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9화 〉탐식마(貪食魔)
사람들은 서로에 대해서 안다고 생각하고, 서로를 자신이 만들어 놓은 틀에 집어넣어서 규정지으려고 들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별 쓸모없는 선입견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지금 같은 경우가 그런 대표적인 예라고 할 만 했다.
국제적인 플레이어 테러조직 ‘위스프’의 수장인 그렉먼 그레고리우스는 카이로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정확히는 카이로였다가 면적이 세 배로 늘어나고, 무인의 도시가 되어버린 라가들의 도시를.
그의 은밀한 후원자나 협력자들마저 그렉먼이 측근들을 데리고 지금쯤 알래스카나 멕시코의 어느 시골에 피난 가 있을 거라고 예상한 것과는 반대로 그는 아프리카 대륙을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서열 2, 3위가 내빼는 바람에 공중분해 5초전이었던 ‘위스프’를 재정비해서 이곳에 도달했다. 중간 중간 괴수 밥이 될 뻔한 난민들을 구조한 것은 덤이었다.
가장 호의적인 시각을 가진 3자에게도 민족주의자인 척 하는 수전노라는 평가를 받던 그렉먼이 할 만한 일이 아님은 분명했다. 그에 대한 보편적인 평가인 화약에 미친 테러리스트라는 타이틀에는 더더욱 어울리지 않았고 말이다.
하지만 그렉먼은 사람들의 생각보다 훨씬 복잡한 남자였고, 더 복잡한 형태로 자신이 속한 민족을 사랑하는 자였다.
그렉먼이 이곳에 오게 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속한 민족이 괴수 따위에게 죽어나가는 것을 원치 않았고, 건물 폭파만큼이나 능숙한 던전 공략 경험과 직감으로 카이로에 이번 사태의 원인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카이로 중심에 있을 원인을 제거하면 당장 벌어지고 있는 끔찍한 학살이 잦아들 것이라는 것도.
그 길로 그렉먼은 불타는 민족애 반, 분노 반으로 평소라면 절대로 접근하지 않았을 사지를 괴수의 파도를 뚫고 여기까지 온 것이다. 오면서 이상한 점이 한 두 가지 발견 한 게 아니었지만, 그것을 곱씹을 여유는 없었다. 아무런 희생 없이 이곳까지 온 게 아니었으니까.
그렉먼 그레고리우스는 뒤편에 있는 부하들을 돌아보았다. 지부 말단에 심부름꾼이었던 자, 자신의 반대파였던 간부, 오면서 자신에게 감화되어 ‘위스프’에 투신한 신참, ‘위스프’가 만들어질 때부터 그렉먼을 따라온 분신이나 다름없는 자. 그들은 제각기 숨을 고르며 그의 지시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쉰 명에 이르는 플레이어들은 그를 따라 이곳까지 도달했다. 오는 도중에 거의 반토막이 나긴 했으나, 그들이 해쳐 온 위기들을 생각하면 이 인원이 남은 것도 기적이었다. 솔직히 그렉먼 본인도 이렇게 잘 풀릴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위스프’가 공중분해 되는 속도는 그만큼 빨랐으니까.
갑자기 던전들이 연쇄적으로 터지면서 괴수를 쏟아내는 바람에 개죽음을 당한 인원이 못 해도 삼분지 일은 될 것이다. 그렉먼은 평생 찾은 적이 없는 신에게 감사했다. 민족을 위해서 불사를 목숨은 남겨준 것에. 그것 외에는 자신이 이곳까지 도달한 것이 설명이 되지 않는다고 여겼다.
그렉먼은 모두를 향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말 그대로 생사고락을 함께한 이들에게 다른 말은 필요 없었다. 사기를 돋우는 연설도, 민족을 위해 가야한다는 호소도 필요 없었다. 앓는 소리가 터져 나오며 결사대는 진입준비를 시작했다.
“가지.”
그렉먼은 망설임 없이 카이로 라고 불렸던 땅으로 발을 디뎠다.
***
그렉먼은 턱을 타고 흐르다가 떨어지려던 땀을 손으로 받아내었다. 그는 그 소리마저 누가 듣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시야는 넓지 않았다 그렉먼의 시력을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는 불평을 품지 않았다. 카이로였던 도시를 비롯해서 새로 솟아난 하얀 땅에서는 태양빛 아래가 아니면 다 이 모양이라는 걸 몇 번이고 체험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일행들이 경험한 바에 따르면 하얀 땅과 그곳에 드리운 안개는 카메라나 전자 기기에만 영향을 끼치는 게 아니었다. 현재 그렉먼과 그를 따르는 ‘위스프’ 잔당들만 알고 있는 정보다. 미국이나 협회, 유럽 측에서 보낸 조사단은 변화를 인식하기도 전에 내뺐으니 당연했다.
‘방향을 잡는 것도 쉽지 않군.’
그렉먼은 진저리를 치며 차광막처럼 도시의 하늘을 막고 있는 안개와 그 아래에서 이중으로 태양빛을 가로막고 있는 기괴한 식물들을 올려다봤다. 저것들만 해도 카이로는 이미 던전이나 다름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혹시나 해서 구해온 나침반이고, 플레이어의 시력이고 죄다 먹통이니까.
그나마 위안 삼을만한 것은 카이로에 진입한 이후에 괴수를 마주치지 않은 것이랄까?
‘...이상하리만치 조용하군.’
그 사실이 한편으로는 그렉먼에게 불안감을 불러일으키고 있긴 했으나, 호재인 것은 분명했다. 이상 현상의 규모로 봤을 때 중심을 지키고 있을 보스몹은 결사대 인원이 다 달려들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테니까.
‘감시탑으로 보이던 건 감시 병력이 없었고, 통과할 때 그 위화감은 분명히 감시결계일 텐데...어찌된 일이지?’
그렇다고 이유를 알 수 없는 호재를 마냥 기뻐할 정도로 얼빠진 인간은 아니었다. 카이로는 검은 벽이 무너지기 전까지 만단위의 라가류 괴수가 몰려 들어간 도시가 맞나 싶을 정도로 조용했다. 풀벌레 우는 소리마저 없었다. 어떻게 봐도 카이로 내의 무언가가 영향을 끼친 게 분명했다.
‘너무 노골적이야...기습할 의도라면 몇 번이고 기회가 있었을 텐데?’
도무지 의도를 알 수 없다는 점. 그 점이 그렉먼의 신경을 계속해서 긁어대었다. 평소의 그라면 더 볼 것도 없이 후퇴를 선언한 후에 진득하게 정찰을 반복했을 것이다. 적들이 지칠 때까지.
국제적인 수배범이면서 이날까지 사지 멀쩡하게 목숨을 보존한 건 그런 신중함 때문이었다.
‘...후퇴하면 다음을 기약할 수가 없다.’
그렉먼이 결사대에게 이 상황의 수상함에 대해서 말하지 못하는 이유였다. 결사대는 이미 정신적, 육체적으로 한계에 달한 상태. 그 부분을 제하더라도 카이로 상황이 이번 같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함정일 확률이 다분히 높아 보이는 상황에서 실낱같지만 함정이 아닐 확률에 기대보는 수밖에 없는 게 결사대의 처지였다.
‘그들도 아주 모를 리가 없지.’
그렉먼은 옆에서 걷고 있는 결사대원들을 돌아보며 한숨을 삼켰다.
결사대 인원 전부가 지금 상황이 이상하다는 걸 인지 못하는 건 아닐 것이다. 분명 이상하다는 걸 알면서도 지금 같은 호재가 두 번 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서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일 터.
‘...끝까지 간다.’ 그렉먼은 제 추측을 쓰레기통에 쳐 박기로 결정했다.
우려와 달리 결사대는 카이로 중심부까지 아무런 문제없이 도달할 수 있었다. 괴수가 움직인 흔적은 있었으나, 그 흔적의 주인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기현상이 반복되었다. 눈에 띄는 괴수의 흔적이 발견될 때마다 결사대는 조금씩이나마 속도를 높였다.
빠른 걸음에 가까웠던 행군 속도가 중반부쯤에는 거의 뜀박질 수준이 되었다. 반나절도 안 되는 시간 만에 괴수들의 도시가 되었을 카이로 중심지까지 도달한 결사대가 맞닥뜨린 것은 하늘에 닿을 기세로 솟아있는 거목의 벽이었다.
성벽처럼 한 공간을 둘러싸고 있는 거목 사이로 보이는 것은 돌로 지어진 제단이었다. 계산상으로 있을 수 없는 세월을 견뎌낸 것 같은 제단의 뒤에는, 도저히 못 볼 수 없는 거대한 존재감을 괴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제단 뒤편에 서있는, 제단과 똑같은 높이를 가진 권좌 위에 늘어져 있는 괴물은 잠이 든 것인지,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인지 석상마냥 미동도 없는 상태였다.
라가로드 구엘 뒤 굴락. 괴물의 머리 위에 떠올라 있는 이름이었다.
“라가...로드?”
누군가가 괴물의 머리 위에 떠올라 있는 글자를 읽었다가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결사대는 눈알 굴리는 소리라도 들릴까봐 조심스럽게 서로를 살피고는, 조심스럽게 서로를 향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저놈이다! 저 놈이 이 괴현상의 중심이다!” 외칠 수만 있다면 그렇게 외쳤을 것이다.
네임드 몹. 아프리카 대륙이 통신상으로 격리되기 전에 수십 번이나 매체에서 회자되었던 괴물 중의 괴물.
자세한 정보는 접할 수 없었지만, 두 시간여 만에 도시 하나를 괴멸시키고 바다를 건너서 동양의 어느 나라의 수도를 폭격한 그런 놈들과 같은 수준의 괴물이라면, 이 괴현상의 키가 되긴 충분해 보였다. 적어도 놈의 주변에 핵이 되는 뭔가가 있을 터.
평소라면 그런 괴물을 상대해야 한다는 사실에 절망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목숨 걸고 감행한 자살특공이 아주 헛짓은 아니게 된 것에 안도하고, 안도감은 긴장을 풀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식어가던 의욕에 불을 질렀다.
결사대는 발소리를 죽여 가며 권좌을 중심으로 포위 진영을 짰다. 지시나 신호를 맞춰볼 것도 없었다. 포위진이 완성되고 무장을 갖추자 그들은 신호도 없이 동시에 권좌를 향해서 몸을 내쏘았다.
한계에 도달했을 터인 몸에서 어떻게 그런 기운이 났는지 그 본인들도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순식간에 권좌 꼭대기까지 도달했다. 라가로드는 여전히 앉은 채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스칵! 가장 먼저 도달한 공격은 그렉먼 그레고리우스의 사선 베기였다. 그렉먼의 몸뚱이만한 대검은 라가로드의 목과 좌측 쇄골을 몸뚱이에서 분리해내었다. 공격을 날린 그렉먼 본인이 깜짝 놀랄정도로 아무런 저항이 없었다.
그렉먼이 혼란스러움을 되씹어보기 전에 후속 공격들이 쏟아졌다. 염력으로 만들어진 망치가, 바람의 칼날이, 심장에서 개화한 화염의 꽃이 라가로드의 몸뚱이에 동시에 폭발했다.
여섯 번째 공격이 닿았을 때쯤에 라가로드의 사지는 몸통에 붙어있는 것이 없었다. 이어지는 공격들은 떨어져나간 사지마저 분해해버렸다. 결사대원들은 만족하지 않고 제 모든 기량을 라가로드의 몸뚱이에 쏟아내었다.
기껏해야 10여초 사이, 권좌에는 2미터가 넘는 근육질의 괴물은 온데간데없이 살점 한 움큼과 핏물만이 남게 되었다.
그들은 반쯤 넋이 나간 채로 권좌에 남은 살점과 핏물을 내려다보았다. 라가로드 구엘 뒤 굴락이었던 것을.
결사대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그들은 당장이라도 웃음을 터뜨릴 것 같은 간질간질한 기분과 일말의 불안감이 공존하고 있는 기묘한 표정을 쌍둥이마냥 똑같이 짓고 있었다.
“해냈다.”
그들에게, 자신에게 확신을 주려는 것처럼 그렉먼이 말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결사대원들은 일말의 불안감을 옆으로 치워버리고 환호를 토해낼 준비를 하고 그렉먼에게 시선을 모았다. 그들의 대장이, 멋들어진 마무리 멘트를 내뱉으면 미친 듯이 소리 지를 생각이었다.
“우리가 ㄱ...”
퍼걱! “끄르륵...”
하지만 그렉먼의 입에서 나온 소리를 그들이 바라던 말이 아닌 가래 끓는 소리였다. 목이 부러진 채로 피거품을 꾸역꾸역 토해내는 자신들의 대장의 모습에 결사대는 한 순간이나마 머리가 텅 비어버렸다. 그들의 대장이 권자에 머리를 쳐 박고 숨이 끊어진 모습이 그들의 뇌리에 새겨졌다.
그래서 그들은 그렉먼의 목을 부러뜨린 살덩어리의 모습을 조금 늦게 발견하게 되었다. 그렉먼의 몸뚱이를 살덩어리가 집어삼키고 삼킨 것보다 세 배는 덩치를 불릴 때까지 말이다.
“어?”
그것이 신호였다. 결사대원들은 필설 하는 게 불가능한 괴성을 지르며 권좌 위에서 뛰어내렸다. 아니, 뛰어내리려고 했다. 권좌에 뿌리를 박고 있는 살덩어리가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살덩어리는 필요하면 꼬챙이처럼 뾰족하게 모습을 바꾸어 결사대원을 꿰기도, 채찍마냥 휘둘러 다리를 잘라버리기도 하면서 결국 모든 결사대원들을 집어삼켰다. 그러고 나자 살덩어리는 권좌를 삼킬 정도로 거대해졌다.
부글부글 끓는 것처럼 수축과 확장을 반복하던 살덩어리는 이윽고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라가로드의 모습으로 말이다.
라가로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오만하게 턱을 괸 채로 턱을 쓰다듬었다.
[결국 전혀 다른 곳에 떨어졌는가. 하긴, 준비가 미흡하긴 하였지.]
유리알을 박아 넣은 것처럼 투명한 눈동자에 빛이 뿜어져 나왔다. 라가로드는 저가 집어삼킨 자들의 기억을 뒤적거렸다. 만족할 수 있는 정보를 뽑아내자 라가로드는 입가를 비틀었다.
[허나 나쁘진 않군. 제물을 다시 확보하는 건 어렵지 않겠어. 아니, 의도치 않았으나 괜찮은 사냥감이 이렇게 많은 곳에 왔으니 운이 좋다고 해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