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5화 〉탐식마(貪食魔)
“스읍...후우-”
화련은 눈을 감은 채 심호흡을 하며 긴장을 풀어보려고 했지만 잘 되진 않았다. 화련은 슬쩍 실눈을 뜨고 옆을 살폈다.
슬쩍 봐도 백혜라는 화련보다 훨씬 안정된 상태로 심호흡을 반복하고 있었다. ‘애한테도 밀릴 수는 없지.’ 화련은 집중력을 가다듬었다.
솜털이 곤두서고, 그 솜털로 작은 마력의 움직임마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집중력이 극에 달했을 때 어떻게 안 것인지 류 현이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확인하겠습니다. 계속 하시겠습니까?”
장난기라고는 없는 표정에 혜라와 화련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흘 동안 얼굴만 마주하면 류 현이 이번 일의 위험성에 대해서 주지시킨 덕에 둘은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었다. 자신들을 위한 경고라는 걸 알기에 투덜거리거나 하진 않았다.
“여기까지 와서 발을 어떻게 빼요. 마스터가 거부해도 무조건 할 거에요.”
“하겠어요. 제 경력이 길진 않지만...승하 언니 옆에서 이런 기회가 잘 오는 게 아니라는 건 배웠어요. 위험할 수도 있다는 건 충분히 이해했고, 그거랑 별개로 이게 큰 기회라는 것도 확실히 알고 있으니까. 이이상은 부담 안 가지셔도 될 것 같아요.”
혜라의 똑 부러진 대꾸에 화련은 왠지 밀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표정으로 그것을 드러내진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후욱! 그 직후였다. 화련은 두개골을 뚫고 뇌에 손가락 같은 것이 꽂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게 뭔...’
말할 것도 없이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자신이 자처한 일이 아니었다면 아마 당장 붙잡은 손을 뿌리치고 머리칼이 뽑힐 때까지 머리를 헤집었을 것이다. 이 괴상한 감각이 사라질 때까지 그리 했을 것이다.
“...끄윽.”
“아...긋...”
‘뭐야...대체...? 왕국...? 멸망. 약혼? 뭐가 이렇게 엉망진창이...’
화련이 본 적도 없는 장면들이 사진처럼 뚝뚝 끊겨서 그녀의 머릿속에 쑤셔 박혔다. 도무지 저항할 수 없는 기억의 조각들이 화련의 머릿속을 난도질 했다. 화련은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비명을 지르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런 건 못 들어봤어...이런 얘기는 안 했잖아!’
엄한 류 현이라도 붙들고 이게 대체 뭐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손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이제 거의 흰자만 드러난 눈은 핏발이 벌겋게 서있었고,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손은 힘줄이 한껏 돋아있는 상태였다.
백혜라도 화련과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의 손을 맞잡고 있는 게 류 현이 아니었다면 손이 진작 으스러졌을 것이다.
그런 류 현마저 손에 전해져 오는 악력과 발작이라도 하는 것처럼 떨고 있는 두 여자의 상태를 보고 일이 생각과는 많이 다르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었다.
“화련 씨? 혜라 씨?”
두 여자는 대꾸하지 못했다. 할 수 없었다. 류 현의 목소리를 들을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마구잡이로 쏟아지는 기억의 탁류 때문에 자신들이 원래 가지고 있던, 하지만 잊었었던 오래된 기억들까지 표면 위로 떠오르자 제 기억들이 뒤섞이지 않게 하려고 기를 써야 했다.
신음소리도,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기를 5분여. 그들은 전환점에 도달했다. 아니, 닥쳐왔다고 해야 더 맞을 것이다. 그녀들이 바란 전환점 같은 건 아니었으니까.
“끄윾!”
“커억!”
화련과 혜라가 입에서 울컥 피를 토하자 모두가 기겁했다. 승하는 벌떡 일어나서 혜라에게 당장 달려들 기세였으나, 류 현의 시선에 막혀서 아랫입술만 짓씹었다. 희란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주변을 서성거리면서도 화련과 접촉시도는 하지 않았다. 그녀는 시작 전 류 현이 한 당부를 잊지 않았다.
주변에서 난리가 났든 말든, 화련과 혜라 두 여자는 제 정신을 지키고 있기도 바빴다. 기억의 탁류에서 갑자기 흙탕물 정도가 아니라 시커먼 먹물이 튀어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악의라는 이름의 시커먼 먹물이!
앞서 쏟아지던 기억들이 중구난방이고, 스쳐지나가는 시간이 너무 짧아서 모든 상황을 파악하기가 불가능 했으나 볼 수는 있었던 반면, 이 악의를 휩쓸리는 것 이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무엇을 향한 것인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몇 명의 것인지 알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그저 이런 악의가 개인에게서 비롯되지 않았을 거라는 막연한 추측뿐! 엘더 리치의 마력에 깃든 기억 속에 왜 이런 것이 있는지 조차 따질 여유가 없었다.
두 여자는 자신의 내부를 점령할 기세로 차오르는 시커먼 먹물의 휘몰아침 속에서 필사적으로 붙들만한 기억을 찾았다. 이성적인 판단 하에 취한 행동은 아니었다. 살기 위해, 자신의 자아를 지키기 위해서 본능을 따라 움직인 것이다.
서로 다른 악의에 휘말리고 있었지만 두 여자가 찾은 탈출구는 같았다. 그녀들은 가장 진득하게 기억들을 갉아먹고 있는 엘더 리치의 악의를, 원한을 붙잡았다. 그 순간, 온몸이 찢기는 것 같은 감각을 맛봐야 했지만 목적했던 바는 이룰 수 있었다.
류 현으로부터 넘어오는 기억의 탁류가 거짓말처럼 뚝 끊긴 것이다. 억지로 정신을 붙들어 매게 만들던 고통이 사그라지자 집중력과 함께 힘이 쭉 빠져나갔다. 현실 시간으로 10분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영겁이 흐른 것만 같았다.
두 여자는 머리가 터져버리지 않았을까 하는 바보 같은 걱정 속에서 정신을 잃었다.
***
불이 꺼진 병실 안에는 남자 홀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었다. 남자는 가부좌를 튼 채 숨소리조차 내지 않으며 천천히 호흡을 반복하고 있었다. 남자는 몇 번 더 들이쉬고 내쉬고를 반복하다가 눈을 떴다.
“쯧.”
‘진전될 기미가 안 보이네. 기미가.’
류 현은 털고 일어나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자신의 내부를 정리하는 수련에 착수 한지 벌써 엿새가 되어가고 있음에도 눈에 띄는 진전이 없었다. 실전과 실전 후에 마력흡수로 막힘없이 경지를 높여온 류 현에게는 낯선 일이었다.
낯선 만큼 어떻게 이 정체를 뚫어야할 지도 모호했다.
‘그냥 마력 다시 채워 넣어야 하나. 그러긴 좀 불안한데.’
류 현이 최소한의 마력 말고는 마력을 안에 담아두지 않고 있는 건 이런 상태가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무슨 사고가 터질지 모르니 사고를 치더라도 그 규모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어제 엘더 리치의 불꽃 채찍을 흉내 내다가 체육관 지붕을 날려먹기도 했었다.
‘불안해서 호흡으로 마력 모으는 것도 못하겠군.’
희란과 화련, 승하에게 보통 때의 류 현이 뿜어내는 마력보다 훨씬 안정적이라는 보증까지 받았으나, 원래는 알지도 써 보지도 못한 방법이라 시험해보기도 켕겼다. 사고가 안 났으면 모르겠으되, 마력채찍을 뽑아내다가 체육관 지붕을 날렸으니까.
그건 남들의 몇 십 배나 되는 마력을 파쇄권 같은 단순 무식한 방법으로 펑펑 써대던 류 현에게는 정말로 낯선 일이었다. 마이크로를 붙여야 하는 미세 컨트롤이면 모를까, 이런 규모의 마력운용에 실패해 본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참관했던 화련과 희란, 승하보다 류 현 스스로가 더 당황했었다.
‘처음 접하는 지식이라서 라고 핑계 대기에는 나만 막혀 있으니까...’
나흘 전 카이로 주변에 포진하고 있는 병력들로부터 장벽이 붕괴했다는 소식을 듣고, 화련과 백혜라에게 엘더 리치의 지식과 마력을 전달 받겠냐고 물었다. 미리 들어서 고민을 끝낸 화련은 곧바로 수락했고, 혜라는 조금 더 생각해보겠다고 했었다.
어제, 혜라도 수락하고 둘 모두에게 그것을 나눠주었다. 주고 나서 조금 급하게 군것이 아닌가 싶었지만, 둘 모두 잠깐 정신을 잃었다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별 이상이 없었다. 전달 과정에서 간질 발작을 하는 것처럼 벌벌 떨고, 각혈한 것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혜라는 깨어나자마자 트리플 캐스팅이 된다고 방방 뛰어서 해서 류 현의 우려를 덜어주었다.
화련은 감사의 말과 열심히 하겠다는 말을 늘어놓고는 희란과 함께 레드 던전에 틀어박혔으나 표정이 나쁘진 않았었다. 자신을 보는 시선이 뭔가 의구심에 차있었으나, 류 현은 화련이 정리를 끝낼 때까진 묻지 않을 생각이었다.
어차피 그녀의 성격상 정리가 끝나면 류 현이 묻기 전에 먼저 입을 열 터였다.
‘어째 나만 뒤처지는 기분인데.’
팀원들이 들었으면 학을 떼었을 소리였지만 류 현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이렇게 벽에 막혀본 것이 처음이라 막막한 마음이 더 했다.
“조급해하지 말자. 또 사고 치면 누나가 알 게 돼.”
스스로 타이르듯이 되뇌어 봐도 쉽사리 마음이 정리되진 않았다. 류 현은 작은 한숨과 함께 문을 열어젖혔다.
“...무슨 명상을 그렇게 오래해?”
문 옆에 쭈그려있던 승하가 볼멘소리를 내었다. 기척을 숨긴 것도 아니어서 류 현도 당황하지 않고 대꾸했다.
“별로 그렇지도 않은데요. 승하 씨가 너무 안 하는 쪽 아닙니까?”
“헤헹, 난 실전파라서 그런 거 안 해도 돼.”
“무슨 일 있었습니까? 무슨 일 있으면 그냥 들어오셔도 된다고...”
“그러다가 간신히 붙잡은 실마리 놓쳐봐야 그런 소리를 함부로 안 하지. 별 건 아니야.”
‘별 것도 아닌데 자기 수련에 바쁜 사람이 이러고 있습니까.’ 그 소리를 입으로 내뱉을 정도로 속이 꼬인 건 아니었다.
‘웨인 쪽 연락만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웨인이 들었다면 울지도 웃지도 못할 말이었지만 류 현은 진심으로 기원했다. 더 이상의 두통거리를 사양하고 싶었다.
“아프리카 쪽 소식이야.”
“카이로요?”
“음...아니라고 하기도 애매하고 맞다고 하기도 애매하네. 가서 보자. 웨인이 아예 노트북까지 들고 찾아왔어.”
순간적으로 또 그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류 현은 애써 표정관리를 하며 말했다.
“아니, 그게 급한 상황 아닙니까. 얼마나 기다리신 겁니까?”
“음, 대충 한 시간 쯤 됐나?”
류 현은 고개를 내저으며 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