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4화 〉탐식마(貪食魔)
“그, 그럼 그 때 충돌은...”
“아니, 그놈들은 우리가 이걸 가지고 있다는 걸 몰랐어. 알 수가 없지. ‘마녀’는 류 현 혼자서 상대했고, 놈들이 붙인 눈은 ‘마녀’가 죽기 전에 박살이 났으니까. 위력을 알고 있다는 듯이 입 턴 것도 그냥 때려 맞추기 내지 허세였을 거야. 놈들로는 절대 그 위력을 못낼 테니까.”
웨인은 이번에는 편두통이 아니라 밀려드는 현기증에 머리를 부여잡았다. 지벡 건터가 자백한 일을 이야기할 때만 해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었다. 그저 화내는 승하가 당장 지벡을 못 쫓아가게 말리는 정도가 최악의 상황이라고 생각했었으니까.
그런데 승하의 ‘가방’에서 목걸이 형태의 아티펙트가 나오고, 그게 유니크 아티펙트 개미지옥이라는 말을 듣고 나선 그 생각을 강제로 바꿔야만 했다. 승하가 마이크로 컨트롤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미세하게 조종해서 캔을 찌그러뜨려 보이자 현기증이 밀려들었고.
평온한 상태였다면 승하의 조종능력을 보고 기겁했겠지만, 지금은 그걸 알아챌 여유가 없었다. 웨인은 승하가 탁자 위에 올려둔 초록색 보석이 달린 목걸이를 내려다봤다.
칼리프 클랜이 실제로는 어떤 마음을 먹고 그런 것인지는 그도 알 수 없으나, 대외적인 명분이 된 물건이 눈앞에 놓여있었다. 그것도 유니크 아티펙트를 빼돌렸을 거라고 의심받던 이들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그럼 ‘마녀’를 잡으실 때 얻으신 거 맞습니까?”
“예, 꽤나 고생했었지요.”
표정관리를 하느라 입가에 경련이 올 것 같았지만 웨인은 꾹 참아내었다. 그 말대로라면 눈앞의 남자는 세 개나 되는 유니크 아티펙트의 실소유자인 셈이었다. 뭣 때문인지 본인이 유니크 아티펙트를 가지고 있는 건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그 사실이 바뀌진 않는다.
“저도 저 개미지옥으로 얻어맞을 때는 칼리프 클랜과 관계되어 있다는 생각은 못 했었습니다. 어느 누가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괴수가 원정대를 습격해서 다 죽이는 게 아니라, 아티펙트만 뺏고 내뺀다니요.”
이 부분은 류 현도 정말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당시에는 개미지옥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펠릭스’에게서 도망치는 것에 온 신경을 쏟아야 했으니까. 등에 업힌 세아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래봐야 그놈들한테 넘길 일은 없지만.’
알았어도 크게 달라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칼리프 클랜이 보유한 적이 없는 개미지옥이 왜 이번 생에 그들에게 발견되었는지는 몰라도, 칼리프 클랜에 넘겨줄 생각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대형 클랜에 대해서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 않았는데, 칼리프 클랜은 이번에 바닥 밑에 바닥이 있음을 보여주지 않았는가.
같이 귀국한 웨인이 슬슬 눈치를 보고 있는 이유를 모르진 않았지만, 류 현은 칼리프 클랜에 대한 생각을 바꿀 예정이 없었다. 류 현도, 승하도 그 때 칼리프 클랜의 태도가 단순히 귀한 아티펙트를 분실해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마녀’를 잡고 나서 사막으로 수색대를 보냈을 때 보였던 태도가 아니었다면 그냥 이걸 넘기고 왔을 겁니다. 지분은 최소 40프로 요구했겠지만요.”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술술 늘어놓는 류 현이었다. 칼리프 클랜이 그를 개선장군 대접을 해줬어도 개미지옥을 넘길 일은 없었을 것이다.
전생에서 3차 ‘대소환’이후 칼리프 클랜은 중동의 기둥이었지만, 비무슬림 국가나 플레이어들에게는 국가 공인 도적이나 다름없었다. 분열한 뒤로는 군벌화 되거나 군벌에 흡수되어 패악질이 말도 못한 수준이었고 말이다.
아무리 그들이 괴수는 더 잘 잡는다지만, 그런 놈들에게 유니크 아티펙트를 쥐여줄 생각은 요만큼도 없었다. 전생에서도 없이 그럭저럭 버텼고, 칼리프 클랜에 치명상을 안긴 ‘마녀’도 처리해줬으니 유니크 아티펙트 없이도 잘 버틸 것이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아라비아 반도를 거쳐서 유럽까지 넘어가는 괴수 군단의 숫자만 줄여주면 다른 부분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런데 수색대 행태가 마치 죄인을 찾는 것 같더군요. 승하 씨가 제 쪽으로 날아오지 않았다면 저도 꽤 큰 곤욕을 치렀을 겁니다.”
“곤욕 정도가 아니지. 그놈들 류 현이 엎어져있으면 일단 찌르고 봤을 걸?”
웨인은 부정하지 못했다. 카타르로 마중 나갔을 때 류 현의 상태는 빈말로도 좋지 못했었으니까. 무한정으로 마력을 땡겨 써도 마를 기미가 안 보이는 마나통을 가진 인간이 텅 빈 상태였다. 승하가 사고나 다름없는 현상에 휘말려서 류 현이 싸우던 장소까지 날아가지 않았다면 그냥 곤란한 정도는 끝나지 않았을 터.
“예에...그랬겠지요.”
웨인이 당황해 하는 건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니었다. 파괴되었을 거라고 한 아티펙트가 그 말을 한 당사자들 손에 있다는 사실이 칼리프 클랜에 알려졌을 때의 뒷감당이 끔찍할 뿐.
둘 만으로 칼리프 클랜 말 그대로 갈아버릴 수 있는 괴물들과 클랜원을 망설이지 않고 갈아 넣을 클랜. 두 쪽이 충돌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훤하게 보였다.
더군다나 아티펙트가 유성우만큼이나 큰 흔적을 남기는 놈이라, 던전 안에서만 쓰는 게 아니라면 들키는 건 시간문제였다.
‘아티펙트 사용을 던전에서만 해달라고 할 수도 없고. 쯧...이젠 내 손을 떠난 문제군. 칼리프 클랜이 멍청한 선택을 하지 않기를 바라는 수밖에.’
웨인은 그렇게 정리했다. 이 문제에 대해서 더 이상 가타부타 참견했다간 괜히 류 현과 승하의 반감만 살게 뻔하니까. 협상조차 거의 불가능한 칼리프 클랜과 그나마 말이 통하고 그 이상 전력을 가진 개인들. 저울에 놓을 것도 없이 어느 쪽을 우선해야할 지는 뻔했다.
‘...그래도 미리 말을 해준 게 어디야.’
류 현이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면 칼리프 클랜과 비슷한 시기에 이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이런 처지가 인 것이 썩 유쾌하진 않았지만, 주어진 상황에 마냥 불평만 늘어놓을 정도로 어리지도 않았다.
대신이라고 하긴 뭣하지만 웨인은 얻을 수 있을 때 정보를 더 얻기로 했다.
“혹시 아직 위력 실험을 안 하셨다면 저도 참관할 수 있겠습니까?”
***
츠르르- 츠르르- 카이로를 틀어막고 있는 투명한 벽이 녹아내리기 시작한 건 새벽 2시 무렵이었다. 장벽 주변에 진을 치고 있는 병력들 대부분이 잠들고, 경계 근무 중인 인원들도 집중력이 슬슬 바닥나고 있는 시간.
그 때문에 장벽이 녹아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일전에 장벽 너머를 보이지 않게 하던 검은색이 빠져나간 탓도 컸다.
장벽이 모두 녹아내리는 데는 세 시간 가량이 걸렸다. 류 현의 오른 손바닥에 떠오른 타이머도 그와 맞추어 0이 되었지만, 시차 때문에 그는 정기보고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장벽이 녹아내려 외부와 격리시키는 요소도 사라졌지만, 카이로는 이전처럼 조용했다. 현대식 건물을 집어삼킨 것처럼 자라나있는 풀과 나무들 때문에 던전 유적을 연상시키는 몰골은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대로였다.
그 동안 꾸역꾸역 카이로의 장벽 너머로 들어간 라가류 괴수의 숫자가 만단위에 이름에도 도시는 너무나도 조용했다. 이상할 정도로.
그런 카이로 상공에 빛을 뿜어내는 티끌이 하나 내려왔다. 특이한 것은 카이로 주변을 둘러싸고 진을 치고 있는 병력들의 야영지 외에는 아직 빛 한 점 없는 새벽임에도 티끌이 내뿜고 있는 빛은 주변을 밝히지도, 그리 눈에 띄지도 않았다. 그저 검붉은 빛을 이따금씩 강하게 뿜어내며 천천히 하강하며, 중간 중간 바람에 떠밀려 카이로의 중심부 쪽으로 천천히 이동했다.
카이로 중심부는 장벽에 갇히기 전에는 없었던 커다란 나무들이 빽빽하게 서있었다. 거의 40층짜리 빌딩에 이르는 높이까지 자라있는 그 나무들은 지구에는 존재하지 않는 종이었다.
나무들이 성벽처럼 감싸고 있는 그곳에는 제단이 마련되어 있었다. 최고점 높이가 88미터에 달하는 제단은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건축물이었다.
그러나 육안으로 보이는 제단의 모습은 못해도 반백년의 세월이 흐른 것 같았다. 티끌은 제단 뒤쪽의 비슷한 높이로 솟아있는 의자 위에 내려앉았다. 그러더니 곧 빛을 잃었다.
꾸득- 콰드득! 변화가 시작된 건 그 직후였다. 티끌이 내려앉은 자리에서 별안간 육괴가 터져 나왔다. 육괴 사이로는 핏물이 진득하게 흘러나왔는데, 신기하게도 핏물은 돌 의자에 흡수되지 않고, 다시 역주행해 육괴 위를 흘렀다.
꾸득- 꾸드득! 육괴는 한참이나 들썩거렸지만 원하는 형태를 이루지 못했다. 중간에 살점이 견디지 못하고 터져나간 탓에 몇 번이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했다. 그러고 나서 육괴가 부들부들 떨리는 모습은 마치 결정적인 순간에 훼방 받은 이가 으르렁 거리는 것 같았다.
의자를 삼킬 정도로 덩치를 불린 후에야, 갑자기 한쪽이 터져나가는 현상이 멈췄다. 육괴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뭉쳤다가 펴지길 반복했다.
한 시간쯤 더 그랬을까?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꿈틀거린 끝에 육괴는 원하던 모습을 이루었다.
끝이 갈가리 찢겨나간 흔적이 남아있는 귀는 원래의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얼굴을 가로지르는 커다란 흉터 세 줄도 얼굴의 형태를 일그러뜨릴 정도였다. 온 몸에는 흉터가 없는 곳이 없었고, 개 중 열 댓 개는 정말 목숨이 위험했을 상처의 흔적으로 보였다.
신장 2미터 30센티 가량. 하얀 흰자위 안에 유리알을 박아 넣은 것처럼 투명한 눈동자를 가진 라가는 입술 밖으로 삐져나온 송곳니가 없었어도 사납기 그지없어 보였다. 라가는 권좌에 앉아서 턱을 괸 채로 세상을 내려다보았다.
그 라가의 머리 위 허공에는 붉은 글씨가 이렇게 떠있었다.
라가로드 구엘 뒤 굴락.