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47화 〉탐식마(貪食魔) (247/429)



〈 247화 〉탐식마(貪食魔)

침묵이 방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그냥 말이 없는  아니라 류 현이 내뱉은 말을 곱씹느라 내려앉은 무거운 침묵이었다. 화련은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운을 띄웠다.

“저 반대하려는 건 아닌데 그럼 협회나 유럽 쪽에서 뭐라고 하지 않을까요? 최소한 좀 불편해질 것 같은데...괜찮은 거에요? 마스터가 분명히...”
“동료나 끝까지 같이 갈 혈맹으로는 생각  해도 이미지 구축정도는 해야 될 거라고 말씀 드렸었지요. 실제로 필요한 일이기도 하고요.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으니까요. 특히 3차 ‘대소환’이 지금보다 진행된 이후에는 싫어도 체감하게 되니까요.”
“그러셨었죠. 그런데 지금 말씀하신대로면...”
“예, 아마도 대놓고 표현은 안 해도 여태 쌓아놓은 이미지를 좀 깎아먹는 건 피할  없을 겁니다. 그걸 감안하더라도 휴식기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거고요.”
“자꾸 말꼬리 잡는 거 같아서  그런데...정말로 괜찮겠어요?”


류 현은 불안에 젖은 것 같은 화련을 눈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이야 위기 상황에 몰리면 사람의 시야가 얼마나 협소해지고, 사람이 편협해지는지. 그것이 일개 개인이 아니라 수많은 개인이 모인 국가 단위의 일이 되면 어떤 정신 나간 판단을 하는지 직접 겪어봤으나, 화련은 자신에게 들은 게 다가 아닌가?

‘...과장한 기억은 없는데.’

화련의 이런 반응은 자신을 죽인 아지다하카에 대한 이야기 때문이었으나, 당장 류 현이  사실을 알 길은 없었다. 평소처럼 최대한 친절한 태도를 유지하며 설명을 늘어놓을 뿐.

“괜찮지 않더라도 괜찮게 해야지요. 머리가 있으면 우리팀이 휴식 좀 한다고 뭐라고는   겁니다. 있더라도 협회 측에서 막아줄 거고요.”

전생에서는 알  없었던 사실이었지만, 이번 생에선 협회 인사들과-정확히는 웨인과- 자주 마주치면서 류 현은 확신을 얻었다.


플레이어 협회 수뇌부는 대의를 향한 순수함은 몰라도, 다른 나라의 수뇌부 보다는 시야가 훨씬 넓다는 것을. 류 현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지 않는 이상 그들은 류 현에게 계속 협조할 것이다. 그 외에는 네임드 몹이라는 사상 초유의 위협에 대응할 카드가 없으니까.

다른 곳은 몰라도 협회 수뇌부만큼은 확실히 알고 있을 터다. 웨인 크로이츠가 네임드 몹 사냥에서 유일한 외부 참가자였으니까.   이후로 웨인의 태도가 더 조심스러워졌다는 건 팀원 모두가 아는 일이었다. 원래도 친절하고 사근사근한 태도였지만.

화련은 끄덕거리면서도 표정이 풀어지진 않았다.  현의 말에 납득은 하지만 어딘가 찝찝한 구석이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자신의 찝찝함을 이유로 우길 생각은 없었다.


“그야 그렇겠지만...알겠어요. 휴식기가 필요하다는  저도 느끼고 있었으니까. 기회가 있을 때 쉬어야겠죠. 대강 큰 틀은 잡혀서 당분간은 던전에 안 들어갈 거니까. 무슨 일 있으면  이번처럼 지체하지 마시고 바로 연락주세요. 계속 이러시면 저도 무슨  있는데 저한테만 안 알린 것 아닌가 하고 신경 쓰여서 집중 못해요.”
“알겠습니다. 그리 하지요.”


류 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화련은 만족했다는 듯이 자리에서 털고 일어나서 작별을 고했다.


“그럼 전 먼저 들어가 볼게요. 흐아암, 이틀 동안 거의 못자서.”

생전 처음 겪어보는 상황에 대해서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기에 류 현은 그녀를 붙잡지 않고 잘 쉬라는 말과 함께 배웅했다. 희란도 화련과 비슷한 말을 하곤 뒤를 따랐다.

***

예상과는 달리 협회 간부가 달려와서 매달리거나, 유럽국가의 주한대사가 찾아오는 일도 없이 이주일이 흘러갔다. 변화가 없진 않았다. 아니, 변화에 비해서 너무 조용하다는 것이 맞는 말일 것이다.

카이로를 기점으로 하얀 땅이 솟아나는 현상은 멈추지 않고 계속 되었다. 속도가 줄어든 적은 있었어도, 멈춘 적은 없었다. 그 결과, 카이로는 육지 위의 섬 같은 꼴이 되었다. 솟아난 땅이 얼추 봐도 도시 면적의 열배를 넘으니 당연했다.


솟아난 하얀 땅에 둘러싸인 카이로는 습격날 드리웠던 안개가 도시 전체를 뒤덮으면서, 위성사진 상으로는   없게 되었다. 말 그대로 육지 위의 섬이 된 것이다.


이주일 내내 뉴스 머리를 장식해도 이상할 것 없는 초자연적 현상이었지만 한 번도 매체에 보도된 적은 없었다. 정부에서 엠바고 정도가 아니라 필사적으로 정보를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웃기게도 인도네시아와 인도차이나 반도를 덮친 수해가 이목을 끌어주어 한결 수월했다. 수해소식을 듣고 가슴 아파하거나,  관심 없거나, 가슴 아파하는 이들을 비꼬는 이들 중 아무도 아프리카에서 일어난 변고가 수해의 원인이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자신들이 이해하기에는 너무 복잡한 자연현상의 일환이라고 여겼다.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당장 그 대륙에 살고 있는 이들도 인지하기 어려운 대륙규모의 변화였다. 너무 그 변화의 범위가 넓고 정도가 심했기에, 사람의 눈과 다리로는 사태를 파악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인터넷이 멀쩡하게 돌아가고 있으면 모르되, 그렇지 않았으니까. 인터넷이 되었더라도 별 의미는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솟아난 땅을 찍어봐야 어지간한 장비로는 조잡하게 합성한 사진 마냥 흐릿하게 찍힐 뿐이었다. 제대로  사진을 찍어보겠다고 오래 있다간 장비가 망가져버리고 말이다.

거기에 유럽 정부는 사태 파악보다는 1차 ‘대소환’때 만큼이나 입단속에 힘을 쏟았다. 인접해 있는 아라비아 반도 내의 국가들도 동의 했기에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아프리카 대륙은 통신망 상으로 완전히 고립되었다.

아프리카 대륙 내에는 정보 통제를 할  있는 힘이 남아있는 정부가  손에 꼽을 정도였기에 어중간한 통제에 혼란만 가중되었다. 그런 곳마저 수장들이 도망가기 바빴다. 약삭빠른 독재자들은 은밀히 망명길에 오르거나, 그 도중에 죽임을 당했다.

덕분에 협회는 전보다 쉽게 아프리카 대륙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관찰할  있었다. 군벌 대부분은 유럽에 선이 닿아있었고, 몇몇은 중동이나 중국 같은 강대국의 지원을 받고 있었는데 일단 협회의 행사는 방해하고 보던 그들이 사라지자 협회는 움직이기 쉬워졌다. 협회가 가지고 있었던 기존 정보라인에서 정보가 새는 일도 줄었고 말이다.

협회의 조사팀이 이토록 이른 시간에, 깊숙이 들어올 수 있었던 건 그런 배경이 있어서였다. 조사팀은 카이로를 지척에 둔 상태였다. 유럽이나 일본, 중국의 조사단이 이제야 이집트 국경선을 넘어온 걸 생각하면 엄청난 성과였다. 이집트 국토가 최소 1.2배 불어났다는 추측이 대세인  생각하면 더더욱.

협회 조사팀의 대장, 콜 뷸러는 파피루스를 수십 배로 키워놓은 것 같은 식물의 잎사이로 보이는 태양을 한  올려봤다가 말했다.

“딱 한 시간. 한 시간만  움직이자.”
“콜, 너 그 소리 점심 먹고도 했어. 알아?”
“알고도 일부러 저러는 거지. 륀양이 없으니까  때다 하고 죽어라 굴리네. 굴려.”
“못가. 차라리  죽이고 시체로 끌고 가.”

콜 뷸러는 그늘 아래에 널브러져 있는 조사단 팀원들을 보고 혀를 찼다. 정규 편제로는 총 11명인 팀이었지만, 이번 작전을 수행하면서 비전투원에 가까운 이들을 빼고 다른 팀에  명을 보내고 나니 거의 반 토막이 나 여섯 명으로 쪼그라들었다.

일시적이나마 팀 규모를 줄인 협회의 의향을 이해하고 있었기에, 콜은 팀원들을 닦달해서 이집트에 온지 열흘 만에 이곳에 도달했다. 전자 장비가 천천히 먹통이 되고, 정글형 던전을 뚝 잘라서 박아놓은 것 같은 환경을 뚫고 이동한 것을 생각하면 위업이라고 칭송해도 될 만한 성과였다.


하지만 콜은 전혀 만족하지 못한 상태였고, 팀원들을 계속 닦달할 생각이었다. 비전투원에 가까운 이들이 빠졌으니 속도를 내는 건 자신만 잘 하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협회의 조사팀에 몸을 담은 지 5년이 넘어가고, 팀원들과 함께 한 지도 그쯤 되었으니 그들의 육체적 능력은 가족들보다 잘 알고 있었다.

‘오래 있어봐야 좋을 게 없어.’

만족할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도 있지만, 지나오면서 본 광경들이 너무나도 터무니없었기 때문에 빨리 원하는 것을 보고 철수할 생각이었다.

다년간의 조사단 생활에서 조급증은 황천행 티켓이라는 걸 배웠으나, 그 다년간 같이 단련된 그의 감이 이 불길한 땅에서 빨리 떠나야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콜은 굳이 고른다면 자신의 감을 더 믿는 쪽이었다. 그가 일터로 삼은 던전은 원칙에 충실하다고 위험을 피할 수 있는 녹록한 곳이 아니었으니까.


그  덕에 비전투원을 포함하는 조사단을 이끌면서도 아직까지 사지 멀쩡하게 살아있을 수 있다는  모르지 않았다. 솟아난 하얀 땅에 발을 딛고 있는 내내 그의 감은 계속해서 경적을 울렸다. 전에 없을 정도로.


그 이전에 콜은 이곳까지 오면서 본 광경 때문이라도 빨리 이 일에서 손을 털고 싶었다. 탐구심이나 선지자 기분을 낼 건이 아니었다.

“아까 그 이상한 도마뱀 같은 놈이랑 또 만나고 싶어? 오늘만 더 고생하자. 협회에서도 카이로에 진입하지 말고 외곽만 훑어보고 돌아오라고 했으니까 잽싸게 보고 돌아가자고.”

류 현이 봤다면 지룡이라고 했을 괴수 이야기였다. 300미터 이상 멀찍이 떨어져 있어서 무사히 넘어갔지, 아니었으면 크게 피를 봐야했을 것이다.  봐도 반으로 쪼그라든 조사단이 감당할 수 없는 녀석이었다.


그 정도 크기에, 존재감을 가진 놈이 고작 300미터 떨어졌다고 인간의 존재를 눈치 못 채는 게 이상한 일이었지만 그런 상태에 놓인 괴수를  두 번 본 게 아니었다. 하얀 땅위에서 발견한 괴수들은 하나같이 상태가 이상했다.

마치 몽유병 환자처럼 주변 변화에 반응이 느리고, 인간을 감지하는 능력도 무뎌진 듯 했다. 그런 상태가 아니었다면 제 아무리 콜이 이끄는 조사단이라도 이렇게 빨리 오진 못했을 것이다. 오다가 발견한 괴수들은 숫자는 물론이고, 그 질마저 상당했으니까. 처음 보는 괴수도 있었다.


“오면서 다들 봤잖아. 그놈들 맛탱이가 가긴 했어도 이리로 오고 있었어. 재수 없으면 샌드위치 당할 수도 있다고.”

조사단 팀원들도 콜의 말을 이해했다. 앓는 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그들은 모두 자리에서 털고 일어났다. 개 중에서 가장 덩치가 큰 사내가 보초를 서고 있을 이들을 부르러 달려 나갔다.

***


“미치겠군. 세상이 망할 징조인가?”
“말 가려서 하라고 하고 싶은데 못 하겠군...이게 대체 무슨 꼴이야?”
“...콜, 이거 협회에 보고해도 믿어주기는 할까?”
“안 믿어주더라도 증거도 제시 못해. 카메라는 이미  갔어. 젠장, 왜 아날로그까지 맛이 가는 거야? 기계식 시계는  만 돌아가는데.”
“지금 그런 불평을 해봐야 무슨 소용이야? 협회에 가서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해도 시간이 모자랄 텐데. 콜, 진입해서 증거물이라도 떼 갈래?”


팀원들의 시선이 콜 뷸러에게 모였다. 열 쌍의 시선을 받게  콜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이대로 철수한다. 협회에서도 진입하지 말고 외각만 훑어보고 복귀하라고 했었어.”
“하지만 그냥 돌아가서 증언하면 절대  믿을 텐데?”

드문 일이었다. 조사단원들은 일에 있어서는 콜의 판단을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쪽이었으니까. 그만큼 그들이 보고 있는 광경이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저기서 물건  개 주워 나온다고 해서 크게 변하지도 않아. 그리고 저거 안 보여? 어떻게 봐도 마법사의 방어막이랑 판박이잖아. 저 안에 들어가면 단박에 감지당할 거다. 당장 보이는 라가로드만 해도 여덟이야. 들어가면 개죽음이다.”


다들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뷸러의 말은 조사단으로 살면서 자긍심을 느끼는 그들의 자긍심을 긁긴 했으나, 충분한 논리를 가지고 있었다. 혹여 논리가 없었어도 그들은 결국 설득 당했을 것이다. 목숨이 달린 일에 적당히 타협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니까.

“철수하자.”

그들은 카이로를 코앞에 두고 발길을 돌렸다. 지상에 나타난 최초의 라가들의 도시를 등 뒤에 두고 조사단은 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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