.
‘지중해에서 검은 리치성 잡을 때처럼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그 때랑은 규모가 차원이 달라. 카이로 안에 무슨 변화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대기권 밖에서 촬영하는 것도 안 될 정도면...그 근처까지 데리고 가는 것도 좀 그렇지. 사지에 데려다 놓은 꼴이 될 거야.’
류 현이 인도주의자라서 그런 건 아니었다. 막을 수 있는 사고 때문에 괜한 전력 손실을 원치 않았기에 하는 고민이었다. 회귀자인 그로서는 도저히 간과할 수 없는 문제.
3차 ‘대소환’은 네임드 몹의 등장도 골치 아프지만, 실질적으로 인구수를 갉아먹는 건 그 아래의 괴수 군단이다. 강력한 소수가 아무리 노력해도 대군이 가지는 저지력은 가질 수 없는 법.
‘카이로 쪽을 해결하더라도 아프리카에 풀린 괴수들은 그대로 남아. 전생보다 잘 풀려서 내전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았지만, 전생과 얼마나 달라질지도 모르는데 괜한 전력손실은 피해야 한다. 칼리프 클랜은 앞으로 우리 요청을 무시할 가능성이 높으니 더더욱 피해 없이 작전을 마쳐야 해.’
큰 피해가 날 경우 전사한 플레이어의 소속국가 사이에 불편한 기류가 생성되는 건 덤이다.
“끙...그 전권 반납하면 안 돼? 어차피 카이로 들어가서 그 안에 있는 것만 슥삭 하고 나올 거잖아.”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십쇼. 지금 이집트에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는데, 그런 곳에 우리끼리 들어가긴 왜 갑니까. 거기다가 저쪽에서 먼저 나서서 같이 가자고들 하는데.”
“아- 몰라. 난 이런 거 쥐약이야. 나빼고 의논해.”
소파 위에 벌렁 드러누우려는 승하를 혜라가 눈빛만으로 다시 앉게 만들었다.
“제발 좀 머리 굴려야 할 거 같으면 사람 맥 빠지게 만드는 소리부터 뱉는 버릇 좀 고쳐요.”
“내가 보탠다고 뭐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궁시렁거리던 승하는 혜라의 눈빛이 더욱 날카로워지자 입을 다물었다. 혜라는 소리 없는 한 숨을 내쉬고는 류 현에게 물었다.
“상륙 작전에 동원되는 병력의 대략적인 수치가 어느 정도죠?”
백혜라는 상륙작전 계획서에 찍힌 CSG라는 단어를 손으로 짚으며 물었다. 그 뒤에는 3~4라는 숫자가 찍혀있었는데, 너무 어려서 대규모 토벌전에 참가해 볼 기회가 없었던 그녀는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항모전단을 줄여놓은 거야. Carrier Strike Group이었지 아마.”
“아, 항모전단...네?”
“대륙규모 이변이 터졌으니 어설프게 접근했다가는 전력만 깎아먹을 거라는 걸 다들 느끼고 있는 거죠. 그렇다곤 해도...미국이 좀 무리하는 거 같긴 하군요. 혼자서 항모전단 셋을 대주겠다니.”
“자기들도 그렇게 될 수도 있는 거니까 불안한 거겠지. 뉴욕의 천공성 아직 그대로 있다면서?”
“예, 보였다가 안 보였다가 하긴 하는데 하루 이상 안 보이는 경우는 없다더군요.”
미국은 사흘이 멀다 하고 천공성에 관한 자료를 보내주고 있다. 자국민에게 알리지 않는 기밀을 실시간으로 공급하고 있는 이유는 뻔했다. 아프리카 대륙에 일어나고 있는 일이 자국 내에서 터졌을 때, 외면 받지 않기 위함일 터.
“뉴욕에 카이로 같은 게 터지면...진짜 끔찍하겠네. 동부는 날아가는 거 확정이고. 그 보다는 여파로 죽는 숫자가 더 많을 것 같지만.”
“미국이니까요.”
던전의, 플레이어의 시대에 스타트를 잘못 끊는 바람에 메인 스트림에서 이탈했다지만 경제적, 정치적 영향력은 여전하다. 미국의 식량 생산량만 생각하더라도 뉴욕에 카이로에 일어난 현상이 똑같이 벌어진다면 그냥 끔찍한 정도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영향력 부분을 제하고도 류 현은 아프리카 꼴을 나는 걸 두고 볼 생각은 없었다.
‘이거저거 많이 변했지만 미국은 여전히 협조적이니까. 아니더라도 그냥 내버려둘 수도 없고.’
“아프리카 얘기로 다시 돌아가죠. 협회나 유엔 상륙군에 참가한 국가들이 이거저거 보내주겠다고 하긴 했는데 우리 입장에서는 제원은커녕 뭐하는 건지도 모르는 것들만 잔뜩 적혀있어서 봐봐야 알 수 있는 것도 없죠.”
류 현은 무릎 위에 올려놓은 테블릿 피시를 조작했다. 곧 다른 이들의 테블릿 피시에 수신음이 터져 나왔다. 네 여자가 류 현을 바라보자 류 현은 받은 것부터 보라고 손짓했다. 그녀들이 화면을 읽어 내려가는 듯하자 류 현이 말했다.
“저희가 쓸 수 있는 아티펙트와 시약 재료입니다. 확보된 재고는 좌측하단에, 재고가 부족하면 최대한 구해주겠다고 하니 빨리 요청을 넣는 게 나을 겁니다.”
카탈로그를 뒤적거리던 화련은 우측하단의 페이지 수를 보고 그것을 그만두었다. 도저히 이 자리에서 다 못 볼 양이었다. 검색기능도 달려있긴 했지만 당장 떠오르는 것들만 시키고 말 것도 아니고 말이다.
“이 정도로 그냥 퍼줄 줄은 몰랐는데...본 드래곤 때도 이렇진 않았잖아요? 눈에 보이는 변화가 엄청 크긴 하네요. 도쿄가 폭격당해도 이렇게 퍼주진 않았는데.”
“유럽 입장에서는 아프리카에서 못 막으면 자기네 앞마당이 위협받게 되니까요. 칼리프 클랜이 있긴 하지만...거기서 막는 건 별로 좋은 방법은 아니죠.”
“어찌됐거나 우리 입장에서 나쁠 건 없잖아? 아니었으면 입국부터 시작해서 이동수단까지 골머리 썩혔어야 했는데. 이참에 왕창 뜯어먹자고. 오, 이 칼 판매 불가라더니 여기 올려놨네.”
“...언니는 속 편해서 좋겠네요.”
“야, 그렇다고 저 쓰레기 놈들. 자기 집 근처에 불나니까 그제야 나서? 도와주나 봐라! 이럴 순 없잖아. 어차피 해야 될 거 받을 수 있을 때 받는 게 낫지. 우리가 무슨 사기 쳐서 뜯는 것도 아니고. 어, 이거 저번에 네가 사고 싶다던 아티펙트 아냐?”
“갑자기 왜 삼천포로...어? 진짜네? 재료를 더 못 구해서 단종됐다고 했었는데!”
금세 쇼핑에 빠진 그녀들을 보고 픽 웃던 류 현은 자신도 카탈로그를 다시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강찬에게 필요한 부산물이나 아티펙트를 요청해놓긴 했으나, 승하의 말대로 뜯어낼 수 있을 때 뜯어내는 게 좋으니까.
한 5분 정도 카탈로그를 들여다보며 이야기를 나눴을까? 그들은 방으로 다가오는 인기척 하나를 느끼고 복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인기척은 순식간에 방문까지 도달하더니, 문을 부술 것처럼 열어젖히고 들어왔다.
“...웨인 씨?”
“죄, 죄송합니다. 워낙 급한 사안이라.”
문을 열어젖히고 들어온 웨인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의 체력을 생각하면 믿기 힘든 일이었지만 류 현은 차분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시길래 이렇게 급하게...?”
“루, 루마니아에 네임드 몹이 출현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계속 북상중이라고...”
“...이름은, 머리 위에 뭐라고 떠 있었답니까?”
“데스 나이트 체페슈라고...”
류 현의 미간이 확 일그러졌다.
***
절그럭 절그럭- 끼이익- 뼈마디가 부딪히는 소리와 철판이 서로 부대끼는 소리가 꽤나 요란했다. 새벽 시간대의 거리에는 꽤 크게 울릴 정도로.
하지만 거리로 고개를 내밀고 불평을 하거나, 무슨 일인지 살피는 이는 없었다. 이런 소음이 벌써 30분 넘게 거리를 배회하고 있음에도.
당연했다. 도시 내의 살아 움직이던 인간들은 1시간도 전에 전부 숨이 끊어졌으니까. 비명소리도 없는 조용한 죽음이었다. 소리 없이 내려앉은 시독 구름은 단말마 한 마디 허락하지 않고 시민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죽어버린 도시는 아무런 불평 없이 죽은 자들의 군대를 통과시켰다.
반쯤 흘러나온 창자를 다시 밀어 넣는 구울이, 어디서 구한 것인지 구멍이 숭숭 뚫린 철투구와 흉갑을 걸친 스켈레톤들이 도시를 뒤덮을 것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행진했다. 막 언데드가 된 따끈따끈한 구울이 담배 가게의 문을 열고나와 행렬에 합류했다.
도시 내에서 비슷한 현상이 계속해서 벌어졌다. 외곽의 공동묘지에서 관뚜껑을 밀고 나온 시체들이 다 썩어서 뼈마저 제대로 남아있지 않은 몸뚱이를 끌고 행진에 동참해왔다. 아파트 계단을 다 내려올 인내심이 없는지 고층에서 떨어져 내려서 다 부서진 몸을 회복하기도 전에 팔로 질질 기면서 행진하는 놈들도 숱하게 존재했다.
그야말로 지옥에서나 볼 법한 광경.
그들의 최선두에는 시체들의 군대에 어울리지 않는 완전 무장한 중세 기사 같은 것들이 뼈만 남은 말에 올라탄 채 선도하는 중이었다.
완전 무장한 기사차림의 기병이 넷. 그 중 단연 돋보이는 것은 칠흑빛 갑옷을 장비하고 있는 최선두에 선 기병이었는데, 그 기병의 머리 위에는 이런 말이 떠올라 있었다.
데스 나이트 체페슈. 데스 나이트가 군대를 멈추게 한 것은 그로부터 16시간 후, 루마니아의 수도인 부쿠레슈티를 목전에 두고서였다.
죽은 자의 군대는 몇 번이고 인간들의 저항과 맞부딪쳤지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니, 오히려 그 덩치를 불린 채로 데스 나이트의 지시에 따라 부족한 사지를 열심히 움직여 오와 열을 갖춰 섰다.
데스 나이트는 도시를 구경하는 듯하다가, 철판에 감싸인 검지로 도시를 가리켰다. 죽은 자들의 군대가 괴성을 지르며 수도를 덮쳐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