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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8화 〉탐식마(貪食魔) (248/429)



〈 248화 〉탐식마(貪食魔)

파캉! 찌직! 슥 하고 내민 일 검에 얼음칼이 수수깡처럼 부러져나갔다. 어지간한 굵기의 강철빔보다 단단한 물건이었으나 승하가 내휘두르는 검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혜라의 옷을 뚫고 피부 위를 슬쩍 긁어놓았다.


살갗 위에는 그보다 단단하게 압축해놓은 얼음막이 있어 피가 베어 나오거나 하진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타격이 있었던 쪽은 오히려 승하였다. 승하는 손아귀에 느껴지는 얼얼한 감각에 검을 거두고 훌쩍 물러났다. 혜라도 그냥 있진 않았다.

짜자작! 승하가 준 검신에 서리가 서린다 싶더니, 얇디얇은 얼음이 얼어붙었다. 겉보기에는   아니었지만 승하가 검에 적용시키고 있는 마력검의 수준을 생각하면 말도  되는 일이었다. 얇은 얼음은 그 두께만큼 금방 부스러져 흩어졌다. 정말 멈칫하는 수준으로 승하의 집중력을 갉아먹은 정도.


백혜라가 의도  것도 딱 그 정도의 틈이었다. 어깨높이로 들어 올린 손이 하얗게 백열했다.

쩌엉! 승하는 뭔가 다가온다고 머리로 인식하기도 전에 뒤로 구르듯이 물러났다. 그녀를 물어뜯을 기세로 냉기가 공기 중의 수분을 얼리며 따라붙었다. 승하는 그제야 자신을 쫓아오는 냉기를 볼 수 있었다. 정확히는 냉기를 뿜어내고 있는 채찍형태의 마력을!


승하는 온 몸을 비틀어 이어지는 2연격을 피하며 생각했다. 냉기 채찍이 뱀처럼 서로 다른 각도로 덮쳐들었다.

‘제대로 흡수했네. 엘더 리치보다 빠르...이크!’

이어진 4연격은 피해내었지만, 앞섶이 얼어붙는 건 피할  없었다. 제 아무리 그녀라도  보이지도 않는 냉기 덩어리의 냉기가 미치는 모든 범위를 예측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승하는 망설임 없이 얼어붙으려는 옷깃 둥치를 잡아 뜯었다. 와이셔츠가 찢겨나가며 맨살과 속옷이 드러났지만 그녀는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생물상대로는 반은 먹고 들어가겠네. 하도 리치 같은 놈들이 쏟아져서 재미 보긴 힘들겠지만.’


승하는 그리 평하면서도 공격루트와 후퇴루트를 동시에 구상했다. 혜라가 반쯤 농담으로 하는 말에 의하면 전투시 순간적으로 아이큐가 200까지 치솟는 승하는 순식간에 여덟 가지의 루트를 짜내었다. 혜라의 다음 공격을 기다리는 동안.


하지만 공격은커녕, 반대편에서 이글거리던 마력과 적의가 거짓말처럼 사그라들었다. 승하는 고개를 갸웃했다.


“혜라야? 왜 그래?”
“언니 상태가 어떤지 보고나 말해요. 제발 좀.”


내가  어때서? 승하는  생각 없이 고개를 내렸다가 맨들맨들한 맨살만 보인다는 걸 깨닫고는 조금 놀랐다. 정확히는 맨가슴이 훤히 드러나있다는 사실에.

‘응? 오늘 분명히 차고 나왔는데? 아...’ 너무 급하게 앞섶을 잡아 뜯어서 같이 속옷까지 뜯어낸 모양이었다. 나름 특수제작품이긴 했지만 승하의 악력 앞에서는  의미 없는 일이었다.

“아니 뭐 별 문제는 없잖아?”

승하는  거 아니라고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플레이어로 살다보면 알몸보다 못한 꼴이거나, 아니면 정말 알몸뚱이 꼴로 지내게 되는 경우가  있다.


거의 던전에 들어갈 때마다 겪게 되는 일이며, 현실에 뛰쳐나온 괴수가 5성리치 이상일 경우에는 현실에서도 맛보게 되는 상황이다. 리치의 마법이나, 샌 드래곤의 브레스가 옷을 피해가진 않으니까. 아무리 비싼 소재를 쓰고, 첨단 기술을 때려 박아도 갑옷이 아닌 옷가지는 찢어지지 않을 수가 없다. 그보다 더 튼튼한 방어구들도 퍽퍽 터져나가니까.

최근에 류 현과 희란의 연계로 미어터질 정도로 마력을 수혈 받고, 그 때문에  튀기된 항마력 덕택에 속옷까지  녹아내리지 않고 싸움을 끝내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방어구가 몸을 둔하게 만들고, 자신의 내구력으로는 입든 말든 잘 못 맞으면 즉사라는 주장을 앞세워 최소한의 무장만 갖추는 편인 승하는  했다. 더욱이 그녀는 ‘가방’에 여분의 옷을 집어넣을 수치심 같은 건 키우지 않는 쪽이었다.

‘예거즈’와 떠오르는 신성 검성이 한창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때 알몸 노출한 횟수만큼 사진이 기사에 실렸다면 그걸로 누드화보를 만들 수 있을 정도였다. ‘예거즈’ 창립 멤버들이 두  시퍼렇게 뜨고 그들의 어린 돌격대장을 보호한 덕에 그런 일은 없었지만.

그러니 승하의 지금 같은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다. 혜라도  사실을 모르진 않았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예거즈’ 창립 멤버들을 포함해도 가장 오랜 시간 그녀와 붙어있었으니까.

어쩌면 승하의 지금 같은 성격이 그 때 적극적으로 뜯어말리지 않은 탓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는 쪽이었지만, 말을 아끼진 않았다.

“여기가 집이고, 우리 둘만 있으면 그렇겠죠.”

혜라는 찌푸린 얼굴로 승하의 뒤통수 쪽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체육관 2층 난간에 기대어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희란이 그곳에 있었다. 그녀는 지금 여분의 츄리닝을 가져다 줘야할지 말아야할지 고민하는 그 자세 그대로 굳은 상태였다.

“희란이 쟤는 이런 거  두 번  것도 아니면서 매번 저러네.”
“언니가 이상한 거고, 희란 언니가 정상이죠. 누가 대련에서 알몸이 될 때까지 치고받아요?”

너랑 나라고 대답하려던 승하는 말을 삼켜야만 했다. 혜라의 눈이 코앞에서 이글거리고 있었으니까. 속으로 투덜거릴 권리를 포기하진 않았지만.


속으로 불평을 곱씹던 승하의 고개가 입구 쪽으로  돌아갔다. 뒤를 이어 혜라도, 희란도 그곳을 바라봤다. 핼쑥한 표정의 여자가 체육관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전력질주를 한 것인지 이마에 송글송글 땀까지 맺혀 있었다.


“무슨 일이죠?”

이소은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는 혜라의 물음에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조금 헐떡인 후에 허리를 폈다.


“호, 호출입니다.”

그러고도 호흡이 진정되지 않는지 중간중간 헐떡거렸다. 승하가 이소은에게 다가가려는 걸 팔을 뻗어 막은 혜라가 대신 물었다.

“어디죠? 병원?”
“네, 네...벼, 병원 쪽입니다.”

승하의 꼴을 본 이소은이 놀랐는지 말을 더듬었지만 승하는 신경 쓰지 않았다.


“류 현이 불렀다고? 무슨 일이지. 차는 준비해뒀어?”


백혜라가 심부름꾼으로 생각하라고 붙여준 여자, 이소은은 승하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

“진짜 끔찍하네.”


승하의 감상에 모두가 침묵으로 동의했다. 탁자에 둘러앉은 네 명의 남녀, 화련, 승하, 희란, 류 현은 탁자 대부분을 덮고 있는 커다란 지도를 내려다보며 한 숨을 내쉬었다. 아라비아 반도가 그려져 있는  지도는 이집트가 자리하고 있어야하는 부분이 둥근 타원형처럼 표현되어있었다.


리비아는 국토 면적이 그대로임에도 국경이 찌그러져있었고, 아라비아 반도는 곧 이집트와 닿아서 홍해를 부르는 새로운 명칭이 필요해 보였다. 크게 보면 그랬고, 세부사항으로 파고  들면  끔찍했다.

지도 위에 붙어있는 하얀 스티커 같은 건 늘어난 땅을 의미했고, 이젠  부분은 이집트 영토보다 더 커질 기세였다. 그 여파인지 지난  주간 세 차례의 해일이 인도차이나와 인도네시아를 덮쳤고, 그곳은 사이비 종교가 횡행할 정도로 상태가 막장이라는 기사가 연일 보도될 정도였다.


가장 끔찍한 지표는 위성사진 상으로 확인되는 전깃불 지표였는데, 솟아난 하얀 땅 때문에 촬영이 불가능한 면적이 늘어난 것을 감안해도 전깃불 숫자가 확 줄어들었다는 거였다. 거의 반토막 수준으로.


밤의 불빛이 줄어든 만큼 인구수가 줄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지만, 좋은 예측거리는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자체 괴수 억제력이 파멸적인 수준인 아프리카니까.

“아프리카 대륙에서부터 본격적으로 터지기 시작한 거 같군요.”
“3차 ‘대소환’?”
“예, 네임드 몹이 튀어나온 시점에서 저한테는 이미 시작된 거나 다름없었지만요. 레이더 오작동을 감안해도 이 정도면 확실하다고 봐야겠죠.”

류 현이 짚고 있는 종이에는 추가 검토가 필요하다는 표시가 찍혀있었다. 유럽 연합에서 운용하고 있는 괴수 레이더가 잡아낸 개체 수를 바탕으로 단위 면적당 예상 개체수를 예측한 자료는 이 기세면 과장 좀 많이 보태서 아프리카 대륙이 괴수 반 인간 반이  수 있다는  보여주고 있었다.

“지룡이나 칼날늑대, 라미아, 모래 귀신. 사진 한 장이라도 나온 것들만 모아도 아프리카 내에서는 대처가능한 팀이 없을 겁니다. ‘위스프’가 민족애에 불타서 들이받지 않는 이상은요. 사실 그래도 좀 많이 힘들 겁니다. 이놈들이 한 마리씩 나온 게 아니라  넓은 곳을 지나가다가 찍힐 정도면...”
“이미 끝장이라는 거지. 사실 이미 끝장났는데 산소호흡기 붙여놓은 거였지만.”
“이런 식으로 말하고 싶진 않지만...그렇죠.”


 현은 떨떠름하게 인정하며 뒷목을 주물럭거렸다. 아무리 사람 목숨이 목숨같이 보이지 않게 될 정도로 수많은 죽음을 봐온 그라지만, 이 정도 규모에는 덤덤하게 넘어가기가 어려웠다. 너무 멀고, 실감이 안 나는 이야기라서 그런 지 그냥 넘기기가 더욱 찝찝했다. 팀원들도 마찬가지였는지, 화련과 희란은 지도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음울한 표정이 되었다.


“뭐 어쩔  없지. 우리가 만화영화 슈퍼히어로도 아니고. 할 수 있는 일만 확실히 하자고. 나머지는 협회가 알아서 하겠지. 아니 사실은 미국이나 유럽놈들이 해결해야 하는 일이지만.”

승하가 그렇게  털고 일어나는 것처럼 말하자 두 여자의 표정이 풀렸다. 류 현은 머쓱한 기분 속에서 말을 받았다.


“지금부터 준비만 해도 골치 아플 것 같긴 하니까요. 이집트로 진입하는 것도 그렇고 카이로는 증언만 모아도 도시 전체가 던전이 된  같은데...이게 참.”
“미국 애들이 거창하게 이름도 지어줬네. 라가랜드.”


협회만큼이나 많은 자료를 보내온 것이 미국이었다. 협회의 조사단이 압도적인 속도로 카이로를 찍고 돌아온 것이 충격을 받았는지, 아니면 분노를 느꼈는지 몰라도 미국은 그 주에 강습기를 카이로로 밀어 넣었고, 당연히 가다가 추락한 강습기에서 내린 조사단은 카이로에 들어가 한 명의 사망자만 내고 귀환했다.


외곽을 훑어본 것뿐이었지만 조사단이 내놓은 보고서는 충분히 충격적이었다. 협회의 조사단이 라가가 카이로를 자신들의 도시로 뜯어고쳤을 것이라고 내놓은 추측에 쐐기를 박다 못해,  많은 스케치와 사진 가지고 왔으니까.


문명의 이기를 이용해서 찍은 사진은 아니었다. 미국이 마탑과 거래를 통해서 몇 가지 마법을 끌어 모아 독자적으로 개발한 영상 마법이었다.

대체 어떻게 그렇게 단시간에 뜯어고쳤는지 몰라도 카이로는 던전 안에서 볼  있는 유적 같은 꼴이 되었다. 다른 점이라면 간간히 콘크리트 빌딩이 보인다는 거고, 라가들의 도시 문명수준이 생각지도 못한 수준이라는 점.


“이건 어떻게 봐도 감시탑이지? 그놈들이 아주 대놓고 땡땡이치는 관습이 있는 게 아니면 무인 감시탑일거고.”
“이것만 봐선 마력 흐름을 알 수는 없지만...아마 그렇겠죠. 구조자체가 누가 오르락내리락 할 만한 구조가 아니잖아요? 보고서에도 카이로에 진입하자마자 감시탑이 붉게 빛나면서 추적대가 붙었다고 하니 무인이거나 무인이나 다름없는 수준으로 빠르게 반응하겠죠.”

그들은 삼각  모양의 건축물이 비치는 영상을 보며 의견을 나누었다. 영상을 출력하고 있는  정말 복잡한 문양을 새겨놓은 항마석이었는데, 최소 블루퍼플 던전의 것으로 보이는 항마석을 통째로 갈아 넣은 걸 보면 어째서 미국이 이 기술로 던전 내의 정보 선점을 하지 못 했는지 알법했다.

블루퍼플 쯤 되면 가격이 문제가 아니라, 희소성 때문에 라도 마구 갈아 넣을 수가 없다. 던전과 관련된 것이라면 온갖 견제를 전 세계로부터 받고 있는 미국이라면 더더욱.


‘근데 이런 물건은 전생에서도  봤는데. 3차 ‘대소환’이후로는 별 쓸모가 없어서 그랬나? 하긴 그 때는 이런 괴상한 땅이 솟아나지도 않았으니 정말 쓸데없긴 했겠네.’

어쨌거나 영상은 매우 짧았지만, 미국의 조사단이 받았을 충격을 유추할 정도의 정보는 주었다.


라가들의 땅. 라가랜드라고 명명한 것은 결코 과장 같은  아니었다. 적어도 카이로와 접한 라가들의 도시에 대해서는 말이다.


“으- 왠지 일이 더럽게 피곤하게 돌아갈 거 같은 느낌. 이집트 본토까지는 화력 빨로 밀어붙여서 어떻게 진입해도 카이로까지 그렇게 해달라고 할 수도 없을 거고. 진입하는 데 인원 좀 대달라고 하면 해주려나?”
“계획이 그럴싸해 보이면 숟가락 얹고 싶어서라도 자기 사람들을 밀어 넣겠죠. 유럽은 저번에 재미 본 걸 기억하고 있을 테니 어떻게든  겁니다. 진입 계획 짜는 게 문제죠.”
“이번에는 진짜로 맨땅에 헤딩하게 생겼네요. 그나마 네임드 몹이 없는 게 다행이긴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전생이랑 똑같이 돌아가라고 할 수도 없고. 달라서 이렇게 문명 유지도 되고 있으니 맞춰가야죠.”
“근데 웨인 그 녀석은 왜 이렇게 안 와? 사람 불러놓고.”


류 현은 대답 대신 어깨만 들먹거렸다.


웨인이 다 죽어가는 얼굴로 나타난 건 그로부터 5분 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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